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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 주의할 점
1. 나치와 동독을 동일시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비교하는 것은 범죄의 무게가 아니라, 민주국가가 과거를 처리할 때 쓴 원칙과 그 일관성입니다.
2. 모든 131법 수혜자가 나치 가해자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난과 추방 등으로 직장을 잃은 공무원도 폭넓게 포함됐습니다.
3. 무장친위대 관련 ‘연금’은 하나의 제도가 아닙니다. 법정 노령연금과 전쟁 피해 사회보상은 법적 구조가 다릅니다.
4. 지금의 AfD 지지를 과거 청산의 결과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선거에는 경제, 이민, 외교, 대표성, 정부 평가 등 여러 변수가 작용합니다.
5. 프랑스와 독일을 그대로 같은 선에 놓을 수 없습니다. 점령당한 나라의 부역 청산과 가해국의 과거 청산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프랑스는 비교를 위한 거울로 등장합니다.
6. 나우만 서클이 실제로 얼마나 위험했는지는 역사학계에서도 평가가 갈립니다. 이 글이 이 사건을 다루는 이유는 위험의 크기보다, 신생 민주주의가 어떤 종류의 과거에는 대응할 수 있었고 어떤 종류에는 대응하기 어려웠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7. 사견과 칼럼은 개인적인 감상과 비유입니다. 역사학계의 합의나 법원의 공식 평가가 아닙니다.
8. 이 글의 핵심은 “누가 더 나쁜가”가 아니라, 정상적인 법적·정치적 결정의 누적이 어떻게 역사적 불의를 오래 끌고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 * *
과거 청산이란 무엇인가: 전후 독일 80년의 기록
프롤로그: 아도르노의 질문
과거 청산이란 무엇을 뜻하는가?(Was bedeutet: Aufarbeitung der Vergangenheit?)
— 테오도어 W. 아도르노, 1959년 강연
이 글의 제목은 철학자 테오도어 W. 아도르노가 1959년에 한 강연에서 빌려 왔습니다. 당시 서독에서 ‘과거 청산’이라는 말은 과거를 깨끗이 정리해서 끝내 버리자는 뜻으로 쓰이곤 했습니다. 아도르노는 바로 그 점을 경계했습니다.
그에게 진짜 청산은 과거를 기억에서 치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있는 힘을 ‘명료한 의식으로 끊어 내는 일’에 가까웠습니다.¹
독일은 과거 청산에 성공했을까요?
흔히 이렇게 묻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한 문장으로 답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한편으로 서독은 나치 독재와 헌법적으로 단호히 결별했습니다. 기본법과 헌법재판소를 중심으로 안정된 민주주의를 세웠고, 네오나치 정당을 금지했으며, 이스라엘 및 유대인 피해자 단체와 배상을 협상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독일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초기 서독은 옛 공무원과 법조인, 군인과 관료 상당수를 새 국가에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나치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나치가 ‘범죄자’나 ‘반사회적 인간’이라고 낙인찍은 여러 피해 집단은 오랫동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판결은 2002년, 2009년, 2017년이 되어서야 일괄 무효가 되었습니다. 어떤 피해 집단은 2020년에야 연방의회로부터 명시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질문을 조금 바꿔 보려 합니다.
과거 청산은 무엇을 얼마나 처벌했느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과거의 법·경력·권리·조직·기억이 현재의 ‘정상’으로 굳어 버리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전후 독일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거대한 음모가 아닙니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합리적이었던 결정들, 혹은 당시에도 충분히 비판받을 만했던 결정들이 수십 년 동안 같은 방향으로 쌓여 가는 과정입니다.
이 책을 읽는 렌즈: 제도적 히스테리시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렌즈 하나를 챙겨 두겠습니다.
법적 안정성, 신뢰 보호, 확정판결 존중, 개인책임 원칙. 모두 민주적 법치국가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오늘 합법이던 행동을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내일 처벌해서는 안 되니까요.
문제는 처음 만들어진 법적 상태 자체가 부당했을 때 생깁니다. 이런 경로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1. 부당하게 형성된 지위가 있습니다.
2. 시간이 흐르면서 그 위에 연금과 경력, 판결과 행정처분, 신뢰가 쌓입니다.
3. 법적 안정성과 신뢰 보호가 그 상태에 달라붙습니다.
4. 이제는 그것을 고치려는 쪽이 더 무거운 정당화 부담을 집니다.
반대로 애초에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보호받을 ‘기존 권리’ 자체가 없습니다. 피해자가 직접 문제를 다시 제기해야 하고, 새 법과 새로운 정치적 결단이 나와야 비로소 무언가가 바뀝니다.
이 글에서는 이 비대칭을 편의상 **‘제도적 히스테리시스(hysteresis)’**라고 부르겠습니다. 물리학과 경제학에서 과거의 상태가 현재의 경로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으로 1944년부터 2026년까지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는 동안, 이 비대칭은 모습을 바꿔 가며 여러 번 등장할 것입니다.
읽기 전에
본문 사이사이에는 사견이 끼어 있습니다. 사견은 자료를 읽으며 떠오른 개인적인 감상과 비유를 담은 자리입니다. 역사학계의 합의나 법원의 공식 평가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둡니다. 주석은 각 장 끝에 모아 두었고, 번호는 글 전체에 걸쳐 이어집니다.
* * *
주
¹ 독일 연방정치교육원(bpb), Bert Pampel, 「Was bedeutet ‚Aufarbeitung der Vergangenheit‘?」 및 아도르노 강연 소개. [bpb 1](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archiv/537192/was-bedeutet-aufarbeitung-der-vergangenheit-kann-man-aus-der-vergangenheitsbewaeltigung-nach-1945-fuer-die-aufarbeitung-nach-1989-lehren-ziehen/) · [bpb 2](https://www.bpb.de/themen/deutschlandarchiv/302850/im-jahr-der-jubilaeen-die-ungewisse-republik/)
1장. 1944~1949: 폐허 위의 청산
전쟁이 끝나 갈 무렵 유럽 곳곳에서 청산이 시작됐습니다. 이 장에서 만나는 네 장면, 곧 그리스 마을의 학살, 프랑스의 숙청, 연합국의 탈나치화, 한 법철학자의 공식은 모두 수십 년 뒤에야 결말을 맞습니다.
1944년 6월, 디스토모
1944년 6월 10일, 그리스 중부의 작은 마을 디스토모에 독일 SS 부대가 들이닥쳤습니다. 이날 민간인 200명 이상이 살해당했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노인과 여성, 어린이와 갓난아기도 있었습니다.²
명백한 전쟁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독일 최고 법정에 이르기까지는 60년이 넘게 걸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족들은 낯선 법 논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7장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프랑스: 더 세게 시작한 청산
같은 해 여름 해방된 프랑스에서는 ‘에퓌라시옹(épuration)’, 즉 부역 청산이 시작됐습니다. 나치 독일과 점령당한 나라의 부역 문제를 그대로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프랑스는 비교를 위해 꼭 짚어 볼 만한 사례입니다.
프랑스의 청산은 해방 직후 서독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법 밖에서 벌어진 보복과는 별도로 정식 재판과 행정 숙청이 진행됐습니다. 부역자들은 사형과 징역, 시민권 제한, 공직 박탈 같은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가 되자 분위기가 빠르게 바뀝니다. 사면과 국민 화해가 강조되면서 청산은 서둘러 막을 내립니다.
프랑스에는 독특한 방패도 있었습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비시 정권을 합법적인 프랑스 공화국의 계승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논리는 공화국의 법적 정통성을 되살리는 데 매우 쓸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차원에서는 이런 연쇄를 낳을 수도 있었습니다.
1. 비시는 합법적인 공화국이 아니었다.
2. 그러니 비시는 ‘진짜 프랑스’가 아니었다.
3. 진짜 프랑스는 레지스탕스와 자유프랑스였다.
4. 그렇다면 프랑스의 평범한 관료 조직이 유대인 박해에 얼마나 가담했는가 하는 질문은 흐려진다.
심사를 통과한 남자, 모리스 파퐁
이 문제를 상징하는 인물이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입니다. 그는 비시 정권 시절 보르도가 있는 지롱드 도청의 고위 관료였고, 유대인 관련 업무에 대한 서명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1944년 12월, 내무부 청산위원회는 그가 비시 정권에서 공식 직책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레지스탕스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로 그의 공직 유지를 권고했습니다.³
파퐁은 청산을 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청산을 ‘통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 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5장과 6장에서 확인하겠습니다.
독일: 탈나치화와 살아남은 당원 카드
패전한 독일에서는 연합국이 탈나치화를 실시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심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공직과 연금 자격을 잃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는 바로 다음 장의 주제입니다.
이 시기에 훗날 큰 의미를 갖게 될 문서 더미 하나가 살아남습니다. 나치당(NSDAP)의 중앙·지역 당원 카드입니다. 이 카드들은 전쟁 말기에 폐기하려고 제지 공장까지 옮겨졌지만 살아남았고, 미군이 이를 압수했습니다.
미국은 이 당원 카드와 SS 인사 자료 등을 ‘베를린 문서센터(Berlin Document Center, BDC)’에서 관리했습니다. BDC는 미 육군, 이후 미 국무부의 관리 아래 있었고, 운영비는 서독이 댔습니다.⁴ 이 문서고가 독일에 넘어가기까지는 거의 반세기가 걸립니다. 그 사연은 4장부터 차례로 펼쳐집니다.
