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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티베리우스 황제의 장모.
대 아그리피나: 티베리우스 황제의 양머느리
칼리쿨라:클라우디스 황제의 조카.
헤로데 안티파스: 자신의 이복형제의 아내이자 질녀인 헤로디아와 결혼.
율리와와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을 무렵 율리아의 간통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자 트베리우스는 군단 사령관(5년 임기)에 임명된 상태였는데도 모든 공직을 내놓고 로도스 섬으로 떠나 버린다. 그곳에 있는 동안 티베리우스는 점점 외골수에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남녀를 불문하고 마음에 드는 어린 노예들이 눈에 띄면 외딴 곳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손길을 뻗친다는 황제(티베리우스)의 추잡한 소문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Avilius Flaccus):이집트 통치자. 티베리우스의 친구.
티베리우스 황제가 오만하고 불쾌한 사람이었다는 인식이 형성된 이유는 어느 정도 2세기에 활동한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노티우스의 평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초기 역사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디오 카시우스 여시 카프리 섬에서 머물던 티베리우스 황제를 불쾌한 인물로 평가했다.
2세기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나쁘게 묘사한 이유는 이 세 역사가가 황제의 모습을 끊임없이술을 마시고 변덕을 부렸던 카프리 섬에서의 말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사적인 삶을 공적인 삶과 철저하게 분리하여 비밀을 감췄다.
카이사레아 군대에 주둔한 병사들 중에 상당히 많은 수가 미트라교(조로아스터교 이전에 이란 지역에서 태양 정의 계약 전쟁의 신인 미트라를 숭배하는 종교)에 열괄하고 있었다. 당시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미트라교는 정기적으로 종교 모임을 갖고 있었다. 로마 사람들은 축일 때도 정해진 시간에 모이지 않고 그제 제물을 마칠 때에만 신전을 찾았었다.
카리사레아에는 카르멜 산 입구에 있는 지하수에서 퍼 올린 물을 실어 나르는 수로도 두 개 있다. 1패덤:1.98미터
로마 행정관의 부임 때문에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의 권한과 관할 영토는 갈릴리와 페레아(Perea)로 축소된다. 안티파스는 왕이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못했다. 사실 안티파스는 로마 하급 통치자라고 할 수 있는 테트라크(tetrach, 한 주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영주)였다. 서기 33년, 필라테는 사마리아와 에돔, 예루살렘에서 열린 순회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몇 차례나 카이사레아를 떠났다. 이는 서기 33년 초봄에 필라테가 군대를 이끌고 유월절 축제가 한창 벌어지는 있는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의 당시 실거주자는 6만에서 12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하지고 있지만, 중요한 축제가 벌어지는 기간에는 그 두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때에 따라서는 순레자들의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설 때도 있었다.
서기 32년 열린 갈릴리에 유월절 축제에 일어난 유혈사태는 필라테의 머리를 꽤나 아프게 했고 이로 인해 이 지방을 다스릴 책임을 맡고 있던 안티파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서기 26년,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필라테는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이에 대해 기록하기를 '필라테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진 군기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는데 신앙심이 깊은 우대인들이 이를 보고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고 했다.결국
오래 카이사레아에서 대중의 반대에 맞서던 피라테는 결국 군기를 거두어야 했다.
요세푸스는, 도시의 수로를 건설하기 위해서 성전에 바친 제물인 고르반(corban, 우대인이 소원성취의 답례로 신에게 바치던 제물)을 필라테가 사용햇다는 사실을 알게된 유대인 투사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이 사건으로 성난 군중들과 로마군 사이에 소요 사태가 벌어졌는데 군중들이 곤봉과 단검을 들거 넘벼들었다고 나오는데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서기 32년 초막절(9월 말에서10월 초) 축제 때에
기원전 21년에 태어난 안티파스가 제일 처음 시작한 공사는 갈릴리에 있는 세포리스(Sepphoris, 현재의 지포리)를 재건한 일이다.
헤로데 대왕이 죽고 나서 로마군은 반란을일으킨 세포리스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곳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당시 급진적인 반란군의 주도자였던 유대(Judas)가 궁전에 있던 무기를 모두 추종자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세로피스는 반란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대왕의 유언을 심사하기 위해 로마로 불려갔다가 갈리로 돌아온 직후 세포리스의 재건을 시작하였다. 서기 8년에서 10년 사이에 재건을 마친것으로 보인다.
