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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과의 전쟁
삼하 10:6-14
6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7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8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9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10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11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12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13 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14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0:6-14 / [암몬의 연합군과 싸우는 다윗] 이렇게 무모한 일을 저지른 암몬 족속은 자기들이 다윗의 비위를 거슬러 미움을 사게 된 것을 알고 사방에서 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소바 동부에 있는 아람 족속의 나라 벧르홉과 아람 족속의 지역 중에서 가장 북부에 있던 나라 소바에서 보병 2만 명과, 마아가 왕에게서 용병 1천 명과, 갈릴리 호수와 헬몬산 사이에 있는 아람 족속의 나라 돕에서 용병 1만 2천 명이 고용되어 연합군을 이루었다. 7) 다윗은 암몬 족속이 이렇게 대규모로 전쟁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온 군대를 요압 장군에게 맡겨 출전시켰다. 8) 암몬 족속들은 이미 완벽하게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도 랍바의 성문 앞에서는 암몬 족속의 군대가 직접 지키고 있었으며, 소바와 르홉에서 온 아람 족속의 지원군은 돕과 마아가의 용병들과 함께 도성에서 좀 떨어진 들녘에서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9) 그렇게 복병이 있는 것을 모르고 랍바 성문을 향하여 진격하던 요압은 자신이 앞뒤로 적진에게 포위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런 위기에서 요압은 정예병들만을 골라서 아람 족속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10) 나머지 군인들은 자기 동생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 족속과 싸우게 하였다. 11) 이때에 요압은 자기 동생 아비새에게 이와 같이 격려하였다. `아람 족속이 강하여 나를 몰아붙이면 네가 와서 나를 도와주고, 암몬 족속이 강하여 네가 후퇴하게 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와주겠다. 12) 너는 적진의 숫자가 많은것 때문에 겁내지 마라. 우리는 이제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해서도 담대하고 용맹스럽게 싸우자. 그러면 여호와께서 전쟁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루어 주실 것이다.' 13) 요압이 이스라엘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아람 족속의 연합군을 향하여 진격하자, 그들은 모조리 도주해 버렸다. 14) 전세가 이렇게 되자, 그것을 본 암몬 족속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모조리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요압과 아비새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돈으로 산 군대와 믿음으로 뭉친 군대는 결정적인 순간에 낼 수 있는 힘이 다릅니다.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6) 이렇게 무모한 일을 저지른 암몬 자손들은 용병을 고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벧르홉과 소바에서 아람의 보병 이만 명, 마아가 왕과 그의 군대 천 명, 그리고 돕에서 만 이천여 명의 용병이 고용되어 연합군을 이루었습니다. 즉 암몬 자손들이 다윗의 조문사절단에게 가한 모독행위는 사실상 전쟁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만약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암몬 사람들이었다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용서를 구해 다윗 왕과 평화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당시 고용된 용병의 구성은 보병과 전차병, 기마병 등이었습니다. 암몬의 지도자 하눈의 어리석음은 국가정세의 흐름과 흥왕하는 다윗 왕권의 흐름에 대한 통찰의 무지입니다.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7-10) 다윗은 암몬 족속이 대규모로 전쟁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듣자 곧 군대를 파병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정작 빠지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정예 부대만 요압의 지휘 아래 보냈습니다. 이때 암몬 자손들은 나와서 자기들의 성문 어귀 곧 성문 앞에 포진해 있었고 주변국의 용병들은 들에서 진을 치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병거와 마병을 이용한 협공을 준비한 것입니다. 복병이 있는 것을 모르고 랍바 성문을 향하여 진격하던 요압은 자신이 앞뒤로 적진에게 포위된 것을 뒤늦게 압니다. 이제 이 위기 속에서 목숨을 담보로 배수진을 칩니다. 요압은 정예병들만을 골라서 용병 연합군인 아람 족속과 싸울 준비를 시키고 나머지 병력은 그의 동생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군과 대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11-14) 요압의 전략은 적은 수로 많은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적의 협공이 있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입니다. 아비새로 하여금 암몬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고 요압 자신이 먼저 아람 동맹군을 선제공격했습니다. 혹, 자신의 선제공격이 위기에 처하면 아비새가 암몬군을 포기하고 자기에게로 달려오고, 자기의 선제공격이 성공하면 자신이 아비새에게 달려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아비새 지휘관에게 ‘하나님의 성읍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뒷일은 여호와께 맡기자’며 용기를 돋우며 먼저 요압 자신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아람 족속의 연합군을 쳤습니다. 아람의 용병들은 살기 위해 돈 받고 고용된 자들이기에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자 살기 위해 도망했고 모랫둑처럼 무너져 모두 도주해 버렸습니다. 전략상 요압은 암몬 족속을 더 이상 공격치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적 용 : 요압이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는 외침이 지금 당신에게 주는 용기는 무엇입니까?
