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죽어도 좋아 밤 아홉 시 이십 분. 김포공항을 이륙하는 비행기 뒷좌석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장장 이십여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먹고 자면서 여행을 해야 했다. 지도를 보면 지척일 터인테 최신형 비행기로 날아도 하루가 걸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갈아입을 옷과 일용품이 든 작은 가방 하나만 덜렁 든 채 비행기에 올랐다. 혜라도 마찬가지였다. 은주 누나가 마련해 준 달러와 친구애들이 혹시 모른다면서 만들어 준 크레디트 카드와 여행자 수표가 내 소지품의 전부였다. 전기 면도기와 손수건을 빼면 거북선 몇 갑과 혜라가 준 라이터와 볼펜이 더 들어 영문 모르는 파리행에 관해 또 몇 번이나 귀찮게 질문을 했지만 나는 화장품 한 개 사다 준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고 말았다. 은주 누나의 연락을 받은 미나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였지만 세련된 모습의 혜라를 보자 움찔해서 자리를 피하기만 했다. 파리에 간다면 다혜를 만나게 될 터이니 마지막으로 미나의 얼굴을 한번쯤 기억하라는 의미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혜라는 미나의 자태를 보더니 쑥스러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은주 누나에겐 혜라가 여행을 안내하는 여행사 직원이라고 둘러붙였지만 믿으려 하지 않는 눈치였다. "좀 자두는 것이 좋아요." 혜라가 어깨를 내게 바싹 기대며 말했다.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지만 나는 최신형 비행기가 더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꼬박 삼 일을 기다렸다. 그 삼 일 동안 나는 혜라가 묵는 호텔을 주살나게 들랑거렸다. 그녀는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의 기운 마음에 행여 변덕이라도 생길까 봐 몸살난 사람처럼 그녀가 원하는 짓을 했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원했고 나는 그것을 흥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혜라는 적어도 다혜의 신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된다는 걸 강조했다. 그것은 나를 잡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질 필요가 있는 거라고했다. "잠이 올 턱이 없지." "억지로라도 자야 해요. 시차 극복도 "나는 버틸 수 있으니까 상관 말고 자요." "이게 우리의 신혼여행길이었으면 좋겠어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 내 대답이 섭섭했는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도 삼만 삼천 피트, 짙은 붉음, 석양의 빛깔을 맴돌 듯 날으는 비행기, 일본에 갈땐 몰랐단 비행기의 지리함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가슴을 휘젓는 다혜 생각, 잠들 수 없었다. "그럼 바둑 둘래요." "지금 내 기분 좀 알아 주라." "가만 내버려 두면 돼? 말도 시키지 말고?" "그래." 여자를 그렇게 지독하게도 사랑할 수 있는 남자기 때문에 내가 속을 빼놓고 좋아하는 거야. 비겁하지 않아서 좋아. 남자들 사회에서 그런 말 있지. 키퍼 없는 문전에서 공 차는 재미가 없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기다려 보겠어. 내가 얼마나 질긴 여자인가를 보여 주고 나도 남 못지 않게 사랑해봤다는 소리도 듣고 싶어." "그것보다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나 알켜 줘." "지금은 나도 몰라. 도착해서 연락을 하고 상황을 봐야 뭐라고 할 수가 있어." "죄소한 어떤 애들이란 거라도 알려 줘. 연락할 방법도 없고...... 이젠 덜렁 나 혼자야." "아니지. 아직은 위험해. 몰래 편지를 써서 승무원에게 맡겨도 그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내서 쪽지로 비상연락을 할 수도 있어. 또 앵커리지에 도착해서 나를 따돌린 채 공작을 꾸밀 수도 있어." "지독하다." "난 그래.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게 지독해질 테니까. 당신은 나를 피해 도망가려고 하겠지만 나는 악착같이 지구 끝이 아니라 황천 끝이라도 쫓아가서 책임지라고 할 테니까." "독종한테 걸렸군." "왜 겁나?" "그래, 겁난다." "그럼 나한테 장가 들면 간단하잖아. 파리에서 내리자마자 튀면 돼." "넌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되면 또 너를 납치할 거다.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납치되거나 불행한 꼴을 당하게 된다. 내가 지금 피하지 않고 비행기를 탄 것은 아직도 내가 뜨겁게 사랑해야 될 어머니와 여동생과...... 그래, 다혜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 길이 나를 근본적으로 보호하는 길이기 때문에 나선 거다." "난 언제 죽어도 좋아요. 당신이 선택만 해 준다면...... 그러나 그렇게 쉽게 납치되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진 않을 거야. 나만은 그렇게 못하니까." "믿을 게 있고 믿어서 안 되는 게 있다." 혜라는 잠잠해졌다. 비디오 테이프로 상영되는 영화가 보기 싫어 승무원에게 장거리 여행자에게 눕는 방법이 고안되어야 좋을 것 같았다. 제법 넓은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마치 우리나라의 비좁은 고속버스 좌석에 앉아 반 나절이나 시달려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살나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나눠 주는 승무원들을 보면서 우리 나라의 모든 서비스가 대한항공만큼만 되어 준다면 정말 밝은 마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앵커리지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열 시가 좀 넘어선 시간이었다. 김포를 떠난 것이 아홉 시 이십 분이었는데 겨우 열시간 넘었다는 것은 시차 때문이었지만 묘한 생각이 들었다. 섭씨 영하 삼 도, 구름 낀 하늘과 반 뼘 조금 넘는 새하얀 눈발, 바닷가 가득 뒤끝에 부연 아침 햇살을 받은 것 같은, 온통 새하얀 이국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십 분간의 공항 구경 시간이었다. 혜라는 공항 대합실에서 쳐다보이는 활주로를 가리켰다. "온통 하얗고 활주로만 까만 색깔이니까 그것고 정겹죠?" "너 같은 여자는 이런 데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하겠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활주로를 가리키는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어서 이렇게 말했다. "귀신이네." 혜라는 더 힘주어 껴안았다. 공항 뒷문으로 나가 새하얀 눈을 한움큼 집었다. 뭉쳐지지 않는 눈이었다. 떠나온 우리 그런지 타국 땅 앵커리지가 그렇게 낯설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산악도 온통 하얗다. 그런 속에 푸른 나무들이 줄을 맞추어 늘어서 있는 것은 신기해 보였다. 눈이 오면 앙상해져야 할 나무라는 내 인식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았다. 혜라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면세점을 한바퀴 돌고 내려와 커피 한 잔을 마신 우리는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프랑스가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해돋이가 펼쳐지는 장관이 드러났다. 저리 붉을 수 있을까? 놀라운 장관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채색을 하더라도 저리 오묘하게 붉은 빛깔을 화가가 저 빛깔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색깔을 잘 다루는 화가가 저 빛깔을 보면 심정이 어떨까? 파리의 꼭두새벽, 잠자는 도시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새벽의 불빛들이 잠자는 도시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사이에 도시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층층마다 아름다운 다섯가지 색깔이 엷어지거나 무리하게 짙어지는 구름층으로 뒤덮이곤 했다. 파랑, 노랑, 분홍, 핏빛 그리고 무거운 흙빛깔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짧은 순간이 지나면 그렇게 영롱하던 붉은 빛깔은 보잘것없는 핏빛으로 옅게 보이기도 했다. 비가 오지 않고 쾌청한 섭씨 팔 도의 기상이란 승무원 말을 귀담아 들었다. 이튿날 아침, 파리 도착한 것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공항이 아니라 조금은 당황했다. 