나사렛은 세포리스에서 남서남쪽으로 6.4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세포리스는 외적인 뿐 아니라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안티파스는 세포리스에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아닌 로마식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애섰다. 실제로도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계속된 유대 전쟁 때 세포리스는 로마의 편을 들었다.
안티파스가 두 번째로 추진한 대규모 공사는 로마 세계에서 극진한 존경을 받고 있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였던 리비아의 이름을 본떠 만든 리비아스의 건설 이다. 리비우스가 공식적으로 완공됐다고 발표된 연도는 서기 13년이지만 실제 완공은 그 전이라고 추정된다.그녀의 다른 이름인 율리아를 본떠 율리아스라고도 불렸던 이 도시는, 현재 요른단의 텔레르 라메 이다.
안티파스가 세 번째로 진행한 엄청난 공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축공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때 세운 티베리아스를 안티파스 자신이 수도로 삼았으며, 이 도시는 유대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의 폴리스를 본떠 지방 자치제를 제일 처음으로 시행한 도시였다. 갈릴리 호수의 서쪽 호숫가에서 시작되는 티베리아스는 물을 쉽게 끌어올릴수 있던 언덕에 자리 잡고 있고 페레아와 갈릴리의 중간 부근에 있었기에 교통도 편리했다. 또한 시리아와 이집트로 가는 길도 수월하여 북남부의 중요한 무역 도시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었다. 남쪽에는 안티파스가 좋아하는 암마투스 온천도 있었다. 티베리아스가 완공된 시기는 23년 이라고 본다.
도시를 건설하면서 싵앙심이 돈독한 유대인들이 그 장소를 불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공동묘지 건설을 금지했기 때무에 티베리아스에 주민들을 유치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안티파스는 차선책으로 도시 외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티베리아스로 이주시켰고, 티베리아스에 거주한다는 조건으로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다양한 사람들로 도시민들을 구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갈릴리 원주민들이었다. 이들 갈릴리 사람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도입하려는 안티파스의 의도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반자치적인 성격을 띤 정부를 중심으로 둔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 의회는 도시의 주요 유지들이 모두 참석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다. 티베리아스에서는 주조 시기가 적힌 동전을 자체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 양식의 도시였던 주변 지역에는 그들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안티파스의 통치 아래 그 도시에 살고 있던 고위 관부들이 관할하는 지방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안티파스의 측근으로는 궁전의 가사를 관리했던 쿠자와 예수의 제자이자 예수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그의 아내 요안나가 있다. 예수와 제자들은 안티파스와 측근들에 관한 소식을 요안나와 안티파스의 친구이자 수양형제이며 역시 예수를 잘 알고 있던 마나엔(Manaen)을 통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페레아의 사막에서 활동했다. 요한이 처형된 시기는 서기 31년에서 32년 사이로 추정된다. 요한은 사해 옆에 있는 안티파스의 군사 기지 마케루스에서 분잡힌 후 처형된다.
요세푸스는 요한의 죽음을 다룬 장에서 안티파스의 두 번째 결혼이 아라비아의 왕 아레타(Aretas)와 전쟁을 벌인 원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레타 왕은 안티파스가 쫒아낸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 였다.
안티파스는 기원전 8년에서 7년 무렵부터 기원전 5년 내지 4년까지(3년 정도) 교육을 받기 위해 로마에 머물렀는데, 그동안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비롯한 로마의 여러 유명인사들과 교류했다.
예루살렘은 사막 때문에 끊긴 남동쪽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대부분 시설들은 이곳의 남동쪽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두 골짜기, 힌놈 골짜기(남쪽에서 동서로)와 기드론 골짜기(남북으로)에 둘러싸인 분지 위에 자리 잡았다. 중심부는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낮은 골짜기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높은 절벽이 솟아 있었다. 이 절벽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은 예루살렘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총독 필라테는 예루살렘에 올때 마다 헤로데 궁에서 묵었다. 안티파스는 이곳에 방문할 때면 도시 중심부의 성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하스몬(Hasmonean) 궁전에서 주로 생활했다. 고위 성직자인 카이아파스(성경의 가야바)의 거처는 도시의 상류층과 부유한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사는 남쪽 구릉지대에 있었다. 좁은 도로가 대부분인 이곳에서 바퀴 달린 교통수단은 지날수 없었다.
