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로 산다는 것은/문보근
나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에는 반지꽃같이
앙증맞게 자라고 싶었고
소녀시절에는 첫눈같이
설렘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결혼해선 신사임당같이
현모양처로 살고 싶었고
늘그막엔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지고 싶었습니다
옛일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면서
이렇게는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외할아버지라면 신주 모시듯 했던
외할머니처럼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자식이라면 애지중지 했던
친정 엄마처럼
남편 옷을 장만할 때
내 옷도 사고
자식 신발 마련 할 때
내 신발도 사고
남편이 친구 만나러 다닐 때
나도 모임에 나가고
자식이 투정을 부릴 때
나도 하소연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아아 그런데
난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외할머니같이
친정 엄마 같이
나는 살고 말았습니다
여자로 태어나 고상하게 살고 싶었지만
논개같이 당차게
양귀비같이 아름답게
학처럼, 연꽃처럼
청순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었지만...
여자로 산다는 것은
원하는 데로 살 수가 없는 건가요?
여자가 아내로 되는 순간
이런 여자로 변했습니다
이쁘지 않은 나를 어여쁘게 보아주고
아내로 맞이해 준 남편이 고마워
그런 남편에게 보탬이 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다 해온 나,
못난 이 어미를 엄마라고 불러주며
무럭무럭 커가는 자식들이 기특하고 대견해
살을 에이는 듯한 어떤 역경도 이겨왔던 나
그렇게 숨 가쁘게 살다 보니
우아하게 살고 싶었던 옛 꿈들이 여지없이
깨어져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이
여자의 인생인가요?
온실 화초처럼 자라왔기에
하는 일마다 굼뜨고 어설프지만
때론 친정아버지처럼
때론 어릴 적 친구들같이
부족한 것은 채우고
구멍 난 곳은 때우고
흉거리는 덮어가며 살아준 남편이기에
아내는 초인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가족은 여자에겐 늪과 같은 것,
어느 날 문득
주름진 내 모습을 거울에서 비출 때
어느새 늙어버린 내 인생이 불쌍하고
억울하단 생각이 들어서
이제는 남편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나도 내 존재를 찾아 살아야 한다고
굳은 마음으로 거리로 나섰지만,
이쯤이면 남편곁을 멀리 떠나왔다고
내 깐에는 자신했는데
어느새 남편 마음에 빠져있는 연약한
나를 나는 봅니다
이쁜 자식이라 하더라도
어떤 때는 꼴도 보기 싫은 날도 있었습니다
이유 없이 그런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엔
자식들이 어떻게 되든 다 내 팽개치고
어미라는 무게도 벗어던지고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미는 그럴 수는 없는 것인가요,
큰 마음먹고 나선 길인데
멀리도 못 가고 어린이 옷가게에서
자식의 옷을 고르고 있는 나를 나는 봅니다
아내들은 다 압니다
아내란 남편이 밉다가도 눈에 안 보이면
금방 외로워지는 것이
아내의 마음이란 것을요,
허구 한 날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이
밉다가도 어쩌다 일찍이 귀가하는 날이면
어디가 아픈가, 하는 걱정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이 아내란 것을요,
무겁게 걸었던 어제의 길,
그 길을 오늘 또다시 걸어가게 될지라도
어제를 잊어버리고 오늘을 산뜻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내의 삶,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나
시계 추처럼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남편의 고단한 직장살이,
그래서 아내는 우는 방이 두 개가 있다 합니다
하나는 자식들을 향해
또 하나는 남편을 향하여...
부부는 연리지 나무,
남편의 신음소리는 아내의 것이 되어야 하고
아내의 눈물은 남편의 눈물이 되어야 하는,
기쁜 일 엔 함께 웃고
슬픈 일 엔 함께 우는
아내로 산다는 것은
가족이란 늪에서 연꽃으로 피는 삶인가요?
아내로 산다는 것은.....
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허리케인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