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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로마인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sulla
세계의 반을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몰락과 현대사의 이탈리아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루 아침에 로마가 세워지지 않았듯 로마의 몰락 또한 하루 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흐름을 지켜봤던 인물들과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되짚고자 한다. 물론 미래는 독자들의 몫이 되겠지만... 템즈
An 1894 photogravure of Alaric I taken from a painting by Ludwig Thiersch.
템즈: 로마 말기 스틸리코 장군과 로마제국군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던 알라리크 장군과 마지막 황제랄 수 있는 갈라플라키디아 여제를 제 첫 인터뷰에 초대했습니다. 우선 알라리크 장군께 당시 국내 외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알라리크: 천년하고도 오백년이 훨씬 더 지난 일을 꺼내려니 감회가 새롭군요. 그동안 강바닦에 묻혀 지내며 간간히 들려오는 세상소식은 듣고 있었으나 이렇게 공개적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을 뭐라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단순히 로마내부의 상황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가장 큰 원인이야 로마내부의 부패에 기인하겠지만 당시 훈족의 침탈로 저의 부족인 고트족이 어쩔수 없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난민들에대한 로마인들의 박해로 고트족이 일어서게 된것이지요.
템즈: 장군께서는 로마장군으로서 고트족을 이끌고 로마에 반역했던 것에 대한 변명으로 들리는데요.
알라리크: 반역이라...내가 아니었어도 로마는 멸망의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미 로마 내부의 부패와 병역의무에서 면제된 로마시민을 대신한 이민족으로 구성된 로마군을 이끄는 로마장군들의 반역이 멸망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예고한 것 입니다. 저의 역할은 다만 그 침몰해가는 거함의 구멍을 조금 크게 했다고나...
The burial of Alaric in the bed of the Busento River. 1895 lithograph
템즈: 장군의 후견인 이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왜 이방인이었던 스틸리코 장군과 알라리크 장군을 요직에 앉혔는지 듣고 싶군요.
알리리크: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언급하기 앞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시대를 간력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래야만 제 행동이 왜 단순히 개인의 야망에 의한 반란이 아니었나 이해될 것 입니다.
템즈: 물론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로 정한 배경 비잔틴으로 천도한 것 등등 많은 것들이 궁금하긴 합니다만...
알라리크: 로마 말기의 대중들의 가치관은 어떤 권력도 창출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었지요. 권력의 기반이 되는 대중들의 가치관이 쾌락과 개인의 이익추구에 혈안이 되었다면 그 권력은 모래위의 성에 불과한 것 입니다. 이러한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꿰뚫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울어가는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미 오래전 공화정 당시 그라쿠스 형제가 시도했던 개혁의 실패를 거울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전면적 개혁을 단행한 것 입니다.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비잔틴으로 천도하는 급진적 개혁을 시도 했습니다.
Constantine the Great, mosaic in Hagia Sophia, Constantinople, c. 1000.
템즈: 그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자신의 개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 입니까?
알라리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도는 아니었습니다. 퇴폐하고 향락만을 일삼는 로마의 대중들 사이에서 불과 5분의 1에 불과한 기독교들만이 유일한 권력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본 것 입니다. 이들만이 뭔가 진지한 생산적 힘을 가졌다고 믿었지요. 로마의 뿌리인 라틴 민족과 고트족으로 대표되는 게르만 민족의 융합을 위해서는 이 기독교만이 양쪽에 공통된 가치부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템즈: 수도 이전 또한 그 과정이었군요.
알라리크: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개인이나 집단이나 한번 익숙해진 문화를 바꾸기는 그 만큼 힘든 것 입니다. 예수도 말했듯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봐야지요. 더구나 권력의 기반이 되어야 일반 대중들이 일부 정치모리배들의 이간질에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는 판 속에서는 로마의 재건은 요원한 것으로 생각 되었지요. 서로마를 버리고 동로마를 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민족과의 평화적 국민 통합을 이루어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천도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템즈: 그렇지만 서로마는 천도 이후 백여년만에 멸망하고 마는데요. 이런 결과임에도 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보십니까?
알라리크: 물론 천도로 인해 서로마의 몰락이 급속도로 진행됐으나 새로운 수도의 탄생으로 인해 로마의 명맥이 그 후 천 년 넘게 유지되었다면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An engraving depicting what Theodosius may have looked like, ca. 1836.
템즈: 이제 다시 장군과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대해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알라리크: 동로마로 천도한 뒤로도 서로마와 동로마에는 각각 황제가 존재했습니다. 호랑이가 없는 곳은 토끼가 왕이라고 서로마의 황제를 차지하기 위해 군인들의 반란이 빈번할 때 였습니다. 동로마에서 고트족의 반란으로 동로마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자 서로마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스페인을 다스리고 있던 테오도시우스 장군을 동로마 황제에 임명했습니다.
얼마 후 서로마에서 막시무스 장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발렌티아누스 황제가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동로마로 피신했습니다. 당시 두 아들을 둔 40세의 홀아비였던 테오도시우스 동로마 황제가 서로마 황제의 여동생 갈라와 눈이 맞아 혼인을 하게되었지요.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 오늘 제 옆에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입니다. 나중에 로마의 마지막 여제로 표현됩니다만..