몇 년 전 랍비들은, 예루살렘에서는 외부인에게 돈을 받고 집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선포했다. 이는 집은 모두의 공동 소유여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인식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편하게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카이아파스는 15년(기원후 18년~33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지냈다. 카이아파스는 강력한 권력을 쥐기 위해 안나스와 밀접한 협력한 듯 하다. 안나스는 명에 대제사장 같은 존재 였다. 고위 성직자들은 헤로데 대왕이 자신들의 막강한 권력을 빼앗아간 후에도 끊임없이 정치 문제에 관여해 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기원후 18년에 필라테의 전임자 이자 로마의 행정관 이었던 발레리우스 그라쿠스(Valeriys Grat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다.
바리사이 파(제2성전 시대 후반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융성했던 유대교 한 종교 분파) 사람들은 고위 성직자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성경』에 입각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왔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이 이어 제국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만 해도 50만 명이 넘었다. (로마는 100만이 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민족에 따라 거주지가 나뉘어져 있었다. 도시의 남쪽( 지도를 보면 서쪽임)에는 라코티스(Rhakotis)라 하여 가난한 이집트인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이다.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궁전이 있는 부르키움(Brucheium)에 머물렀는데 1세기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에 의하면 부르키움의 면적은 알렉산드리아 도시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달했다고 한다. 부르키움에는 궁전 뿐 아니라 소마(Soma, 알렉산드리아의 거대 묘지)와 박물관, 거대한 도서관 같은 공공건물도 함께 있었다. 유대인들은 도시의 북동쪽에 거주했다.(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불화 때문에 115년부터 117년까지 유대인 거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만 하더라도 유대 지방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수는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아주 적은 수였다.
알렉산드라에서 거대한 도서관이 포함된 박물관이 기원전 3세기에 실립됐다. 장서 70만 권을 소장했다(AD 1세기경)
이집트는 로마 시가 소비하는 곡물의 3분의 1을 공급하였다. 이집트 장관(프로쿠라토르)은 황제가 직접 가사 계급 중에서 적임자를 뽑았다. 이집트 장관은 모든 일을 황제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고위직 행정관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중에서 뽑았다. 각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집단이었다. 이집트에는 보병 3개 군단을 주둔 시켰다. 이집트 남쪽에서는강도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집트 남부의 독립왕국인 메로에서는 육로로 홍해까지 갈 수 있었기에, 상아를비롯하여 표범 가죽, 타조 깃털, 흑단과 같은 이국적인 물품을 로마로 들여가려는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재임시절에 전성기를 맞은 메로에는 막강한 힘과 부를 자랑했다.
메로에 삭람들은 이집트 신들도 경배했지만 사자ㅣ 머리에 뱀이나 사람의 몸을 한 사자신 아페데멕(Apedemek)처럼 자시들 고유의 신도 경배했다. 독특한 문화와 고유한 언어를 갖고 있던 메로에는 상형문자인 이집트어와 달리 표음문자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메로에의 문화와 건축 양식은 이집은 양식이 아닌 아프리카 양식으로 점점 더 변모해갔다. 당시 메로에는 칸다케(candace)라는 여왕이 다스르고 있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구 플라쿠스(Flaccus)가 이집트의 장관으로 임명된 시기는 서기 32년에서 33년 사이이다.
부임한 첫 해에 플라쿠스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후로는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면서 종교적인 탄압 정치를 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고위 인사였던 필론은 자신의 저서에, 부임 초기의 플라쿠스는 선임자들보다 훨씬 평화롭고 공명정대하게 이집트를 다스렸다고 적었다.
플라쿠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들과 함께 자랐는데 판다테리아 섬으로 유배당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손녀 대아그리피나의 몰락에 깊에 관련돼있다. 그는 게멜루스를 티베리우스 황제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필론은 스스로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서 지도자가 되었다.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때는 그의 나이 50인 AD 35년 무렵일 것이다. 필론의 글에는 플라톤의 철학이 엿보인다.
