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숙 소설집 [나쁜 그림]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퍼포먼스처럼(2)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그것도 가짜 같습니까?”
그녀는 주인의 객담을 무시한 채로 흘낏 바깥을 살폈다.
애인이 천천히 오고 있었다.
“날 잡술라고?”
여자는 남자를 타고 앉은 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머리칼이 사르르 쏟아져 그녀의 어깨로 흘렀고, 흐트러진 그 머리칼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인 듯이 그녀가 돌이질 쳤다. 그리고 허리를 천천히 회전했다가
급격한 엉덩방아를 찧어대기 시작했다.
그 율동은 일정한 시간을 베어 먹으면서 조금씩 변화하였다.
여자가 작가이고 남자가 행위자라면 또 다른 관객은 바로 여자 자신이었다.
여자가 작가이고 여자 자신이 행위자라면 남자는 오로지 관객일 뿐이었다.
퍼포먼스의 특성이 그렇듯이, 여자의 그것은 일회용 행위예술이었다.
남자의 눈이 잠잠히 감기었다.
고통이 낳은 쾌감을 좀더 세밀히 음미한다거나, 그렇게 함으로서 좀더 나은
예술이 될 거라거나, 그런 설명이 남자의 얼굴에 씌어지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갔고,
그 분홍빛 땀방울이 호로록 떨어지면서 관객의 가슴에 얼굴에 입에,
어지러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추상표현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눈을 뿌리고 있었다.
붓 끝에 흰색 물감을 잔뜩 묻혀 중묵을 칠한 화선지 위에 눈을 뿌리듯이,
그녀는 지금 애인이란 이름의 화선지 위에 분홍빛 눈을 그리는
순수미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평면성의 화판에다 파도의 무늬를
불어넣어 관객으로 하여금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사기행각이었다.
하지만 관객은 번번이 거기에 매혹될 뿐만 아니라, 그런 사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기도 했다. 몸속의 피가 온통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을 부여잡고 남자는
두 번째의 신음을 우물거렸다.
-암, 사, 마, 귀...
그녀는 여전히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청죽같은 그의 열정을 마구 흔들고 물어뜯어 깨운 다음,
한 복판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싶을 따름이었다.
영과 육을 혼합하고 싶은 거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라는 신념을 세워
기억세포에 단단히 붙들어 매고는,
남자의 수천수만 억 개 세포 하나하나에 그녀의 영을 버무려넣는 작업을 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새로운 작품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것의 실핏줄 한 올 까지도 놓치지 않고 혀끝으로 조금씩 핥다가,
드디어 폭발할 그 순간을 포착하여 사납게 타고 앉아서는 자신의 한
가운데를 찢어발기는 일이다.
분리와 합일을 반복하여 순간적인 갈증과 포만을 교차시키면서.
가느다란 아쉬움을 꿀꺽 삼킨 그녀는 보얀 이를 드러내고서 웃은 다음,
혁인의 부르튼 입술을 어루만졌다.
여린 살갗의 한 가운데가 부르튼 것이 안쓰럽다는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는 짤막하게 말했다.
“일장춘몽이었어.”
퍼포먼스처럼(3)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칠년 전 어느 봄날의 금요일 오후 네 시 경,
명기남은 천천히 담뱃불을 비벼 껐다.
영화동 신도시 아파트 입구에 드물게 남아있는 단독주택형 상가에
자리잡고 있는 ‘풀다스릴 표구사’였다.
아름드리 가로수에서 흰 눈물처럼 떨어져 내린 벚꽃은 이따금 불어오는
소소리바람에 휩쓸려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몰리다가 마침내 눈 더미처럼
답쌓였다.
소파에 앉은 명기남은 가끔씩 바깥을 내다보다가는 다시 미쓰염에게
눈을 돌려 실실 웃는다.
사십대 후반의 그는 몸이 마른 편이고 얼굴도 갸름한데다 좀 신경질적인
인상이다. 어찌 보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양순해 보이지만 가느다란
눈초리엔 언뜻언뜻 심상찮은 무엇인가가 번뜩이고 있다.
코와 가슴에 실리콘을 삽입하여 어딘지 인조인간 같은 미쓰염은,
통굽 슬리퍼를 한쪽만 벗어 던지고는 그 다리의 무릎을 꺾어 남자의
허벅지 위에 냉큼 올렸다. 그 무릎이 남자의 두 허벅지 사이를 눌러
화들짝 잠이 깬 유기체를 지그시 문질러대는 한편으로,
그녀의 몸통이 보온병과 함께 배틀배틀 흔들렸다.
팽팽히 솟은 그녀의 젖가슴이 남자의 이마를 툭툭 건드리자,
핑크빛 머리칼도 어깨를 타고 한들거리며 푸르딩딩한 입술에선
코맹맹이 소리가 흘러나온다.
“우리 사장님이 배가 허벌나게 고파부렸쪄 잉? 에구구 체할라.
커피 마셔 감서 천천히 드셔잉.”
“개업 준비 하느라고 묵도 몬했을 텐데, 자아, 입 벌리라꼬.”