세상이 우리를 오해하고 멸시할 때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그들과 동일하게 분노와 미움을 드러내시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영적 싸움에서 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는 이미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모욕과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고난 받는 것을 마땅히 여기며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 설 교 >
은총을 모독한 하눈
사무엘하 10장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울 때에는 암몬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던 때는 암몬도 다윗에게 복속이 된 상태이지만(삼하8:12) 다윗이 나하스가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려고 합니다. 나하스가 다윗에게 언제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그랬는지 아니면 복속이 된 상태에서 다윗에게 반역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떻든 나하스를 생각하여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무엘하 9장과 10장에서 다윗이 은총을 베풀려고 한 형태는 비슷합니다. 그 아버지로 인하여 아들들에게 은총, 자비, 헤세드를 베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자신이 죽은 개와 같은 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심을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눈은 이러한 다윗의 은총을 모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안에 있는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면 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긍휼만이 한량없는 감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언약 밖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은 은혜를 모독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삼하 10:1-5 / 다윗의 사절단을 맞이한 하눈의 신하들이 다윗의 사절단이 자기들을 공격하기 위한 정탐꾼으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을 깎아 버리고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습니다. 이것은 죽음만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율법에서 유대인들은 수염을 깍지 못하게 합니다(레19:27, 21:5). 수염은 남자다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극한 분노와 슬픔을 표할 때는 수염을 잡아 뜯거나 깎기도 합니다(스9:3, 렘41:5). 그리고 제사장 외에는 고대의 유대인들은 속옷을 입지 않는다고 합니다. 겉옷을 잘라서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잘라버렸으니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리고에서 왕에게 그런 소식을 전합니다. 왕이 사절단에게 수염이 자라도록 기다렸다가 돌아오게 합니다. 왕의 사절단을 모독한 것은 왕의 은총을 모독하고 거절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전쟁의 선포와 다름이 없습니다.
삼하 10:6-14 / 암몬 자손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을 알고 아람에 용병 삼만 삼천을 고용합니다. 다윗은 요압과 군대를 보냅니다. 그런데 암몬과 아람의 용병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앞뒤로 포위하여 공격해 옵니다. 요압이 이스라엘 군대 중에서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선발하여 요압이 거느리고 용병을 치려고 나가면서 나머지 군대는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의 군대를 치게 합니다. 요압이 아비새에게 말하기를 아람의 용병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암몬이 너보다 강하면 네가 너를 돕겠다고 하면서 담대하라고 합니다.
12절에서 요압의 신앙적인 자세를 보게 됩니다. 아비새를 격려하면서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성읍을 위하여 싸우려고 나왔으면 당연히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쟁에 나서야 하는데 그 승패의 주권을 주님께 맡깁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요압이 이러한 믿음으로 아람의 군대를 대항하여 나아가니 그들이 도망을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암몬 자손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그들의 성읍으로 들어갑니다.
