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부터 사회인 야구에 푹 빠져 있습니다...
아직은 리그에 나가서 실력을 뽐낼만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남구 최고의
팀임을 자부하며 친한 선후배들과 함께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싸이월드에 있는 클럽에 야구 관련 자료를 올리다가 우연히 박철
순 선수에 대한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오비의 골수팬인 저에게는 상당한 감동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미쳐 몰랐던 사실들도 알게됐구요...ㅜ.ㅜ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었기에, 다른 회원님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여기에
올립니다...특히 두산 팬분들은 꼭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저에게 있어서 만큼은 박철순은 선동열,박찬호 이상가는 최고의 에이습니다.
오비 화이팅!!! 두산 화이팅!!!
프로통산 15년 동안 231경기 76승 53패 20세이브, 통산 방어율 2.95를 기록한
것이 박철순의 기록이다. 매년 고작 5승 정도를 올렸을 뿐이라고 보여지는 이
기록의 박철순.. 그러나 그는 야구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한국 야
구 불세출의 영웅이다. 국보급 투수 선동렬, 한시즌 최다승에 빛나는 장명부,
세대를 풍미했던 최동원등.. 기록과 성적으로 박철순을 압도하는 투수들은 많
다. 그리고 왕년의 홈런왕 이만수, 김봉연.. 영원한 3할타자 장효조등.. 타자까
지 찾아본다면 박철순의 통산 기록은 어쩌면 그의 선후배들이 적어간 기록에 초
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야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
름.. 그것은 바로 박철순 이다.
배명고, 연세대를 거쳤으며 한국 최초의 쿠바전 승리투수인 박철순은 79년 한
미 대학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주며, 한국인 사상 최초로 미
국 프로야구에 진출한다.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싱글 A 팀에 입단한 그는 빠르
게 실력을 향상시켜 가며 트리플 A 까지 오른 한국 최초의 선수이다. 1982년 한
국에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두산의 전신인 OB의 구단주였던 박용민 단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LA다져스를 통해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와 독대를 하게됐고, 어
렵사리 박철순을 영입하는데에 성공을 한다. 박철순이 1956년 3월 12일생이니
당시의 나이 26세..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박철순은 주위의 기대를 저 버리
지 않았다. 82년 3월 28일 LG의 전신인 MBC 청룡과의 경기에 처음 등장한 그는
타자를 압도하는 스피드와 스크류볼, 팜볼등을 구사하며 상대를 유린, 9-2로 승
리하고 첫 승을 신고한다. 특히나 당시에 박철순이 던지던 너클볼은 이전까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구질로 타자들에게 마구 라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의 대상
이 되었으며, 투수는 공만 잘던지면 된다던 당시의 우리 야구 수준을 뛰어넘는
뛰어난 수비로 "투수는 제 5의 야수"임을 증명했다.
이러한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인 이 82년에 세계 야구사에 남는 대기록을 수립
하는데, 그것이 바로 22경기 연승이라는 한시즌 최다연승 세계 신기록이다.
4월 10일부터 9월 18일까지 161일간 30경기에 등판해서 22연승을 거둔 박철순
은 시즌을 24승(13완투승, 7구원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1.84 로 마치면서 원
년MVP와 방어율 승률 다승 기록상등 투수부분 타이틀을 독식하기에 이르고, 나
아가 한국시리즈에서 한수위의 전력이라 평가받던 삼성에게 4승 1무 1패로
OB가 역전 우승을 하는데에 기폭제가 된 1승 2세이브를 올렸다.