크고 웅장한 반면 현대화라는 게 참 비인간적이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나가는 곳이고 어디가 들어오는 곳이며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웬만큼 외국어를 하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될 것 같았다. 혜라가 없다면 어떻게 움직일지를 몰라 당황할 것 같았다. "이거 더러워서 영어 배워야겠다." 나는 주눅이 드는 걸 의식했다. 그렇다고 크고 웅장한 모습에 대한 저항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긴 영어가 안 통해. 미국 알기를 똥친 막대기쯤으로, 역사와 전통도 없는 벼락부자 취급을 하니까. 사실이 그렇고. "이 자식들은 어떻고? 식민지 많이 가졌던 나라치고 야만스럽지 않은 놈들이 어디 있어. 그게 진짜 야만족이 아닌가? 미국이야 신판 야만인 족속이고, 이녀석들은 왕년의 야만족이지 뭐." "얼추 말이 되는데." "이제 벙어리 한 놈 데리고 왔으니 말을 해 줘도 될 때 아니야?"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나는 슬쩍 말을 놓았다. "좀 차분해 봐요." "여긴 서울이 아니고 파리야. 아는 놈 하나도 없고 말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 같은 신세야. 네 눈치만 보면서 살아 있어야 할 딱한 사내라고. 이젠 약속대로 말해야지." "숨 좀 돌리고 시작할 수 없어요?" 시가지가 보이는 순간부터 나는 가슴이 정신 없이 뛰고 있어. 내가 비행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다혜가 어디 있는 것만 알면 비행기에서 그냥 뛰어내리려고 했을 거다. 아니면 이놈의 파리 시가지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참, 당신은 독해요. 그렇게 사랑해요?" "이건 사랑 이전에 내 자존심의 상처야. 나는 죽음과 자존심을 놓고 저울질을 안 하는 성미야." "차차 따져요." 매몰차게 한마디 하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를 놓치면 나는 미아처럼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거리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공항 근처는 신선한 내음으로 가득 찼다. 택시를 잡고 뒤따라 탄 나는 앞좌석의 불쑥 튀어나온 괴상한 물체 때문에 깜짝 놀랐다. 운전석 옆자리에 털투성이인 개새끼가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웬 개새끼야?" "운전석 옆자리엔 사람이 안 타요. 가장 위험한 자리니까." "그럼 죽을 때 개부터 죽어달라는 건가?" "사랑하는 개죠." "기분 나쁜데." "여긴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만 없으면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아요." "어디로 가는 거야?" "우선 호텔로 가야 돼요. 거기서 다시 "날 죽이고 싶으면 빨리 죽여달라고 해. 난 성질이 급해서 죽는 것도 급하게 굴 테니까." "차암...... 여긴 파리야." "파리든 날파리든 난 가리고 따지지 않아. 난 다혜를 만나러 왔지 관광하러 온 게 아냐. 알아?" "알아요. 멋대가리 없는 남자 같으니." "아직 멀었나?" "아직 멀었어. 아직 시내에 들어서지도 않았으니까." "빌어먹을......" 택시는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다. 시간과 거리 병산제이기 때문에 꽤 많은 요금이 나올 것 같았다. 밋밋한 들판만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평야 위에 나라가 선 혜라는 불어를 우리 말 하듯 운전사와 지껄이기도 했고 프랑스가 지닌 몇 가지 특성을 말해 주기도 했다. 별로 깨끗한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며 국민성이 느긋한 이유도 말해 주었다. 파리 시내를 관통하면서 혜라는 방사선형으로 도심이 꾸며지고 모든 건물이 조각품처럼 보이는 설계를 한 것은 나폴레옹 삼세 때 파리의 오스만 시장이 십 팔 년간에 걸쳐 설계하고 건설했다는 얘기도 해 주었다. 한두 해에 시멘트로 얼렁뚱땅 해치우는 우리 나라의 그 머리통 나쁜 시장들에 비하면 꽤 배짱 있는 시장이었던 모양이었다. 신시가지 하나도 몇 해 안 가며, 때려부술 만큼 개판을 쳐 놓는 친구들은 국민의 세금 알기를 제 호주머니 속의 용돈 알 듯했다는 지금도 집 지으려고 임시 전기를 끌어다 쓰느라고 공탁해 놓은 돈을 술값이란 명목으로 내 주지 않고 닦아먹는 공직자가 수두룩하고, 돈 몇 푼에 불법 건물을 눈감아 주는 공직자가 도처에 깔려 있고 오늘 준공검사해 준 건물을 내일 헐어 버리는 속수무책의 공직자가 질펀한 마당에 무슨 도시계획이 잘 될 턱이 있을까? 그런 걸 모를 리 없는 고위층이란 작자들이 게슴츠레 눈감고 있는 것은, 그럴 리야 없겠지만 사 년에 한 번씩 선거 직전에 선심용으로 양성화해 주려는 훌륭하고 지당한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그러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더더구나 그럴 리 없겠지만 부하들이 챙겨먹은 돈들이 뭉텅이 돈으로 환산되어 자신의 행위는 설마 아니겠지. 모르지, 하도 잘 챙겨 잡순 친구들만 뻔뻔스럽게 잘 사니까 어느 친구인들 애써 잘못 살기를 바랄까? 서울 땅 팔아먹은 시장녀석이 아직도 큰소리 치며 살고 있다는 세상이고 서울 변두리고 노른자위고 가리지 않고 핥아댄 고위층이란 날쌘 녀석들이 발바닥에 흙 안 묻히고 제비처럼 날아다니며 사는 세상이라니까 먹고 보자는 심리가 그리 팽배했을 것이다. 하기야 조무래기들 탓해서 무엇할까? 한입에 털어먹는 친구들은 쌩쌩하고, 흘린 떡고물이 입가에 묻어서 탄로난 친구들만 죽사발이 되는 판이니. "세느 강예요." 도심 사이로 돌둑을 쌓은 좁다란 강을 시구에서 늘 듣던 대로의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크고 작은 배들과 한눈에도 유람선처럼 보이는 배가 보였다. 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나무들이 겨우 세느 강다운 운치를 보여 주었다. "흙탕물이잖아." "비가 왔었을 거예요." "한강보다 형편없는데 뭘 그래." "그렇긴 해요. 그걸 보면 서울은 무지하게 복받은 도시예요. 한강만 잘 꾸며놓아도 그게 바로 관광자원이죠. 강폭도 얼마나 넓고 탁 트였어. 여긴 한강에 비하면 도랑이죠. 저쪽을 봐요. 울창한 숲이 있죠. 세느 강의 운치는 숲길과 배와 다리의 모양새뿐이죠." "이 나라는 깡통을 오려서 차를 만들어 내 시야에 여러 번이나 들어온 자동차는 일인용이라고 해야 할 만큼 작은 자동차가 모두 깡통을 두드려 펴 붙인 것 같은 갖가지 모양을 넣은 것들이었다. "문화는 다양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거잖아요. 제멋에 겨우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죠. 남에게 객관적으로 피해감을 주지 않을 경우에지만요." "그런 도시에서 내가 죽을지 모르지. 내가 만약 죽거든 넌 반드시 나를 고향에 묻어야 한다. 난 한줌의 흙이라도 돌아가야 돼. 알았어?" "왜 죽는 생각부터 하지?" "그런 예감이 든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가면 돼." 여자와의 약속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놈이다. 그것이 비록 가치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내 스스로와의 약속, 내 자신과 약속한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가 있다." "참 지독해." 고개를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해 둘 게 있다. 만약 다혜가 죽는다고 해도 난 너를 사랑하게 되지 않아." "좋아하긴 하겠죠." "어려울 거야. 나 같은 사내에겐 기대를 거는 게 아냐." "나도 어지간한 여자예요. 그렇게 쉽게 물러설 여자가 못 돼요." "나를 언제 봤다고 사랑한다는 거야?" "첫눈에 미치기도 하는걸요." 파리 시가를 구경하기만 했다. 흘러가는 풍경이 예술 같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거리 풍경이 현대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조각품 전시장을 지나 비로소 시가지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옛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 신시가를 건설한 곳이라고 했다. 똑같이 생긴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개성을 가진 독특한 건물들이었다. 라테팡스의 펜타 호텔 앞에 택시가 멎었다. 원형으로 우뚝 속은 건물이었다. 파리 시내에서 호텔들은 증개축을 할 수가 없어서 일백 년도 넘은 옛 건물 그대로의 호텔이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는 혜라의 설명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연락이 되었는지 육층의 열쇠를 받아든 혜라가 씨익 웃었다. 안내하는 사내녀석과 그녀의 표정은 아주 당당했다. 