명기남이 한 손으로 염을 감자 염이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하였다.
커피잔을 가까스로 세워 잡은 그녀가 푸르딩딩한 입술을 똥그랗게 열어
그의 바로 코밑으로 가져간 것과 때를 맞춰 그 입에 떡을 쏙 밀어 넣은
명기남은, 커피잔을 교묘히 받아 옆의 탁자에 안전하게 놓고서야 그녀를
넙죽 안았다. 그녀가 밀착되었다.
그녀는 캑캑거리다가 기침을 해대다가 기어이 그의 가슴을 탕탕 치고는
눈을 싹 흘겼다.
“아이구야 사장님도, 아직 해도 안 졌어라잉.”
명기남은 버릇처럼 바깥을 살폈다.
늙은 벚나무만이 여전히 흰 꽃을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는 염의 귀밑머리를 후후 불며 나직나직 속삭였다.
“우리집에 이사 오이라.”
그녀가 한숨을 내리쉬고 올려쉬고 했다.
“돈이가 있어야지라아. 우리 싸장님이 꽁짜로 주신담 또 몰르지만이라아-”
그가 그녀의 오똑한 콧날을 톡 쳤다.
“니는 여시 중에서도 백여시다 고마. 요즘 세상에 그래 큰 방을 공짜로
달라고? 칼 안든 강도 아이가.”
그녀는 아찔한 통증에 코를 싸쥐었으나 이내 호호호 웃었다.
“그럼, 엄청 싸게.......... 흐응?”
“안 할란다. 니한테는 특별히 비싸게 받을란다.”
“저엉 말?”
그녀는 이틀이나 면도를 못한 남자의 까끌까끌한 턱을 어루만졌다.
“그라모! 정말이재.......... 니 몸이 여간 비싼 기드나?”
그 순간이었다. 미쓰염이 숨이 깔딱 넘어갈 듯이 놀라는 것이었다.
명기남의 아내 차미혜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네 몸이 여간 비싸냐.......... 그렇게 비싸? 미쓰염의 몸이 대체
얼만데 그래?”
차미혜는 남편의 말을 곱씹으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하지만 도로 나가기도 인기척을 내기도 곤란하던 차에 미쓰염과 눈이
마주쳐서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한 그녀였다.
미쓰염이 숨을 길게 뿜는다.
염의 머릿속에는 명사장과 자기와의 뜨거운 입맞춤 장면위에
차미혜가 들이닥쳐 연적의 뺨을 보기 좋게 후려갈기는 장면이
겹쳐지고 있었다.
“미쓰 염이 개업했다고.......... 좀 먹을래?”
미쓰염은 바로 그 틈을 이용하여 문을 밀었고, 그런 그녀를 차미혜가
불러세웠다.
“그릇은 그냥 두고 가아?
“아 아닌게라아, 이따 가지러 올 게라아-”
종종걸음치는 그녀의 탱탱한 엉덩이에 불타는 듯한 머리칼이 나릿나릿
춤추고 있었다.
미혜는 비로소 남편을 돌아다보았다.
퍼포먼스처럼(4)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일찍 퇴근한 이유는요..........”
차미혜는 간단한 여행가방을 챙겨들었다.
“서울엘 다녀오려구..... 낼이 아버지 기일인데 깜박했지 뭐예요.
밤차를 타야겠어요. 상숙이한테 일러뒀으니까 당신 식사 걱정은
안해도 될거구... 민이한테도 핸드폰 쳐 놨구..........”
“나도 가야 되는 거 아이가?”
그녀는 남편의 질문을 묵살했다.
그의 머릿속이 미쓰염과의 불같은 밤을 위한 청사진을 펼치느라고
사뭇 분주할 것이라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런 걸 알고
있다는 건 그녀에게는 일종의 슬픔이기도 했다.
“모레 일요일에 올게요.”
“어떤 놈팽일 달고 갈라고?”
명기남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자, 그녀는 미쓰염을 들먹였다.
“미쓰 염이나 조심하라구요. 저 뒷방은 독채나 다름없어요.
걔한테 홀딱 넘어가서 방세 전부 날리지 말구.......... 월요일에 누가 방을
보러 오기로 했으니까 그리 알아요.”
“사람을 바본 중 아나?”
명기남은 기세가 등등하여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쉽사리 맞을
차미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서슬을 냉큼 피하면서 갔다 올게요-를 확
던지고 나가, 길가에 뒹구는 벚꽃을 밟으며 벚꽃을 맞으며 목적지도 없는
사람처럼 걸었다. 남편의 눈이 계속 따라붙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혁인이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와 있었다. 그녀보다 세 살 아래인데다 아직
독신이고 일백팔십이 넘는 키의 그는 손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명기남은 자기의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아내의
뒤를 밟은 것뿐이었다. 아내가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는 마음 턱 놓고 미쓰 염을 불러들이는데 있어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될 선행 조건이었다.
그는 아내와 맞부딪히게 되면 둘러댈 말로 차비를 보태 줄까?
