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털 돼지'라는 이름의 동물을 아는가? 녀석들은 온몸이 가시처럼 억센 털로 뒤덮여 있고 무리를 지어 산다. 녀석들의 약점은 추위에 몹시 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서로 몸을 부비며 추위를 잠재우려 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가시털이 서로를 찔러대는 통에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또 떨어져 있게 된다. 한참을 떨어져 있다 보면 뼈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오히려 가시털의 아픔보다 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또 엉겨붙어 비벼댄다. 추위를 녹여줄 상대를 찾아 비비고, 아파서 떨어지고…. 이렇게 그들은 살다가 죽는다. 죽을 때까지 그러고 산다. 쇼펜하우어의 우화집 어디에선가 나오는 이야기다. 가시털 돼지만 생각하면 나는 속으로 한숨짓게 된다. 우리의 모듬살이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할 요량으로 잠시 가시털 돼지를 차용했던 것이다. 그렇다. 외로움은 추위처럼 온다. 술과 추위를 이겨낼 장사가 없듯 실존적 고독을 이겨낼 권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포 한 장 달랑 뒤집어쓴 채 바람부는 동토 위에 홀로 서 있어야 할 운명 앞에서 모든 인간은 속절없이 서로를 찾아 나선다. 비벼보기 위해서다. 비비면 좀 나을까 해서 가정도 만들고 사회도 꾸리고 조직도 결성한다. 그러나 보라, 사람 모인 곳에 이기심과 탐욕이 없었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집착과 질투, 증오와 적개심, 편가르기와 암투, 자기 것 챙기기와 남의 것 빼앗기가 없었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모두들 날카롭고 무서운 자기만의 가시털 속에 육신을 은닉하고 있는데, 그 몸으로 서로를 비빈다고 외로움이 가셔지겠는가?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자기 손으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가시털을 뽑은 다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속살로 이웃의 언 몸을 녹여 주든지, 그게 싫으면 평생을 홀로 빈 들판에 서서 삭풍을 감당할 용기를 지니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인간사회는 가시털로 인한 상채기를 최소화시켜 보려고 온갖 메커니즘을 고안해 내기도 했지만, 그것의 효용은 언제나 제한적이었다. 제도를 만들고 움직이는 것 또한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날이 아직 춥다. 또 비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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