내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 있는 쪽으로 걸었다. "신혼여행 왔으니 전망좋고 조용한 방을 달라고 했어." "진혼곡이 울릴 텐데." "제발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말이 씨가 된대잖아." "이판사판이란 걸 좀 알아." "성질 급한 거야 소문난 사실이지만 황천 가는 일까지 그렇게 급할 필요는 없잖아." "이왕 급하게 살 작정을 한 놈이니까 내 성질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고." "신혼여행 와서 그러는 게 아냐. 새 신부 입장도 좀 생각해야지." "사람 참 할 말 없게 하네." 레테팡스의 아침 풍경은 초겨울 날씨처럼 내려다보이는 시가지가 부옇게 보였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늙은이들과 출근 전의 부산한 사람들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샤워하고 한숨 자두는 게 어때?" "그럴 여유가 내겐 없어." "너무 닦달하지 않는 게 좋아. 당신한텐 시간 버는 게 더 급한 일이야. 여긴 서울이 아니잖아." "여기가 어디든간에 나는 장총찬 그대로다." "내 얘길 잘 들어. 한숨 자두라고 건 피로를 풀라는 뜻이고 그런뒤에 이곳 지리나 환경을 익혀둘 필요가 있어. 그 사람들과 상대하려면 적어도 파리라는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쯤은 알고 있는 게 좋아. 그들을 당황하게 해 줄 필요가 있어. 조금 전에 도착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잖겠어." "그렇게 치자면 난 그들 앞에 발가벗겨져 보인 셈이고 그들은 정장을 한 채 나를 구경하고 있는 셈인데...... 내가 이런 창피를 계속 당할 순 없잖아." "그렇게 따지면 그래." "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으란 말야? 내가 누군데?" "한국에서 온 장총찬씨지." "이게!" "때릴 거야?" "성질 같아선 정말......" "부탁이야. 그 성질 좀 눕힐 수 없어. 이번 일만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서 좀 해 줘." 저승사자 같은 너를 말야?" "나중에 알게 돼, 내 진심을." "나중에 따지지 말고 지금 좀 네 진실을 알자. 죽일 작정이면 이렇게 질질 끌고 다니며 죽이지 말고......" "난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이 고생을 자청한 거야." "알 수 없군." "그래. 나 같은 여자는 내가 생각해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아.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지. 사람을 볼 줄 알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말야." 정말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어찌 보면 내 편인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나를 잡기 위해 단수 높은 술수를 쓰는 여자로 느껴지곤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그녀 쪽에서 내 마음을 잡으려는 눈치였다. "나도 분명한 게 있지. 난 다혜 이외의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알아.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흔들릴 때가 있지. 그리고 변할 때도 있어. 사람은 늘 변하며 사는 동물이지. 더구나 사랑이란 건 오묘해서 말야." "너 같은 여자는 누구라도 좋아할 수 있어. 인물 좋고 똑똑하고 그러면서 애교도 많으니까." "잘못 봤어. 누구한테 지지 않을 만큼 예쁘다거나 똑똑하단 소리는 질리게 많이 들었어. 그러나 나 같은 여자는 누구를 쉽게 좋아하지 않아. 또 쉽게 받아 주지도 반드시 이루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말야. 나는 아직까지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한 적이 없어. 당신도 마찬가지일거야." "넌 독한 여자구나." "맞아. 난 보통 독한 여자가 아냐. 내가 갖고 싶은 건 무슨 짓을 하든 갖지. 최후에는 내가 죽거나 당신이 죽거나 할지도 몰라. 나는 당신의 시신이라도 차지하려고 할지 몰라." 분명이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실천을 할지 못 할지는 접어두고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면이 있는 여자라는 건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말해. 감출 만한 것이 아니라면 다 얘기하겠어. 나 같은 여자가 오히려 솔직하다는 건 알아야 해." "왜 그들과 손이 닿았지?" "좀 어렵군. 그렇다고 못할 말은 아냐. 망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고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였어." "그러면 그들은 집안을 살리고 오빠를 살릴 만한 힘이 있겠군." "그렇지." "그만한 가치가 있었나?" "첨엔 충분히 있었지. 내가 몸을 팔아서라도 해결하고 싶었었거든." "지금은?" "조금쯤 후회가 없는 건 아냐. 그렇다고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후회하고 선택이었으니까." "구체적으로 말 좀 해 봐." "차차 말할게. 우리 집안의 부끄러운 일면이기 때문이야. 우선 좀 쉬어요. 오후엔 돈도 바꿀 겸 파리 시내 구경 겸 나가야 돼." "난 예민해서 쉽게 잠들지 않아." "그럼 날 사랑해 주면 되잖아." "싫어." "결국 우리 운명은 그렇게 될걸요. 두고 봐요. 내가 어떤 여자인지." 만만하게 볼 여자가 아니었다. 웬만해서는 나를 단독으로 만나러 오기도 어려웠을 터인데 파리까지 마음대로 끌고 다닐 만큼 배짱도 큰 여자였다. 그녀가 우리 운명이란 말을 했을 때 나는 섬뜩한 끌려가는 것인데 혜라는 서슴 없이 우리 운명이라고 했다. 그녀는 마치 내 운명까지도 알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늦었어. 그들은 그렇게 녹녹한 상대가 아냐. 나를 묶어 두기 위해선 인질이 필요했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우리 부모는 미국에 있어. 내가 배신을 하면 우리 부모는 수모를 당하게 되어 있어. 우리 부모에겐 약점이 있으니까. 그리고 어떤 의미로 보면 우리 오빠를 살려 준 은인인 셈이지. 물론 계산된 은인이지만." "흔히 문제가 있으면 핑계를 삼듯, 그런 핑계는 아니겠지." "그럼 얘기해 줄 수 있겠지. 네 말처럼 어차피 우리 운명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야잖겠냐?" "글쎄." 그녀의 눈빛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밝은 때보다 차라리 어두울 때가 더 매력적인 여자였다. 섬세한 그녀의 표정마다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느껴운 터지만 심각한 모습에서 그렇게 차가운 매력이 물씬 풍기리라곤 상상조차 안했었다. 빼어난 외모란 까딱하면 아주 천박해지지만 자기 고뇌를 열심히 정리해 가며 살면 그렇게 아름다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여자들이 거의 천박해지는 것은 외모 때문에 받는 시선들이 쉽사리 합리화되지 않는 까닭인지 "말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내니까 창피할 것도 가릴 것도 없잖아. 그게 내 운명이라면 난 피하지 않겠어. 그게 운명이라면 피해질 리도 없겠지만." 다소곳이 라테팡스의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혜라가 천천히 걸어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부끄럽긴 하지만 당신한테만은 말하고 싶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고백해 본 적이 없어.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한테만은 비밀을, 가장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 것인가 보지." "사실 난 네 정체를 알고 싶어. 어떻게 내 앞에 왔는지, 왜 왔고 오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거지. 미워하기도 싫어.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계략적인 생각이 더 앞섰다는 걸 숨기지 않겠다. 물론 너같이 빼어난 미인인 경우에 옷을 벗기고 싶은 경우가 있지. 그것은 감정적인 욕망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난 네 비위를 맞추어서라도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는 계산된 행동을 했어. 그러나 네게 뭔지 모르지만 진실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너를 이해하고 싶었어." "당신 맘 알아.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뜻도 알고, 이제까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솔직한 사람은 별로 없었어. 더구나 내가 이렇게 자존심을 팽개쳐가면서까지 좋아한다고 달려든 적은 없었어." 아니니까 걱정 따윈 하지 말고." "이해를 바라거나 당신한테 사랑을 가로채기 위해서는 아냐. 그러려면 적당히 거짓말을 해서 당신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었어." "알아." 