선물을 안 사가도 되겠어? 등등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혁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평소 그는 아내와 지혁인의 사이를 잔뜩 의심하고
있었다. 무슨 책을 사는지 매일같이 아내의 서점에 드나드는 그가 명기남은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저 작자가 바로 이 시점에 나타나다니,
이게 웬 알리바이 김새는 모양새냐....... 그는 오감 육감을 총동원하여 오만
때만 가지 상상으로 무장을 하고는 아내 차미혜의 출현을 기다렸다.
이윽고 차미혜가 나타났다. 과연 그의 짐작대로 지혁인이 반색을 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런데 차미혜가 무슨 꿍꿍이인지 남자의 손을
쌀쌀히 뿌리친다. 수상하기 짝이 없군. 그녀가 매표소로 향하는 것을 본
명기남은 몸을 형사처럼 기민하게 움직여 그녀를 비켜주는 것과 동시에
지혁인의 입음새를 재빨리 훑었다. 양복에다 넥타이까지 맨 것이 나들이 복장이
분명했다. 그가 여자 중학교 교사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명기남은 지혁인의
행선지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토요일이면 또 모르지만, 평일에, 그것도 퇴근시간
도 아닐 터.
퍼포먼스처럼(5)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표를 끊은 차미혜가 다시 지혁인에게로 다가서더니 그를 그윽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계획된 만남이라 이거지? 그가 확신에 확신을 거듭하고 있을 때에
지혁인이 버스에 오르는 차미혜의 손을 잡으려고 크고 미끈한 제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그 손을 쌀쌀맞게 뿌리치면서 혼자힘
으로 차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라모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꼬 누가
증명이나 해 줄라카듸? 문디.......... 네년의 그 잘난 꼬리를 확실하이
거머쥐기 위해서라도 늬 인내심을 본받아야 하겄다 이말이다.”
명기남은 치를 부르르 떨었다.
“그 뜨거운 장면을 목격하고도 태연한 척 할 때 알아봤다 고마. 뛰는 년
위에 나는 놈이 바로 나다 이년아, 해 보자고..........”
지혁인이 한참 만에 여학생 서넛을 만나 차에 태우고는 자기도 올라타고
있었다. 그는 백일장에 선발된 학생들을 인솔해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명기남은 그것을 위장 술책으로 보고 그 심증을 딱 굳혀버렸다.
명기남 그는 버스가 도로에 진입하려고 몸을 틀자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를
뽀드득 갈아댄 것이다.
정말이었다. 명기남의 상상대로 그들은 둘이 같이 앉았다.
게다가 명기남이 버스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조차 둘 다 알아챘다.
“드디어 사건 터졌군!”
지혁인이 신음을 뱉었다. 차미혜의 서점에서 명기남에게 톡톡히 당했던
두 번의 경험이 그 절망의 도를 가늠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차미혜는 그의 절망감이 무색하리만치 담담한 어조였다.
“뭘 그리 겁내? 덕분에 이혼 당하면 좋지.”
“날 기어코 가정 파괴범으로 만드시겠다? 손도 한 번 안 주면서.......”
차미혜는 자기 손을 잠깐 내밀어보고는 아예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확신이 서기 전까진 못 줘. 손 한번 잘못 줬다가 내가 이 꼴인 걸.......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인간이 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더라구.......
이혼을 못하면 별거라도 할 거야. 정말 그럴거라구.......... 이건, 순전히 내
문제니까 신경 끄셔.”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 되는 판인데.......... 이왕 누명을 쓸라모, 비슷한
불꽃놀이라도 해야지 덜 억울할 거 같은데?”
차미혜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지혁인의 팔이 자기 어깨를 서서히 조여 오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다가는 느닷없이 중얼거렸다.
“어디 숨어서 민이 동생을 하나 키울거야.”
환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던 혁인의 목소리가 둥둥 떴다.
“내 딸을 키우고 싶다 그거?”
여자가 냉큼 받았다.
“낳아만 줘. 못 키울 건 또 뭐야?”
그녀는 자기가 실험적으로 내뱉은 말에 대하여 이 남자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였고, 지혁인도 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아찔한
계획을 말하는지가 궁금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 일요일 오후 여섯 시 경이었다.
지혁인은 자기 집 들머리인 ‘미락횟집’을 그냥 스쳐 지났다. 그리고는 마침
명기남이 잠복해있는 골목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바다에 채 닿지 못한 빗발이 바람에 흩날렸고,
어슴푸레한 저녁물결도 가만가만 안개를 피워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이윽고 준무장한 빗줄기 떼가 바다에 하강하였다.
저들이 연신 튕겨 오르며 방울방울 부서지다 못해 기어이 줄기찬 공세로
돌변하자, 그제야 바다가 가슴을 여는 낌새였다.
“미친놈, 자살이라도 할라카나..........”
이를 갈아붙인 명기남이 자동우산을 척 펼치고는 천천히 사내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꺾고 마냥 걷던 사내가 자갈밭이 시작되는 경사지로
접어들 때쯤 명기남이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렀다. 시퍼렇게 섰을 칼날이
손끝에 아찔한 키스를 보내오자, 그는 칼자루를 다부지게 거머쥐는 한편
이죽거렸다.