플라쿠스가 가한 잔혹 행위에 대해 탄원하기 위해 가이우스 칼리쿨라 황제를 찾아간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를 여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도 그는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기위해' 예루살렘의 대성전을 찾아갔던 적도 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
필론에게는 알렉산드로스 리시마코스(Lysimachos)라고 하는 유명한 형제가 있기도 한데 리시마코스는 이집트에서 로마의 고위 관리직을 수임한 그는 자신의 재산을 예루살렘 성전의 문을 금은으로 장식하는 데 사용하곤 해다.
서기 33년 집필되었다고 추정하는 필론의 저서 중에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로고스라고 추정하는 작품이 있는데, 로고스가 신의 사자이며 구세주라는 그의 개념은 그 당시 사람들의 주요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요한의 복음서」에서는 로고스를 플라톤의 철학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인간과 모든 것의 유형적인 실체이자 신과 동일한 존재라고 하였다.
예수의 대부분 여자 제자들은 예수가 갈리리 북쪽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가르치을 펼쳤던 시기에 제자가 되었다.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와 요셉의 어머니의 마리아, 아티파스의 집사인 쿠자의 아내 요안나가 있다. 살로메는 어업에 종사하던 하족들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의 복음서」의 저자 요한은 대제사장의 장인 아나스의 가문고 여줄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엔 시신을 땅속이나 동굴에 묻는 풍습이 있었는데, 보통 동굴을 더 선호했다. 장례를 치를 시신은 일다 온몸에 기름을 바르고 아마천으로 칭칭 감았는데, 얼구른 몸통을 감는 천과는 다른 천으로 분리해서 감았다. 세월히 흘러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면 뼈만 모아 작은 납골함에 집어넣었다.
사두가이파는 친로마 성행이 강하고 헬레니즘 문화에 젖어 있었다.죽음 이후의 영혼 불멸성, 몸의 부활, 천사 같은 영적 존재를 부인하는 유대교의 한파이다.
2세기 들어 또다시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나자 로마는 예루살렘을 속주로 마들고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이 이름은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때까지 사용되었음)로 바꾸어 버렸다.
AD 33년 초봄에 라자루스(라자로)의 부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예수는 가까운 제자들과 함께 요르단 강 동쪽 편에 있는 페레아 지방에서 머물렀다. 이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신변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페레아로 가려면 흑해나 사해로 흘러가는 요르단 강을 꾸불꾸불 감싸고 있는 열곡을 지나 하류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강을 따라 내려오다 평평한 분지에 다다르면 그곳에서 신(新) 예리코와 헤로데의 거대한 겨울 궁전을 지나 요르단 강의 수많은 여울을 건너가야 한다.
라자로의 부활로 생명의 위협을 한층 더 심하게 받은 예수는 중앙 산맥이 있는 예루사람 북부 지방의 에브라임으로 갔다. 에브라임은 예루사람 북쪽에 잇는 우회로를 거쳐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닿을 수 있다.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이 될 때까지 머무르던 에수는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한 일행은 도중에 예리코로 가서 그곳에서 갈릴리에서 온 순례자들 무리오 한데 섞였다.(이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타키투스는 만약 세야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네로 황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 율리우스-0클라우디우스 왕조 보다 도 훨씬 도 타락한 왕조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26년에 세야누스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안 그래도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시끄러운 로마에서 떠나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으의 아내 라빌라에게 자신과 결혼하면 황제의 권한을 나누어 주겠다는 약속을 한 세야누스는 28년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 드루수스를 독살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세야누스는 자신의 아내인 아피카타와 이혼도 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황후인 리비아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마음을 높고 로마를 떠날 수 있게 한 든든한 지원자이기도 했으나 29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세야눗는 곧바로 아그리피나와 황제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를 그녀의 두 아들 네로와 드루수스를 유배시킨다. 당시 아그리피나는 세야누스 반대파의 최선봉에 서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아그리피나를 경계해 온 티베리우스 황제를 이용하여 그녀를 제거한다.
막강한 권력은 손에 쥔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라빌라와 결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의 출신 계급을 이유로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허락할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서기 31년까지도 황제는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카프리 섬에 은둔해 있었지만 세야누스의 야망을 눈치 채고 있었다.