그러나 박철순의 영광은 여기서 주춤하게 되는데.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던 그
가 전지훈련중 요추간판 헤르니아라는 허리 부상을 입게 되는 것이 그 시작이었
다. 결국 83년 시즌을 뛰지 못하던 그는 MBC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인 9월 22일
팬서비스 차원에서 등판했으나, 그를 성원하는 팬들의 함성이 그치기도 전인
1회 1사 1,2루서 송영운의 타구에 허리를 맞고 쓰러져 실려나가게 된다. 이해
11월 30일 결국 그는 LA의 센트럴 메모리얼 병원에 허리치료차 입원을 하게되
고, 4개월 만인 84년 4월 다시 돌아오는데.. 그런 그를 바라보던 팬들을 놀라
게 한것은 지속적인 약물치료와 진통제의 복용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탈모증세
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찾아
나가던 박철순은 85년 9월 22일 또다시 허리통증이 재발하여 서울대병원으로 후
송되고, 이듬해 8월 17일 대전서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전에 등판하여 4-2의 역
전승을 거두면서 9개월만의 첫승을 거둔다. 이 해에 박철순은 13경기에 등판해
5승 3패, 방어율 3.54를 기록했고, 사람들은 이때부터 그를 불사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88년 3월 15일, 그의 날개를 완전히 꺽어 버리는 불상사가 일
어나고야 만다. CF촬영중에 왼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
다. 수술을 마친 그에게 닥친 문제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느냐가 아닌, 정상인
의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철순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상인의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는 물
리치료와 한방치료, 싸우나등을 병행하며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고 걷는 것 조
차 자연스럽지 못했던 스스로를 다시금 다잡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 89년 6월
1일, 청주 빙그레전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감격의 승리를 기록하니 87년 10월
1일 기아의 전신인 해태 전 이후 650일만의 승리였으며, 33세라는 운동선수로
선 적지 않은 나이를 감안하건데, 그것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철
순의 전설은 이제 부터였다. 90년 7월 5일 해태전에서 5-0 완봉승으로 1500일만
에 완봉승을 거두고는 91년부터 94년 매년 7승을 기록했다. 92년 10월 9일 해태
전에서 다시 완봉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최고령 완봉승 기
록이며 이때 그의 나이 37세(36년 5개월)였다. 93년 8월21일 빙그레전에서는
6타자를 연속으로 삼진으로 돌려 세웠는데 이것은 당시의 연속타자 삼진 기록
과 타이었다. 그리고 열흘뒤 해태와의 경기에선 개시와 동시에 2이닝동안 6타
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워 경기개시 연속삼진 기록을 세웠다. 94년 7월 8일 삼성
전서는 개인 최다 기록인 한경기 11탈삼진을 기록하며, 10회 연장까지 완투승
을 기록, 연장전 최고령 완투기록을 수립했다. 8월12일 현대의 전신인 태평양과
의 경기에서는 다시 완봉승을 기록, 자신이 갖고 있던 현역 최고령 완봉승 기
록을 38세 5개월로 연장 시켰다. 95년 4월19일 LG전서의 승리로 7연승을 기록하
며 최고령 연속경기 승리 신기록 (39년 1개월 7일)을 수립하며, 이 시즌 9승
2패를 기록, OB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공헌했으며, 10월 20일 13년만에 한국시리
즈 등판해서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을 세우고(39세 7개월 8일), 끝내는
우승.. 13년 만의 우승을 기록하고는 선수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 많은 야구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96년 7월 30일 LG전에서는 세이브를 기록하여, 최고
령 세이브 기록(40세 4개월 18일)을 세웠으며, 9월 4일 한화전 승리로 최고령
승리 투수 기록을 40세 5개월 23일로 연장시켰다.