니 죽고 나 사는 기라..........
니 아무리 날고기는 놈이라 카드라도, 일박 이일동안 갈아붙인 이 칼날만은
몬 피한다 고마.......... 염불이나 읊어두거라.
마치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이 혁인이 몸을 휘딱 날렸다.
어쭈, 살아보겠다고?
명기남은 우산을 잽싸게 세워 자기 몸을 가리는 한편 혁인이
독수리 날갯죽지처럼 생긴 절벽 안쪽으로 뛰어드는 것을 유심히 살폈다.
자갈 밟는 소리를 한껏 죽이며 다가간 그가 손을 갈퀴처럼 펴서 날개 안쪽을
더듬거리는 동안, 날개를 못 접고 나뒹군 우산이 마구 펄펄거리며 빗속을
방황했다. 그새 밤이 왔는지, 아니면 동굴이 깊어서인지 사방은 먹물을 뿌린
듯이 깜깜하였다. 축축한 소금기와 시퍼런 파래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엄습한
순간, 눈앞에서 작은 반딧불 빛이 깜빡였다.
흠칫하여 다가들던 명기남이 반딧불이 반원을 그으며 난다 싶은 순간에 덜퍽
엎어지고 말았다.
담뱃불이었다.
다리를 대각선으로 꺾고 앉아 담배를 뻐끔거리던 혁인이
그것을 던져 버림과 동시에 미행자의 다리를 걷어찼던 것이다.
“비겁한 인간.......... 정면 대결 하자고.”
퍼포먼스처럼(6)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명기남의 허벅지에서 피가 흘렀다. 넘어지면서 둥글넙적하게 생긴 자기
재단칼에 당한 것이었다. 미행자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그 얼굴을 확인한
혁인이 머리를 꾸벅였다.
곧장 난투극이 벌어졌다.
치고받는 사이에 차츰 굴 밖으로 밀려나자 주먹들이 활기를 더해갔다.
어디선가 번갯살이 스치는가 싶더니 뒤미처 천둥이 울었다.
따그락 따그락 자갈 무너지는 소리도,
자갈을 때리고는 일없이 솟구쳐 올라 허공을 난사하는 파도의 아우성도,
모두가 똘똘 뭉쳐 내리치는 빗발을 잡아 째는 것만 같았다.
빗살을 가르는 사내의 주먹에 번번이 나가떨어지면서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곤 하던 그는 다시 독수리 날갯죽지 안으로 떠밀렸다.
그리고 쿡 처박힌 채로 불쑥 손을 들어올렸다.
“말로 하자, 말로..........”
명기남이 목을 꺾고 반쯤 드러누운 벽의 옆자리에 지혁인도 기대앉았다.
그리고는 뜯어진 외투를 벗어 한 바퀴 말아 휙 던져버렸다.
“이유가 뭐요?”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고 질겅질겅 씹는 혁인의 턱 바로
밑에다가 명기남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한 대 주지..........”
혁인은 대꾸 없이 담배를 건네고는 침착하게 라이터를 켰다.
그리고 명기남의 코앞에다 먼저 불을 들이대자, 미행자의 얼굴이 빨긋
빛났다가는 다시 어둠에 묻혔다.
명기남의 상처는 연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번들거리며 나타났다가
연기를 내뿜을 때는 다시 침침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불이 채 붙지 않은 담배를 아예 뱉어버린 혁인이 자갈 하나를 집어 허공으로
던졌다. 그 자갈이 다른 돌에 가서 맞는 소리가 딱! 하고 들리자, 혁인은
마치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했다.
“왜 이러는 거요? 나랑 무슨 원수 졌소? 혹시, 거머리 띠요?”
그러자 명기남이 코웃음 쳤다.
“네녀석이 바로 거머린기라. 거머리 중에서도 찰거머리!”
혁인이 침울한 웃음을 빗줄기에 실었다.
“찰거머리고 뭐고, 뒤 밟은 이유나 압시다. 날 죽일 작정이요?”
명기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 쥑이뿔끼다.”
명기남은 뻗었던 다리를 끌어당기고는 등덜미를 밀어 올려 지혁인과
비슷한 높이로 목을 뻗쳐 올렸다.
키 차이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상어밥이 되기 싫으면 수단껏 그 상어보다 몸을 길게 보이라고 했던가...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베인 자리가 알알했다.
“솔직하이 불거라. 어데다가 살림을 차렸드노?
이중생활 하는 거로 내 다 안다. 좋게 말할 때 고분고분 불란 말이다.
안 그라모, 둘이 다 경찰에 처넣고 맞대질 시킬끼다.”
혁인이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고는 재깍 불을 붙였다.
“대체 누구랑 말이요?”
“시치미 떼지마라. 둘이 딱 붙어 가 서울 가는 거로 내 두 눈이 똑똑히
목격했단 말다. 제 아비 제사 지내러 간담서 외간 남자는 와 달고 갔겄노
이말이다.”
"..................."