1946년, 라드브루흐 공식
1946년,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가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나치 시대에 ‘법률의 형태’를 띠고 저질러진 불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훗날 ‘라드브루흐 공식’이라 불리게 되는 그의 주장은 단순합니다. 실정법은 원칙적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과 정의의 모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일 때는 실정법이 정의에 자리를 내줘야 합니다.
이 공식은 나치 시대의 불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쓰였습니다. 다만 나치 판사들을 ‘법왜곡죄’로 처벌하는 데에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서독 사법부가 판사의 고의를 매우 엄격하게 입증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반세기 뒤, 전혀 다른 과거를 만나 힘차게 되살아납니다. 이 이야기는 6장에서 다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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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²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2006년 2월 15일 결정, 2 BvR 1476/03(디스토모 사건). [BVerfG](https://www.bundesverfassungsgericht.de/SharedDocs/Entscheidungen/DE/2006/02/rk20060215_2bvr147603.html)
³ 지롱드 도립문서보관소, 「Archives des procédures d’instruction… Maurice Papon」. 1944년 12월 청산위원회가 비시 정권의 공식 직책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에 우호적이었다며 공직 유지를 권고한 기록을 소개합니다. [Archives de la Gironde](https://archives.gironde.fr/ark:/25651/vtaf88959716a324c85)
⁴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Die NSDAP-Mitgliederkartei」;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Foreign Records Seized」. [Bundesarchiv](https://www.bundesarchiv.de/das-bundesarchiv/aus-unserer-archivarbeit/die-nsdap-mitgliederkartei/) · [NARA](https://www.archives.gov/research/guide-fed-records/groups/242.html)
2장. 1949~1953: 재통합의 공화국
1949년 서독이 세워지자 정책의 무게중심은 빠르게 숙청에서 사회 통합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같은 몇 년 사이, 신생 민주주의는 극우 정당을 해산시키기도 하고 옛 나치 인맥의 침투를 겪기도 합니다. 이 장의 4년은 서독 과거 청산의 기본 설계도가 그려진 시기입니다.
1950년, 조용히 지워진 조항 하나
1950년, 전쟁 피해자에게 사회보상 급여를 주는 ‘연방원호법(Bundesversorgungsgesetz, BVG)’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정부가 처음 낸 법안의 제8조에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전력이 있는 사람(politisch vorbelastete Personen)’을 급여에서 배제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1997년 연방정부가 연방의회에 제출한 답변은 이 조항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조항이 있었다면 나치 거물이나 전쟁범죄자에게 급여를 거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이 조항은 의회 심의 과정에서 삭제됐습니다. 정부는 이것을 ‘당시 의식적으로 내려진 결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⁵
1950년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이 삭제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이 장의 마지막과 3장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1951년, ‘131법’
이 시기를 상징하는 법이 기본법 제131조와 이를 구체화한 1951년의 이른바 ‘131법’입니다. 이 법은 종전 때문에 공직을 잃은 사람들, 동부 영토에서 쫓겨난 공무원, 옛 직업군인 등 아주 넓은 집단의 법적 지위를 정리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러니 ‘131법 대상자 = 나치’라고 이해하면 틀립니다.
그러나 탈나치화로 공직을 잃었던 사람들도 이 틀을 통해 대거 돌아왔습니다. 독일 연방정치교육원(bpb)은 약 15만 명이 탈나치화 과정에서 잃었던 연금 청구권과 공직 기회를 되찾았다고 설명합니다. 이 법은 사회민주당(SPD)의 찬성까지 받아 통과됐습니다.⁶
이것을 누군가 밀실에서 만든 ‘나치 구제 계약’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당시 서독에는 행정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수백만 명이 어떤 형태로든 나치 국가와 얽혀 있었고, 냉전은 빠르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사회 전체를 영원히 시민사회 밖으로 내쫓는 정책은 현실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초기 서독의 암묵적 타협을 굳이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이 정도일 것입니다.
나치 체제는 범죄적 독재로 부정한다. 그러나 그 체제 아래에서 살고 일했던 사람들 상당수는 새 민주주의에 다시 받아들인다.
문제는 누구를 얼마나 빨리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거꾸로 누구의 배제가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였습니다.
1951년 봄, 니더작센의 충격
같은 해 5월, 신생 공화국은 첫 번째 경보를 듣습니다. 니더작센 주의회 선거에서 ‘사회주의제국당(Sozialistische Reichspartei, SRP)’이 11.0%를 얻은 것입니다.⁷
SRP는 1949년 10월에 세워진 정당입니다. 쓰는 말부터 나치당을 떠올리게 했고, 지도부 대부분이 나치당이나 그 산하 조직 출신이었습니다. 선거에서는 탈나치화의 ‘부당함’, 본(Bonn)의 ‘체제 정치인’들, 서방과의 결속을 공격했습니다.⁷
이 당의 간판 얼굴은 오토 에른스트 레머(Otto Ernst Remer)였습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과 쿠데타 시도가 벌어졌을 때, 베를린에서 이를 진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장교입니다.⁷ 선거를 앞둔 1951년 5월, 레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유세장에서 7월 20일 거사 가담자들을 ‘반역자’라고 비방했습니다. 이미 여러 번 해 온 말이었습니다.⁸
SRP의 약진은 민주 정당 정치인들을 긴장시켰습니다. 계산도 깔려 있었습니다. 독일이 스스로 조치하지 않으면, 아직 남아 있던 연합국 점령 당국이 직접 나설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습니다.⁷
1952년 3월, 브라운슈바이크 법정
레머의 발언을 법정에 세운 사람이 프리츠 바우어(Fritz Bauer)입니다.
바우어는 유대계 사회민주주의자였습니다. 나치 집권 뒤 투옥과 망명을 겪었고, 전후 귀국해 검사가 되었습니다. 1950년 브라운슈바이크 검찰총장이 된 그는 1952년 3월 이른바 ‘레머 재판’에서 직접 기소를 맡았습니다.⁸
이 재판에서 바우어가 공격한 것은 레머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7월 20일의 저항자들을 ‘반역자’로 몰아가던 전후 사회의 서사 전체였습니다. 법원은 레머에게 징역 3개월을 선고했고, 저항자들의 행동을 나치라는 불법국가에 맞선 정당한 저항으로 인정했습니다.⁸ ⁹ 레머는 형을 살기 전에 이집트로 달아났습니다.⁸
바우어는 이 글에 몇 번 더 등장합니다. 그때마다 기억해 둘 점은 하나입니다. 그가 늘 옳았다는 영웅 서사가 아닙니다. 같은 시대, 같은 서독, 같은 기본법과 같은 냉전 조건 안에서도 더 적극적인 과거 청산을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상상한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52년 10월, 첫 번째 정당 해산
연방정부는 1951년 5월 SRP 해산을 신청하기로 결정했고, 같은 해 11월 연방헌법재판소에 신청서를 냈습니다.¹⁰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뒤, 독일공산당(KPD)에 대한 해산 신청서도 냈습니다. 좌익 극단주의 쪽에도 똑같이 맞서겠다는 신호였습니다.¹¹
그러니까 서독의 ‘방어적 민주주의(wehrhafte Demokratie)’는 좌우 양쪽을 거의 동시에 겨냥하며 출발한 셈입니다. 이 점은 3장과 4장에서 중요해집니다.
1952년 10월 23일, 연방헌법재판소는 SRP를 위헌 정당으로 판결하고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서독 역사상 첫 정당 해산이었습니다. 재판소는 SRP가 인권을 무시하고, 복수정당제를 공격하며,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에 따라 조직되어 있고, 인적·조직적으로 나치당과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SRP 소속 연방의원과 주의원들은 의원직도 잃었습니다. SRP는 판결을 앞둔 9월에 스스로 해산을 선언해 두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¹⁰
이 판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산을 하나 남겼습니다. 바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정의입니다. 재판소는 이를 모든 폭력적·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국민의 자기결정과 자유·평등에 기초한 법치국가적 질서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핵심 원칙으로는 기본권 존중, 국민주권, 권력분립, 정부의 책임성, 행정의 합법성,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제와 정당의 기회균등 등을 꼽았습니다.¹⁰ 이 정의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독일 헌법 해석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2017년에 다시 손질되는데, 그 이야기는 7장에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성공담에는 단서가 하나 붙습니다. 해산 이후 기성 우파 정당들(독일당 DP, 자유민주당 FDP, 실향민당 BHE)은 옛 SRP 유권자 약 36만 7천 명의 표를 얻으려 애썼습니다. SRP의 주장 일부를 받아들였고, 옛 SRP 간부들을 후보로 영입하기도 했습니다. 연방의회 학술조사처의 보고서는 이런 흡수가 극우 진영을 약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동시에 그것이 선거 전술적 동기에서 나왔고 당시에도 거센 비판을 받았다는 점도 함께 적고 있습니다.¹⁰
극우 정당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지자와 간부 일부는 기성 정당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이 장의 주제인 ‘재통합’은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1953년 1월, 영국군이 문을 두드리다
그리고 바로 그 흡수의 그림자가 몇 달 만에 드러납니다.
