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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갈천위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기산이 점점 다가오건만 도무지 아무런 도발의 낌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천여 명의 수하를 동원하고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질 지
경이었다.
청평야에서 기산에 이르는 수백 리 길.
길목마다 미리 수하들을 풀어 수상한 자를 수색하고 통행을 차단하며 조심스
럽게 움직이긴 했지만,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는 일이 없었다.
만약 설운교가 봉래도의 군주다운 기품이 없이 인물만 반반한 계집이었거나,
표물을 지키려는 표사들의 필사적인 태도와 뛰어난 능력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혹, 무적세가의 장난에 넘어가 거짓 미끼를 문 건 아닌가 의심할만한 상황이
었다.
물론, 무적세가에서 전면전을 피하려는 심정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야 자신이나 금천후나 다를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그렇지 자신의 며느리가 될 여인이요 천하의 정
세를 좌우할 폭발력을 지닌 봉래도의 군주를 탈취 당한 금천후가 꼼짝도 않는
것이 계속 머릿속을 찌뿌둥하게 만들었다.
금천후는 무림의 하늘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무적세가의 가주 아니던가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꼼짝도 않는단 말인가.
드넓은 관도를 독차지 한 행렬의 중앙, 마치 황제라도 된 양 무수한 고수들이
호위하는 사인교 위에 앉아있는 갈천위의 얼굴은 영 펴지지 않았다.
장마철 눅눅해진 이불을 덮고있는 듯 영 개운치 않은 느낌.
순간, 행렬이 멈추고 작은 소란이 일었다.
고개를 든 갈천위의 눈에 한 무리의 무사들이 행렬을 헤치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수그린 채 선두에선 자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광택이 흐르는 흑
갈색 무복을 입은 삼십여 명쯤 되는 무리의 복장만으로도 그들의 정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염상호가 이끌고 간 혈룡대원들이었다.
갈 때와는 십여 명 이상 차이나는 인원이 사나운 맹수를 포박하듯 사슬로 꽁
꽁 묶은 자를 끌고 오는 모습에 갈천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잔풍과 기세연을 어린아이 다루듯 손쉽게 없애 버린 흉수를 불과 십여 명의
희생을 치르고 잡아온 혈룡대원들과 그들을 제대로 지휘한 염상호가 새삼 장
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게다가, 적지 않은 인원을 잃은 것이 수치라도 되는 양 공을 내세우기는커녕
한없이 죄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흐뭇해진 갈천위는 참으로 모처럼 만에 칭찬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염상호를 필두로 사인교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는 혈룡대원들이 고개를 들기
도 전에 갈천위의 흔쾌한 웃음이 널찍한 관도에 울렸다.
"프하하핫! 모두들 수고했다. 흉수의 솜씨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렇듯 거뜬
히 생포해 왔으니 내 너희들의 공을 크게 치하하리라!"
"……."
하나 가장 공손한 태도로 겸양의 말을 주절거려야 마땅한 염상호가 계속 고개
를 못 들고 있는 것 아닌가.
순간, 불길한 예감이 갈천위의 뇌리에 스쳤다.
염상호가 제 아무리 흑마방의 지낭이라 해도 그에게는 수중의 구슬이요 표정
하나만으로 능히 속을 헤아릴 수 있는 오랜 수하였다.
염상호의 태도는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갈천위의 음성이 갑작스럽게 무거워졌다.
"뭐가 잘못됐느냐? 보고하라."
미리부터 수십 번도 더 생각한 말이건만 막상 갈천위에게 보고하는 순간이 닥
치자 염상호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 여기서 꾸물거리다가는 오늘 중으로 목이 떨어질 확률이 그만큼 높아졌
다.
"강북총타주 잔풍과 혈룡대주 기세연을 살해하여 방주님의 위엄을 희롱한 흉
수는 놓쳤습니다."
천만 뜻밖의 말이나 갈천위는 별 다른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다.
"놈을 반드시 잡아오라고 했을 텐데?"
무심한 음성이 울리는 순간, 염상호의 코끝에 전해지는 비릿한 혈향.
음성에 냄새가 밸 리 없으나 저런 음성이 발해진 후 숱한 인명이 사라지는 것
을 목격한 경험에 반응하는 몸의 조화였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자를 찾는다고 헤매느니 방주님께 돌아와 다른 분부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말이야 어떻게 했든 염상호에게 그런 정도의 재량은 있었고 또한 그의
판단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이미 목표를 손에 넣은 이상 한시바삐 기산으로 돌아가 뒷일을 대비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렇다면 저 자는 뭐란 말인가.
