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바둑과 지리산행 성 일 수
연말 연시가 되니 날씨는 차고, 춥고 수도권과 서해안에서 눈 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사는 곳은 눈이 귀한 곳이다. 해서 눈을 보고자 지인과 1박 2일 지리산 눈 산행을 하기로 했다. 세상은 어지러운데 산은 늘 평화롭게 그기에 있고 언제나 반겨준다. 오후에 출발해서 진주에서 1박을 했다. 숙소에서 이번 산행을 같이할 지인과 평생의 취미이자 마음 수행의 도구인 바둑을 두었다. 지인과는 평생 바둑 친구이자 라이벌이라 같이 산행을 할때마다 낮에는 등산, 밤에는 바둑을 둔다. 호적수 라이벌과의 대국은 언제나 설레고 투지가 샘 솟는다.
바둑은 현존하는 최장수 게임이다. 중국에 황제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기대조 (棋待詔; 황제의 바둑 상대역을 맡는 벼슬의 일종)가 있었는데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당 현종의 '기대조' 바둑 고수 왕적신(王積薪)이 위기십결 (圍棋十訣) '바둑 둘 때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10가지 교훈' 또는 '바둑을 잘 두기위한 10가지 비결' 즉, '바둑의 10계명'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바둑은 4000여년 전 중국 요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현재 정설이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아들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요순 창시설이다.
어리석다는 표현을 지금의 말뜻 그대로 받아들여 요순임금의 왕자들이 하나같이 바보천지였다고 해석하면 안 될 것이다. 바보천치였다면 바둑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을까요? 왕자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줄 목적으로 바둑을 가르쳤다는 것은 곧 바둑으로 나라를 다스릴 지혜를 전수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 시절 바둑은 제왕학(帝王學)의 교재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여타 학문이나 책이 아닌, 바둑으로 왕자들을 가르쳤을까? 그때는 바둑이 지금과 같은 형태의 놀이나 게임의 형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왕학으로 쓰이던 바둑이 수천년의 세월을 거치며 변형, 발전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기성(棋聖) 오청원(吳淸源) 九단이 천체도구설을 주장하였다. 바둑의 기원을 요순임금 이전으로 추정하면서 바둑은 원래 천체를 관찰하는 도구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바둑으로 변형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본시 하늘의 별자리를 기록하는 기구가 바둑판이었으며 이것으로 천문을 살피고 역(易)을 따졌을 것이라고 보고, 따라서 요순임금이 바둑을 가르쳤다는 기록은 제정일치 시대의 제왕수업을 말한다는 겁니다. 이는 현존하는 바둑판에 9개의 성(星)점(화점 이라고도 함)이 있는 것을 볼 때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하고 많은 것 중에서 왕자에게 굳이 바둑을 가르친 까닭이 무었이었겠는가, 고대 농경시대에서 임금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별자리를 살펴 파종시기와 추수 시기를 정하는 절기를 제대로 헤아려 무지몽매한 백성에게 알리는 일이 무척 중요했을 것이고, 왕의 권위는 이것으로부터 나왔다. 별자리를 관측하고 기록해 농경의 시기를 가늠하는 기구가 바로 바둑판이었다는 겁니다. 바둑판이 가로 세로 19줄 361로 로서, 춘하추동 365일의 음양오행의 이치가 담긴 우주의 축소판 또는 인생의 축소판에 흔히 빗대는 것이 그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닌 것입니다.