베르너 나우만(Werner Naumann)은 괴벨스가 이끈 선전부의 차관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유언장대로라면, 괴벨스가 정부를 이끌게 되면서 그 뒤를 이어 선전장관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전후 그는 신분을 숨기고 지내다가, 1950년 사면 이후 본명으로 뒤셀도르프의 한 무역회사를 운영했습니다.¹²
나우만은 옛 나치 인사들을 모아 모임을 꾸렸고, 보수 정당들, 특히 자유민주당(FDP)에 침투하려 했습니다.¹² FDP는 당시 아데나워 연립정부의 한 축이었습니다. FDP 정치인 에른스트 아헨바흐(Ernst Achenbach)의 중개로 이 모임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FDP에 상당한 영향력을 얻었고, 주 FDP는 점점 뚜렷한 우경화의 길을 걸었습니다.¹³
1953년 1월, 나우만과 측근들을 체포한 것은 독일 당국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점령 당국이었습니다.¹² ¹³
서독 사회의 반응은 흥미롭습니다. 많은 언론이 영국의 조치를 부당하거나 지나치다고 보았고, 독일 정치권의 반응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관심은 나치 인맥이 독일 정치에 얼마나 스며들었는가보다 영국의 ‘진짜 속셈’이 무엇이냐에 쏠렸습니다. 기독민주연합(CDU) 정치인 게프하르트 뮐러는 나우만 체포를 프랑스에서 진행 중이던 오라두르 학살 재판과 묶어, 유럽방위공동체 조약을 겨냥한 ‘서로 짜고 벌인 총공세’라고까지 불렀습니다.¹³
영국은 거센 비판 끝에 4월 1일 이들을 독일 사법부에 넘겼습니다. 나우만은 7월 28일 풀려났고, 연방대법원은 1954년 12월 처벌할 만한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며 사건을 최종 종결했습니다.¹²
나우만은 1953년 총선에 극우 독일제국당(DRP) 후보로 나서려 했습니다. 이를 막은 것은 형사재판이 아니라 뒤늦은 탈나치화 절차였습니다. 그는 ‘중대 책임자’ 등급으로 분류되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잃었습니다.¹² 정치의 길이 막힌 그는 옛 인맥을 통해 재계로 옮겨 갔고, 대기업 계열사의 이사회에까지 이름을 올렸습니다.¹²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SRP 해산과 나우만 체포는 불과 3개월 간격으로 일어났습니다. 둘을 나란히 놓으면 신생 민주주의의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보입니다.
SRP는 스스로 나치당의 후계자임을 감추지 않은 정당이었습니다. 이런 정당은 헌법재판소가 금지할 수 있었고, 실제로 금지했습니다. 독일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지킨 첫 사례입니다.
나우만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따로 당을 차리지 않고 연립 여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이들을 멈춰 세운 것은 독일 헌법기관이 아니라 점령국이었고, 독일 사법부는 결국 처벌할 행위를 찾지 못했습니다.
간판을 내건 극우는 금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성 정당 안으로 들어온 과거는 같은 도구로 잡기가 훨씬 어려웠습니다.
이 대비는 4장에서 본격적으로 만날 주제를 미리 보여 줍니다. 과거가 더 이상 ‘나치’라는 간판을 달지 않고, 정상적인 정치와 정상적인 전문성의 언어 속으로 들어왔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는 주제입니다. 나우만 서클과 FDP를 잇던 아헨바흐라는 이름도 5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1953년, 하이드리히의 미망인
같은 해 북부 슐레스비히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나치 친위대 보안 조직의 수장이었고, 유대인 학살을 조율한 반제 회의를 주재한 인물입니다. 그는 1942년 프라하에서 공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전후 그의 미망인 리나 하이드리히(Lina Heydrich)가 연방원호법에 따른 유족 급여를 신청했습니다.
1953년, 슐레스비히 상급보험청은 그녀의 유족 급여를 인정했습니다.¹⁴ 바로 3년 전 의회가 지운 그 배제 조항이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다음 장에서 이어집니다.
* * *
주
⁵ 독일 연방의회, Drucksache 13/7055, 1997. 정부는 1950년 정부안 제8조가 ‘politisch vorbelastete Personen’을 배제할 수 있었고, 나치 거물이나 전쟁범죄자의 급여를 막을 수 있었으나 의회 심의 뒤 삭제됐으며 그 결정이 의식적으로 내려졌다고 설명합니다. [Bundestag](https://dserver.bundestag.de/btd/13/070/1307055.pdf)
⁶ bpb, 「Politische Entscheidungen und Einstellungen」; bpb, 「11. Mai 1951」. [bpb 1](https://www.bpb.de/themen/deutsche-einheit/deutsche-teilung-deutsche-einheit/43652/politische-entscheidungen-und-einstellungen/) · [bpb 2](https://www.bpb.de/themen/zeit-kulturgeschichte/deutschland-chronik/131407/11-mai-1951/)
⁷ bpb, Torsten Oppelland, 「Sozialistische Reichspartei」, 2020. [bpb](https://www.bpb.de/themen/parteien/parteien-in-deutschland/500841/sozialistische-reichspartei/)
⁸ Lexikon der politischen Strafprozesse, 「Otto Ernst Remer」; Deutsche Biographie, 「Remer, Ernst」. [Lexikon](https://www.lexikon-der-politischen-strafprozesse.de/wp-content/uploads/2016/04/Otto-Ernst-Remer.pdf) · [Deutsche Biographie](https://www.deutsche-biographie.de/119198908.html)
⁹ bpb, 「Fritz Bauers Robe」; 「Zwischen Diffamierung und Anerkennung: Zum Umgang mit dem 20. Juli 1944 in der frühen Bundesrepublik」. [bpb 1](https://www.bpb.de/themen/zeit-kulturgeschichte/geteilte-geschichte/343073/fritz-bauers-robe/) · [bpb 2](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186870/zwischen-diffamierung-und-anerkennung-zum-umgang-mit-dem-20-juli-1944-in-der-fruehen-bundesrepublik/)
¹⁰ 독일 연방의회 학술조사처, 「Nachfolgeorganisationen von SRP und KPD nach den Verbotsurteilen des Bundesverfassungsgerichts」, WD 1 - 3000 - 034/13, 2013. SRP 해산 신청 경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정의, 의원직 상실, 해산 이후 기성 정당의 SRP 지지층 흡수를 정리합니다. [Bundestag](https://www.bundestag.de/resource/blob/405264/1c43548de5a3630781ec4e94366e64ae/WD-1-034-13-pdf.pdf)
¹¹ Henning Hansen, 『Die Sozialistische Reichspartei (SRP). Aufstieg und Scheitern einer rechtsextremen Partei』, Düsseldorf 2007(의회주의·정당사 위원회 KGParl 공개본). [KGParl](https://kgparl.de/wp-content/uploads/2007/01/die-sozialistische-reichspartei.pdf)
¹² Franz Menges, 「Naumann, Werner」, 『Neue Deutsche Biographie』 18권, 1997. 영국의 체포, 4월 1일 독일 사법부 이관, 7월 28일 석방, 1954년 12월 연방대법원의 종결, 탈나치화 절차에 따른 선거권 박탈과 이후 재계 진출을 정리합니다. [Deutsche Biographie](https://www.deutsche-biographie.de/sfz69231.html)
¹³ bpb, Sonja Levsen, 「Zwischen Konformität und Konflikt. Die westdeutsche Gesellschaft 1953」,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2023. [bpb](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1953-2023/520825/zwischen-konformitaet-und-konflikt/)
¹⁴ 독일 연방의회, Plenarprotokoll 3/56, 1959년 1월 22일, 3057~3058쪽. 하이드리히 유족 급여, 정부의 반대 논리, 정부안 배제 규정의 삭제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Bundestag](https://dserver.bundestag.de/btp/03/03056.pdf)
3장. 1953~1959: 정상화의 시간
1950년대 중반 서독은 ‘경제 기적’과 함께 빠르게 안정을 찾아 갑니다. 이 시기에 내려진 판결과 결정들은 하나같이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수십 년을 갑니다.
1956년 8월, KPD 해산
1953년 총선에서 독일공산당(KPD)은 2.2%를 얻어 연방의회에서 사라졌습니다. 1956년 무렵에는 당원 수도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¹⁵ 그런데 1956년 8월 17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 당을 위헌 정당으로 해산했습니다.
재판소는 정당을 금지하는 데 그 정당이 실제로 권력을 잡을 현실적 가능성까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없애려는 목적이 있고, 그것을 위해 적극적·투쟁적·공격적으로 행동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성공할 가능성이 사실상 없어도 금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혁명이 일어날 시점이 아니라 체제 전복이라는 목표 그 자체라는 것이었습니다.¹⁶
2장에서 본 것처럼 SRP와 KPD의 해산 신청은 사흘 간격으로 나란히 제출됐습니다. 그러나 결말까지 걸린 시간은 달랐습니다. SRP 판결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고, KPD 판결은 5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해산 이후 KPD 주변 사람들이 치른 비용도 작지 않았습니다. 1951년부터 1968년 사이 불법 정치활동 혐의로 수사를 받은 사람은 연구자에 따라 12만 5천 명에서 15만 명가량으로 추정됩니다. 많은 이들이 직장이나 연금 수급권을 잃었습니다. 나치에게 박해받았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전후의 정치적 범죄 혐의 때문에 나치 피해 보상에서 배제된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¹⁶
이 장면은 4장에서 다시 비교 대상으로 돌아옵니다. 1960년대, 선거에서 훨씬 강해진 극우 정당 앞에서 정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1956년, 신티·로마 판결
같은 해 연방대법원(BGH)은 신티·로마에 대한 1943년 이전의 박해를 모두 인종 박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법원과 보상 행정에는 이들을 ‘반사회적’, ‘범죄적’, ‘유랑 성향’을 지닌 집단으로 보는 오래된 편견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조치들을 인종 박해가 아니라 ‘치안 조치’로 해석했습니다.¹⁷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보상이 늦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나치가 피해자를 분류할 때 쓰던 사회적 편견이 전후 민주국가의 피해자 인정 기준 안에도 남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판결은 7년 뒤 일부 수정됩니다. 그 이야기는 4장에서 이어집니다.