갈천위는 자기 몸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워 보이는 사슬을 칭칭 휘감고 있는 자
를 가리켰다.
"저건 뭐하는 자냐?"
"방주님께 돌아오던 중 삼십리쯤 떨어진 마을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발견하
고 신분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완강히 저항하기에 생포해 왔습니다."
갈천위는 묶여있는 자를 새삼 유심히 살폈다.
길에서 스쳐도 기억하지 못할 평범한 체격과 얼굴.
하나 원독에 찬 눈길에서 발해지는 느낌은 쉽게 대해서는 곤란한 위인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했다.
문득, 믿기 힘든 상상이 스쳤으나 갈천위는 전혀 내색치 않고 지나가는 말처
럼 물었다.
"모두 이자에게 당했느냐?"
방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은 물론, 하나하나가 무림의 일류고수 수준의 무
공을 지닌 혈룡대원.
떠날 때와 차이나는 인원이 십여 명을 헤아렸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부복한 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정체불명의 흉수를 놓친 것보다 지금 이 질문이 던져질 순간을 가장 두려워한
염상호였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이…… 엉겁결에 세 명이 당한 후 포위망을 빨리 갖추지 못해 피해가 늘
었습니다. 결국 반 시진 가까이 추적하며 접전을 벌인 끝에 놈을 잡을 수 있
었습니다."
"……!"
치미는 분노.
하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공과(功過)는 기산에 가서 묻기로 한 갈천위는 사나운 짐승같이 씨근덕거리는
사내를 향해 말문을 던졌다.
"네 놈은 누구냐?"
"프흐흐…… 흑마방의 방주께서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시는 구려. 묻는다고
대답할 내가 아니니, 어서 죽이시오!"
혈도를 봉쇄하고 운신을 못하도록 결박하지 않았으면 당장이라도 자진(自盡)
할 기세였다.
"크흣, 나는 사람의 의지나 인내력을 별로 믿는 편이 아니지. 순순히 정체를
밝히는 게 좋을 게다."
빙글거리며 웃는 것이 불같은 분노를 터뜨리는 것보다 훨씬 사람을 위축시켰
다.
사내는 아예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다물었다.
순간, 염상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자가 쓴 무공이 아무래도 천호검법(天虎劍法)으로 보였습니다."
"뭣이, 무적세가의 무공을 익혔단 말이냐?"
무적세가의 비전절예는 천붕검법이었으나 금종휘 이후 가주들이 독자적으로
창안한 무공이 더러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천호검법이었다.
갈천위는 마침내 무적세가의 움직임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십여 명의 혈룡대원
을 해친 눈앞의 사내가 반갑기까지 했다.
하나 금천후를 위시해 일개 노복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무적
세가의 인물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는 갈천위의 눈에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
이었다.
방주의 태도에서 면죄의 가능성을 읽은 염상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속하의 기억으로 무적세가에 이런 자는 없습니다. 뭔가 알지 못할 일들이 무
적세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의심에 희생을 무릅쓰고 굳이 생포한 것입니다."
안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시달리는 지금, 중차대한 의미를 내포하
고 있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데 장소나 시간이 따로 있을수 없었다.
갈천위는 주변에 경계를 강화하고 형구를 대령토록 지시했다.
"농잔수(聾殘手)를 불러라!"
천성적인 벙어리에 신경이 바위처럼 둔한 자로 십 년 전 관부의 형리(刑吏)
출신들이 만든 잔형문(殘刑門)을 흡수할 때 거두어들인 자가 농잔수였다.
은자를 받고 고문기술을 제공하던 잔형문에서 가장 높은 값으로 팔리던 인물
답게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그의 섬세하고 잔혹한 손속은 사람의 의지를 무력
화시키는데 다시없는 솜씨를 발휘했다.
좌중에 서늘한 긴장이 감도는 사이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곰처럼 덩치 큰 사내
가 불려왔고 사인교 앞에는 형틀이 갖춰졌다.
"준비해라!"
갈천위의 말이 떨어지자 농잔수가 어찌 보면 순박해 보이는 커다란 눈을 꿈벅
이며 느릿느릿 사내 앞으로 다가섰다.