혜라는 돌아앉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십여 시간을 잠 한숨 자지 않은 채 왔기 때문에 피곤할 텐데도 우리는 말짱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잠옷 비슷한 야들야들한 가운을 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편하게 말할게." "그래." "우리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대번에 알 만한 그런 지위도 있었고 그만큼 아쉬움 모르고 살았지.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시대를 잘못 만났든, 사람을 잘못 알았든 하루 아침에 거덜이 났어. 알겠지만 전에 그런 사람이 꽤 많았잖아. 특히 자랑할 만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서 하루 아침에 병신되던 그 케이스지. 그래서 아버지도 미국으로 도망 비슷하게 간 거야. 그 당시에 오빠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망하면 그 자식도 같이 망하는 세상였으니까 우리 오빠도 별수 없는 신세가 됐지. 짐작할지 모르겠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참 가관이었지.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다가 당하고 나면 그처럼 처절할 수가 없는 거야. 하루 아침에 서늘한 세상 인심과 맞닥뜨리면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그런 세상 인심에 대응하지 못하고 마약 중독자가 됐고 설상가상이라고하나, 우리 오빠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졌어. 그것도 차마 설명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아버지가 참다 못해 자식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것이 아버지를 구렁텅이에 떨어뜨렸지. 아버지는 알다시피 체면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야. 대개 그렇잖아." "아버지 이름은?" "짐작을 해. 한때 산천초목이 떨었다는 사람이었으니까." "산천초목이 떨었다면 굉장한 실력자였겠군. 이를테면 그 말 한마디가 법처럼." "그래요." "그럼 혜라는 본명이나 성씨는 "아뇨." "그럼 누구 딸인지 알 만하군." "그래.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그런 애였으니까." "그렇다면 그놈의 체면 때문에 딸내미가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단 말야?" "그건 아니지. 우리 집안에서 몰랐으니까." 행사할 수 있는 자리도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그러나 어떤 것이 막강한 자리의 근본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라 일에 어떤 자리라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 것이고 그 자리는 국민이 국민을 위해 달라고, 대신 심부름을 해 달라고 맡겨놓은 자리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숱하게 버리는 불운을 겪곤 했었다. 혜라의 아버지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모르기 때문에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 아버지가 우리 나라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짐작하고 있냐?" "알아."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어떻게 될 것 같애?" "국민을 기만한 지도자겠지." "잘 봤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가 후회하고 있진 않아. 차라리 전성기 때를 회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을 거야." "너는 어떻게 아버지가 그럴 거라는 생각을 했지?" 모르진 않거든." "국민을 우롱한 자의 자식들이 너 같기만 했어도......" "치켜세우지 마. 내 마음은 더 아프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버지는 미국으로 갈 때 많은 재산을 놓고 갔어. 어떻게 번 돈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아버지 몫이었지. 그런데 아버지는 남겨둔 제물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썼고 오빠는 오빠대로 손을 썼어. 그러다가 일부의 재산을 가져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오빠는 범법자가 되어 피신하게 됐지. 결국 오빠는 씻기 어려운 구렁텅이에 빠져 버렸어. 아버지는 그런 오빠를 구하려다가 도리어 貶챨」結?걸렸어.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당할 찰나에 내가 흥정거리가 된 거지." "네가 그만한 가치가 있었나?" "그들 판단이었겠지. 삼 개 국어에 능통하고 어디다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외모와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사교계의 신데렐라였으니까." "그런 네가 이렇게 초라해졌군." "겉보기는 그렇지만 오히려 나는 좋아.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게 말야." "네가 그들이 원한 만큼 부모와 오빠의 죄 값을 탕감할 만큼 그들에게 공을 세워 줬을까?" "충분하다고는 못해도 웬만큼은 해 냈어." "뭘?" "나를 언제 알았어?" "일본에 있을 때." "그럼 일본 애들과 연관이 있냐?" "있어." "누구?" "놀라지 마. 흑장미한테 들었어. 전설적인 그런 여자와 만나게 된 건 기연이긴 하지만 내가 존경할 만한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이야. 그러더군. 흑장미의 한쪽 가슴이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 거라고. 난 그때 놀랐어. 그만한 여자가 당신이란 남자를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난 그때까지 얼핏얼핏 당신 이름을 들었지만 한국인이란 사실, 시골 출신이고 일류대학은 근처에도 못 가보고 별로 가진 것 없는 그냥 그런 괴상한 남자일 거라고만 당신을 봤어. 그래서 결심했어. 당신을 갖자고." "나를 가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화류계의 대모라고 하는 주여사가 나를 먹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는 얘기를 듣고 묘한 기분이 되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 그런 마음을 다져먹고 있던 차에 이런 일이 생겼고 나는 자청하기로 했어. 어차피 이런 일이 생긴 이상 누가 나서도 나설 일이었으니까. 조금 두려웠던 건 사실이야. 그러나 또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어." "기회는 기회였지. 내가 옷을 벗었으니까." "나는 쉽게 당신을 정복하리라고 사랑하리라는 건 짐작했지만...... 그러나 난 물러서지 않아.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겁난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여자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에트와르 광장 옆에 차를 세운 혜라가 얼굴 좀 활짝 펴고 나와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쾌청한 날씨를 보기가 어려운 곳야. 우린 복받은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 친구들이나 좀 빨리 만나게 해줘라. 미치겠다." 익혀두는 게 책략 중의 하나라고. 이래도 내가 당신 편이라는 걸 모르겠어?" "아직 모르겠다." "당신은 아직도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라는 걸 모르고 있어. 겉보기엔 남자가 강한 것 같지만 여자가 한번 마음을 옹골차게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봐. 당신은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내가 분명히 말했어. 나는 이제 죽어도 당신 편이라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누가 그러대, 사랑은 주는 거라고." "내 마음 급한거 알아?" "알아." "다혜가 어떻게 됐으면 너까지도 죽일 거다." 여자야. 언제라도 죽어 줄 수 있는 여자이기도 하고." 나는 그녀의 약속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쉽게 변심할 여자는 아니지만 잘못 건드리면 아주 매몰차게 돌변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에트와르 광장은 파리의 한 상징으로 시내를 가르는 열 두 군데 길의 중심지였다. 모든 것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광장이었다. 오페라 쪽으로 상원의회 건물이 보이고 그 중심으로 개선문, 샹젤리제와 연결되는 리도 극장의 현란한 간판도 보였다. 