“여학생 몇이 달고 가모 완전범죄가 되는 중 알았겄지만은, 택도 음따!
내 눈은 몬 속인다. 알겄나? 이쯤 말할 때 고백하모 살리 줄 용의가 있다.
아싸리 탁 깨어놓고 하는 말이지만도,
서방을 지 발꿈치 때만큼도 안 여기는 그년을 고마마,
니한테 던져 줄 용의도 있다 그말이다.”
다 타지도 않은 담배를 또 그냥 던져 버린 혁인이 히죽 웃었다.
“여자를 물건으로 아시는 군. 형씨가 여자를 물건으로 아는 동안까지는
절대로 사랑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치를 모르는 거요?”
명기남이 되받았다.
“그래서, 너는 여자를 여자로 알아서 사랑을 얻어냈단 말가?”
그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불끈 주었다.
이제 몸을 트는 것과 동시에 연적의 급소에다 푹 찔러 박으면
만사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까지 악물었다.
미행자가 질기디 질긴 미움을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지끼봐라... 둘이, 사랑하나?”
혁인은 울고 싶었다.
그래, 전생에서부터야. 우린 서로를 목숨처럼 사랑해-
그는 꿈결인 것처럼 속삭였다.
“사랑해..........”
그와 동시였다. 그의 복부에 칼이 들어간 것은.
하지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숨을 억지로 몰아쉬면서도 오직 그 한 마디만을 힘겹게, 되풀이해서
끄집어낼 뿐이었다.
온 내장을 다 쥐어짜서 만들어낼 뿐이었다.
“사.......... 라앙.......... 해에..........”
“곧 죽어도 이 새끼가!”
살인자는 펄펄 날뛰었다.
그는 일박이일 동안 갈아붙인 자기의 재단 칼로 사내의 등을, 다리를,
가릴 것 없이 마구 찔러대었다.
피살자의 억억거림에, 튀어나오는 핏줄기에,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허공을 좍 그었다. 그리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왓! 몽조리 쥑이삐끼닷! 어느 시러배 놈이고, 나오란 말다아!”
바다는 여전히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사월 밤의 시린 빗줄기가 자갈 위에 낭자한 핏물을 끊임없이 씻어 내렸고,
파도는 갑자기 솟구쳐 올랐다가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아직도 굵은 빗줄기를
허위허위 끌어당기더니 기어이 거품을 문 채 자갈밭 위를 뒹굴며 잦아들었다.
피살자도 복부를 틀어막으며 자갈밭 위에 꺼꾸러졌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문
채나마 중얼거렸다. 사랑이라고.
주영숙 시선집☆참았습니다 그리워도 그리워도☆에서한계령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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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처럼(7)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이사 갈 거야.”
그녀의 차가운 선언에 혁인은 생뚱한 질문을 끄집어냈다.
“도대체, 끝이라는 엔드야, 그리고라는 엔드야?”
“디 엔드라구, 끝이라 그말이지.......... 꿈 깨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걸?”
완전히 죽지 않는 한 끊어지지 않을 관계.......... 그랬다.
너는 마땅히 죽었어야 끊어졌을 게다.
차미혜와는 신기하게도 혈액형이 같은 사내. 그래서 신속하게 살릴 수가
있었던 사내 지혁인.
피살자는 살인자의 아내에게서 다량의 피를 보충받아 죽음의 위기를 벗어났던
것이다. 이를테면, 차미혜는 사내의 비워진 핏줄을 채움으로서 그 속에 들어가
버렸고, 그래서 사실은 사내와의 관계가 시작된 셈이었다.
하지만 사내를 구하는 일이나 남편을 도피시키는 일이나 다 불가피했다.
남편이 제발 죽어줬으면 하고 내심 바라던 그녀였지만,
정화수 떠놓고 백일기도를 하는 것으로 남편이 죽어준다면 정말 그리했을
터였지만, 그랬지만, 그 남편이 죽기는커녕 되레 살인자가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어 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해서 남편이 좋아하는 미쓰염까지 대동시키고 한 밑천 집어주기까지 하여
부랴부랴 도피라는 명목으로 남편을 떼어냈던 셈이다.
그랬는데도, 어처구니없게도, 명기남은 겨우 2년 후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되돌아왔었다. 자기가 살해했던 지혁인이 실상은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은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서울로 가자고 하며 이삿짐을 쌌다.
2년간이나 비었던 자기 자리에 그 사내가 본격적으로 들어앉았을 거라는,
충분히 근거 있는 추측을 하면서도 그 불안감은 차마 발설을 못하고 도무지
안절부절못했던 것이다.
이사를 하자, 가서 새 마음으로 살자, 하는 것이 그녀를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명기남의 일방적인 소원이었고, 그녀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덮어쓴 그 지독한
외로움과 죽을 때까지 투쟁해야 되는 자기 운명을 절감해야 했다.
하지만, 2년간의 일회성 퍼포먼스들은 도저히,
단숨에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매번 일장춘몽이었다고 못을 박아온 그 행위는 바로 그녀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부르튼 입술에 담배를 물리는 애인을 측은히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자기 속에 들어있는 양면성을 비웃었다.