하나 솥뚜껑 만한 손으로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다루듯 사내의 결박을
풀고 옷을 벗겨 형구에 앉히는 농잔수의 손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신속했다.
손에 들고있던 작은 자루를 풀러 기괴한 형구들을 가지런히 바닥에 펼쳐놓는
농잔수의 태도가 환자를 맞은 의원이나 작업을 준비하는 세공장(細工匠)을 연
상시켰다.
"말해라! 너는 누구이며 무적세가와는 어떤 관계냐?"
사내는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도록 두 눈을 질끈 감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을 써라."
갈천위의 말이 떨어지자 농잔수는 작은 겸자(鉗子)와 얄팍한 날이 파랗게 빛
을 발하는 소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적지 않은 상처로 얼룩진 사내의 전신을 살피더니 가슴사이의 깊은
검상을 겸자로 헤집었다.
"으으윽……!"
사내의 비명이 울렸건만 농잔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새빨갛게 드러난 속살이 탐스러운 듯 근육의 결을 따라 섬세하게 소도를
그었다.
갈천위의 음성은 직감으로 알아듣는가.
처절하게 터져 나오는 사내의 비명에는 꿈쩍도 않던 농잔수가 갈천위의 나직
한 음성이 울리자 즉각 손을 멈추었다.
"본 좌의 질문에 대답하겠는가?"
"으흐, 으으으……."
사내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릴 뿐 대답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갈천위를 바라보던 농잔수는 갈천위의 고갯짓에 다시금 손을 썼다.
살갗 밖으로 끄집어내어 갈가리 갈라놓은 근육사이로 굵은 소금을 정성껏 비
벼대는 것이다.
"그만, 그만둬라! 이 놈아. 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던 사내가 혼절하자 농잔수는 붓글씨를 써 내려가는 명필의 그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손놀림으로 사내의 인중(人中)과 양쪽 태양혈(太
陽穴)에 각기 호침(毫針)을 꽂았다.
"으으으……."
사내는 금방 깨어났고 농잔수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사내의 전신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이번엔 검 끝이 살짝 스친 것으로 보이는 목덜미였다.
젖은 수건으로 말라붙은 피를 닦아내자 한치쯤 되는 상처가 드러났다.
바닥에 놓인 잡동사니 중 농잔수가 집어들은 것은 작은 송곳과 앙증맞은 자기
병, 그리고 손바닥만한 검은 상자.
어느새 공포로 가득한 눈망울을 희번덕거리며 농잔수를 살피는 사내의 얼굴에
는 그 와중에도 의혹 어린 표정이 스쳤다.
계집아이들 소꿉장난할 때나 쓸만한 물건들로 무얼 하겠단 말인가.
농잔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일에 열중했다.
끝이 가늘고 예리한 송곳에 자기 병 속의 액체를 찍어 목덜미의 상처를 촘촘
하게 찌르기 시작했다.
"으으읍!"
참기 힘든 고통이련만 애써 비명을 삼키는 사내의 인내는 가상했다.
하나 농잔수 일 역시 아직은 준비에 지나지 않았다.
검은 상자 속에 담긴 발그레하고 투명한 몸통을 지닌 불개미들.
놈들은 상자 속에서 나오자마자 달콤한 꿀에 여왕개미의 분비물을 섞은 액체
의 향을 쫓아 맹렬하게 사내의 상처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으으으…… 끄아아악! 제발, 제발 그만……!"
처음엔 간지러움인지 고통인지 모를 느낌에 작은 흐느낌 비슷하던 사내의 비
명이 점차 목이 터져라 외치는 절규로 바뀌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작 농잔수는 조용한 숨결을 토하며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귀만 먹은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과 감정이 마비되기라도 한 듯 온몸을
뒤틀며 악을 써대는 사내를 바라보는 농잔수의 표정은 더없이 무심하고 차분
했다.
사내의 절규에 반응한 것은 갈천위였다.
"멈춰라!"
순간, 농잔수는 사내의 목을 젖히더니 또 다른 자기 병을 들어 상처에 들이부
었다.
"으흐흐흐……."
청량한 느낌과 함께 살갗을 파고드는 불개미들의 움직임이 멎자 사내는 지옥
에서 극락으로 옮겨진 기분이었다.
결국 산다는 게 이런 것 아니겠는가.
지옥의 고통도 극락의 즐거움도 함께 공존하는 것.