상젤리제는 일 킬로미터만 번화가이고 나머지는 좌우로 아주 넉넉한 녹지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밤 먹고 싶지 않아?" "여기에 밤도 있나?" 건물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꼭 같애. 여긴 천지가 밤나무지. 우리 나라 밤나무하곤 다르지만 밤 맛은 비슷해." "나무가 틀린데 열매가 비슷하다 이거냐?" "그래." 혜라는 땅바닥에서 금세 몇 톨의 밤알을 주웠다. 아주 다부지고 윤기 있게 생긴 밤알맹이였다. "이제 밤나무야?" "밤나무치곤 잘생겼잖아." "마치 플라타너스 비슷하군." "프랑스 밤 맛이 어떤가 좀 봐." 나는 다부지고 윤기 있는 밤, 어쩐지 빤질빤질한 것이 썩 마음 내키지 않는 그 밤을 입에 대었다. 광장에 잔뜩 널려 있는 밤을 그대로 밟고 다니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힘주어 깨뜨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물었다. 아주 역겹고 고약스러운 냄새가 입 안 가득 배었다. 혜라는 배를 쥐고 웃었다. 나는 혜라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다. 입 안이 얼얼할 만큼 고약한 냄새였다. "이게 뭐야?" "속여서 미안해." "뭐냐니까?" "마로니에 열매지 뭐야." "마로니에 열매?" "대개 괜찮은 사람만 속아. 의심 많고 매사에 주의하고 남 속여 본 사람은 깨무는걸 못 봤어. 그런 거 보면 당신은 되게 순진해." 마로니에 열매가 약간 비뚤어진 밤알 닮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혜라에게 당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도시, 어느 건물도 비슷하지만 각기 모양이 다른 건물 양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 밖으로 휴지와 오물이 많았다. 동양인이나 아프리카인을 미개인 취급하는 그들의 콧대에 비하면 별로 문화인 같지 않은 국민인 것 같았다. "얘들도 지저분하군." "여기 사람들은 그래요. 쓰레기통이 없으면 아무 데나 버려도 된다는 식이죠." 오른쪽으로 대궁전 그랑팔레가 보이고 왼쪽으로 엘리제궁, 그리고 콩코르드 광장 앞엔 하원 의사당이 보였다. 그 옆으로 프랑스의 자랑이라는 루브르 박물관이 위용 있게 우뚝 서 있었다. 길가로 빠져나온 카페의 의자마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어디 가서 차 한잔 할까?" "입 안이 깔깔해. 술 한잔 마셨으면 좋겠어." "대낮부터 무슨 술." "차라도 좋고." "저쪽으로 가면 휘케트 카페가 있어. 여기선 꽤 유명한 곳이야." "차라리 출출하니까 점심부터 때울까? 원하는 대로 사 줄께. 펑펑 쓰다가 돈떨어지면 일본측이나 소련측 지갑을 빼내지 머." "미국 애들 지갑 두툼할 텐데 그래." "좌우간 굶게 되진 않겠지." "여긴 내 구역야. 최고로 대하겠어. 우선 유명한 곳이니까." "서울의 불고기집만 해?" "착각하지 마. 유명한 것과 잘하는 걸 구별할 줄 알아야 해. 여기선 오래된 곳일수록 쳐 줘. 음식점이든, 옷가게든, 뭣이든 얼마나 오래 전부터 했느냐에 따라 비싸져. 우리 나라에선 피에르 가르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얼간이들이많잖아. 파리에선 유명할 뿐이지 잘하는 곳, 솜씨 뛰어난 곳은 아냐. 그런 걸 보면 잘 사는 이유가 있긴 있어. 여자들이 오면 환장한다는 루이생토레는 세계의 유행을 쥐고 있다는 패션가이지만 변두리의 세 평짜리 옷가게, 이백년인가 대물렸다는 옷집에 명함도 못 내밀어." "그 집에 가보자." "바쁘다는 사람이 웬일이야?" "네 옷 한 벌 해 주려고 그래." "우와! 한 벌에 얼마나 하는지 알기나 알아?" "몇 십만 원 하겠지." "그러니까 명함도 못 내민다고 했잖아. 보통 원피스 한벌이 이백만 원 정도 한단 말야." "염병할......" "어쩌면 나한테 옷 한 벌 해 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번엔 참겠어." 맥심 레스토랑 앞까지 왔다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역시 촌놈인가 봐. 차라리 변두리에 가서 뜨거운 설렁탕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어." "여기선 설렁탕이 더 비싸. 먹을 데도 "여기가 파리지." "정신 놓고 다니나 봐." "비행기에서 하도 자주 먹을 걸 챙겨 줘서 양식이라면 신물이 난다. 걸직한 김치하고 된장 바글바글 끓여서 먹고 싶다." "사람 복잡하게 하지 마. 한식 하는 집 찾아가려면 한참 찾아가야 돼." "그럼 나 좀 편하자. 빵이나 사서 걸어다니며 야만인처럼 먹자." "진짜 파리쟝이 됐나 봐." 사실이 그랬다. 한눈에도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란 걸 알 수가 있는 맥심으로 들어서려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그렇게 비싼 지불을 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시는지조차 모르면서 파리에서도 가장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에 앉아 시간을 버려가며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혜라가 지불하겠지만 그런 음식을 소화시킬 배짱이 내겐 없었다. 차라리 체력이 허락한다면 술이나 실컷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점심은 간단하게 때우고 저녁엔 불고기 먹으러 가지." 혜라가 이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햄버거 두 개와 우유 두 병을 사들고 양지 끝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깔깔했지만 체력을 생각해서 열심히 먹었다. 혜라는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어 보이는지 연신 웃기만 했다. "파리에 오면 루브르 박물관을 꼭 봐야 하는데...... 오늘이 화요일이라 문을 닫았을 거야." "박물관에 가면 표창 같은 거 있겠구나." "호오......" 혜라는 의미 있게 웃었다. 내 자신이 이 낯선 도시에 왔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무기 한 개 갖고 있지 않아 불안해 한다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저녁에 내가 표창을 구해 줄게.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해 놓을게." 우리는 시테 섬 옆의 강변 서점을 주욱훑어보고 노트르담 성으로 들어섰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성당을 눈 앞에 둔 셈이었다. "그 곱추 종지기가 아직도 있어?" "영화에서 죽었잖아." 혜라가 재치 있게 말을 받았다. "난 앞부분만 보고 말았거든." 노트르담 성당은 뾰족탑이 상당히 높게 세워져서 한눈에도 그 위용을 알 수가 있었다. 겉에서 보면 적벽돌과 시커먼 유리창처럼 보이던 것이 안으로 들어서자 오색영롱한 색유리였고 찬란한 모자이크 조각 같았다. 햇살을 받아 성당 안을 기묘한 안정감으로 감싸 주고 있었다. 장미 무늬의 가운데 창살문은 최후의 심판문이고 그 왼쪽은 성 안네, 그 오른쪽은 성모 마리아 문이라고 했다. "소원이 있으면 초를 사서 불을 켜고 빌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곳이야." 혜라가 먼저 초를 집어들고 말했다. 나도 동전을 내밀고 초 한자루를 받아 불을 당겼다. 수많은 사람이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내 생리에 맞지 않는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일이었는데 오늘은 선뜻 촛불을 켠 것이었다. 촛불을 올려놓고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서자 혜라가 손을 잡고 안쪽을 가리켰다. 약간 어두운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알아맞춰 볼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내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말해 줄까?" "관 둬." "난 알아. 당신은 다혜를 위해 기도했을 거야." "살려 주십사 하고 기도했다. 나도 산 "누가 죽인댔어?" "모르겠다." 사람이 답답해지면 하나님을 찾는 모양인지 모른다. 나는 정말 간절하게 다혜의 안전과 내 생명을 보호해 주십사 하고 기도를 했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본 적은 없었다. 천국직행교의 지하실에 감금되었을 때와 유기하에게 당할 때, 또 일본 애들과 결전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간절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노트르담 성당을 나와 다시 세느 강가를 걸었다. 한눈에도 일본 애들로 보이는 젊은 애들이 쌍쌍으로 끌어안고 관광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만큼 국력이 높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원 벤치엔 어머니들이 앉을 틈 없이 많았다. 세느 강 안쪽의 작은 공간엔 수영복 차림의 미끈한 여자들이 햇볕을 등으로 받고 있었다. 양지 끝 잔디밭에선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강렬하게 키스하는 젊은 사내와 계집애도 있었고, 끌어안고 뒹구는 모습도 간간 보였다. 