해서 오늘날 우리나라에 바둑 중.고등학교가 있고 대학에 바둑학과가 있고 바둑 관련 국제 학술대회도 열리고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재래시장에서 뜨끈한 팟죽을 사먹고 봉지 라면과 김밥, 빵을 사서 산으로 향한다. 산행시 1박 이상 숙소에 머물때에는 늘 5일장이나 재래 시장을 구경한다.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짐을 챙기고 심호홉을 한 뒤 산을 오른다. 날씨는 찬데 상쾌하다. 오르다 보니 눈과 얼음이 많아 아이젠을 한다. 오를수록 배낭은 무겁고 추위와 눈보라에 지쳐간다. 집에 있을 때는 산이 그리웠는데 산에 오르니 따뜻한 집 생각이 난다. 눈보라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다가 손가락이 동상에 걸릴 뻔 했다. 한참을 오르다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으로 가져간 차가운 김밥을 먹는다. 입안에 찬 기운이 몰려온다. 감밥집의 따스함과 따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리산이 온통 눈으로 희고 나무도 눈을 이고 있다. 보기는 좋은데 얼마나 무거울까? 눈 무게 때문에 건물도 무너지는데 나무가 견디는 걸 보니 용하다. 세석 대피소를 지나 오늘 목적지인 장터목 대피소로 간다. 몸은 지쳐가고 찬바람은 얼굴을 때리고 손은 시리고 발은 등산화에 눈이 들어와 더욱 시린데 대피소는 보이지 않는다. 어둡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된다. 어둑해질 무렵 대피소가 저기 보인다. 너무 반갑다. 그러나 대피소가 보였는데 막상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한참 결렸다. 시간이 느리게 가나 보다.
관리실에서 예약한 자리를 확인하고, 아이젠과 물 이외에 음식물은 아무것도 파는게 없어 물을 사서 숙소 2층 침상으로 올라가서 내 번호에 짐을 푼다. 실내로 들어오니 몸이 녹고 피로와 시장기가 몰려온다. 물과 라면, 코펠, 버너를 가지고 취사장으로 가서 음식물이 남지 않도록 물을 조금만 넣고 라면을 끓여서 먹는다. 음식물을 남기면 버릴 곳이 마땅치가 않아 다 먹는다.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몰려온다. 양치도 못하고 침상에서 쉬다가 잠을 청한다. 창문과 지붕이 날아갈 듯 바람이 세게 분다. 이러다 지붕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된다. 바람 소리에다 다리도 아프고 온몸은 피곤한데 코로나 이전에는 담요를 지급 했다는데 지금은 빌려주지 않아 마루바닥이 너무 배겨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바로 누워도 꼬리뼈가 배기고 좌.우로 돌아 누워도 배겨 밤새 뒤척인다. 힘들게 배낭에 메고 간 오리털 침구는 얇아서 체중이 실리니 아무 효과가 없다. 살집이 많은 통통한 사람이 부럽다. 인간사 고해라는 부처님 말씀이 생각난다.
새벽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야외 화장실을 갈려고 바깥으로 나왔다. 깜깜한데 화장실 쪽에 희미한 전등이 있는데 너무 추웠다. 건물을 돌아 야외 화장실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눈이 얼어 엄청 미끄러워, 오르다 뒤로 넘어지면 식물 인간이 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다시 숙소로 가서 스틱과 아이젠을 하고 올까 한참을 고민한다. 잠자는 다른 사람들을 깨울 것 같아 포기하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계단을 오른다. 야외 쪽에 있는 화장실은 변기와 변이 모두 얼어 기마 자세로 용변을 본다. 손 씻을 물이 없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 내린 눈으로 손을 비벼 씻으니 손이 빨개진다. 집이 그리워진다. 집은 돌아 오는곳. 학교를 갔다가, 출근을 했다가, 친구를 만났다가, 여행을 갔다가 돌아 오는곳. 침상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다가 새벽에 다시 물, 코펠, 라면, 버너를 가지고 취사장으로 간다. 힘들게 겨울 산행을 하는데 라면만 먹고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짐을 챙기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하고 스틱을 들고 천왕봉으로 출발한다. 찬 새벽공기가 얼굴을 때린다. 산행 중에 지리산 일출을 본다. 일출은 장관인데 너무 춥다. 눈보라를 헤치고 나아가 드디어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에 오른다. 사방을 둘러보니 온 세상이 하얗다.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니 풍광이 너무 멋지다. 감동이 밀려온다. 추위와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고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 하는 겨울 지리산 정상에 서니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싶다. 대자연과 함께하니 티끌 같은 세상사에 억매이지 않으리라 생각해 본다. 여러 해 전 2주간의 에베레스트 트레킹에서도 그리 생각하고 다짐을 했으나 집에 돌아오니 다시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온 생각이 나 이번에는 달라야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정상에서의 벅찬 시간을 뒤로 하고 로타리 대피소로 하산한다.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으로 어제 준비한 빵을 먹는다. 한식(寒食)이다. 하산길이 춥고 미끄럽다. 여기서 잘못되어 계곡으로 구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하산 후 지인과 상의하여 남원에서 쉬어 가기로 한다. 택시를 타고 등산로 입구 추차장으로 가서 주차해 둔 차를 타고 남원으로 갔다.
