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주는 삶을 위해
꿈을 먹고 자라나는 애벌레가 있었어요.
그 애벌레는 늘 일어나서 먹고 놀다가 자고... 하는 단조로움이 싫었답니다. 그래서 왜 일어나고, 먹고, 자는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스스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자 남에게 묻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모르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의문을 풀 수 있는 길이 어디엔가 있을 것 같아 길을 떠났답니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수많은 벌레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댔지만 그들도 역시 고개를 모로 젓는 이들만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줄무늬 애벌레를 만났는데 묘하게도 마치 오래전에 만났던 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한갖진 곳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틀고 재미있게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인가부터 서로가 나의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대요. 그러자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어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겠죠 그래서 서로 헤어지기로 하고 애벌레는 잊었던 목표점을 찾아 길을 떠났답니다.
가다가 만난 이들도 예전에 만났던 이들처럼 모르기는 매일반이었어요. 그래도 계속 가다보니 어디선가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머리 위를 맴도는 것 이예요. 어쩐지 본듯한 얼굴 이여서 자세히 보니 바로 그 애벌레가 변해서 나비가 되어 날아온 것 이예요. 그 나비가 이끄는 대로 나무위로 기어올라가 거꾸로 매달려 실을 뽑아 내어 자신을 감싸않는 고치를 만들고 무섭고 캄캄한 나날들을 기다렸어요.
햇빛이 따뜻하게 내려 쬐던 어느 날, 그도 껍질을 벗고 손발을 움직이니 예쁜 날개를 단 나비가 되어 있었지요. 그들은 너무나도 기쁘고 반가운 나머지 두 손을 맞잡고 멀리멀리 산 넘고 물 건너까지 날아올랐답니다. 그리고 수많은 꽃들이 힘차게 웃음 짓고 있는 벌판으로 날아가 이 꽃 저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맛있게 꿀을 빨아먹었어요. 그리고, 드디어 알게 되었답니다. 애벌레가 앞으로 가는 것도 애벌레가 되기 위한 것이었고 나비가 되는 것은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끝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어디선가 많이 본 내용의 글이지요? 트리나포올러스 라는 작가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소설의 줄거리예요. 분도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아주 오래 전에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지요.
애벌레가 살아가는 의미를 알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은 이를테면 인생을 살아가거나 출가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죠. 길을 가면서 다른 이에게 물어도 정답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은 삶의 의미라거나 깨달음 같은 것은 누가 알려주어서 알 수는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서로가 만나서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는 싫어졌다는 것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유욕을 채웠을 뿐이라는 것이겠지요.
나중에 나비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건 인생을 달관한 목표를 이룩했다는 뜻일 거예요. 그게 바로 희망을 주는 일 이예요. 누구에게? 모든 이들, 불교말로 중생이라 할 수 있는 꽃들에게, 무슨 희망이냐고요? 그야 꽃을 피울 수 있다는 희망, 즉 씨앗들은 열매를 말하는 거예요. 이 씨앗은 누구나 훌륭한 사람, 깨달은 사람(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지요.
또 중요한 것은 꽃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꿀을 빨아먹는 중에 뒷다리에 달린 털로는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의 대궁이에 묻혀주는 수분까지 해준다는 사실 이예요. 나비가 꿀만 빨아먹고 수분은 안 한다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욕심쟁이가 되는 것이죠. 거꾸로 수분만 해주고 꿀을 먹지 못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이 버틸 수 없게되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자기도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고 남도 부처님이 되게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