어떠한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극과 극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한 것.
짧은 시간, 농잔수의 손에서 지옥과 극락을 고루 맛본 이십 구호가 거창한 진
리라도 되는 양 찰나적으로 스치는 상념에 잠겨들 때, 갈천위가 입을 열었다.
조롱인지 진심인지 모를 음성.
"본 좌도 농잔수가 열세가지 수법을 펼치는 것까지는 보았으나 과연 어떤 수
법을 얼마나 더 지녔는지 알지 못한다. 어떠냐, 네가 본 좌에게 농잔수의 솜
씨를 끝까지 지켜볼 기회를 주겠느냐?"
그 순간, 무적비찰 이십 구호는 세가가 명실공히 천하를 다스리는 날 권세의
한끝을 행사하며 영화를 누리겠다는 꿈을 포기했다.
대업이 이루어지면 물론이요, 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더라도 후사를 보장한
다는 금태후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버틴다는 게 무의
미했고 결국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목전의 현실이 세가에
대한 충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것이다.
이십 구호는 대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조건을 제시했다.
"날 살려주는 것은 물론, 새외로 나가 살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시오. 흑마
방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준다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겠소."
"……!"
맹목적인 충성의 한계였다.
대의나 명분을 감안하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아니고
절망의 수렁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에 따라 덥석 잡아 버린 구원의 끈.
그 끈이 어떤 경우에도 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려면 다른 방도가
없다는 유일성(唯一性)이 전제되어야 했다.
언뜻 고리타분한 대의와 명분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고 답답해 보이는 무적
군영대와는 그 근본부터가 다른 무적비찰 요원들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리고, 오직 책임감과 동료에 대한 애정으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세
권표국의 표사들이 위대한 이유였다.
이십 구호가 굴복의 뜻을 밝혔지만 갈천위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장내에는 무수한 수하들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적어도 천하의 주인을 꿈꾸는 처지에 흑마방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는 것
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이 자가 말하는 정보의 내용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에 따라 결정할 문제였다.
"흐음……, 우선 네가 아는 것을 털어놓으면 목숨은 보장한다. 이후 어떤 대
접을 할지는 본 좌의 판단에 따라 다르다."
험한 세상의 바닥을 구르며 살아온 자들은 나름대로 생존의 지혜가 있었고 이
십 구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갈천위의 신중한 태도에서 최소한 허튼 약속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
을 얻었고, 내친 김에 자신의 미래에 대해 보장을 받아내려 했다.
"방주님께서 무적세가를 누르고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아셔야 할 내용
입니다. 소인이 목숨의 위협 없이 한 평생 넉넉히 먹고살도록 배려해 주실만
한 값어치는 충분합니다."
역시 대개의 사람이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하는 가련하고 영악
한 족속이라는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며 갈천위가 매섭게 말
을 잘랐다.
쥐새끼 같은 족속일수록 만만한 구석을 보이면 점점 기어오른다는 것 역시 그
의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본 좌와 흥정할 생각이더냐!"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이십 구호는 금새 사색이 되었다.
얄팍한 계산으로 그나마 인간의 풍모를 유지시키던 신념을 저버린 그에게서
제법 당당하던 처음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아, 아닙니다, 흥정이라니요……. 소인은 그저 방주님의 너그러운 배려만 바
랄 뿐입니다."
이십 구호는 최대한 겸손한 표정을 지으며 머릿속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무적비찰의 특성상 이십 구호가 아는 것은 단편적인 사
실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그 내용은 실로 놀라웠다.
무적세가에서 남모르는 세력을 기르고 있다는 것.
정확한 숫자는 모르나 자신이 소속된 무적비찰이라 불리는 조직이 있고 아마
도 이름 있는 무림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짐작되는 또 다른 조직이 있다는 것.
흑마방은 물론이요 천하의 주요한 방파의 움직임 또한 수시로 파악하고 있다
는 것.
기산으로 가는 이번 행렬을 감시하는 자가 최소한 다섯은 넘으며 자신이 생포
됐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것.
"……!"
뒤통수에 벼락이 내리치는 충격이 갈천위에게 전해졌다.
이십 구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사색이 되어 덜덜 떨던 염상호가 튕기듯 뛰
쳐나와 바닥에 엎드렸다.
"이자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속하의 죄가 하늘을 덮고도 남습니다
!"