사실, 끝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라.
이 카페 이름은 아마, 그리고 가 맞는지도 모르지..........
삼십 중반의 한창 나이의 숱 많은 머리칼을 보면서 그녀는 서글픔을 깨물었다.
쉽사리 사그라질 수 없는 청죽 색깔의 슬픔이 그의 머리칼에서 발긋발긋
일렁였고, 독한, 지독한 인연의 일루전이 언뜻 그의 반듯한 이마를 스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너를 끊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인간의 손에서 너를 살려?
“암튼, 내가 어느 날 영락없는 아지마시 꼴이 되어 있음, 그 땐 정말 끝난
거라고 생각해도 돼. 당신한테서 맘이 떠난 거라구, 그렇게 믿고 날아가도
무방하겠음.”
뼈 삭은 빛으로 돌변하는 피부를 감추기 위해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가 투정을
부렸다.
“젠장, 나도 당신 곁으로 이사 갈란다.”
그녀도 피식 웃었다.
“어린애처럼.......... 미안하지만, 이번엔 안 될걸?”
“왜? 시골이라서? 금방 들킬까 싶어서?”
“괜히 그러지 마. 우리가 운명이라면 싫어도 만나 질 거야.”
“운명?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이 운명이 아니라고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도대체, 내가 당신하고 떨어져서 얼마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이슬이 맺히고 있는 애인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럼 어떡해? 도망이라도 칠까?”
그랬다, 도망이었다. 도망칠 절호의 기회가 있긴 했었다. 그 좋은 기회에
도망을 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그녀는 일순 후회했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혁인이 시도 때도 없이 보챘던 것이다.
멀리 가서 딸 하나 키우면서 살자고 말이다.
같은 생각을 했던지 그가 대뜸 툴툴거렸다.
“옛날에 도망치자니까 내말을 죽어라고 안 듣더니.......... 그 대답을 이제서
하노? 그래, 안 늦었다. 도망치자.”
그녀는 세 시간 전에 이 남자와 관람했던 그림이 떠올랐다.
“거꾸로 처박힌 여자 말이야.”
“아하, 신 표현주읜가 뭔가 그거?”
◈난정주영숙의 동양자수▣
퍼포먼스처럼(8)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그 작품은 감상자로 하여금 이가 득득 갈리는 분노까지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혁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하필 그거야? 차라리 그 한국인 그림이 나아. 허공에다 빨래 널어놓고
그 빨래의 윗쪽에 달 하나도 놓고 아주 구체적인 사다리를 빨래에다 턱하니
걸친 그거 말야..........”
“그래, 그거야. 그런 비현실적인 구상화.......... 그게 바로 우리 관계였어.
그러니까 말야. 그런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되면 바로 ‘그 여자’처럼 거꾸로
매달리게 된단 말야.”
혁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래, 독일로 가자. 당신 알지? 우리 삼촌이 거기에 터 잡고 있는 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안돼. 내 아들을 버릴 수는 없어. 난, 너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아들에게
도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그 인간에게도?”
그럼, 나는 그들에게 완벽하기 위하여 널 붙잡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너를 놓아 줄 거야. 그래야 네가 살아.
“난, 당신 없이는.......... 하루도 내 목숨을 지탱할 수가 없어.”
몸을 탁 치고 들어와 저릿저릿하게 헤엄치는 전율을 꽉 붙들어 누른 채 그녀
가 발끈 핏대를 올렸다.
“죽겠다는 거야 뭐야? 언제 죽을 건데?”
카운터에 계산을 치른 그녀는 쪽지를 한 장 얻어 몇 자 긁적인 다음에 뒤따라
나온 애인에게 내밀었다.
“자아, 약속 어음.”
혁인은 그녀가 계단을 다 올라갔을 때쯤 쪽지를 펼쳤다.
“푸핫! 끝이라는 엔드가 아니고 그리고라는 엔드라 이말이지?”
“되게 맛있다. 퍼뜩 묵어 봐!”
차미혜는 창 밖의 풍경에 흠뻑 빠진 척하고 있지만 실상은
느닷없이 밀려드는 외로움에 질식하기 일보직전이다. 항상 그랬다.
그녀의 외로움은 남편 명기남과 음식점에 앉을 때면 더욱 처연하였다.
관광지에 와서까지도 여자의 취향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기호식품 순대국밥을
찾는 인간 때문에, 아예 냄새조차 맡기가 싫은 것을 남편과 세트로 앉아
꾸역꾸역 먹어줘야만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걸로 쳐서 받는 처지가 너무 비참하여
죽고 싶을 지경까지로 이어진다. 미적미적하다간 오소리감투를 우적우적 씹던
저 입에서 ‘안 처 묵나’가 거리낌 없이 퉁겨올 것이 또 새삼스레 억울해진다.
이 남자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니까 그런 상스러운 소리를 취미삼아 퍼부으며
행복하기 그지없을 테지만 나는 아니지 않은가.
정말이지, 당신 없는 삶을 단 하루만이라도 만끽하고 싶다.......