세야누스를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장악하고 있는 근위대가 손을 쓰지 못하도록 마가야 했다. 세야누스가 드루수스를 독살했다는 증거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제수인 안토니아(게르마니쿠스 와 리빌라의 어머니)가 제공했다고 한다.
9월 초 어느날, 티베리우스 황제는 신변 안전의 이유로 대아그리피나의 칼리쿨라를 카프리 섬으로 불러들인다.
처형된 드루수스의 막내딸 이우닐라(Iunilla)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답게 "말썽을 부려 죄송합니다. 체벌을 받은 후에는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리거 다짐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당시 역사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까지 처녀를 사형시킨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이 소녀를 강간한 뒤에 목에 밧줄을 매달았다고 한다'라고 적었다.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는 티베리우스 황제을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해 드루수스의 죽음에 그의 전처 리빌라가 깊게 관여되어 있다는 내용의 저주의 편지를 적어 카프리 섬에 있는 황제게 보낸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안토니아를 생각해서 리빌라를 직접 처형하는 대신 안토니아의 손에 넘겼다. 안토니아는 리빌라가 굶어 죽을 때까지 가두었다.
황제의 근위대는 서기 34년까지 계속해서 세야누스 의 세력들을 축출했다.
사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신이 근위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렸지만 실제로는 근뒤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었다. 황제는 만약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면 카프리 섬을 떠나 시리아나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반역죄를 지은 사람은 로마에 있는 타르페이아(Tarpeia) 바위에서 떨어뜨렸다.
32년 티베리우스는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스페인의 재력가 섹스투스 마리우스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딸을 강간하려 했는데 마리우스가 딸을 다른 곳으로 숨겼다. 이에 황제는 그를 근친상간죄로 하여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떨어뜨렸다.
황제는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전에 이미 갈루스(티베리우스가 사랑했던 빕사니아의 두번째 남편)을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갈루스를 시작으로 같은 해에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아들 드루수스 , 네르바가 굶어 죽은 것으로 보아 황제가 이들의 배식을 끊어 굶겨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
황제의 점성술사들이 티베리우스에게 다시는 로마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하늘의 징후가 나타났다고 조언을 하자 티베리우스는 정말로 받아들였다.
카프리 섬에서 황제 곁에 머물던 학자들은 대부분 그리스 출신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중 하나였던 네르바는 서기 33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식사를 거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는 날마다 네르바를 찾아가 제발 식사를 하라고 애원했다. 네르바는 자신이 죽으려는 이유를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타키투스는 네르바의 자살 이유가 로마에서 벌어지는 혼돈 때문이라고 봤다.
카이사르의 법에 따라 티베리우스 황제는 모든 금융업자들에게 18개월의 여유를 주면서, 법이 정한 규정에 맞는 자산을 자발적으로 보ㅓ유해야 한다고 공포했다. 그 결과 채권자들이 일시에 빚을 상환 받으려 했기 때문에 통화량이 부족하게 되엇고, 이에 땅을 소유한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땅을 소유한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수에토니우스는, 괴로워 하는 네르바의 모습을 본 티베[리우스가 '채무관계에 대한 정채을 바꿔 원로원들이 무이자로 자금을 빌려주어야 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1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국비를 지원해 주었다'라고 기록했다. 이 정책 때문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금융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다.
서기 33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갈바가 고마의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유대력으로 니산원 9일은 양력으로 하면 3월 28일 토요일 저녁이다.
그리스식 식사법은 모포 위에 차린 음식을 빙 둘러싼후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깔개나 침상이 식탁의 3면에 한 개씩, 즉 한 식탁당 세개가 깔렸다.
마르티알리스(Martialis)의 친구라고 알려져 잇는 아눌루스 푸덴스(Aulus Pudens(성경의 부데)의 아내 클라우디아 루피나(Claudis Rufima)는 쿠노벨리누스(Kunobelinus)의 아들 카락타쿠스(Caractacus)의 딸일지도 모른다.
펠릭스 총독의 아내는 필론의 조카딸이었다.
로마 시민인 경우에는 십자가 처형을 받지 않는다.