삼하 15-19절 /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에서 패한 것을 보고 하닷에셀을 중심으로 다시 아람의 군대를 다 모읍니다. 이번에는 얼마나 다윗이 적을 죽인 숫자가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명과 군대 장관 소박을 죽입니다. 다른 보병과 도망간 자들은 계수를 하지 않습니다.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을 죽인 것은 엄청난 대승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다윗과 화친하고 다시는 암몬 사람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절한 하눈을 도우려고 왔다가 패배하자 자신들이 다시 대군을 모아 다윗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대패하여 도망가게 됨으로 다시는 하눈을 도울 마음이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인 단지 군사적인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려는 다윗을 모독한 암몬을 돕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하눈’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그 이름이 몇 사람 나오는데 그 어원이 ‘하난’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쓰일 때 동사로도 쓰이고 명사로도 쓰입니다. 동사일 때는 수동태와 능동태로 쓰이는지만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보면 동정을 받다. 은혜를 받다. 호의를 받다. 베풀다. 은혜를 구하다. 불쌍히 여기다. 긍휼이 여기다. 가련하다. 애걸하다. 부탁하다. 간청하다는 뜻으로 사용이 됩니다. 하눈의 이름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은총을 베풀려고 하는데 그 은총을 모독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삽니다. 그런데 그런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0:1~18절입니다.“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진멸해야할 가나안 일곱 족속 외에 다른 지역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암몬은 진멸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평화를 선언하는데 받지 않았기에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이 원리가 복음을 전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들고 가는 자들이 먼저 평화를 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3:16~21절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5)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5)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5)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6)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요한복음 3:16절만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한 단락은 함께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을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7절에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정죄)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죄가 무엇인가 하면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 어두움을 사랑했다는 이악한 행위는 세상의 윤리도덕적인 그런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원래 악한 행위임을 어느 누구나가 다 아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악한 행위란 율법적인 자기 의라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의 일입니다. 이들은 결코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방적인 긍휼을 받아야 하는 자라고 고백을 하지 않는 것이 어두움의 일입니다. 이것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일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빛으로 나아올 수록 자신은 어두움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므비보셋과 하눈과 대비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왔는데 자신은 죽은 개와 같은 자라고 나오는 므비보셋과 그 은총을 모독한 하눈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라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한 간구가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를 구하는 자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자 자기들의 의로 무장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을 두 곳에서 봅니다.
사도행전 3:13~15절입니다.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베드로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쳐주었을 때에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볼 때에 전한 내용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부인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이어지는 24~26절입니다.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의 이 증언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도 있었지만 배척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회개한 자들은 주의 긍휼을 바라는 자들이었으며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은 주의 긍휼 곧 주의 은총을 거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4~52절입니다.“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의 복음 증거의 결과입니다. 복음이란 주의 긍휼과 은총과 자비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거절한 자들은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증거 되는데 누구만 믿게 되는가 하면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만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정말로 은혜의 복음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므비보셋과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지만 영생 얻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는 하눈처럼 은총을 모독하는 행위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심판의 기분은 딱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투
삼하 10:6-14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의 신복들에게 모욕을 준 것으로 다윗이 자기들을 미워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6절에 보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문자적으로 “그들 스스로 미움 받게 만들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들이 다윗에게 미움 받을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병들을 소집하였는데 “벧르흡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명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하였다”(6절)고 했습니다.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이 먼저 잘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먼저 싸움을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은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나머지 고용된 용병들은 따로 들에 있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 대응조치로서 요압과 그 휘하에 있는 모든 용사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여기는 우리는 요압이 어떻게 해서 그들을 물리쳤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요압의 작전 우선 적들이 진치고 있는 상황을 잘 알아야만 전략을 잘 세울 수 있고 그 전략이 들어맞아야 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압은 먼저 앞뒤에 친 적진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암몬 족은 성문 어귀에, 그리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을 따로 들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들은 수 13:16에서 평지로 불리워진 나무가 없는 초원지대인 메드바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곳은 헤스본 4마일 동남쪽에 있으며 랍바로부터 20마일 거리 이상이었으므로 그들은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던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이런 지리적 조건이 요압이 두 군대의 합류를 막을 수 있었던 최상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용사들을 나누어서 한편은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다른 한편은 아비새가 지휘하도록 하여서 암몬 사람을 치게 했던 것입니다(9-10절). 요압의 작전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암몬 족과 아람인들의 합류를 막는 것이었고, 그 작전은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2. 