흑마방의 이목을 책임지고 있는 처지에 최대의 적 무적세가의 실정에 이렇듯
깜깜했다는 것은 목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라는 대죄였다.
또한, 흑마방의 지낭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여지없이 짓
밟히는 처절한 심정에 염상호는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이십 구호를 바라보는 염상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너를 비롯한 무적비찰 대원들에게 무공을 전하고 명령을 내리는 책임자자 금
태후라고 했겠다!"
"그렇습니다."
"금태후의 움직임은 샅샅이 살피고 있다. 금태후가 둘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네놈들에게 무공을 전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이냐, 바른 대로 대거라!"
"자세히는 모르오나 세가에서 옥천산으로 통하는 암도(暗道)가 있고, 옥천산
에 사는 사냥꾼인지 약초꾼인지가 그의 화신(化身)이라고 들었습니다."
염상호의 목소리가 급격히 높아졌다.
"옥천산에 기거하는 약초꾼은 장삼(張三)이라는 가짜도인을 비롯해 열두 명이
고 사냥꾼은 새로 움막을 세운 정가(鄭哥) 형제까지 모두 스물 일곱이다. 그
중에 누가 금태후의 화신이란 말이냐?"
이십 구호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하나 이십 칠호는 자신을 다그치는 쥐눈의 사내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자신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위기감에 머리를 쥐어짰다.
"그, 그러니까…… 맞습니다! 일 년 전 어느 겨울날 비밀 연무장을 찾아온 금
태후가 암도 부근에 거처를 정한 사냥꾼 형제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중얼거리
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 한 번 가본 적이 없어도 옥천산 일대의 모습은 염상호의 머릿속에 선명하
게 새겨져 있었다.
"정가 형제의 움막 근처라……."
재빠르게 머릿속을 헤집은 염상호가 탄성을 발했다.
무적세가의 은밀한 움직임을 놓치긴 했어도 염상호가 이끄는 마안기무전이 놀
고만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 류가라는 약초꾼이 금태후……?"
정가 형제가 움막을 세운 곳은 옥천산에서 가장 산세가 험한 무화령(霧華嶺).
그들이 자리 잡기 전에는 약초꾼이고 사냥꾼이고 간에 무화령에 사는 자는 단
하나였다.
무화령에 사는 약초꾼 하나가 약초를 찾는 솜씨가 좋아 수시로 북경의 약재상
을 찾아 약초를 넘기고 흥청망청 돈이 떨어질 때까지 지낸다 돌아온다는 혈안
대(血眼隊) 인조(寅組) 팔호(八號)의 보고서가 머릿속에 그림처럼 펼쳐지며
생생하게 떠올랐다.
염상호는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아니, 모든 일을 명백히 밝혀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북경이 크다고는 하나 동시에 백여 명이 넘는 인원을 분리해서 수용하고 무공
을 가르칠만한 장소는 흔하지 않았다.
"잘 기억해 보거라. 네가 있었다는 장원에 무슨 특징은 없더냐? 담장 밖으로
무엇이 보이더냐? 장원근처에서 자주 들려온 소리가 있다거나, 특이한 냄새를
맡은 적은 없느냐?"
안달을 하며 채근하는 염상호를 제지한 것은 갈천위였다.
오늘, 결정적인 과오를 범했다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가 염상호를 인정하
는 것은 이렇듯 일에 대한 집요하고 치밀한 자세 때문이었다.
하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곤란했다.
"그만 하라! 이곳에서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자세한 전모는 기산에 가서
밝혀도 늦지 않으리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염상호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순순히 물러났다.
갈천위의 지적이 옳았다.
언제까지 길을 막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뜻하지 않은 소득을 얻은 갈천위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신속한 진군을 명했다.
"즉시 출발한다. 기산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제라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
수하가 생포됐다는 소식이 무적세가에 전해지리라 가정할 때 놈들도 기민하게
대처할 것이 분명했다.
더 늦기 전에 무적세가의 숨겨진 힘의 전모와 그 목적을 밝히지 않으면 천하
제패의 야망은 한낱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나게 될지도 몰랐다.
대체 적의 힘과 능력도 파악하지 못하고, 숨겨진 의도를 짐작도 못하는 채 어
떻게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긴장으로 잔뜩 굳어진 갈천위의 육신을 싣고 바람처럼 내달리는 사인교 뒤.