기록의 사나이, 불사조, 한국야구의 산증인으로 한국야구의 역사와 영욕을 같이
해왔던 거인 박철순은 결국 세월의 흐름앞에 42세에 이른 1997년 4월 29일 LG전
이 끝난 후 공식 은퇴식을 갖고,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며, 그의 백넘버 21번은
2002년 4월 5일 두산베어스의 영구결번으로 남아, 잠실 구장 한켠에 그의 이름
과 함께 남아있다. 두산베어스라는 구단이 존재하는 한, 한국 야구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선수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그 이름을 기린 것이다. 그
의 은퇴경기를 보러 대학교 2학년이던 당시 시험 두 과목을 펑크내고 잠실로 갔
다. 경기는 엉망이었다. 박철순은 등판하지 않았고, 두산은 서울 라이벌이라는
LG에 맹폭당하며 10점 이상을 실점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스포츠는 이벤트가
아니기에, 경기에 최선을 다한 LG를 뭐라할 수 없거늘... 하지만 그럼에도 박철
순이라는 거인을 보내는 마당에 실력 이상의 플레이를 보이는 LG가 너무나 미웠
다. 그리고 공 하나조차 던지지 않고 경기가 끝난뒤에야 마운드에 볼을 뿌리는
박철순 선수를 보며, 왜 한 개의 공이라도 경기에서 보여주지 않고 은퇴하는
가.. 하는 작은 원망이 일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다. 박철순이라는 선수는 이미 공을 던질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철순이라는 투수는 지금 나보다도 더 정확히
공을 던질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부서진 상태라는 걸.. 언젠가 경기중에 박철
순이 145Km/H 의 볼을 뿌리자 "저 박철순 선수가 140을 넘기는 스피드로 볼을
던져요!!" 라면서, 조금은 울먹이던 하일성 해설위원이 생각난다. 40을 넘긴 나
이라 해도 미국의 놀란 라이언은 이미 160Km/H 에 육박하는 볼을 뿌린 바 있거
늘 그것이 뭐가 대수인가.. 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후에 내가 알
게된 사실은 조금 더 충격적이었다. 노장 박철순의 투구폼을 기억하는가? 그는
와인드 업 후 유독 키킹을 높이 해서 발을 머리위까지 끌어 올려 공을 던지곤
했다. 텍사스에서 뛰는 박찬호가 LA 입단 초기에 했던 것 처럼 말이다. 그의 투
구폼이 그렇게 바뀐 이유를 당연히 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제와서
몇몇 지인들을 통해 안 사실은 너무도 충격이었다. 이미 그때에 박철순의 어깨
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제대로 된 스피드의 볼을 던질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
서 그는 발을 높이 들어 올려, 발이 내려갈 때의 속도와 탄력을 이용해서 몸의
회전을 가져와 볼에 스피드를 붙였다는 것이다. 정상인처럼 걷기조차 힘들다는
그 왼발을 들어올려서 강하게 땅에 내려꽂아 내고, 디스크에 이은 세 차례의 부
상으로 그를 괴롭혔던 허리를 회전 시켜서... 그는 그렇게 볼을 미트에 꽂아 왔
던 것이다.
작년 올스타전에 앞서 열렸던 올드 스타전이 기억난다. 등판한 박철순은 웃으
면서 볼을 뿌렸지만 공은 타자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중요치 않다. 그런 그가 아직도 볼을 만지며 많은 사람들의 의미가 되어 준다
는 것..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야구가, 또 스포츠가 얼마나 사람에게 감동과
눈물을 선사할 수 있는지 증명되는 것이다.
지금은 야구 평론가로 또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철순..
그가 이후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삶을 살아가던 간에, 그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
들에게 영원한 에이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잠실 야구장에 울려 퍼질 때마다 팬들의 가슴을 적셔왔던 권인하의 "에이스를
위하여"와 프랑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와 더불어....
첫댓글 말그대로 불사조......The Hero
흠냐 전배명고옆에있는 배명중다니는디 ㅋ
박철순선수가 예전에(지금은 잘 모르겠군요..) 제가 사는 동네 근처에 살았었죠. 근데 제가 당시 그 동네 오락실을 자주 다녔는데.. 그 때 박철순선수 많이 봤습니다.
항상 박철순 선수가 하는 게임은 세이브 축구ㅋㅋ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박철순 선수 그 얍사비 헤딩할려고 열심히 스틱 돌리는 모습이 너무 웃겼습니다.ㅋㅋ
롯데와의 코리언시리즈때 위기 상황에 중간계투로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내던 모습은 아직도 잊을수 없는 명장면 입니다...
오비의 팬으로써 눈물 나네요...95년 오비 우승때가 가장 감동 깊었습니다..그때 멤버들도 참 좋아했는디 박철순, 김상진, 권명철, 김경원, 김상호, 장원진, 안경현..나머지는 잘 기억이 --a
MVP김민호를 빼놓고선 시리즈를 얘기 할수가 없죠...ㅜ.ㅜ 암튼 오늘 단독 2위까지 올라갔네요...두산(맘속으론 오비!!!!)화이팅!!!
눈물나는 군요. [곰들의 모임]에서 박철순 선생님과 악수를 나눈뒤 정말 손 씻기 싫다는 생각까지 해봤습니다. 그리고 95년의 오비 정말 멋있었죠. 뭐 빠진 선수들 중에는 진필중 심정수 김태형 이도형 김종석 이명수등도 잊을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