요압의 승리요알은 작전을 세우는데 있어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혼자 다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비새와 나누어서 막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혼자서 군인들을 다 지휘하여 적들을 막고자 했다면 그는 패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아람사람을 향하여 싸우려고 나가니 그들이 다 도망 하였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들이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전투는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승리로 요압의 군대가 이긴 것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많은 용병들이 잘 싸워 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망치자 자신들도 사기가 떨어져 도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압이 전투에 임했던 자세는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용기가 있었습니다. 요압은 과연 다윗의 군대장관이 될만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는 용맹스러운 장수였습니다. 군인에게 필수적인 것이 바로 용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용맹스러움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단을 대적할 용기, 죄의 유혹을 떨쳐버릴 만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의 삶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단결정신이 있었습니다. 싸움에 임하는 군인들은 단결되어야만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압은 아비새에게 아람 사람이 자신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암몬 사람이 아비새 보다 강하면 자신이 아비새를 돕겠다고 하였습니다(11절). 혼자서 군인들을 다 치려고 하였다면 아마도 그 싸움에서 패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협동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군인들이 단결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면 아무리 용맹스러운 군인이라 할지라도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용맹성은 약간 덜 하더라도 단결이 잘되어 있으면 사기가 올라가고 전투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주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사단은 호시탐탐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끼리도 연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군대의 동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단결하여서 서로가 형제임을 인식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즉 단결되지 못할 때 동료들과의 협조를 거부하게 되며, 실패한 자를 보고 기뻐하며 서로 간에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단결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 나라의 방어 및 확장을 위하여, 그리고 진리와 의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3) 백성들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요압이 전투에 임한 것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지도자로서의 바른 길이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사욕을 위해서 전투에 임했다면 그 전투에서 오히려 패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요즈음의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그 나라는 부흥되고 발전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자신만을 생각하게 될 때는 나라는 분쟁이 생기고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4) 여호와를 믿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요압은 12절에서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여호와를 믿는 마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입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이 승리든지 패배든지 그렇게 행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겸손한 복종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렵고 곤란한 지경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믿는 지들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무엘하 10:6-19
다윗이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나 하눈은 다윗이 자신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여 돌려보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흡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눈이 다윗의 신복을 모욕하고 보낸 뒤에 다윗이 분노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이 할 일은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눈은 여러 곳에서 군사들을 고용하게 된 것입니다. 고용했다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군사를 사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방식입니다.
하눈은 다윗에게서 다만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많은 군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많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 생각이며 이방인의 전형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다윗의 많은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군사만 많이 모으면 다윗을 대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사람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이방인들을 나무랄 입장이 되지를 못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고 우리는 그들처럼 살지 말자가 아니라 이미 그들, 즉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방인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사람을 보며 살아온 존재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빙자하여 사람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수가 교회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게 되고, 교회의 크고 작음은 인간의 자존심과 연결되어 이기에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의 대적하기 위해 돈을 주고 군사를 사 모으는 암몬이라는 이방인 방식인 것입니다.
총회가 열릴 때마다 끊이지 않는 것이 총회장 투표 부정입니다. 총회장에 당선되기 위해 자기 편 사람을 만들려고 돈을 얼마를 풀었다는 말이 항상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고 있는 이방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정당한 것입니까? 은석교회는 사람을 모으기 위한 의도로 총동원 전도주일과 같은 행사를 하지 않으니 사람을 보지 않는 정당한 교회입니까? 만약 그렇게 본다면 눈이 어두워져 있는 소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정당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사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암몬과 암몬을 돕는 아람을 치고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하는 내용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분명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암몬 자손이 잘못해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나는 정당하고 저들은 나쁘다는 구별만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구별이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이끌어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가는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여보낸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결국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고 애굽을 나오게 되지만 애굽은 악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은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서 그들을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광야에서의 원망으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애굽의 것을 사모함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을 후회하는 것이야 말로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정당하고 의로운 자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자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악해도 봐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함을 어린양의 희생으로 대속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다른 점은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수없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행위를 가지고 타인과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그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자신은 아주 정당하게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곧 행위를 가지고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별을 하는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눈이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듯 나 역시 예수님의 크신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자에게 무슨 은총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니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방인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으로 여기는 정당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 믿을 것을 권한다면 ‘나는 예수 믿고 있고 너는 안믿는다’는 구별의 자세를 버려야 한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심정에서 믿음을 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믿음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떨 때입니까? 