1956년, 바우어는 프랑크푸르트로
같은 해 프리츠 바우어는 헤센주 검찰총장이 되어 프랑크푸르트로 옮깁니다. 그곳에서 그는 전후 독일 사법사에서 가장 중요한 재판 가운데 하나를 준비하게 됩니다.¹⁸
1958년, 하이드리히 유족 급여 확정
1958년, 슐레스비히 주사회법원은 하이드리히 미망인의 유족 급여를 확정했습니다.
연방정부는 법정에서 반대했습니다. 하이드리히 암살은 정치적 동기의 암살이지 군사적으로 의미 있는 전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희생을 낳은 데 공동 책임이 있는 나치 지도층과 그 유족에게 ‘전쟁 희생자’ 급여를 주는 것은 입법자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¹⁹
그러나 법원은 영국 군사기관의 지원, 전쟁 수행에 미칠 효과 등을 근거로 하이드리히의 죽음을 연방원호법상 ‘직접적인 전쟁 영향’으로 보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법률의 예상치 못한 빈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1959년 연방의회에서 정부가 설명한 내용은 더 중요합니다. 법원이 근거로 삼은 것이 바로 2장에서 본 그 입법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법원의 판단은 대략 이랬습니다.
“입법자가 이런 사람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 빠뜨린 것이 아니다. 정부안에 있던 배제 가능성을 연방의회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삭제했다.”¹⁹
우연인가, 감수한 결과인가
처음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보상 제도는 형벌 제도가 아닙니다. 정치적·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회 급여를 빼앗는 것은 위험합니다. 범죄가 있다면 형사법으로 처벌하면 됩니다. 법치국가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하이드리히 사건처럼 그 원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실제로 드러난 뒤에도 기본 구조는 오랫동안 유지됐습니다. 연방원호법에 가해자 배제 조항이 다시 생기는 것은 40년 뒤인 1998년입니다(6장).
그렇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보다 ‘결과를 알고도 다른 원칙을 앞세우며 감수한 효과’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이건 해석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두 표현은 여전히 다릅니다. “나치 가해자를 보호하려고 만들었다”와 “가해자에게도 유리한 결과가 생긴다는 걸 알지만 사회법의 가치중립성을 우선한다”는 같은 동기가 아닙니다. 다만 결과에 대한 정치적·도덕적 책임의 거리는 상당히 좁아집니다.
여기에 앞의 KPD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대비는 더 날카로워집니다. 한쪽에서는 나치에게 박해받은 공산주의자가 전후의 정치활동 때문에 피해 보상에서 밀려났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홀로코스트 설계자의 유족이 ‘전쟁 희생자’ 급여를 받았습니다. 두 결과는 서로 다른 법과 다른 기관에서 나왔고, 누군가 한자리에서 그렇게 설계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시기, 같은 사회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1958년, 루트비히스부르크
1958년, 루트비히스부르크에 나치 범죄를 수사하기 위한 각 주 법무행정의 중앙사무소가 세워집니다. 그해 울름에서 열린 특무부대(아인자츠그루펜) 재판이, 그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대량 학살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낸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때까지 나치 범죄 수사는 피해자의 고소나 우연한 발견에 크게 기대고 있었습니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사는 이렇게 종전 13년 뒤에야 시작됐습니다.
1959년, 아도르노의 강연
1959년, 아도르노는 ‘과거 청산이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강연을 합니다. 프롤로그에서 소개한 바로 그 강연입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이제 충분히 반성했으니 끝내자”는 식의 청산이었습니다.²⁰
1950년대를 돌아보면 그의 경계가 어디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31법으로 옛 공직자들이 돌아왔고, 하이드리히의 미망인은 유족 급여를 받았으며, 신티·로마는 자신들이 겪은 일이 ‘치안 조치’였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모두 ‘정상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자동세척기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욕망과 피로, 공포와 이해관계를 폭력 대신 정치와 선거로 번역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니 다수가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고 원하면 민주주의는 그 요구도 반영합니다. 1950년대 서독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나쁘다”는 결론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민주주의가 왜 다수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보여 줍니다. 헌법과 기본권, 독립된 법원, 언론과 학문, 소수자 권리 같은 장치는 현재 다수의 감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실과 권리를 보존하려고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 기관들 역시 결국 그 시대의 사람들로 채워진다는 점입니다. 헌법은 새것이어도 판사는 옛 사회에서 왔을 수 있습니다. 법원은 독립적이어도 법감정은 시대의 편견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자유로워도 독자들이 어떤 이야기는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956년의 신티·로마 판결이 그런 예입니다.
민주주의는 자동세척기가 아닙니다.
* * *
주
¹⁵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Verbot der KPD」, 1956년 8월 17일. [Bundesarchiv](https://www.bundesarchiv.de/themen-entdecken/online-entdecken/dokumente-zur-zeitgeschichte/verbot-der-kpd/)
¹⁶ 앞의 주 10과 같은 자료, 5~6쪽(KPD 판결의 논리), 20쪽(해산 이후 수사 규모, 공산주의자의 나치 피해 보상 배제). [Bundestag](https://www.bundestag.de/resource/blob/405264/1c43548de5a3630781ec4e94366e64ae/WD-1-034-13-pdf.pdf)
¹⁷ bpb, 「NS-Verfolgung von „Zigeunern“ und „Wiedergutmachung“ nach 1945」; 「Wiedergutmachung in Deutschland 1945–1990」. [bpb 1](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33275/ns-verfolgung-von-zigeunern-und-wiedergutmachung-nach-1945/) · [bpb 2](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162883/wiedergutmachung-in-deutschland-1945-1990-ein-ueberblick/)
¹⁸ bpb, 「Der Frankfurter Auschwitz-Prozess」; 「Urteil im Frankfurter Auschwitz-Prozess」. [bpb 1](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204287/der-frankfurter-auschwitz-prozess/) · [bpb 2](https://www.bpb.de/kurz-knapp/hintergrund-aktuell/314099/urteil-im-frankfurter-auschwitz-prozess/)
¹⁹ 앞의 주 14와 같은 자료(Plenarprotokoll 3/56). [Bundestag](https://dserver.bundestag.de/btp/03/03056.pdf)
²⁰ 앞의 주 1과 같은 자료. [bpb](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archiv/537192/was-bedeutet-aufarbeitung-der-vergangenheit-kann-man-aus-der-vergangenheitsbewaeltigung-nach-1945-fuer-die-aufarbeitung-nach-1989-lehren-ziehen/)
4장. 1960년대: 법정의 과거, 조문 속의 과거
1960년대에 서독은 처음으로 나치 범죄를 대규모로 법정에 세웁니다. 그런데 바로 같은 10년 동안, 과거는 전혀 다른 경로로도 돌아옵니다. 법률 전문가의 조문 속으로 말입니다.
1963년, 록신의 조직지배론
1961년 예루살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이 열립니다. 이 재판은 형법학자들에게도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직접 총을 쏘지 않고 책상에서 수백만 명의 죽음을 관리한 사람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1963년, 형법학자 클라우스 록신(Claus Roxin)은 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조직지배(Organisationsherrschaft)에 의한 간접정범’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거대한 국가 범죄 기계에서 명령하는 사람은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행자 한 명이 거부해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 명령이 실행될 만큼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면, 뒤에서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도 단순한 교사범이 아니라 범죄의 정범으로 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²¹
록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 이론의 씨앗은 그보다 조금 앞서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 이후 남아 있는 그의 첫 글은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재판할 수 있다」라는 신문 기고였는데, 바로 여기에 훗날 ‘조직적 권력 기구에 의한 정범’이라는 구상의 싹이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²¹
나치의 관료적 대량 범죄를 설명하려고 태어난 이 이론이 독일 최고 법원의 판례에서 본격적으로 꽃피는 것은 30년 뒤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나치가 아니었습니다. 6장에서 확인하겠습니다.
1963년, 신티·로마 판결의 일부 수정
같은 해 연방대법원은 1956년 판결을 일부 고쳐, 1938년 이후의 박해에는 인종정책적 동기가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²² 3장에서 본 판결로부터 7년 뒤의 일입니다. 1938년 이전의 박해는 여전히 이 인정 밖에 남았습니다.
1963~1965년,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
1963년 12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친위대원들을 피고로 한 재판이 열립니다. 이 재판이 성립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 헤센주 검찰총장 프리츠 바우어였습니다.
바우어는 아우슈비츠의 범죄를 수많은 작은 개별 사건으로 흩뜨리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범죄 복합체로 법정에 드러내려 했습니다.²³ 재판은 1965년 8월 판결로 마무리됩니다.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이 서독 사회의 공적 언어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온 순간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법무부의 풍경
그런데 같은 시기 연방법무부의 모습은 사뭇 달랐습니다. 후대의 조사에 따르면 1963년 연방법무부 지도급 인사의 55%가 과거 나치당원이었고, 22%가 돌격대(SA) 출신이었습니다. 15% 이상은 나치 시대 제국법무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습니다.²⁴
바우어가 법정에서 과거를 드러내는 동안, 법을 만들고 다듬는 부처의 상층부는 상당 부분 그 과거에서 온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몇 년 뒤 하나의 법률로 결과를 드러냅니다.