그녀는 순댓국에 밥을 털어 넣어 휘휘 저어두고서 깍두기를 먼저 입에 머금었다.
시큼 매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눈살을 찡그리다 말고 와싹 깨물어버린다.
다시 창밖을 본다.
골짜기 전체가 단풍이 들어 활활 타며 안달복달하는 것이,
마치 폐경기를 앞둔 여자의 가슴 같다.
밑져야 본전이지.
그녀는 식당을 나서자마자 운전대부터 잡는 남편을 유혹한다.
“이 동네서 자고 갑시다. 그냥 가기엔 단풍이 끝내주잖아?”
“그라자.”
왠지 흔쾌한 대답이다.
“우리, 호텔 잡을까?”
“여자가 간도 크다? 호텔이 얼마나 비싼중 아나?”
애당초에 민박집을 정하려던 그녀였다.
게다가 어떤 일에나 여자 주장대로 했다가는 남자의 채신머리가 땅에
떨어진다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를 용이하게 움직이려면 항상 이래야 했다.
청개구리 어미가 새끼 청개구리한테 산에 묻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냇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듯이.
아내가 호텔을 발견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민박집을 정해야 한다는 듯이
남편이 무턱대고 골목 입구에다 차를 세운다. 마침 민박집이 있긴 하다.
“저 집이 깨끗해 보인다. 봐라, 감나무도 있고, 경치가 그저 그만이다 아이가.
그라고, 한적해서 좋구마!”
일쑤 저런 식이다. 돈이라는 것을 벌어서 쓰자는 게 아니라 무조건 아끼면
그게 돈 버는 거라는 주의가 새삼스럽게 갑갑증난다.
하여간에 무드 없기는.......
“잔소리 하지 말고 소주나 한 병 사온나. 피곤해서 죽겄다. 묵고 푹 자야재.
그래야 내일 아침부터 단풍놀인강 뭔강 하는 보국대 짓을 제대로 하재.”
그녀는 단풍놀이조차 아내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남편이 민박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힐끗 확인하였다. 그리고 청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찌른 채
민박집을 한 골목 돌아 나오는 곳의 구멍가게로 발길을 돌렸다.
“참이슬 한 병 주세요. 안주는 햄으로 하구......... 얼마죠? 아참, 화장실은
어딥니까?”
“저기 뒷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그건 두고 가시죠.”
“아뇨, 건망증이 심해서요.”
차미혜는 소주와 햄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마치 핸드백처럼 오른팔에 걸고
유유히 매점 뒷문을 밀었다.
아직도 푸세식?
냄새가 온몸을 채색하는 변소 간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바지 주머니에서 왼손을 뺀 그녀. 손끝이 사각의 작은 약봉지 같은 것을 잡고
있다.
이윽고 봉숭아물들인 손가락이 소주병 마개를 돌려 땄다.
투명한 액체 속에 자맥질하면서, 가루약은 마치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이
사그라졌다. 검은 에테르, 저 벼랑 아래로 휘휘 날갯짓하며 추락하는 약봉지
끝자락에 실낱같은 한숨도 끈적끈적 붙어갔다.
다시 매점 앞문으로 나간 그녀는 민박집 앞에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는 남편의 모습을 잡았다. 흥정을 끝냈다는 뜻이다.
그녀는 논개가 왜장에게 보냈다는 추파를 만들어 써먹는 김에 야밤주행을
하지 않았다는 대단한 인내심까지 칭찬하며 냉큼 남편 위에 올라탔다.
“잡년....... 화냥년....... 그놈한테 하던 짓이가?”
이 남자, 갑작스런 여자의 행위에 소스라치고 눈부셔하면서도 별의별 구실을
내세워 기어코 깔린 몸을 뒤집어 일으킨다.
그리고 익숙한 버릇대로 여자를 차렷 자세로 눕히고는 작업을 시작한다.
가을바람에 시시각각 부대끼면서도 떨어지기 직전까지는 결코 그 색깔을
놓치지 않는 단풍잎 같은 섹스를 바쳐 주리라던 열정이 무서리를 맞은 셈이다.
해서 여자는 늘 하던 그 자세,
즉,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감지 말 것.
남자가 숨이 막힐 우려가 있을 것이므로 그를 부둥켜안지도 말 것.
똑바로 누워 다리만 벌리고 있을 것. 등을 착실히 지킨다.
남자가 여자의 질 속을 시답잖게 들락거릴 동안
여자는 내내 숨겨둔 애인이나 떠올리는 것도 뻔한 순서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자기 애인을 떠올리고서야 이 남자를 참아내는 것이다.
매번 여자에게 기꺼이 먹혀주며 한 덩어리로 활활 타오르곤 하던
소중한 애인이 보고 싶다.
하지만, 아직도 승용차 서랍에 숨겨져 있는 재단 칼이 그녀의 머릿속을
휘적거린다.
너무나 사랑하고픈 애인이 난도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간이 그 칼을 간수하고 있는 한은 끝을 보고야 말리라는 예감이
여자의 온몸을 모종의 결의로 똘똘 경직시킨다.
