|
'명량'의 숨은 이야기
이순신 장군과 송구봉 선생
조선시대는 사대부가 아닌 사람들은 많은 차별을 받고 관직에 나가는 길이 거의 막힌 시대였다. 이때의 서자들은 아무리 사대부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사회진출도 법적으로 막혀있어 일정수준이상 오르기 힘들었다. 이러한 시대에 천고의 기제인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선생이 서자(庶子)로 태어났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송익필(통칭 송구봉 선생)께선 정신수련의 고단자로 신비로운 행적으로 유명하신데 그 일화들을 잠시 소개한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1534(중종29)~1599(선조32)/서울/본관 : 여산(礪山) 父-宋祀連(송사련)/자(字):雲長
호(號):龜峯/시호;文敬/주요저서 : 구봉집(龜峯集)]
1.홍경신과의 일화
한번은 당시에 쟁쟁한 선비로 시문과 필법이 뛰어났던 만전당(晩全當) 홍가신(洪可臣)과 가까이 지냈었다. 홍가신은 뒤에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사람인데 그의 동생에 참의 홍경신(洪慶臣)이 있었다. 홍경신은 형이 서얼 출신인 송익필에게 경대(敬待)하는 것을 항상 못마땅히 생각하고 그의 형에게「어찌하여 송익필과 벗을 하십니까? 내가 반드시 욕을 주겠습니다.」하였다. 이에 홍가신이 웃으면서「송구봉 선생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하는 말이 「그는 비록 사비(私碑)의 소생이라고 하나, 그 학식과 인품이 존경할 만한 분이니라. 네가 그렇게 해보고 싶거든 한번 해 보아라. 그러나 너는 반드시 하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홍경신은 송익필이 오기를 기다려 욕을 뵈주려고 벼르던 차에 어느 날 송익필이 자신의 집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뜰에 내려가 맞으며 절을 하였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홍가신이 까닭을 물었더니 그 아우말이 「내가 절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읍니다」하였다. 이후부터 홍경신도 형과 더불어 구봉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한다.
2.이순신장군의 거북선 제작비화
일찌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의 얘기다. 율곡선생의 소개로 충무공께서 구봉선생을 찾아갔다. 마침 구봉선생은 외출 중이었으나 하인의 안내로 사랑에서 구봉선생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랑방의 아랫목에는 훌륭한 병풍이 한 폭 펼쳐져 있었는데 그 속의 그림이 한 마리 큰 학(鶴)이었는지라 그 앉아 있는 모습이 평소에 상상하던 거북선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만 자신도 모르게 병풍인 줄도 잊고 몇 개의 구멍을 뚫고 말았다. 그러자 이내 구봉선생이 귀가하였다. 하인들에게「손님은 오셨느냐?」하시니, 하인이 「큰일 났습니다. 그 아끼시는 병풍에 구멍을 내셨습니다. 」한다. 그런데 구봉선생께서는 뜻밖에 「쓸곳에 쓰인 것이다. 걱정할 것 없느니라」하고 사랑문을 열며 충무공과는 수인사도 없이 「어디 몇 구멍이나 뚫었는가 보자」하신다. 처음대하는 이충무공은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 겸 인사를 드리니 그제야 정색을 하고 바로 앉아 하는 말이 「 이 네 구멍만 갖고는 전후 좌우로 밖에 더 가겠소? 잠수를 하고 부상을 하자면 적어도 다섯 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나머지 하나는 내가 뚫어줄 수밖에 없겠군」라고 하셨다 한다.
이에 충무공이 크게 놀라 조심히 묻기를「당나라의 이적(李勣)장군이라면 몇 구멍이나 뚫겠습니까?」물으니 <8 구멍은 낼 것일세> 하고, 또다시 「제갈공명(諸葛孔明)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니 <24 구멍은 내겠지> 하신다. 그래 또다시 묻기를 「원래 완전하게 만들려면 몇 구멍이 되겠습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으니 웃으며 조용히 하는 말이 <48 구멍이 전부일세>하셨다 한다.