타키투스는 34년에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는 서기 36년에 이집트에서 불사조가 나타났다고 했다.
콜린 험프리스(Colin Humphreys)와 천체 물리학자인 W. G. 와딩턴(W. G. Waddington)
요세푸스는 헤로데 대왕이 죽기전에 월식이 있을 거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요세푸스가 언급한 월식이 기원전 4년 3월 12일에서 13일까지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요세푸스는 헤로데 대왕이 죽은후 유월절 축제가 시작됐다고 했다. 그해 유월절 축제는 기원전 4년 11월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따라서 헤로데 대왕은 월식이 발생한 날부터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는 전날 사이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예수의 탄생시기는 기원전 5년 12월에서 기원전 4년 1월 사이가 가장 유력하다.
「루가의 복음서」의 티베리우스 황제 15년은 서기 28년 8월 19일부터 서기 31년 12월 31일까지이다.
유대인들은 해가 진 후부터 다음날의 시작으로 보았다.
AD 33년 3월 19일 남반구에 개기 일식 발생.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일어난 월식은 서기 27년, 30년, 33년, 36년에 있었다. 아마 예수는 서기 33년 4월 3일에 일어난 월식의 세계시는 14시 47분 이고 부분 월식이고 그 월식이 일어난 총시간은 86분 이다.
17년 소아시아 지방에서 심각한 지진이 발생한다.
19년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
34년 4분 영주 필립보 시리아와 합병.
35년 로마, 파르티아 제국과 전쟁(~36년)
37년 비키우스 비텔리우스 예루살렘 방문, 대사제의 정통 복식을 복원시킴. 요세푸스 카이사르가 대사제직에서 물러나고 요나단이 대사제가 됨(유월절). 비텔리우스 예루살렘 제방문. 테오필루스를 위해 요나단 물러남.
38년 알렉산드리아 반유대주의 기승.
41년 아그리파 유대와 사마리아 승인.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로마에사 유대인들을 추방함.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역자 프리실라와 아퀼라의 인도로 유대인들 코린트로 이주.
서기 14년부터 37년가지홍해를 거쳐 인도까지 항해한 히팔루스(Hippalus)
『에라트라 해 부근 지도』는 43년 출판 추정.
바리가자(Barygaza, 현재의 인도 바루치Bharuch) , 다미리카(Damorica, 리미리케Lymyrike) 티나이(Thinae, 중국)
베사타(Besata) 디스(this)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토마가 서기 20년부터 49년까지 인도를 통치한 스티카이족 왕인 곤도파르네스(Gondopharnes)의 땅에서 설교를 했다고 한다.
히말리야 동쪽에 있는 텐그노우팔(Tengnoupal)에서 파칸가(Pakhangha)가 들어섰다.
네로 황제 시절 로마의 고위 여사제인 율리아 세베라(Julia Severa)가 현재 아하트 케우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아시아의 프리지아 파카티아나(Pacatiana)에 위치한 아크노이아(Acmonia)에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시나고를 지었다. 이곳은 도리라리움(Dorylaeum)과 필라델피아 사이에 있는 길 위에 있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소아시아 총독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와 사이가 나빠진다.
37년 유대 지방에서는 피라테가 또 한번 큰 실수를 저질러 황제 앞에서 직접 해명하라는 소환 명령을 받게 된다. 당시 필라테는 시리아 총독으로 와 있던 동부 군단의 사령관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구세주라고 주장하느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모세가 율법을 선포한 그리짐(Gerizim) 산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주장한 일로 커다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짐 산의 발견이야말로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가 도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생각한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신성한 산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필라테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기병대와 중무장한 보병 부대를 파견했다. 마을의 늪지대에서 마주친 사마리아인들과 로마군 사이에서 벌어진 대격전으로 많은 사라들이 도망쳤다.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둔 팔라테는 도망을 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잡아들여 사형에 처했다고 했다. 이에 반발한 사마리아 지도자들과 탄원서를 받은 비텔리우스는 결국 필라테에게 황제 앞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스 사람들은 일몰을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했고 로마 사람들은 현대인 처럼 자정을 하루의 시작이라고 정했다. 좋은 상태는 이상향이다. 거의 시공간 모든 상태는 '기'적인 것이다.