뜨뜻한 남원 추어탕을 먹고 숙소를 춘향호텔로 정했다. 내일은 춘향테마파크에 가기로 한다.
일전에 답사 다녀온 조선 중기때 문신인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선생 경북 봉화군 계서당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171호) 생각이 난다. 선생은 남원부사 등을 지낸 부용당 성안의(1561~1629)선생의 아들이다. 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 등 5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암행어사에도 4번이나 등용되었다. 근검.청빈.강직.직언으로 이름이 높아 훗날 청백리(淸白吏)로 녹선 되기도 하였다.
최근 들어 성이성 선생이 춘향전의 중심 인물인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고택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이는 봉화군에서 종택 앞에 세운 안내판에도 나와 있고 답사 시 직계 종손이 답사간 수십명의 회원들에게 성이성 선생이 아버지가 남원 부사로 재직 시 춘향이를 만났다고 하면서 보수적인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가 실명으로 연애소설을 쓸 수가 없어 성 도령을 이 도령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며칠 힘든 일정을 보내고 집으로 향한다. 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라.
<수상소감>
새봄을 맞이하여 행복문학의 신인상을 받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인의 소개로 수필 문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학 글쓰기를 통하여 보다 행복한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재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걸음마를 배우고 나아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더욱 생각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정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신인상으로 선정됨은 잘해보라는 격려와 가르침으로 새기겠습니다. 행복문학과 함께 보람 있는 수필가가 되도록 배전의 다가섬으로 매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행복문학회의 일원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성실하게 노력하여 세상이 글로써 아름다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성일수 올림
첫댓글 부족한 글이라 부끄럽습니다만 계림선생님의 요청으로 제 수필과 수상소감을 올려봅니다. 이 글은 제 원고 원본입니다만 실제 문학지에서는 바둑 관련한 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자료를 조사해서 힘들게 쓴 글인데 심사위원들이 바둑 이야기가 산행과 연결고리가 부족하다고 해서 뺐네요... 모든 회원님들 늘 건강하세요^_^
계림선생님이 글을 올려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퇴직한지 오래되어 이걸 타자를 쳐야되나 어떻하지 하고 고민하다가 방법을 찾아 이제 올리게 되었습니다. 바둑 도 대회 준비 관계로 경황도 없었고요... 해서 며칠 늦었습니다^^
사실 김상유회장님게서 관유수필문학관에 이미 선생님 글을 사진 찍어서 올린 걸 읽었습니다.
참 바쁘게 사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회장님이 사진 찍어서 올린 글에는 바둑 관련한 이야기는 빠져 있습니다~ 저도 글을 올릴 방법을 찾다가 사진 찍어서 올릴려는 생각도 했는데 여러장 찍어보니 읽기가 넘 불편해서 포기했어요^^
친구들이 저를 만나려면 예약해야 됩니다^-^
계림선생님 요청을 받고 휴대폰으로 타자쳐서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조금 해보다가 포기했어요^-^
성일수 선생님의 '행복문학'
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글에서 딴딴한 내공을 느꼈고
성선생님의 일상을 엿볼 수 있어서
미소지으며 읽어내려갔습니다.
다치지않고 건강하게 즐겁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