1963~1967년, ‘과거에 짐이 없는’ 젊은 형법학자들
법무부 상층부가 과거에서 온 사람들로 채워져 있던 바로 그때, 대학에서는 전혀 다른 세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본 록신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1963년 자르브뤼켄에서 열린 형법학자 대회 기간에, 록신은 형법학자 베르너 마이호퍼(Werner Maihofer)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그곳에는 록신의 표현을 빌리면 ‘과거에 짐이 없는(von der Vergangenheit unbelastet)’ 젊은 형법학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1962년에 내놓은 새 형법전 초안, 이른바 ‘E 1962’를 시대에 역행하고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했습니다. 법치국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새 형법을 만드는 것이 자신들 젊은 세대의 과제라는 이야기도 이 자리에서 나왔습니다.²¹
E 1962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열린 ‘대형법위원회’를 거쳐 학계와 실무의 원로들이 함께 만든, 이른바 ‘거대 형법 개혁’의 결과물이었습니다.²¹ 이 장 뒷부분에서 만날 에두아르트 드레허도 바로 이 개혁 작업에 참여한 법무부 관료였습니다.²⁴
1964년 함부르크 형법학자 대회에서 갈등은 공개적으로 터졌습니다. 록신이 E 1962의 착오 규정을 비판하자, 원로 형법학자 한스 벨첼(Hans Welzel)이 록신의 발표를 듣기도 전에 써 둔 반박 원고를 곧바로 꺼내 읽었습니다. 훗날 형법학자 빈프리트 하세머(Winfried Hassemer)는 두 진영, 그리고 두 세대가 이토록 선명하게 갈린 장면을 다시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습니다.²¹
다만 록신 자신은 그 대립이 생각만큼 화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그날 저녁 E 1962의 공동 저자였던 빌헬름 갈라스(Wilhelm Gallas)가 그를 와인 바로 불러 오래 토론했고, 벨첼과도 훗날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²¹
같은 해, 스위스 출신 형법학자 페터 놀(Peter Noll)이 함께 새 형법전을 써 보자고 제안합니다. 그 결과가 1966년 10월에 나온 『형법전 대안 초안 총칙(Alternativ-Entwurf eines Strafgesetzbuches, Allgemeiner Teil)』, 줄여서 ‘대안 초안(AE)’입니다. 저자는 독일과 스위스의 형법학자 14명이었습니다.²¹ ²⁴ᵃ
대안 초안은 응보가 아니라 재사회화를 형벌의 중심에 두었습니다.²⁴ᵃ 록신은 이 초안이 중징역(Zuchthaus)과 단기 자유형을 없애며 큰 파급력을 남겼다고 회고합니다. 인터뷰어인 법사학자 토마스 두베(Thomas Duve)는 1969년의 제1·2차 형법개혁법에서 대안 초안의 영향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평가합니다.²¹
나치 형법의 반대편에 선 형법학
록신에게 이 작업은 단순한 법 기술의 개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2006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형법 구상 전체를 나치 시대 형법에 대한 ‘대조 프로그램(Kontrastprogramm)’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정이 아니라 행위를 처벌하는 형법, 의무 위반이 아니라 법익 보호, 체제 보호가 아니라 개인 보호라는 것입니다.²¹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Und ich habe schließlich im Jahre 1966 einer von der Ständigen Deputation des Deutschen Juristentages einberufenen Sachverständigenkommission angehört, die sich kritisch mit der auffallend milden Beurteilung nationalsozialistischer Gewaltverbrechen durch die deutschen Gerichte befaßte.”
(그리고 저는 1966년, 독일법률가대회 상임대표부가 소집한 전문가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독일 법원이 나치 폭력 범죄를 눈에 띄게 관대하게 판단해 온 데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위원회였습니다.)²¹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아우슈비츠 재판의 변호인 한스 라테른저(Hans Laternser)가 쓴 책을 법률 잡지에 매우 비판적으로 서평했던 일도 떠올립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자신은 형법학자로서의 활동을 처음부터 과거와의 결별이자 새로운 출발로 이해했다고요.²¹
2장에서 바우어를 두고 말했듯, 같은 시대에도 다른 길을 상상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들은 한 세대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1967년 4월, 사민당 의원단 회의실의 바우어
이 ‘대안’은 곧 의회에도 닿았습니다. 1967년 4월 18일, 대연정의 한 축이던 사회민주당(SPD) 연방의회 의원단은 대안 초안을 회의 안건으로 올렸습니다. 손님으로는 대안 초안의 저자인 위르겐 바우만(Jürgen Baumann), 베르너 마이호퍼, 페터 놀과 원로 형법학자 에버하르트 슈미트(Eberhard Schmidt), 그리고 헤센주 검찰총장 프리츠 바우어가 초대됐습니다.²⁴ᵃ
회의록에 따르면 바우어는 에르하르트·아데나워 정부의 형법 초안을 ‘반동적(reaktionär)’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대안 초안은 사회국가를 요구하는 기본법의 정신에 따른 형법이며, 재사회화를 통해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형법에 이를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전면 개정을 기다리기보다 핵심 분야부터 하나씩 고쳐 나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정치 형법부터 시작하고, 그다음 벌금형 규정으로 넘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²⁴ᵃ
의원단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회의를 주재한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는 이번 회기에 정치 형법 개정을 앞당기겠다고 하면서도, 재사회화 구상에는 약간의 의문을 표했습니다. 법률가 출신 의원 아돌프 뮐러엠메르트(Adolf Müller-Emmert)는 대안 초안이 SPD에서는 ‘열린 문으로 뛰어드는 셈’이지만, 그동안 다른 정당들에게 번번이 표결에서 졌다고 말했습니다. 위원회가 이미 정부안을 바탕으로 많은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지금은 정부안의 조문마다 대안 초안의 해당 부분을 나란히 놓고 심의하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²⁴ᵃ
이 회의 다음 날, 콘라트 아데나워가 세상을 떠났습니다.²⁴ᵃ 한 시대가 저물던 그 주에, 법정 밖의 바우어는 형법 자체를 바꾸는 싸움에 나서 있었습니다.
같은 10년의 두 얼굴
이 장면들을 이 장의 다른 장면들과 나란히 놓으면 1960년대의 두 얼굴이 보입니다.
1966년, 젊은 형법학자는 법원이 나치 폭력 범죄를 지나치게 관대하게 다룬다고 비판하는 위원회에 앉아 있었습니다. 1967년, 바우어는 정부의 형법 초안을 ‘반동적’이라 부르며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바로 그 거대 형법 개혁 작업에 참여했던 법무부 관료가 맡은 한 ‘기술적’ 개정이 나치 범죄 방조범들에게 시효의 문을 열어 줍니다.²⁴ 이 장 뒷부분에서 볼 드레허 법입니다.
관대함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위원회와 의원단 회의실에 머무는 동안, 법률의 조문은 다른 곳에서 쓰이고 있었습니다.
1966~1968년, NPD의 부상
그 사이 선거판에는 새로운 극우 정당이 등장합니다. 국가민주당(NPD)은 1966년부터 1968년 사이 7개 주의회에 진출해 모두 61석을 얻었습니다. 1968년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는 9.8%를 득표했습니다.²⁵
3장에서 본 1956년의 KPD보다 선거 정치에서 훨씬 강해진 극우 정당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정당에 대해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는 잠시 뒤에 보겠습니다.
1967~1968년, 문서고를 돌려주겠다는 제안
1장에서 본 베를린 문서센터(BDC)가 다시 등장합니다. 1967~1968년, 미국은 BDC를 독일에 넘기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미국이 내건 조건 가운데 하나는 관심 있는 사람이 방해받지 않고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조건을 서독 정부가 걱정했습니다. BDC를 연구한 역사학자 디터 크뤼거(Dieter Krüger)는 당시 정부가 ‘탈나치화의 재개(Neuauflage der Entnazifizierung)’를 우려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Kurt Georg Kiesinger)의 나치당 경력도 정치적 문제였습니다.²⁶
문서고는 결국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문서고를 둘러싼 이야기는 5장에서 훨씬 더 흥미로워집니다.
1968년 5월, 드레허 법: ‘차가운 사면’
1968년 5월 24일, 연방의회는 질서위반법 도입에 따른 법률 하나를 별도 토론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킵니다. 형법상 공범과 방조범의 형을 조정하는 기술적인 개정이었습니다.²⁴
그런데 그 결과는 전혀 기술적이지 않았습니다. 살인의 특정한 가중 요건을 본인에게서 입증하지 못한 나치 대량 학살의 방조범들은 형이 낮아졌고, 상당수 사건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것으로 처리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9년 연방대법원 판결을 거치며 많은 나치 사건이 시효에 막혔습니다. 훗날 이 법은 ‘드레허 법(Dreher-Gesetz)’ 또는 ‘차가운 사면’이라고 불리게 됩니다.²⁴
이름의 주인공 에두아르트 드레허(Eduard Dreher)는 나치 시대 특별법원의 검사였고, 최소 17건의 사형을 구형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전후 그는 연방법무부의 유력한 형법 전문가가 되었습니다.²⁴
후대 조사에 따르면, 이 결과가 처음부터 치밀하게 설계된 ‘비밀 사면’이었다고 단정할 증거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실수였다고 보기에도 강한 의문이 남습니다. 법 시행 전 한 연방대법원 판사가 시효 문제를 경고했고 그 경고가 드레허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드레허 자신도 과거의 사형 구형 때문에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²⁴
여기서 정당 하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일은 아닙니다. 당시 정부는 기독민주연합·기독사회연합(CDU/CSU)과 사회민주당(SPD)의 대연정이었고, 법무장관은 SPD의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emann)이었습니다.