템즈: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에게는 나중에 질문하기로 하고요. 우선 알라리크 장군과의 대담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당시 장군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스틸리코 장군이 언급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알라리크: 제가 일생 동안 존경인물을 말하라면 저를 키워주신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저의 라이벌이었던 스틸리코 장군 뿐 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스틸리코 장군 또한 이민족 출신으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발탁된 장군이었지요. 반달족 출신으로 그의 충성심은 황제 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재건에도 그 뿌리를 두었으나 저는 다만 제 군주였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충성심을 가졌다고나 할까요.
Stilicho (right) with his wife Serena and son Eucherius
템즈: 스틸리코를 그렇게 존경했던 것이 결국 스틸리코가 장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포로가 된 장군 가족을 무사히 돌려보낸 이유가 될 수 있겠군요.
알라리크: 그것 때문에 결국 스틸리코도 모함을 받아 숙청되게 됩니다만 절대로 저와 스틸리코가 뒤로 내통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한 때 동료로서 그리고 나중에 적이 되었지만 서로를 존중해 주는 군인의 길을 간 것이지요. 스틸리코 장군 또한 참수 되기 전 그의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었지요. 아무리 이민족 장군이 충성을 바쳐도 로마의 민심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였습니다. 그러한 로마에 평생 충성한 스틸리코 장군의 뜻을 기리어 제가 로마를 함락한 것도 장군이 순수 로마인들에게 참수 된 후 입니다.
템즈: 천 오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민족과의 융합은 언제나 힘이 드는가 봅니다. 공식적으로는 476년에 서로마가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만 이미 로마의 침몰은 그전이 아닌가 합니다.
마지막 여제랄 수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녀께 묻겠습니다. 2명의 남편을 둔 비운의 황녀로 기록되었는데 간략한 소개가 있어야 할 듯 싶습니다만.
갈라 플라키디아: 제 첫남편은 여기 계신 알라리크 장군의 동생분이었던 아타울푸스 장군이었습니다. 서로마가 알라리크 장군에 의해 함락되고 나서 저는 포로가 되었지요. 그러다가 저는 아타울푸스 장군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남편이 바로셀로나에서 암살되고나서 저는 라벤나 궁전에 칩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복 오라버니였던 당시 호노리우스 황제의 정치적 흥정에 의해 저는 재가를 해야 했고요. 저의 두번째 남편인 콘스탄티우스 장군과의 사이에서 난 발렌티니아누스가 나중에 저를 이어 황제에 오르게 됩니다.
Portrait of Galla Placidia, from her tomb in Ravenna
템즈: 그 이복 오라버니였던 호노리우스 황제도 갈라 공주께 흑심을 품고 있지 않았나요? 어쨌든 호노리우스 황제가 죽고나서 그의 측근이었던 요한네스 장군이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만… 갈라 여제의 25년간의 통치 당시에는 전쟁이나 냐란이 잠잠했고 그리고 로마를 병들게 했던 권력 다툼 또한 없었는데 갈라 플라키디아 여제가 첫 남편과의 옛사랑 추억에 잠겨 국사를 놓친 것은 아닌가요?
갈라 플라키디아: 저의 조카인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가 저를 로마제국 황제로 추대해서 이탈리아로 진군해서 제가 황제의 자리에 앉아있긴 했으나 그것은 침몰하고 있는 배에 남아있는 선장과 다름없었지요. 권력의 바탕이 되어야 할 중소농민계급은 타락한 귀족과 정치가들로 인해 이미 붕괴되고 노예의 공급처였던 아프리카마저 반달왕국에게 빼앗겨버린 때였습니다. 이런 침몰직전의 거함을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그 침몰을 재촉하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템즈: 그래도 기독교사에서는 갈라 플라키디아 여제당시의 기독교 보호에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요.
갈라 플라키디아: 제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처럼 저 또한 기독교만이 몰락해가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 했습니다. 침몰해가는 로마라는 거함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후세에 전해줄 유일한 구명정은 기독교였다고 봅니다.
Interior of the Mausoleum of Galla Placidia in Ravenna.
템즈: 어떤 사학자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몰락을 가져왔다고도 보는데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세계에 퍼트린 것만은 확실하군요.
로마제국의 몰락은 한 두 원인으로 설명되기는 힘들 것 입니다. 서로마의 멸망 이후 천 육백년이 흐른 뒤 미국이라는 세계최강의 국가가 지배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하나의 거울이 될 듯도 합니다. 한 민족 혹은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개인의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원천이 되는 대중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고 봅니다. 빈부차별의 심화와 대중들의 쾌락추구, 이성이 아닌 쥐 떼처럼 몰려다니는 군중들의 감성은 최강국가를 침몰시키는 한 원인이 될 것 입니다. 무능한 정치인들의 권모술수 또한 그 침몰의 지대한 역할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될 것 입니다.
특히 한 시대를 무능한 통치자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민중들의 공통점으로 보입니다.. 무능한 정치인의 퇴출과 더불어 일반대중들의 건전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요구되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하나의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출처: http://blog.daum.net/touristclub/5164898
그림: 로마인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