선리후기:좋음
선기후리:안됨
리:일고 사고함
기:중지 '리'를 기다림
'기'가 상당 많은 부분 차지
흔히 됐다고 하는 좋은 상태란 것도 착각이다. '리'에 도저히 근접 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기'의 범위인 것이다.
AD 31년 10월 18일 처형당한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함께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언제가는 세야누스가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를 공동 집정관에 취임시킨 이유는 자신의 의도를 철저하게 감처 세야누그사 마음을 놓기 하기 위해서 였다. 허락하지 않았던 리빌라와 결혼해도 좋다고 허락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세야누스와 리빌라가 티베리우스의 아들 두루수스를 살해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으나, 서기 31년에 드러나 증거로 티베리우스 황제는 두 사라이 아들을 살해했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확실히 속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유대인 거주 지역)에 있는 유대 민족을 보호해 주고자 했던 적도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대리인인 세야뉴스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아주 강하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로마의 속주는 그 중요성에 따라 레가투스(총독대리 역할을 하던 관리)와 프로쿠라토르(속주에서 곡물 공급 화폐 주조 광산 문제등을 국가를 대신해 담당하는 재정 대리인)를 구분하여 배치했지만, 두 관리직 모두 로마법률이 정한 한도 내에서 엄청난 자유재량을 발휘하여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레가투스가 다스리는 지역은 프로쿠라토르의 통치 지역보다 좀 더 강력한 군사력이 제공되었다.
서기 26년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폰티우스 필라테(성경의 빌라도)는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인 세야누스가 발탁했다.
AD 32년 12월 18일
하누카(Hanukka,봉헌절 축제)가 시작
하누카는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축일을 제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봉헌절제는 유대력으로 키슬레브월 25일에 시작해서 8일 동안 지속되었다. 축제일 동안에은 사람들이 매일 할렐(Hallel, 세 차례의 순레 절기 때 회당에서 암송되는「시편」113~118편을 지칭하는 유대인의 전례용 명칭)을 낭동하면서 기쁨에 들떠 야자수를 비롯한 여러 나뭇가지들을 열심히 운반한다. 축제일 동안 성전은 놀라울 정도로 밝게 빛났으며 이는 일반인들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집집마다 가장들은 가족들을 위해 언제나 등불을 밝혀놓았다.
달과 태양의 주기를 기초로 한 종교력과 민력(民曆) 체계이다. 1년을 이루는 달의 이르믄 바빌로니아 용어에서 유래했다. 달은 종교 용례에 따라 배열되었는데, 니산(Nisan : 그레고리력의 3~4월), 이야르(Iyyar : 4~5), 시반(Sivan : 5~6월) , 타무즈(Tammuz : 6~7월), 아브(Av :7~8월), 엘룰(Elul : 8~9월), 티슈리(Tishti : 9~10월), 헤슈반(Heshvan 또는 마르헤슈반Marheshvan : 10~11월) , 키슬레브(Kislev : 11~12월), 테베트(Tevet : 12~1월), 셰바트(Shevat : 1~2월) , 아다르(Adar : 2~3월)순이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거나 혹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대리인을 '신의 아들'이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아들'이라 주장한다고 해서 신성모독은 아니었다.
서기 33년 무렵 로마에서는 사립 도서관을 설립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규모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데 사립 도서관의 규모는 두 팔을 뻗으면 방의 양쪽 끝이 손바닥에 닿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그 속에 빼곡히 들어찬 구루마리의 수는 평균적으로 1700부가 넘었다. 도서관의 구조는 방 한가운데에 직사각형의 책꽂이가 놓여 있고 사방의 네 벽에도 책을 꽂을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50만 부가 넘는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고 페르가뭄 도서관도 20만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1세기 후반이 되자 출판업이 크게 발달하여 현재의 책과 비슷한 형태의 사본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본은 두루마리 형태가 아니라 각 장을 실로 꿰맨 제본 형태로 변하고, 글도 한쪽 면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쓰게 된다. 이렇게 책의 형태가 바뀌게 된 이유는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기독교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 모여『성경』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보통「마르코의 복음서」는 60년대 중반 「요한의 복음서」는 90년대에 완성되었다고 본다.