아무도 간섭하거나 간섭받지 않는 풍경 같았다. 초미니 차림의 계집애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속옷 한 개가 펄렁일 때마다 훤히 보이는데도 괘념치 않고 사내와 잔디밭에서 마냥 뒹굴었다. 못 볼 것을 잔뜩 본 기분이기도 했고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우리는 다시 차를 세워 두었던 곳으로 나왔다. 길가의 주차장에 세워 놓았던 자동차 뒷부분이 찢어서 쓴 메모지가 꽂혀 있었다. "뭐야?" "자동차를 쳐서 미안하대. 이건 연락처고, 보험증서 번호가 적혀있어." "어쩌라는 거야?" "여긴 흔한 일야. 보험회사라고 할 만큼 제도적으로 잘 돼 있거든. 앞 차가 막아서서 빠져나가기 어려우면 두어 번 받아서 나갈 길을 트고 빠져나가기도 해. 양쪽 서로 부서지거나 찌그러지지만 보험회사에서 다 알아 처리해 주니까 싸우거나 신경질 낼 필요도 없어." "살기 좋은 나라인지 개떡 같은 나라인지 모르겠다." "이런 경우도 흔해. 친구 차가 고물일 때 튼튼한 트럭을 가진 친구가 일부러 받아서 차를 받게 해 주고 자축연까지 열지." "우리 나라 보험회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겠군." 자동차는 퐁피두 문화관으로 달렸다. 오래된 건물이어서 그런지 시내의 건물들은 퇴색한 느낌을 주었다. 십 년에 한 번씩 시청과 건물 주인이 비용을 반반씩 부담하여 건물세척을 한다고 했다. 퐁피두 문화관 광장에는 우리 나라의 약장사 패거리와 흡사한 패거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묘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동전을 한쪽에 모아가며 연신 기기묘묘한 재주를 보여 주었다. 외국인이 많다는 혜라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주일에 하루쯤만 여기에 와서 재주를 않게 돼." 서커스 단원만큼이나 재주가 출중한 젊은이도 있고 차력사, 마술사, 요가사 등등의 기묘한 인물들이 가지각색의 옷차림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퐁피두 문화관은 모든 내장품을 건물 밖에 그대로 내보인 특징적인 건물이었다. 건축물은 배관이나 전기, 구조물 따위를 속으로 감추어서 건물 내부나 외부에 가능하면 보이지 않게 하지만 이 건물은 일부러 밖으로 노출시켜 건물의 허상을 속속들이 보여 준 것이었다. 열 살도 채 안 됐을 성싶은 계집애도 담배를 뻑뻑 피우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도대체 나를 이렇게 끌고 다니는 이유가 뭐냐?"않은 마음으로 구경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참으로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혜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이렇게 시내 구경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혜라는 뭐라고 하든 아주 행복한 사람처럼 미소만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날씨까지 궁합이 맞았다는 그런 인식인 것 같았다. 며칠 동안 함께 있어본 결과로는 혜라라는 여자가 보통 여자와 다르다는 것과 나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부모를 구하기 위해 이런 조직과 손을 잡긴 했지만 아까운 여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진직 고관의 딸이라는 인식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거추장스럽고 까탈스런 여자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직접 붙어 있어보니 성품도 좋고 뛰어난 근본적으로 착하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잠자코 있어. 다 당신을 위한 거야. 나중에 알게 돼. 지금 설명 할 수가 없어서 나도 답답하지는 마찬가지야. 지금 다닌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두란 말야. 당신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거든 지금 우리가 움직이는 길이 어떤 루트라고 생각하고......" "나는 정말 민혜라라는 여잘 모르겠다. 도대체 나를 언제까지 이렇게 묶어둘 거냐?" "길지 않아.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길지는 않아. 인생은 그래도 꽤 긴 거지만 당신과 내 인생에 있어선 어떨지 모르거든.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줘. 나도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이상의 인생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단 몇 시간일지, 단 며칠일지 모르거든." "누구 겁 주려고 이러냐?" "아무렇게나 생각해. 제발 내 인생이 남아 있는 동안은 내 말대로 해 줘. 제발 얼굴 좀 펴 줘. 가소롭더라도 웃어 줘 봐. 싫더라도 신혼여행 온 사람처럼 밝은 척이라도 해 달란 말야. 누구는 속이 없어서 이렇게 웃고 돌아다니는 줄 알아?" "그만 심각하자. 진짜 심각해야 할 측은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앞지르고 그러냐." "나도 모르겠어." 혜라는 난폭하게 운전하기 시작했다. 심사가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길거리의 교통은 엉망진창이었다. 차선을 비워 주지 않고 꽉 교통순경 한 사람이 없었고, 클랙슨을 누르거나 싸움질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리 삐지고 저리 삐져서 달아나는 차가 많아 조용한 상태에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었다. 중앙선에서 마구 차를 돌려도 피식피식 웃거나 손 한번 들어 주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일 킬로미터쯤 빠져나오는데 사십여 분의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고 스몰라이트만으로 야간운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로등은 환했다. 그러니까 서로 눈이 시거나 운전 방해를 받을 염려가 없었다. 자동차를 번화가의 길가 주자창에 세우고 혜라가 말했다. "뭣 좀 사야 돼. 그리고 저녁 먹고 어디 나는 그녀를 따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썩 세련된 건물 앞에 섰다. 혜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귀여운 여자였다. 진열 상품이 각기 다른 건물 세 채가 한 개의 백화점이었다. 우리 나라의 웬만큼 큰 백화점만큼한 건물 세 채였다. 혜라는 잡화부가 있는 백화점으로 들어서더니 안내판을 보고 곧장 지하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우리 나라의 어떤 백화점과 체인을 맺었다는 오프랭탕 백화점 지하에는 각종 생활도구들이 즐비했다. 몇 사람에게 불어도 몇 가지를 묻더니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돌아갔다. "필요한 게 있을 거야. 당신이 골라." 나는 혜라의 치밀함에 빙긋 웃었다. 칼과 가위, 손톱깍이와 병따개, 족집게와 송곳, 진열된 곳이었다. 내가 즐겨 쓰는 표창을 두고 왔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손 쓸게 없다는 걸 혜라는 눈치 챈 것 같았다. 일본의 흑장미와도 가깝다는 것으로 미루어 내 신상에 관해서는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새끼손가락만한 칼 두 자루와 뒤꼭지 부분만 잘라내어 숫돌에 갈면 내가 만들어 쓰던 조선 표창과 흡사하게 생기고 무게도 엇비슷해 보이는 병따개 스무개, 다용도로 쓸 수 있는 묵직한 칼을 한 자루 골라 잡았다. 혜라가 줄칼과 숫돌 한 개씩을 더 넣으라고 했다. "이만하면 나를 믿겠어?" 혜라가 싱긋 웃고 물었다. "함정일 수도 있지. 때렸다. "당신 참 어진간해." "그러니까 팔자가 이 모양이지." "당신한테 사랑받는 여잔 정말 행복할 거야." 혜라는 씁쓸하게 말하고 물건꾸러미를 챙겨안았다. 다시 일층 잡화부로 올라가더니 넓은 가죽 허리띠를 한 개 골라 주었다. 보통 치밀한 여자가 아니었다. 허리띠 속에 표창을 만들어 감추고 양말속과 옷소매 사이에 작은 칼을 감춘 것까지 다 알고 있는 여자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이었지만 현란한 불빛과 가로등 때문에 초저녁 무렵처럼 먼 곳까지 익숙하게 보였다. 한식집에서 김치만 세 그릇을 더 문을 걸어잠근 채 우리는 표창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고른 병따개는 대만제였고 뒷부분을 잘라내어 줄칼로 모서리를 쳐내고 숫돌에 날을 세우기만 하면 영락없이 조선 표창에 형형색색과 섬세한 조각을 파넣은 표창 같았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냐?" "언젠가 그런 물건을 보았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 거지 머. 일본에 갔을 때하고 지난 번 서울에서 당신의 표창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쉽게 연상할 수가 있었어." "무게까지 비슷해. 아주 손에 익은 표창 같다." "당신이 쓰는 것은 무쇠지만 이건 신주 같애서 얼추 비슷하리라고 생각했어. 