재단칼을 사흘걸이로 번쩍번쩍하게 갈아서는 신주단지 모시듯이 융으로
싸 놓곤 하는 장본인이 드디어 희열의 숨을 내뿜으며 저 혼자 잦아든다.
그리고 한참 후엔 개선장군의 표정으로 되살아나서 술을 찾는다.
당당히, 너무도 당당히.
“야이 화냥년아, 남자 정기를 홀랑 빼 묵었이모, 영양보충을 해줘야 할 거
아이가? 햄도 사왔나?”
저 따위 욕설을 농지거리라고 하고 있는 남자가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여자는 한껏 곰살궂게 감겨들면서 사뭇 태연스레 말한다.
“거기 있잖아요? 종이컵도 있어 거기.”
주영숙 시선집☆참았습니다 그리워도 그리워도☆에서해는 숨을 거둔 게 아니다
해는 숨을 거둔 게 아니다
사람들은 길 따라 집으로 가고
나의 길은 나를 불러내어
등 떠밀어낸다
파래에 물들어 부르르 떨어대던 해풍
저마다 막다른 길로 가버리고
꼬불꼬불 뒤안길
햇무리 너머 허공으로 사라지고
절절했던 그 마음 전하지도 못한 나는
저승 가야 널 본단 현실에
오도 가도 못하고
절벽은 발아래 있고
해는 먼저 물밑에 자맥질했다
그러나 저 해는 숨을 거둔 게 아니다
달아오른 가슴을 잠시 식힐 뿐
사람들은 길 따라 집으로 가고
나의 길은 나를 불러내어
등 떠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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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처럼(9-마지막 회)
주영숙, 드디어 거친 붓질을 시작하였다
파격적이고 거친 언어가 뜬금없는 수묵향을 풍기며 엄습하는,
이것이 바로 주영숙의 작가적 특성이다.
봉숭아 붉은 빛깔이 아직도 남아 있네.........
차미혜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뚝 멈춰 내렸다.
며칠 치의 신문이 한꺼번에 와있는 것이었는데, 그 여러 장 중의
한 면이 눈에 띈 것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흔들리고 있던,
아직도 청청하게 살아 파들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신문의 작은 박스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찍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인쇄체가 아닌, 낙서처럼 생긴 피사체였다.
바로 그녀 자신의.
오늘 커피 값은 2002년 12월 29일 오전 11시에 and에서
귀걸이로 받겠음?
2002년 말경에 찍었기가 십상인 2003년 1월1일자 신문이다.
쪽지 글 옆에는 이 문서의 주인을 찾습니다, 라는 단 한 줄의 인쇄체가
전화번호와 함께 붙어 있다.
그녀는 새삼스레 달력을 보았다. 2003년 1월 5일이었다.
그래, 이 엔디가 아니고 에이 엔 디야.
그녀는 지혁인의 음성사서함에다 자신의 음성과 전화번호를 입력시켰다.
“아직 안 죽었네?”
곧바로 음성메시지 회신이 왔다.
“그날, 안 나오셔서 실망했소. 하지만 아주 잘 하셨어!
그 귀걸이를 그녀에게 선물했으니.......... 아참, 이달 십일일에 결혼하요.
또다시 일장춘몽이 된다고 해도 할 수 없소.
인생은 어차피 일장춘몽이라고, 일찌감치 가르침을 받은 터라
면역이 생겼능기라. 그럼, 내세에 환생해서 다시 시작해 봅시다.”
“그래, 너는 살았구나. 이제부턴 마음 놓고 살겠구나.”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지나고 겨울에 들고서도,
그리고 첫눈이 오고서도 한참을 더 견디고 있던 봉숭아물은 이제,
절벽 끄트머리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기어이 추락하고야 말리라는 예감에
몸부림치던 단풍잎과도 같은 그런 빛깔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은 지독한 슬픔이야.
차미혜는 112를 눌렀다.
“지난가을 살인 사건의 범인인데요.......... 내장산 근처 민박집 사건
말이에요, 그것 말구, 벌거벗은 채 거꾸로 매달린 남자.......... 예,
그렇다니까요?”
그녀의 눈이 점차 초점을 잃어간다.
“거기를 도려낸.......... 흐흐흐....... 맞심당, 공범? 웃기고 계시네,
혼자 한 거라니까..........”
그녀는 전화기를 놓으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공동제작 같은 건 절대로 안 한다고요..........”
‘세계미술용어사전’에 기록된 ‘신표현주의’를 일부분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신표현주의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아 온 토양인 개념미술 형식에서
등을 돌린 후 이젤에 그림을 그리고, 주형을 뜨거나 손으로 깎아 조각을
만드는 전통적인 미술제작 방식을 선택했다. 또한 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에서 영감을 찾은 반면에 미니멀리즘의 절제와 개념미술의
냉정함을 버렸다. 그리고 알레고리나 제스처 적인 물감처리와 같이 이전에
금기시되던 수단을 통해 격렬한 감정을 표현했다.
신표현주의는 널리 확산되었고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며 또 세대교체를 상징한다.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