「히브리인에게 보낸 편지」나 「요한묵시록」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신약성경』의 집핍 방식에서 드러나는 유대적인 성격 이다. 이 『성경』들을 살펴보면 초기 교회, 즉 기독교 1세대들이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들이 제시되어 있다. 복음서 젖나들의 서술 식은 헬레니즘 양식이라기보다는 유대교 경전의 서술 방식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신랄한 풍바를 이용한 방식은 라틴 작가인 페트로니우스의『사티리콘』(60년대 중반쯤집필) 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당대 풍자 문학의 독특한 서술방식을 본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료를 배열하는 방식을 보면 동시대에 유행한 그리스-로마 양식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유대 사회는 묵시록이나 고대 예언서 드을 집대성하는 동시에,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를『구약성경』으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를 차용할 필요 없이 이미 스스로 최상의 문학 집필 방식을 익히고 있었다.
타키투스의『로마 제국 연대기』는 서기 115년에서 117년 사이에 집필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의『황제들의 생애』에는 딱딱하고 간결한 타키투스의 것보다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훨씬 더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는 일화들이 실려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작품은 타키투스보다는 좀 더 후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스어 집필된 디오 카시우스의『로마사』는 집필 시기는 2세기 말로 보인다.
요세푸스가 쓴『유댜 고대사』에는 기원전 2세기 중반 이후의 유대 역사에서 시작하여 유대 전쟁이 시작된 서기 66년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그 이후의 기록이 없는 이유는 66년에 요세푸스가 다른 책을 쓰기 위해『유대 고대사』집필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방제국은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이다. 이곳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아테네 방언에 바탕을 둔 그리스어 코이네(Koine) 이다.
'이타주의자' 유형이 있는데, 이들은 상대와의 만남을 절설히 원한다. 이들은 오직 일정한 환경이나 외부적 자극을 통해서만 욕망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의 대상은 그들의 관능적 투사 속에서만 존재하므로, 만일 상대방과의 관계가 아정적일 경우 역으로 그들의 욕망은 손상될 수 있다.
동양에서는 클리토리스(음핵)는 '보석들의 테라스', '다르마의 보석' 혹은 '귀한 돌' 등으로 부른다.
서구 문화에서는 구어에서 클리토리스와 관련해 어떤 식의 애칭이나 경칭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1740년에는 에스파냐 왕실 출신의 마리 테레즈 대공 부인이 주치의에게 왜 임신이 안 되는지를 묻자, 의사는 이렇게 재치 있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대공 마님의 외음부가 너무 일찍 쾌감을 느껴서 그런 것 같사옵니다." 이 시절에는 여성의 쾌감이 큰 가치로 인정되었는데, 그것은 여성의 성적 즐거움을 임신의 징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집에 유폐된 채 순결의 의무에 구속되고 욕망과 성적 유희를 부정하도록 강요된 것은 결국 19ㅔ기 이후부터라고 봐야 할 것이다.
顧春(악이태의 증손녀)
중앙의 향시는 예부에서 주관하는 회시가 있기전 1년전 치름. 3년마다(자 묘 오 유) 거행. 조정에서는 主考官 2명. 正考官과 副考官 한명을 임시로 파견한다. 8.1에 성도에 도착. 6일에 시험장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시험은 8월 9일 (1차) 12일(2차) 15일(3차) 16(마침)
托渾布
富俊
1194년 황하는 陽武縣(지금의 하남 原陽縣)에서 옛 제방이 터져 封丘縣을 지나 동으러 흘러 넘쳐 梁山泊으로 들어가 다시 두 가닥으로 나뉘었다. 한가닥은 北淸河(대청하)를 지나 바다로 들어갔고, 다른 가닥은 남청하(泗水)를 지나 회수로 들어갔다. 원대에 이르러 북쪽지류(북청하)의 흐름이 점점 미약해졌는데 1494년에 제방을 쌓아 黃陵岡의 수로를 끊어서 북쪽 지류를 막아버리자 황하는 모두 남으로 흘렀다.
裕謙 원명은 裕泰
裕恩(예친왕의 아들) 容제
崔鍾世
성폭력(행) 스와핑
상처 거부당함,간통 인터넷 성 단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