무게가 틀리면 그만큼 고리 속에다 납을 갈아내면 될 것 같았아. 여긴 대장장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당신 맘에 들게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았어." "고맙다." "몇 년 더 있다가 인사를 하지 그랬어? 싱겁게 들리는데." "그들은 성능 좋은 무기를 가졌겠지. 기관단총이라든지......" "나도 그쯤은 전화 한마디로 구할 수 있어. 그러나 그건 정말 위험해. 총으로는 당할 수가 없어. 숫자로도 상대가 안 되고 솜씨로도 안 돼. 총을 지니면 언제라도 뒤통수를 갈길 수 있는 사람들이거든. 그러나 맨몸으로 나서면 방심하거나 여유를 주게 될 거야. 그럴 때 당신에겐 기회가 "그건 그래." "내가 당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 같지 않아?" "그래 겁난다."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어. 결정적인 때, 나는 당신에게 매몰차거나 배반하게 돼. 그러나 그게 연극이란 걸 당신은 알아야 돼. 그럴때 삐치면 안 돼.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시간이 해결한다고 생각해야 돼. 이건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어째 좀 으스스하다. 금방이라도 누가 기관단총을 들고 문을 부수며 들어와 나를 염라대왕 앞에 데려갈 것 같기도 하다." "나하고 있는 동안은 안심해도 돼. 그들은 내가 연락하는 대로 움직이게 돼 줘야 돼. 그래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내가 당신을 설득하느라고 시간이 걸릴 거라고 믿을지 몰라. 내가 아까 저녁을 먹으며 연락을 했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설득됐냐는 거야. 거의 돼가는데 아직 못 믿을 게 있다는 연막을 쳐뒀으니까 아마 나를 믿고 기다릴거야." "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차차 알게 돼." 우리는 손발이 맞아 두어 시간 만에 표창 스무 개를 만들었다. "실험해요." "조오치. 나는 표창 던질 때마다 가슴 속이 다 시원해져. 그것도 진짜 던질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표창을 들어 침대 모서리 나무 표창을 날렸다. 정확하게 스무 개는 이열 종대로 침대 모서리에 박혔다. "역시 당신야." 혜라가 탄성처럼 소리질렀다. 스무 개의 표창을 빼내어 허리띠속에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 넣었다. 든든했다. 웬만한 기관총이라도 맞서보고 싶은 그런 응어리가 펄펄 숨쉬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준비가 다 됐다. 붙여만 다오. 한주먹으로 해결하마." "아직 때가 일러. 초조해 하지 마. 다혜는 멀쩡해. 내 목숨이라도 걸 수가 있어." 할 말이 없었다. 혜라의 행동이나 말은 처음부터 일관성이 있어서 믿어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밤이 이슥했지만 들기만 하면 나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유혹해 내고 말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매력이 그녀에겐 있었다. 어찌 보면 그녀는 잠자리에서만은 세상을 급하게 살려고 마음 다져먹은 사람 같았다. 그녀의 말이 자꾸 귓전에 남아 나를 괴롭히곤 했다. 자신의 인생이 아주 짧을지 모른다는,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나를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차례나 했었다. 마치 그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여자처럼 서두르기도 했고 모든 걸 각오한 사람처럼 달관한 유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그녀는 실체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금방 죽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고향 땅에 묻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다가도 어떤 때는 은 모릅니다." 데나 뿌려 주고 자신이 죽은 날만은 정말 잊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듯 말하기도 했다. 알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럴 때의 나는 이상하게 그녀에게 약해졌고 그러지 말자는 다짐도 녹아 버리곤 했다. "내가 만약 당신 때문에 죽는다면, 그날, 내가 죽은 날마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슬퍼해 줄 수 있을까?" 혜라는 밤이 깊어지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 되자 또 이렇게 시작했다. 나를 마음 약하게 해서 유혹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자주 말하듯 정말 죽어 버릴 것인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내 편의대로 나를 위해 죽을 생각이 들게 했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나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꼭 죽어야 할 일이라도 있냐?" "그냥 해 본 소리지 머. 인생이란 늘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거니까 말야." "혹시 그 조직을 배반하면 네가 죽게 되는 거야?" "나를 누가 죽여?" "그럼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릴 계속하지?" "재수 없는 소리가 아니라 재수 있으라고 하는 소리야." "알다가도 모르겠다. 도대체 네가 죽으면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냐? 기탄없이 말해 봐. 지킬 만하면 지켜 주지 머." "그러니까 말해 보라잖아." "내가 길거리에서 그냥 시체로 발견되더라도 그건 당신을 위해 죽었다고 믿어 줄 수 있어?" "믿는 다 치자." "물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돼. 그러나 당분간은 나를 못 믿게 될까 봐 그래." "죽는 여자가 별 걱정을 다하는 구나. 믿어 줄게." 어떻게 얘기의 꼬리가 흘러가는지도 알기 위해서 이렇게 물고 들어가 보았다. 혜라의 그럴 때 표정은 숙연하고 너무 진지해서 속지말자고 다짐하다가는 어느 틈에 꼼짝 못하고 그녀의 덫에 채이곤했다. "내가 만약, 분명히 만약이라고 했어. 정말 만약 죽게 되면 어떻게 처리를 쎠構岷?" "해 달라는 대로." "그럼 화장을 해서 재를 우리 나라로 가져가." "그러고는?" "당신 고향 근처에 금강이 있잖아. 본적이, 우리 집안 본적도 그쪽이니까 거기다가 뿌려 줘." "무슨 신파극 같다." "그러면 어때." "그거야 쉽지." "그 뒤가 문제야." "또 있냐?" "내 죽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살아 있는 한 기억은 하겠지." "그게 아니고 아주 슬퍼해 줘야 돼." 주랴?" "그럼 더 좋고." "사람 잡을래?" "부탁야. 다른 날은 몰라도 내가 죽은 날만은 금강가, 내 재를 뿌린 그곳에 와서 하루만이라도 나를 생각해 줘. 만약 다혜와 결혼했더라도 그날만은 나를 생각해서 하루만 허비해 줘.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그날만은 사랑도 하지 말고. 그날은 나만 생각해 줘. 강가에 와서...... 그래, 지금 죽으면 우리 나라도 추운 겨울이니까 아주 두툼하게 입고 술이나 한 병 들고 와서 내 영혼과 부라보라도 해 가며 하루를 보내면 되겠어. 난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어. 그러나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어. 이게 내 자존심이고 이게 나로선 최상의 양보야. 당신이 죽을 때까지 그래 주면 좋지만 난 그렇게 욕심을 안 부려. 앞으로 십 년간만이라도 말야. 내가 지나친 걸까." "모르겠다." "그러면 내가 당신을 위해 죽어 줄 수 없잖아." "네가 왜 나 때문에 죽냐?" "만약이라고 했잖아." "정말 나를 위해 죽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지." "약속할 수 있지?" "한다." "그럼 됐어. 만약 당신이 약속을 지키 않으면 나는 귀신이 돼서라도 당신을 못 살게 굴 거야." "독하구나." "난 내 사랑에 대해서만은 승부를 보고 죽어야 되니까." "분명히 말했잖아. 난 너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고." "알아. 내가 사랑하면 되는 거니까." "정말 넌 죽게 되냐? 더구나 나 때문에?" "그럴지 모르지." "왜 나 때문에 죽어야 하냐? 살 길은 얼마든지 있잖아. 나를 넘겨 주고 가도 되고 내팽개치고 가도 네 입장은 그만 아니냐. 굳이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지켜 줄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거다." "당신은 사랑에 대해 너무 몰라. 난 그 부분만은 질겨." "나도 그 부분만은 질긴 놈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좋아할 수 있지." "언젠가는 돌아설 거야. 