그런 행위가 있는 자신을 정당하게 여길 때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은총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행하는 것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로 서게 하는 도구로 작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 비해 정당한 자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사 사람을 100명 살해한 살인자 앞에서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죄의 본성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장에 보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10장에 이어 11장에서 그러한 얘기가 등장할까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일에 드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했던 다윗이지만 그가 남의 아내를 범합니다. 결국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이 못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눈이 군사를 모았다는 말을 들은 다윗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요압과 용사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아람과 암몬은 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을 들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단지 사람만을 보면서 대적하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치기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이 정당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할 수 없는 자신을 보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이 살길임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가 되기 위해 정당하지 못함을 고백한다면 그것은 위장일 뿐입니다. 여전히 정당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한 신자로 여기심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여겨주심일 뿐입니다. 결국 정당한 신자로 여겨주시는 것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요압이 아우 아비새를 독려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이 말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들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정당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압의 이러한 착각이 곧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교회 일은 곧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식을 갖고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분명 도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뭐든 교회와 연관된 일은 하나님의 뜻을 동원합니다. 이것은 모두 엉터리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가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봅니다’라고 변명을 합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암몬 자손을 돕기 위해 나왔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자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섬기며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기준에 의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리한 대로 자신에게 좋은 대로 변하고 행동하는 이방인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믿음 역시 그와 같지 않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기준으로 하여 변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갑니까? 믿음을 말하면서 항상 내 편한 대로 살고, 나에게 좋은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 예수’ 하다가도 나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치 못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 이방인을 끌어 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우리의 정당치 못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신의 정당치 못함을 보는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뭔가 엉터리로 여겨지는 교회나 교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 교회, 나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질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정당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네가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때입니다.
이방인이든 신자는 세상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는 자신의 악함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언제나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즉 자기 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뭔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이방인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임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께 무척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제발 건성으로 흘려듣는 것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방인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무엇이 이방인이며 무엇이 참된 이스라엘인가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삼하10장을 천천히 읽으세요.
요약: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다. 하눈은 자기 관리들의 말만 듣고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을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냈다.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했으나 패했고, 다시 모인 아람 사람들을 다윗이 친히 출전하여 앎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하닷에셀의 군 사령관 소박을 죽였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걸다 (1~19절)
①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1절)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2절)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3절)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4절)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5절). ▶ 다윗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어떤 은총을 받았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길이 없다. 다만 다윗이 도망자 신세였을 때 나하스에게 신세를 지지 않았을까 추정될 뿐이다. ▶▶ 자고로 문상하는 자리에서 문상객을 건드리는 건 조폭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눈의 신하들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왕에게 어리석은 조언을 했다. 설령 정탐을 하러 왔다손 치더라도 문상하는 자리이기에 그냥 넘겨야 했는데 그 왕에 그 신하였다. 어리석은 신하들의 잘못된 조언을 무지한 왕 하눈이 그냥 받아들였다. 누가 감히 다윗을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다윗이 못마땅하더라도 자신의 부친을 문상하러 온 그의 신하들을 망신 준 것은 그들을 보낸 다윗 왕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짓이었고 결례였다. 무지한 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나 보다. ▶▶▶ 하눈은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았다. 절반은 길이의 절반이 아니라 면적의 절반일 것이다. 다윗 왕은 그들이 부끄러워했으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말고 수염이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라고 했다. 또한 신하들이 입고 있던 옷을 둔부가 절반은 드러나도록 잘라버렸다. ‘중동볼기’는 ‘in the middle as far as their hips’(NASB)로 엉덩이의 절반 부분을 말한다. 속옷을 입었을 것이므로 치부가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이 역시 다윗의 신하들을 수치스럽게 했을 일이다.