이것으로도 구봉선생의 계제(계제)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공명 하면 중국의 삼국시대 때 유비를 도와 천하를 횡행할 때 신출귀몰한 용병과 작전으로 조조의 간을 서늘케 한 대도인(大道人)인데 그도 크게 미치니 못한 것이 아닌가? 충무공은 생각하기에 당나라의 이적 장군이나 제갈공명마저도 아득히 미치지 못할 분이라면 도대체 이 어른은 어떠한 분일까? 하기는 율곡선생(충무공과는 친척간)의 소개에서도 가이 짐작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하셨지 않은가? 이제야 진정 훌륭한 스승을 뵙게 되었구나 싶었으리라.
그는 그날 밤늦도록 정치, 경제, 군사 등에 관해서 광범한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으며, 그후 구봉선생의 제자로 입문하여 훗날의 국난에 대비하는 많은 수련을 쌓았다. 그날밤 구봉선생은 충무공에게 두수의 글을 주셨는데, 장군은 임진난 당시 왜적의 섬멸전을 펼때 신묘한 전략을 세우는데 아주 적절한 글이었으니 다음과 같다.
달밝은 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독룡이 숨어 있는 곳의 물은 편벽되게 맑고
산에서 나무 찍는 소리가 ‘정 정’ 울리니 산은 다시 그윽하다
毒龍潛處水偏淸
伐木丁丁山更幽
일찌기 고청 서기(徐起)는 그의 문하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을 알고자 한다면 구봉 송익필 선생을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제갈공명이 구봉선생과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기록이 있다. 구봉선생은 서얼로 태어나 한평생 방랑 생활을 하시면서 많은 시를 지어 남겼으며 김시습, 남효온과 더불어 산림삼걸(山林三傑)로 불리운다. 그의 시를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낙화가 펄펄 날리어 시냇물이 붉은데
백조는 쌍쌍이 비단강산을 날으네
취객이 무심코 도사를 찾아갔더니
작은 배 바람에 떠있을 뿐이구나
천리를 헤메는 육척의 이내몸
십년동안 서울의 봄구경 잊었구나
어제 취한 그 꿈속같은 내고향
창밖의 청산이 내 벗인가 하노라
선생은 65세때에 면천의 김진려의 집에서 8월8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제자로는 김장생(金長生), 박엽(朴燁), 정엽(鄭曄), 서성(徐 ), 정홍명(鄭弘溟), 서기(徐起), 김반 등 많은 문인들이 있으며 우계 성혼(牛溪 成渾)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도 송구봉선생을 외우(畏友)로 하였다 한다. 선생의 구봉집은 뒷날 제자들이 흩어진 시문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3.시해법을 행하다
구봉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 제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시골에서 올라온 일이 있었다. 그 선비는 제삿날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여 앞당겨 온다고 부지런히 집을 나서서 올라 왔다. 구리쇠 나루를 건너 남대문쪽으로 걸어가는데 길에서 어떤 귀인의 행차를 만났다. 길 옆으로 비켜서니 가마안에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보니 구봉선생이었다. 「자네 좀 늦었네, 난 갈 길이 바빠 그만 가네. 이것이나 받아가게」하시면서 헌붓 한자루를 주셨다. 그 선비는 공손히 받아들고 땀을 닦으며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그때에야 정신이 번쩍든 선비는 자기가 돌아가신 분을 만난 것을 알았다. 하도 기이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급히 제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보니 제사를 이미 이틀 전에 지냈다고 하였다. 그 선비는 자기가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선생에게 받은 붓을 모두에게 보였다. 제주(祭主)는 그 붓이 틀림없이 구봉선생이 쓰시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4.율곡이이 선생과의 인연
이율곡은 학문은 물론이고, 별자리를 보는 눈이 남달라서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세상일을 두루 헤아리곤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동쪽 하늘 외진 곳에 숨어서 홀로 그윽하게 빛나는 별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율곡은 그 별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별도 조선의 인물이 분명한데, 그 임자가 도대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조선 천지의 이름난 사람 가운데 그 별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던것이다. '숨어 살고 있는 인재가 분명해. 내가 한번 찾아봐야겠어.'율곡은 벼르던 끝에 어느 날 그 별의 임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밤마다 별을 보면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며 율곡은 나아간다. 그러기를 여러 날, 율곡은 별빛을 보면서 자신이 찾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유심히 살피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별의 임자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고. 주막집에서 하루를 묵은 이율곡은 여느 날처럼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게 된다. 아직 동이 터오르기 전이라서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이른 시각, 율곡이 터덜터덜 말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소를 타고 오는 게 보였다. 허름한 베옷에 삿갓을 쓴 모습이 영락없이 촌사람의 행색...