법은 의회 전체의 동의로 통과했습니다.
더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구체제의 사람이 새 체제의 ‘정상적인 전문가’가 된 뒤에는, 과거의 연속성이 더 이상 “나치를 보호하자”는 언어로 나타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제 개인책임 원칙, 공범론, 공소시효, 기술적인 형법 개정, 법률 전문가의 판단이라는 아주 정상적인 언어 속에서 작동할 수 있습니다. 2장에서 나우만이 ‘간판 없는 침투’를 시도했다면, 1968년에는 간판도 침투도 필요 없었습니다. 과거는 더 이상 바깥에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기구의 상식과 전문성 속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1968년, KPD의 후계 정당과 NPD 금지 보류
1968년 9월, 금지된 KPD의 사실상 후계 조직인 독일공산당(DKP)이 합법적으로 창당됩니다. 그 전에 KPD 관계자들은 법무장관 하이네만 등과 합법적인 공산당 활동의 조건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²⁷
그리고 같은 해 12월 18일, 키징거 대연정의 국무회의에 NPD 해산 신청이 정식 안건으로 올라옵니다. 내무장관 에른스트 벤다(Ernst Benda)는 해산 신청이 법적으로 타당하고 정치적으로도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²⁸
그러나 총리실과 내각은 여러 가지를 걱정했습니다. 증거가 완전히 명백하지 않아 헌법재판소에서 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지면 NPD가 오히려 정치적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NPD를 금지하면 새로 생긴 DKP에도 상응하는 조치를 요구받을 수 있었습니다. 1969년 총선 전에는 판결이 나오기 어려웠고, 국민 상당수가 정당 금지보다 공개적인 정치 경쟁을 선호한다는 판단도 있었습니다.²⁸
결국 정부는 해산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NPD를 민주 정당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NPD는 1969년 총선에서 4.3%를 얻어 5% 문턱 바로 아래까지 갔습니다.²⁵
비대칭적인 시행착오
이 대비를 ‘친나치적 방향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2장에서 본 것처럼 서독이 처음 해산시킨 정당은 극우 SRP였으니까요. 두 시대 사이에는 냉전 정치의 변화, KPD 금지의 후유증, 정당의 자유에 대한 인식 변화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세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흐름은 분명해 보입니다.
1. 1952년, 나치당의 후계를 자처한 SRP는 해산됐습니다.
2. 1956년, 이미 정치적으로 약해진 KPD도 ‘성공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논리로 해산됐습니다.
3. 1968년, 주의회 7곳에 진입한 NPD 앞에서는 패소 위험과 정치적 역효과가 고려됐고, 정부는 공개 정치의 장에서 상대하기로 했습니다.
국가는 정당 금지라는 극단적인 권한을 매우 일찍, 좌우 양쪽에 썼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서야 그 권한을 훨씬 신중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 학습의 비용을 이미 KPD와 그 주변 사람들이 치렀다는 점입니다. 연방헌법재판소가 KPD 판결의 기준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2017년의 일입니다(7장).
1969년, 형법 175조 개정
남성 간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던 형법 175조는 나치가 1935년에 대폭 강화한 조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화된 규정은 서독에서 1969년까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²⁹
1969년 개정으로 처벌 범위가 줄었지만, 축소된 형태의 처벌 조항은 훨씬 오래 남았습니다. 나치가 강화한 형법이 민주국가에서 24년 동안 작동하며 내린 유죄판결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7장에서 이어집니다.
* * *
주
²¹ Thomas Rotsch, 「Von Eichmann bis Fujimori – Zur Rezeption der Organisationsherrschaft」, 『Zeitschrift für Internationale Strafrechtsdogmatik』 2009; 연방대법원 1994년 7월 26일 판결(5 StR 98/94) 관련 논의; Thomas Duve, 「Ein Gespräch mit Claus Roxin」, 『forum historiae iuris』, 2006년 5월 15일(록신의 회고, 특히 단락 7~8, 12~13, 21). [ZIS](https://zis-online.com/dat/ausgabe/2009_11_ger.pdf) · [BGH 1994](https://www.anwalt24.de/urteile/bgh/1994-07-26/5-str-98_94) · [Duve 인터뷰](https://forhistiur.net/media/zeitschrift/0605duve-roxin.pdf)
²² 앞의 주 17과 같은 자료. [bpb](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33275/ns-verfolgung-von-zigeunern-und-wiedergutmachung-nach-1945/)
²³ 앞의 주 18과 같은 자료. [bpb](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204287/der-frankfurter-auschwitz-prozess/)
²⁴ bpb, 「Amnestie von NS-Tätern – Das „Dreher-Gesetz“ von 1968」, 2023년 9월 26일. [bpb](https://www.bpb.de/kurz-knapp/hintergrund-aktuell/541083/amnestie-von-ns-taetern-das-dreher-gesetz-von-1968/)
²⁴ᵃ SPD 연방의회 의원단 회의 약식 의사록, 1967년 4월 18일(의회주의·정당사 위원회 KGParl 편집). 안건 4 ‘형법 개혁 대안 초안의 처리’와 편집자 주 14·21. [Fraktionsprotokolle](https://fraktionsprotokolle.de/spd-05_1967-04-18-t1710_EP.html)
²⁵ bpb, 「Zur Entwicklung des Rechtsextremismus in Deutschland」. NPD는 1966~1968년 7개 주의회 61석, 1969년 총선 4.3%를 기록했습니다. [bpb](https://www.bpb.de/themen/rechtsextremismus/dossier-rechtsextremismus/198940/zur-entwicklung-des-rechtsextremismus-in-deutschland/)
²⁶ Dieter Krüger, 「Archiv im Spannungsfeld von Politik, Wissenschaft und öffentlicher Meinung. Geschichte und Überlieferungsprofil des ehemaligen Berlin Document Center」,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45(1), 1997. [IfZ](https://www.ifz-muenchen.de/heftarchiv/1997_1_2_krueger.pdf)
²⁷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Die Gründung der Deutschen Kommunistischen Partei 1968」. [Bundesarchiv](https://www.bundesarchiv.de/themen-entdecken/online-entdecken/geschichtsgalerien/die-gruendung-der-deutschen-kommunistischen-partei-1968/)
²⁸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151. Kabinettssitzung am 18. Dezember 1968」, 안건 6(NPD 해산 신청 논의). 총리실 기록에는 DKP 문제, 증거 상황, 패소의 정치적 위험, 공개적인 정치 경쟁을 선호하는 여론 등이 언급됩니다. [Bundesarchiv](https://kabinettsprotokolle.bundesarchiv.de/resources/pdf/a059e4e4-70fb-460a-9e8f-08be6233bac8.pdf)
²⁹ 독일 연방의회, 「Verurteilungen wegen Homosexualität sollen aufgehoben werden」, 2017. [Bundestag](https://www.bundestag.de/webarchiv/textarchiv/2017/kw17-de-rehabilitierung-501820)
5장. 1970~1980년대: “이미 끝난 일을 왜 다시”
이 장의 주인공은 거대한 악당이 아닙니다. 나치를 감쌀 생각이 전혀 없었던 민주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1970~1977년, 한 의원의 반복된 질문
1970년부터 사회민주당(SPD) 의원 카를하인츠 한젠(Karl-Heinz Hansen)은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습니다. 정부는 왜 베를린 문서센터(BDC)를 넘겨받지 않는가?
1976년, 외무부의 한스위르겐 비슈넵스키(Hans-Jürgen Wischnewski)는 구체적인 반환 협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적절하지 않다(nicht opportun)’고 답했습니다. 그 무렵 BDC는 서독의 ‘점령 후속 비용’ 예산에서 1977년 한 해에만 130만 마르크를 지원받고 있었습니다.³⁰
“미국이 명부로 협박했다”는 이야기
여기서 흔히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이 50년 동안 당원 명부를 독점해 서독 엘리트의 나치 경력을 협박 수단으로 썼고, 서독은 자료가 없어서 과거 청산을 못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서사는 너무 단순합니다. 서독 행정기관들은 특정 인물에 대해 BDC에 조회할 수 있었고, 행정기관의 조회는 BDC 업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오히려 일반 연구자와 대중의 자유로운 접근에 훨씬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³⁰
게다가 4장에서 본 것처럼 역할은 시기마다 뒤집혔습니다. 1967~1968년, 자유로운 접근을 조건으로 문서고를 넘기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걱정한 쪽은 서독 정부였습니다.