②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6절). ▶ 물은 엎질러져야 엎질러진 줄 알게 된다. 하눈과 그의 신하들은 자신들이 한 행동이 다윗의 미움을 사게 된 줄 바로 알았을 것이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실행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물은 엎질러졌다. 다윗 왕은 나하스를 생각해서 암몬은 건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하눈이 화를 자초했다. 쓸데없이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만들고 아람 사람이 주축이 된 용병을 3만 3천 명이나 고용하게 되었다. 그 비용은 은 천 달란트였다. ▶▶ ‘마아가’(Maacah)는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소생으로(창22:24) 아람 사람들이다. “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밉게 한 줄 안지라 하눈과 암몬 자손은 더불어 은 천 달란트를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마아가(Aram-maacah)와 소바에 보내 병거와 마병을 삯 내되 곧 병거 삼만 이천 대와 마아가 왕과 그의 군대를 고용하였더니”(대상19:6~7a). 겉모습은 암몬과의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닷에셀과의 전쟁에 이은 아람과의 두 번째 전쟁이었다. 돕(Tob)은 입다가 사사가 되기 전에 피신했던 곳으로 암몬 북방에 있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역대기에는 돕 사람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를 통해 돕 사람도 결국 아람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③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7절)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8절)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9절)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10절)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11절)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12절) 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13절)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14절). ▶ 암몬 자손은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아람 자손들은 들판에 있었다. 요압이 볼 때 이스라엘 군의 앞뒤로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형세였다. 아람 사람들은 용병이었기에 목숨 걸고 싸울 의지가 없었을 것이다. 요압은 자신의 동생 아비새에게 12절에서처럼 말하고 있다. 군 지휘관들이 이런 자세로 싸우는데 용병들이 이스라엘 군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암몬 자손은 용병을 썼기에 성문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가 여차하면 성 안으로 도망치려 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람 사람들이 도망을 치자 암몬 자손들도 성읍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하눈 신하들의 잘못된 조언으로 하눈은 커다란 실수를 했고, 돈을 많이 썼지만 전쟁에 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것을 보고 헛짓거리했다 라는 말을 쓴다.
④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15절)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16절)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17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18절)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그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19절). ▶ 먼저 살펴볼 것은 이번 싸움은 다윗 왕이 직접 출전한 전쟁이라는 점이다. 요압은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는데(14절),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윗 왕이 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번 싸움이 어디서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요단 동편인가 서편인가? ‘헬람’이 기준이 된다. 다윗이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헬람은 요단 동편이 된다. 그러므로 15절의 아람 사람이 다 모인 곳은 요단 동편이 되고(대상19:16), 16절에서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냈다는 것은, 하닷에셀 자신은 요단 서편에 있었지만 동편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그가 강 건너쪽 즉 서편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모인 아람 군대는 소박이 이끌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으므로(8:6,14), 보나 마나 다윗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역대기는 다윗이 아람 병거 칠천 대의 군사와 보병 사만 명을 죽이고 군대 사령관 소박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대상19:18). ▶▶ 다윗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게 되었다. 아람 사람들이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게 되었다. 줄을 잘 서야 망하지 않는다. 어떤 줄에 서야 하는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나 나라나 왕을 따르는 줄에 서는 게 망하지 않는 비결이다.
[문제10-1] 다음 중 삼하10장의 내용과 다른 것은?
① 다윗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려고 했는데, 이는 다윗이 암 몬 왕 나하스에게 은총을 입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② 다윗이 요압을 비롯한 신하들을 나하스를 조상하라고 보냈다.
③ 하눈은 자기 관리들의 말만 듣고 다윗이 보낸 신하들을 욕보였다.
④ 다윗은 신하들의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했다.
⑤ 수염의 절반을 잘랐다는 것은 길이가 아니라 면적의 절반을 잘랐다는 말 이고,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다는 것은 둔부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선 으로 잘랐다는 말이다.
[문제10-2] 다음 중 삼하10장의 내용 중 틀린 것은?
① 암몬 자손들은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아람 사람들이 주축 이 된 용병 33,000명을 고용했다.
② 요압이 이끄는 이스라엘군과 대치한 암몬 자손은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진을 쳤다.
③ 요압은 암몬 자손과 아비새는 아람 용병과 싸우려고 진을 쳤다.
④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했던 아람 사람들이 다시 모여 헬람에 이르렀는데 하닷에셀의 군 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렸다.
⑤ 다윗도 친히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러 아람을 쳤는데, 아람 병거 700대 와 마병 40,000명을 죽이고 군 사령관 소박을 치니 그가 거기서 죽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무엘하 10:6-19
다윗이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나 하눈은 다윗이 자신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여 돌려보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흡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눈이 다윗의 신복을 모욕하고 보낸 뒤에 다윗이 분노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이 할 일은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눈은 여러 곳에서 군사들을 고용하게 된 것입니다. 고용했다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군사를 사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방식입니다.