'나만큼이나 부지런한 사람이 또 있군.'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무심코 그 사람을 바라본 율곡은 흠칫했다. 삿갓 아래에서 무언가 이상한 빛을 본 것 같았기 때문, 율곡은 말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 잠깐 말씀을…" 그러자 그 사람이 소를 멈추고 삿갓을 들어 율곡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런!'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사람 눈에서 빛이 나오는데 마치 화살이 몸에 와 닿는 것 같았다. 몸가짐이 무겁기로 소문난 율곡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칫했다.
율곡은 한눈에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소 탄 사람에게 말을 했다. "실례합니다. 저는 누군가 하면…"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소 탄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허허, 율곡선생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마중 나오는 길이올시다." "아니 어떻게 그걸!" "자, 다른 얘기는 뒤에 하고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그 사람은 태연히 소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향했다. 율곡이 소 탄 사람을 따라서 당도한 곳은 산 속에 있는 외딴 초가집이었다.
방안에 둘이 마주앉자 율곡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가 둔해서 선생을 이제서야 뵙게 되었습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선생이라니요. 보잘것없는 촌사람인 걸요. 저는 송구봉이라고 합니다." '송구봉, 송구봉……' 둘은 시간 가는 걸 모를 지경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나라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있을 왜인들의 침입등..아침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밖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서로 뜻이 잘맞은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해서 아주 친해진다. "앞으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허허, 저 또한 같은 마음이올시다."
5.선조와의 만남
하루는 율곡이 선조 대왕께 구봉선생의 학식과 사람됨을 아뢰고 장차 나라의 큰일에 쓰일
인물이 된다고 추천하였다. 그러자 왕은 당장 만나고 싶으니 함께 어전에 들라 명하였다.
그리하여 율곡은 밤중에 구봉과 함께 어전에 부복하였다.
임금은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하며 구봉선생의 대답을 듣다가 부복하여 있는 구봉선생에게 「고개를 들고 짐을 보라 」명하였다. 그러자 구봉선생은 「소신에게는 압인지기(壓人之氣)가 있어 성상께서 혹 옥체에 손상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고 아뢰니 왕은 괜찮다고 하시면서 재촉하였다. 구봉선생은 잠시 주저하였으나 어명을 어길 수 없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임금을 보는 순간 왕은 용안이 창백하여지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눈빛이 호랑이의 눈과 같이 번쩍하고 불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왕은 송구봉 선생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그 사람 얘기는 이제 하지도 말라 어디 그게 사람의 눈이더냐?」고 하였다 한다.
6.혼쭐난 이여송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조선 땅에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병이 들어온다. 왜란이 끝나갈 무렵,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아주 음흉한 계략을 품는다. 이번 기회에 조선 땅을 차지해 버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하루는 왠 소년이 소를 탄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년은 대청마루를 향하여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 보고자 하시니 이여송 장군은 속히 나를 따라오시오!" 그 말과 함께 소년은 유유히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선다. "허허, 맹랑한 놈이로고. 이거 재미있는 놀잇감이 생겼군. 내가 한손으로 잡아서 구경거리로 만들어 주지." 그 말과 함께 이여송은 훌쩍 말에 올라 소년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수백명의 호위병이 그 뒤를 따랐다. 이여송은 한달음에 소년을 잡으려고 채찍을 휘둘렀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분명히 소년이 탄 소가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잡힐 듯 잡힐 듯 영 잡히지를 않는 것이다. 이제 따라잡았다 싶으면 또 몇 발자국 앞에 나가 있는 것이다.