설운경을 실은 가마 안의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공력을 돋워 가마 밖의 일에 귀기울인 해연이 전하는 말에 뛰는 가슴을 진정
시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음모의 사슬에 묶인 여인은 가식 없는 사랑에서 안식
을 구하는가.
자신의 혼사에 얽힌 사연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예감에 얼굴이 어두워진 설운
경의 망막에 진실하고 소박한 사랑으로 다가온 한 사내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
올랐다.
이제는 지울 수 없는 숙명으로 가슴깊이 새겨진 사내, 사군명의 얼굴이…….
갈천위의 거대한 행렬이 일으킨 자욱한 먼지가 깨끗하게 가라앉은 관도.
방주의 행차 근처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게 샅샅이 수색하고
길을 연다는 혈룡대의 장담이 그다지 믿을 만 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
관도에서 오장쯤 떨어진 뽕밭의 수풀이 들썩이더니 땅속에서 두 사람이 모습
을 드러낸 것이다.
행여 설운경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접근했던 설운교와 금사익은 뜻 밖에 얻어들은 소리에 망연한 표정이었다.
금사익 역시 혼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운교는 한 마디 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흥, 천하에서 가장 위대하고 당당하다는 무적세가의 행사치고는 참으로 석연
치 않군요. 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런 자들을 길렀나요?"
"나도 처음 듣는 얘기요, 틀림없이 뭔가 잘못 된 거요. 본가에서 몇몇 명문가
의 자제들에게 무공을 전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따위 쓰레기들을 이용해 일
을 꾸밀 까닭이 없소."
사실여부를 떠나 세가를 배신하고 흑마방에 붙은 이름 모를 사내에 대해 금사
익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요? 아까 그자의 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로군요."
금사익에게 느꼈던 호감만큼이나 배신감도 큰 탓일까.
설운교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하면, 아까 그자같이 충성스런 수하들은 물론, 그보다 더 훌륭한 제자들을
무수히 거느리고 있으면서 대체 우리 언니가 놈들의 손에 떨어지도록 방치한
이유는 뭔가요? 행여 본 도의 손을 빌려 흑마방을 쓸어 버릴 꿍꿍이라도 꾸미
고 있는 건가요?"
"닥치시오! 본가는 무림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가문이오. 본가를 그따위 더러
운 음모나 꾸미는 용렬한 집단으로 모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소!"
굳이 세권표국에 신부의 호송을 맡긴 아버지의 처사를 석연치 않게 생각하던
터라 설운교의 말에 더욱 강하게 반발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나 설운교는 금사익의 격한 반응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할말을 다 쏟아
부었다.
설운교 역시 남다른 기질과 자부심으로 뭉친 여인인 것이다.
"명심하세요! 본 도는 물론 해남의 누구하나 이번 혼사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 없어요. 만일 언니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니 언니가 이리저리 죽을
고비를 겪으며 고생하다가 흑마방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만 전해져도 중원은
해남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당연히 그 첫 목표는 언니
의 신변을 책임진 무적세가가 될 거구요!"
"……!"
순간, 금사익은 설운교의 말이 공연한 허풍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설운교의 성격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운교의 말대
로 사태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었다.
봉래신장이라는 봉래도의 고인이 굳이 신분을 감추고 중원으로 건너와 이번
혼사의 성공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이야말로 봉래도의 분위기가 설운교의 말대로 심상치 않다는 명백한 증거 아
니겠는가.
턱없는 자부심으로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던 무적세가의 소가주가 비로소 세
상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찌 됐든 그런 결과만은 막아야 하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아니
되오!"
설운교에게 말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금사익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
다.
일신에 닥칠 위해나 가문의 몰락을 걱정해서는 분명 아닌,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
어쩌면 봉래도와 중원의 무림인들이 무수하게 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상황을
떠올리는 자체가 그를 전율케 하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다면, 치열한 싸움을 몇 차례 겪은 그에게 적을 베어 넘기는 것이
단지 통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생긴 때문이오, 무림천하가 무적세
가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그러나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내 이대로 두고보지 않겠소. 설령 내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참
극은 막고야 말겠소!"
장차 무적세가의 가주가 되어 무림천하를 이끌어갈 금사익의 소중한 깨달음을
담은 간절한 독백이 텅 빈 관도 위에 울려 퍼졌다.
사는 게 별거 아니라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어 손쉽게 변신한 이십 구호가 흘
린 핏자국이 선명한 관도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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