하눈은 다윗에게서 다만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많은 군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많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 생각이며 이방인의 전형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다윗의 많은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군사만 많이 모으면 다윗을 대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사람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이방인들을 나무랄 입장이 되지를 못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고 우리는 그들처럼 살지 말자가 아니라 이미 그들, 즉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방인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사람을 보며 살아온 존재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빙자하여 사람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수가 교회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게 되고, 교회의 크고 작음은 인간의 자존심과 연결되어 이기에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의 대적하기 위해 돈을 주고 군사를 사 모으는 암몬이라는 이방인 방식인 것입니다.
총회가 열릴 때마다 끊이지 않는 것이 총회장 투표 부정입니다. 총회장에 당선되기 위해 자기 편 사람을 만들려고 돈을 얼마를 풀었다는 말이 항상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고 있는 이방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정당한 것입니까? 은석교회는 사람을 모으기 위한 의도로 총동원 전도주일과 같은 행사를 하지 않으니 사람을 보지 않는 정당한 교회입니까? 만약 그렇게 본다면 눈이 어두워져 있는 소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정당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사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암몬과 암몬을 돕는 아람을 치고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하는 내용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분명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암몬 자손이 잘못해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나는 정당하고 저들은 나쁘다는 구별만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구별이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이끌어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가는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여보낸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결국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고 애굽을 나오게 되지만 애굽은 악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은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서 그들을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광야에서의 원망으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애굽의 것을 사모함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을 후회하는 것이야 말로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정당하고 의로운 자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자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악해도 봐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함을 어린양의 희생으로 대속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다른 점은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수없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행위를 가지고 타인과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그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자신은 아주 정당하게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곧 행위를 가지고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별을 하는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눈이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듯 나 역시 예수님의 크신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자에게 무슨 은총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니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방인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으로 여기는 정당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 믿을 것을 권한다면 ‘나는 예수 믿고 있고 너는 안믿는다’는 구별의 자세를 버려야 한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심정에서 믿음을 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믿음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떨 때입니까? 그런 행위가 있는 자신을 정당하게 여길 때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은총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행하는 것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로 서게 하는 도구로 작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 비해 정당한 자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사 사람을 100명 살해한 살인자 앞에서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죄의 본성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장에 보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10장에 이어 11장에서 그러한 얘기가 등장할까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일에 드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했던 다윗이지만 그가 남의 아내를 범합니다. 결국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이 못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눈이 군사를 모았다는 말을 들은 다윗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요압과 용사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아람과 암몬은 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을 들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단지 사람만을 보면서 대적하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치기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이 정당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할 수 없는 자신을 보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이 살길임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가 되기 위해 정당하지 못함을 고백한다면 그것은 위장일 뿐입니다. 여전히 정당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한 신자로 여기심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여겨주심일 뿐입니다. 결국 정당한 신자로 여겨주시는 것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요압이 아우 아비새를 독려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이 말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들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정당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압의 이러한 착각이 곧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교회 일은 곧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식을 갖고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분명 도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뭐든 교회와 연관된 일은 하나님의 뜻을 동원합니다. 이것은 모두 엉터리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가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봅니다’라고 변명을 합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암몬 자손을 돕기 위해 나왔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자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섬기며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기준에 의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리한 대로 자신에게 좋은 대로 변하고 행동하는 이방인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믿음 역시 그와 같지 않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기준으로 하여 변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갑니까? 믿음을 말하면서 항상 내 편한 대로 살고, 나에게 좋은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 예수’ 하다가도 나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치 못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 이방인을 끌어 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우리의 정당치 못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신의 정당치 못함을 보는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뭔가 엉터리로 여겨지는 교회나 교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 교회, 나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질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정당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네가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때입니다.
이방인이든 신자는 세상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는 자신의 악함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언제나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즉 자기 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뭔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이방인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임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께 무척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제발 건성으로 흘려듣는 것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방인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무엇이 이방인이며 무엇이 참된 이스라엘인가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