1978년, 사민당 의원단 회의실
1978년, 이 문제가 SPD 내부에서 터집니다. 당대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의원단 회의에서 BDC와 과거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Wir wären von allen guten Geistern verlassen …”(우리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Das bringt uns innenpolitisch auch nicht einen Millimeter weiter voran.”(그건 국내 정치에서 우리를 1밀리미터도 앞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이미 어느 정도 끝난 일을 다시 여는 것은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였습니다.³¹
한젠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이 일부러 나치를 보호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정부가 8년 동안 분명한 설명 없이 BDC 인수를 미루면 객관적으로 그런 의심을 낳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이유를 설명하면 자신의 비판을 거두겠다고도 했습니다.³²
1978년 3월 7일, SPD 의원단은 결국 “정부가 옛 나치를 덮으려 한다”는 취지의 한젠의 공개 발언을 공식적으로 질책(Missbilligung)했습니다. 반대 6표, 기권 5표였습니다.³²
그렇다고 “브란트의 한마디에 반환이 영원히 묻혔다”고 보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후 헬무트 슈미트 정부는 반환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1979~1980년에는 구체적인 이전 협상까지 진행됐습니다. 그 뒤에는 오히려 미국 쪽 역사학자들과 기관들이 독일의 접근 제한을 걱정하며 이관에 소극적이던 시기도 있었습니다.³⁰ 문서고가 실제로 넘어오는 것은 1994년입니다(6장).
음모론보다 불편한 것
BDC 이야기의 진짜 교훈은 거대한 비밀 음모보다 조금 더 평범하고, 그래서 더 불편합니다.
민주주의자들조차 “이미 끝난 문제를 다시 열면 무엇을 얻는가?”, “우리 정부가 나치를 감쌀 리 없는데 왜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청산을 막는 힘이 꼭 친나치 이념일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의 정치적 안정, 국가의 평판, 연정의 결속, 개인정보 보호, 행정 편의, 법적 안정성 같은 정상적인 가치들도 얼마든지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아헨바흐, 다시
2장에서 나우만 서클과 자유민주당(FDP)을 잇던 인물로 등장한 에른스트 아헨바흐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나치 점령기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일했던 사람이었고, 1970년대에는 FDP 연방의원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71년 서독과 프랑스는 프랑스 법정에서 궐석재판으로 유죄를 받은 나치 범죄자들을 독일 법정에서 재판할 수 있게 하는 협정에 서명합니다. 그때까지 이들은 프랑스에서 유죄를 받고도 서독에서는 ‘존경받는 시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쿠르트 리슈카(Kurt Lischka)입니다. 프랑스에서 7만 명이 넘는 유대인의 추방과 살해에 책임이 있는 친위대 장교였지만, 그는 쾰른에서 아무 일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독일 출신의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부부가 이들을 찾아내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³³
자신도 나치 시대에 깊이 연루되어 있던 아헨바흐는 이런 재판을 막으려고 몇 년 동안 갖은 수를 다 썼습니다.³³ 결국 리슈카 등 세 명은 1979년 10월부터 쾰른 법정에 섰고, 1980년 2월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1971년의 협정 서명으로부터 9년이 걸렸습니다.³³
1953년 나우만 사건 때 영국군이 막아 세운 인맥의 한 고리는, 이렇게 20년 뒤 연방의회 안에서 또 다른 청산을 늦추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1981년, 보르도의 문서
1장에서 ‘청산을 통과한 남자’로 소개한 모리스 파퐁은 그 뒤 승승장구했습니다. 제4·제5공화국에서 파리 경찰청장, 국회의원을 거쳐 예산장관까지 지냈습니다.
1981년, 그가 비시 정권 시절 서명한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과거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됐습니다. 1983년 첫 기소가 이루어졌지만,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다시 15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³⁴ 결말은 6장에서 보겠습니다.
* * *
주
³⁰ 앞의 주 26과 같은 자료(Krüger 1997). [IfZ](https://www.ifz-muenchen.de/heftarchiv/1997_1_2_krueger.pdf)
³¹ SPD 연방의회 의원단 회의 녹취록, 1978년 2월 21일, 빌리 브란트 발언. [Fraktionsprotokolle](https://www.fraktionsprotokolle.de/spd-08_1978-02-21-t1500_WN.html)
³² SPD 연방의회 의원단 회의 녹취록, 1978년 3월 7일, 카를하인츠 한젠 / BDC 논쟁과 질책 표결. [Fraktionsprotokolle](https://www.fraktionsprotokolle.de/spd-08_1978-03-07-t1500_WN.html)
³³ Jüdische Allgemeine, Roland Kaufhold, 「Im KZ-Drillich vor Gericht」, 2013년 7월 1일. 리슈카 재판의 경위와 아헨바흐의 방해를 다룹니다. [Jüdische Allgemeine](https://www.juedische-allgemeine.de/kultur/im-kz-drillich-vor-gericht/)
³⁴ 프랑스 법무부, 「Ouverture complète des archives des procès Maurice Papon」, 2023년 1월 27일. 1983년 첫 기소와 1998년 반인도범죄 공범 10년형을 정리합니다. [Ministère de la Justice](https://www.justice.gouv.fr/actualites/actualite/ouverture-complete-archives-proces-maurice-papon)
6장. 1989~1998: 두 번째 과거
1989년, 독일은 청산해야 할 과거를 하나 더 갖게 됩니다. 동독, 곧 독일민주공화국(DDR)의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과거를 다루는 과정에서, 첫 번째 과거를 위해 만들어졌던 법리들이 놀라운 방식으로 되살아납니다.
1989~1990년, 점령이 아닌 가입
먼저 짚어 둘 사실이 있습니다. 동독은 서독에 군사적으로 패배해 점령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989년 시민혁명 뒤 1990년 3월 18일 첫 자유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자유롭게 선출된 인민의회(Volkskammer)는 1990년 8월 23일, 기본법 옛 제23조에 따른 연방 가입(Beitritt)을 찬성 294, 반대 62, 기권 7로 결정했습니다.³⁵
그러니까 법적으로 통일은 ‘서독의 정복, 그리고 동독 청산’이라는 경로가 아니었습니다. ‘동독 시민혁명, 자유선거, 자유선출 의회의 가입 결정, 그리고 통일’이라는 경로였습니다.
국가보위부(Stasi) 문서의 보존과 공개, SED 독재의 책임 규명 요구도 처음부터 서독이 강요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동독 시민운동 스스로가 문서 파기를 막고 독재 기관의 책임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비대칭적인 통일의 형식
그런데 통일의 제도적 형식은 비대칭적이었습니다. 새로운 제3의 독일 국가를 처음부터 함께 만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기존 서독의 기본법과 제도를 동부 지역으로 넓히는 ‘가입’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통일 직후 서쪽에서 동쪽으로 대규모 엘리트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1990~1994년 동부 행정을 지원한 서독 출신 행정 인력은 약 3만 5천 명이었습니다. 1990년 동부 주정부의 직업공무원형 차관(Staatssekretär) 62명은 전원 서독 출신이었습니다. 1994~1995년 동부 사법 엘리트 가운데 동독 출신 비율은 1~3% 정도로 추정됩니다.³⁶
이런 인력 이동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독법을 즉시 운용해야 했고, 동독의 행정과 사법은 SED의 정치적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새 주정부를 꾸려 갈 경험 있는 인력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필요성이 있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어떤 언어와 태도를 써도 괜찮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1992년 1월, ‘작은 체육관’
1991년 법무장관 클라우스 킨켈(Klaus Kinkel)은 사법을 통해 SED 체제를 ‘탈정당화(delegitimieren)’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이후 연방의회에서 거듭 인용되며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1992년 1월 17일, 연방의회에서 CDU/CSU의 하르트무트 뷔트너(Hartmut Büttn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Die Zahl unbelasteter Richter und Rechtsanwälte konnte man mühelos in einer Turnhalle zusammenfassen.”(흠 없는 판사와 변호사의 수는 체육관 하나에 손쉽게 다 모을 수 있었습니다.)
동료 의원 잉그리트 로이치(Ingrid Roitzsch)가 “작은 체육관이면 충분하다”고 끼어들자, 뷔트너는 자신도 ‘작은 체육관’을 말한 것이라고 받았습니다.³⁷
개별 심사를 거치는 민주적 사법 개혁과 “깨끗한 동독 법조인은 작은 체육관에 다 들어간다”는 집단적 언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동독 쪽에서 ‘승자의 정의(Siegerjustiz)’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비판이 모든 동독 관련 재판의 법적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통일 독일의 동독 관련 형사처벌은 흔히 상상하는 대규모 숙청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1994년 7월, 두 개의 사건
1994년 7월 1일, 베를린 문서센터가 마침내 독일 연방문서보관소로 넘어갑니다. 1945년 미군이 당원 카드를 압수한 지 반세기 만이었습니다.³⁸
같은 달 26일, 연방대법원은 동독 국가방위평의회 사건을 판결합니다. 국경에서 탈출자를 사살하게 한 동독 지도부의 책임을 다룬 사건이었습니다. 이 판결에서 4장의 록신이 1963년에 발전시킨 ‘조직지배에 의한 간접정범’ 이론이 본격적으로 쓰였습니다. 독일 최고 법원 판례에서 이 이론이 등장한 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³⁹
이것이 “동독 지도부 처벌은 그래서 부당했다”는 결론을 자동으로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왜 나치의 관료적 대량 범죄를 설명하려고 발전한 법적 도구가, 30년 뒤 동독 지도부의 국가 범죄를 다룰 때 더 선명하게 꽃피었을까요?