소년은 수려한 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이르러서야 소를 멈췄다. "스승님, 이여송 장군을 모셔 왔습니다." "수고했다. 방으로 모시거라." "들어가시지요." 귀신에 홀린듯한 기분의 이여송은 어리둥절해 방으로 들어선다. 세 사람이 들어앉으면 꽉 찰 것 같은 비좁은 방이었다. 방안에는 한 노인이 앉아있다가 나직하고 위엄 있는 소리로 이여송을 맞이했다.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거기 앉으시오."
노인은 밖에 있는 소년에게 다른 군사들을 모두 방으로 들이라고 말했다.
그 좁은 방에 수백명의 군사를 들이다니, 어림도 없는 말이라 이여송이 뭐라 말릴려는 찰라..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들어와 앉으면 그 옆에 새로 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백명 군사가 모두 방안에 들어와 앉았다. "자, 그 동안 싸우느라 수고했소이다. 한잔씩 드시구려." 노인은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이여송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나서 술을 한 잔씩 돌리는데, 아무리 따라도 술은 줄지를 않았다. 이여송과 군사들은 하도 신기해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술이 다 돌고 나자 노인이 묵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딴마음일랑 먹지 말고 그대들 나라로 돌아가시오."
그 말과 함께 노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이여송을 쏘아보았습니다. 노인의 눈에서는 번개와도 같고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이여송은 그만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이여송은 자기 마음을 훤히 꿰뚫는 이 노인한테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치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아이쿠. 조선을 넘보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구나.' 결국 이여송은 조선 땅을 차지하려던 계획을 버린 채 군사들을 이끌고서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이 노인은 송구봉 선생이시다.
7.거북선 제작
하루는 율곡선생이 찾아 왔다. 자리에 앉자 마자 대뜸 그림을 그렸는데 잠자리 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구봉선생왈 "안될말일세..사람을 얼마나 죽이려고.." 그러자 율곡은 다른그림을 그리는데 이번에는 지네 였다. "그것도 너무 일러..아직 때가 아닐세.." 마지막으로 율곡이 거북을 그리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그건 가능 하겠군.."하셧다. 그리하여 만들어 진것이 거북선이다. 잠자리는 헬리콥터를 지네는 장갑차를 의미한다고 한다. 태종때도 이미 거북선의 기초도안이 있었는데 모두 정신계에서 앞으로 쓰일물건을 보고와서 만든것으로, 이이 선생과 구봉선생을 비롯한 선현들이 상당한 고단자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할수 있겠다.(기록을 살피자면 거북선은 근래에 복원된 단순한 배모양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원형○ 으로, 바다에서 전후좌우 자유자제로 방향전환이 가능한 전투선 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형지물이 없는 바다에서 진행방향이 자유롭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현대 군함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현대기술로 재현에 내는 쪽이 후일 바다를 장악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실로 선생은 丹學界의 최고봉이니 당시(當時) 丹學人 율곡이이(栗谷李珥),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함), 남명 조식(南溟 曺植), 우계 성혼(牛溪 成渾) 등과 깊이 교유하면서도 늘 그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선생의 출신이 다른분에 비해 비천해서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학문과 도덕에서 그가 처한 경지는 잡초속의 영지(靈芝)라고나 할까. 그의 문인(門人)과 벗들 가운데 문묘(文廟)에 드신 분이 사계 김장생, 김집(金集),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조헌(趙憲) 등이 있고 무인(武人)으로는 김덕령(金德令:孫弟子), 박엽(朴燁)등을 꼽을 수 있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가히 짐작이 가는 바 있다.
blog.naver.com/neosal?Redirect=Log&logNo=40017678565
첫댓글 한국은 신명의 기운이 특히 강한 땅이어서,
외세가 들어와도 영구적인 점령은 허용이 안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