1995년 7월, 파리의 연설
1995년 7월 16일,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는 1942년 파리의 유대인 대규모 검거(벨디브 사건)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연설합니다. 그는 프랑스 국가와 프랑스인들이 유대인 박해에 가담한 책임을 명시적으로 인정했습니다.⁴⁰
1장에서 본 ‘비시는 진짜 프랑스가 아니었다’는 자기 서사가 50년 만에 크게 수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996년 10월, 라드브루흐의 귀환
1996년 10월 24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동독 국경 사살 사건에 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재판소는 소급처벌 금지가 원칙적으로 매우 엄격한 보장이라는 점을 먼저 확인했습니다.⁴¹
그러면서도 재판소는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국가가 중대한 범죄적 불법을 정당화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본적 인권을 극도로 침해했다면, 그런 국가 관행에 대한 신뢰까지 보호할 수는 없다고요. 결정문은 1장에서 본 라드브루흐 공식을 직접 언급합니다.⁴¹
그러니 “라드브루흐 공식은 나치에는 전혀 쓰지 않고 동독에만 썼다”는 말은 틀립니다. 1장에서 본 것처럼 이 공식은 나치 불법을 다루는 데에도 쓰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역설은 남습니다. 나치 시대를 계기로 만들어진 법리가 나치 판사들 앞에서는 높은 고의 입증의 벽에 막혔고, 동독 청산에서는 훨씬 자신 있게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1997~1998년, 뒤늦은 배제 조항과 99건
1997년, 연방정부는 2장에서 본 1950년의 배제 조항 삭제가 ‘의식적인 결정’이었다고 의회에 답변합니다.⁴² 그리고 1998년, 마침내 연방원호법에 제1a조가 신설됩니다. 나치 시대에 인간성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위반한 사람에게 전쟁 피해 사회보상 급여를 거부하거나 이미 지급 중인 급여를 박탈할 수 있게 한 조항입니다.⁴³
그러나 실제 운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시몬 비젠탈 센터 등이 제공한 자료를 포함해 7만 명 이상이 검토 대상으로 거론됐지만, 실제로 급여가 박탈된 것은 99건에 그쳤습니다. 연방노동사회부(BMAS)가 이 격차가 왜 생겼는지를 별도의 연구 과제로 발주했을 정도입니다.⁴³
“옆방에서 처리하면 된다”
이 과정을 처음부터 따라가 보면 기묘한 순환이 보입니다. 이건 해석입니다.
1. 1950년: 사회법은 형벌이 아니다. 범죄는 형사법에서 처리하라.
2. 그런데 형사처벌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3. 1998년: 그렇다면 사회보상법에 가해자 배제 조항을 넣자.
4. 그런데 이번에는 개인의 구체적 책임을 입증하라는 요구가 돌아왔다. 수십 년 전의 기록을 찾아야 했고, 기존 권리와 신뢰 보호도 따져야 했다.
5. 결과: 검토 대상 수만 명, 실제 박탈 99건.
각 단계의 법리는 따로 보면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복도 끝까지 걸어가 보면, 각 제도가 “이 문제는 옆방 일”이라고 말했고 결국 어느 방에서도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2020년대에 다시 등장합니다(8장).
1998년, ‘아우슈비츠라는 도덕의 몽둥이’
1998년, 작가 마르틴 발저(Martin Walser)는 독일출판협회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아우슈비츠가 ‘도덕의 몽둥이(Moralkeule Auschwitz)’로 쓰이고 있다고 말해 큰 논쟁을 일으킵니다.
독일 정치 언어에는 이와 비슷한 계열의 표현으로 ‘나치 몽둥이(Nazi-Keule)’라는 말도 있습니다. 대개 상대를 나치나 극우와 연결해 도덕적으로 제압하려는 공격이 지나치거나 부당하다는 뜻으로 씁니다. 연방정치교육원은 이런 표현을, 정치적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나치와 연결해 비난하는 수사의 한 모델로 설명합니다.⁴⁴
그런데 이 말 자체도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실제 극우적 언어나 역사 왜곡을 비판했는데 상대가 “또 나치 몽둥이냐”라고 받아친다면 어떨까요. 비판 내용에는 답하지 않고, 나치 비교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아 논의를 끝내려는 방어 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제 관련성이 거의 없는 일에서 상대를 손쉽게 ‘나치’라고 부른다면, ‘나치 몽둥이’라는 비판에도 내용이 생깁니다. 그러니 이 단어가 등장할 때 던져야 할 질문은 간단합니다. 정말 부당한 나치 비유였는가, 아니면 실제 비판에 ‘나치 딱지’라는 이름을 붙여 무력화하고 있는가?
1998년, 파퐁의 판결
같은 해 프랑스에서는 모리스 파퐁이 유대인 추방과 관련한 반인도범죄의 공범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습니다.⁴⁵ 1944년 청산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한 지 54년, 문서가 공개된 지 17년 만이었습니다.
파퐁은 “프랑스는 아무런 과거 청산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매우 강한 청산 기구를 만들고 실제로 그 사람을 심사했는데도, 무엇을 책임으로 볼 것인지를 잘못 정의하면 그 인물이 새 민주국가의 엘리트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 청산의 문제는 단지 얼마나 세게 처벌하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청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가장 불편한 비교
이 장을 마치기 전에, 가장 불편한 질문 하나를 피하지 않겠습니다.
나치와 동독을 역사적으로 같은 무게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나치 국가는 인종 절멸 정책과 유럽 침략 전쟁, 홀로코스트를 국가 정책으로 수행했습니다. 동독의 정치적 억압과 국가 범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과 두 체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두 청산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교의 질문은 “어느 독재가 더 나빴는가?”가 아니라 “민주국가는 두 과거를 처리할 때 자기 원칙을 얼마나 일관되게 적용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 나치 판사들에게는 왜 법왜곡의 고의를 그토록 좁게 인정했을까요?
- 동독 판사와 지도부에게는 어떤 기준을 적용했을까요?
- 나치 시대 공직자는 왜 광범위하게 사회와 관료 체제로 재통합됐을까요?
- 동독 출신 공직자와 전문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심사되고 교체됐을까요?
- 나치 범죄를 계기로 발전한 라드브루흐와 록신의 법적 사고는 왜 통일 뒤 동독 국가 범죄 재판에서 더 선명하게 작동했을까요?
이런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동독이 나치와 같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독의 나치 청산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비추는 거울일 수 있습니다. 비교의 대상은 두 체제가 아니라, 두 과거를 처리한 민주국가의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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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³⁵ bpb, 「23. August 1990」. [bpb](https://www.bpb.de/themen/zeit-kulturgeschichte/deutschland-chronik/132238/23-august-1990/)
³⁶ bpb, 「Zwischen Austausch und Marginalisierung: Ostdeutsche in den Eliten nach der Vereinigung」; 「Elitezirkulation in Ostdeutschland 1989–1995」. [bpb 1](https://www.bpb.de/themen/deutsche-einheit/lange-wege-der-deutschen-einheit/310065/zwischen-austausch-und-marginalisierung-ostdeutsche-in-den-eliten-nach-der-vereinigung/) · [bpb 2](https://www.bpb.de/shop/zeitschriften/apuz/archiv/538387/elitezirkulation-in-ostdeutschland-1989-1995/)
³⁷ 독일 연방의회, Plenarprotokoll 12/71, 1992년 1월 17일, 6023쪽. [Bundestag](https://dserver.bundestag.de/btp/12/12071.pdf)
³⁸ 앞의 주 4와 같은 자료. [Bundesarchiv](https://www.bundesarchiv.de/das-bundesarchiv/aus-unserer-archivarbeit/die-nsdap-mitgliederkartei/)
³⁹ 앞의 주 21과 같은 자료. [ZIS](https://zis-online.com/dat/ausgabe/2009_11_ger.pdf) · [BGH 1994](https://www.anwalt24.de/urteile/bgh/1994-07-26/5-str-98_94)
⁴⁰ 프랑스 대통령실(Élysée), 자크 시라크, 「Allocution sur la responsabilité de l’État français dans la déportation des juifs」, 1995년 7월 16일. [Élysée](https://www.elysee.fr/jacques-chirac/1995/07/16/allocution-de-m-jacques-chirac-president-de-la-republique-sur-la-responsabilite-de-letat-francais-dans-la-deportation-des-juifs-durant-la-deuxieme-guerre-mondiale-et-sur-les-valeurs-de-liberte-de-justice-et-de-tolerance-qui-fondent-lidentite-franca)
⁴¹ 연방헌법재판소, 1996년 10월 24일 결정, 2 BvR 1851/94 등. [BVerfG](https://www.bundesverfassungsgericht.de/e/rs19961024_2bvr185194.html)
⁴² 앞의 주 5와 같은 자료(Drucksache 13/7055). [Bundestag](https://dserver.bundestag.de/btd/13/070/1307055.pdf)
⁴³ 연방노동사회부(BMAS), 「Die Neufassung des §1a Bundesversorgungsgesetz: Streichung von Kriegsopferrenten für NS-Täter」. 7만 명 이상의 후보와 실제 99건 박탈의 격차를 연구했습니다. [BMAS](https://www.bmas.de/DE/Service/Publikationen/Forschungsberichte/fb472-schlussbericht.html)
⁴⁴ bpb/fluter, 「Du Grammatik-Hitler!」; bpb의 발저-부비스 논쟁 관련 자료. ‘Auschwitz-Keule’, ‘Moralkeule Auschwitz’의 정치적 용법을 설명합니다. [fluter](https://www.bpb.de/system/files/dokument_pdf/fluter_Nazis_0.pdf) · [bpb](https://www.bpb.de/themen/zeit-kulturgeschichte/juedischesleben/332612/postmigrantische-erinnerungskultur/)
⁴⁵ 앞의 주 34와 같은 자료. [Ministère de la Justice](https://www.justice.gouv.fr/actualites/actualite/ouverture-complete-archives-proces-maurice-pap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