당신은 다혜와 결혼까지 하진 못해." "두고 보자. 악착같이 같이 살 거니까. 나도 한번 한다고 마음 다져먹으면 무서워지는 놈이다." "당신은 무지무지하게 행복한 사람야. 나 같은 여자가 이렇게 다 내팽개치고 사랑할 정도면......"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올해 토정비결을 보니까 여난이 씌어있더라."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내가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는지를 알아만 주면 돼. 나도 이렇게 당신한테 빠질 줄은 몰랐어. 이래보여도 난다긴다하는 총각들, 우리 나라에서 어디 내놓아도 제 값 높은 고관대작의 자식이나 재벌 이세들이 하나 당신을 선택한 거야. 이건 내 운명야." 나는 그녀의 진지한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금세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이었다. 그녀는 무너지듯 내게 안겨왔다. 나는 그녀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뜨겁게 달아오는 그녀의 몸을 안았다. 어쩌면 이것이 내 운명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거절할 수 없는 핑계를 나는 가지고 있었다. 이 여자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으면 다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핑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잠자는 욕망쯤은 언제나 털고 일어설 수 있지만 다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고 마다 할 수가 없었다. 밤은 까무라지고 우린 뜨겁게 밤을 새벽에 펜타 호텔에서 구시가지 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는 참으로 한적해 보였다. 우리 나라의 초겨울 새벽처럼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과 조깅하는 사람, 더러는 자전거로 광장을 도는 사람과 새벽 공기를 마시러 나온 노인네들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육교에도 유리를 다는 파리 사람들, 지하철 역의 의자도 수만 개가 모두 다르고 건물도 같은 모양이 없게 만든 이 도시의 자존심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혜라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호텔 방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 혜라는 오늘 나다니는 길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익혀두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만 좀 돌아다니자." "그건 안 돼. 내 추억을 위해서도 안 되고 당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안 돼. 어제 군말 않기로 약속했잖아. 오늘 하루만, 딱 오늘 하루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줘. 부탁야." "믿어도 되냐?" "맹세할게." "좋다. 무조건 따라만 다니마." "루브르 박물관을 봐둬야 해." "거긴 왜?" "당신이 최후에 피신해야 할 곳일지 모르니까." "겁 주네." 나는 이미 그녀에게 이곳 파리에서의 생활을 내맡긴 처지였다. 그녀에게 다 계획이 있고 뜻이 있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말없이 루브르 박물관은 수요일이어서 입장이 무료라고 했다. 화요일은 문을 닫는 대신 수요일엔 모두 공짜로 입장을 시킨다는 그들의 관용과 멋진 구상이 기분 좋았다. "여긴 위대한 프랑스가 아니라 위대한 전리품, 치사하게 훔친 보물들 전시장 같다." 한 작품, 한 작품 설명을 들으며 내가 대번에 느낀 것은 바로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들이 전쟁과 힘의 우위를 이용해 찬탈해 온 것들이란 인상이었다. "그건 잘 봤어. 그러나 빼어난 예술품은 꽤 많이 가진 나라이기도 해." 비너스 상 앞에 우뚝 서더니 혜라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때?" "그럴 줄 알았지. 그만큼 대단한 예술의 나라라는 것도 한편으론 인정해야 돼." 일백 육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도 있었고 내 팔목보다 굵은 순금 지팡이도 있었다.무지무지한 양의 보석과 금붙이도 있었고 희랍에서 강제로 훔쳐온 진귀한 보물과 피라미드의 머리 부분까지 진열되어 있어서 프랑스는 예술품의 도둑 나라올시다 하는 인상도 지울수가 없었다. "옛날 사람이 저렇게 작았나?" 미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육 척도 채 안 될 크기의 미라들이었다. "아냐. 내장하고 골을 드러내고 일정기간 두었다가 미라를 만들었기 때문에 줄어든 거래." 어쨌든 수탈의 문화를 부정할 수는 보물들을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것을 보면 프랑스의 선조들이 어떤 족속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힘 있는 나라에 현재도 힘 없는 나라는 문화재 아닌 정신까지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수탈의 문화라고 하더라도 너무나 엄청난 규모와 널리 알려진 진귀한 것들이 많아 넋을 잃고 구경하는데 혜라가 내 팔을 살짝 쳤다. "쟤들 조심해." "집시잖아." "저렇게 서너 명씩 떼지어 다니다가 밀치고 넘어지면서 주머니를 털거든." "심심한데 잘 걸렸다." 나는 일부러 그쪽으로 끼여들었다. 몸을 붙였고 그 옆의 사내녀석이 일부러 나를 안고 비틀대는 사이에 계집애가 재빨리 내 주머니를 뒤졌다. 나는 내 지갑과 여권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실패했다는 걸 안 그들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설렁설렁 걸어갔다.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는, 아주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나는 눈 크게 뜨고 혜라 앞에 사내녀석과 계집애의 작고 앙증맞은 지갑을 흔들어 보였다. "어머! 같이 못 놀겠네." "쟤들 좀 불러 줘. 얘길 해 줘야겠어. 그런 솜씨로 어떻게 밥 먹느냐고." "신나는데." 혜라가 뛰어가 집시 애들을 불러세웠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앙증맞은 지갑을 보더니 "얘들한테 이렇게 말해. 한국인 호주머니에 손대면 손목이 잘려지는 거라고. 한국 사람 가운데엔 특수한 물건을 지갑에 부착한 사람이 있어서 몰래 손을 넣었다가는 싹둑 잘리는 거라고. 내 지갑에도 그런 장치가 있어서 일부러 얘들 손목을 보호하려고 잡은 거라고 말해." 혜라는 방실거리며 집시 애들에게 말을 했다. 집시 애들이 호들갑스럽게 말대꾸를 하며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내가 일부러 무섭게 인상을 썼다. "당장 손목을 자를 것이로되 한국인을 앞으로 다시 건들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약속하면 그냥 보내 주겠다고 해." 혜라가 통역하는 사이에 녀석들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그러겠다는 시늉을 했다. 애들, 미국 애들, 소련 애들...... 당장 무릎 꿇고 빌라고 해." 집시 녀석들이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깍지낀 채 중얼거렸다. 혜라가 연신 웃었다. 녀석들은 혜라의 말을 듣고 뒤가 마려운 것처럼 도망질 했다. 우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위인들만 묻히게 된다는 팡테움을 스쳐 지나가며 루소, 볼테르, 위고, 졸라, 슈플레 같은 위대한 인물이 묻힌 곳이라고 말했다. "우리 나라에 저런 게 있으면 볼 만하겠다. 죽어서 그런 곳에 묻히려고 별의별 짓을 다하겠지. 아마 진짜 위인은 엉뚱한 산에 묻히고 아주 지능적인 사기꾼들, 고도의 위선자들, 뛰어난 가짜 투철한 아부주의자들이나 탁월한 사대주의자들 말야." "정말 그럴 거야. 우리 나라는 좀 별난 게 있어. 진짜는 늘 말이 없는데 가짜는 늘 떠들썩하고 살아 생전에 대우를 받는 것 같애. 가짜들은 죽을 때도 요란하게 죽고 묻일 때도 요란하거든." "왜 가짜가 판치는지 아냐?"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때문이지." "대충은 맞췄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 탓이겠지만 힘으로 뭐든지 해결하려는 멍청이들이 우글우글해서 그래. 해방되고 나서 주욱 말이다." "강대국들 지랄에 비위 맞춰가며 사는 얼빠진 지도층 인사들의 의식은 어떻고." "그만 두자. 그래도 난 우리 나라를 싶으면 국적 바꿔가지고 한국인이 아닌 걸 자랑으로 삼는 부류는 악착같이 안 될 놈이다." "할 말 없게 만드네." 혜라는 머쓱해 했다. "생각해 봐라. 우리 나라 지도층이란 친구들 가운데 이중 국적자가 한둘인 줄 아냐? 정치합네, 행정가입네, 법조인이고 종교지도자고 교수고 경제인입네 하는 친구들 가운데 부지기수로 이중국적자가 많다는 사실을 아냐? 그런데 그 친구들이 왜 이중국적자가 됐는지를 알면 더 기절초풍할 거다. 전쟁이 나면 혼자라도 살겠다 이거지. 괜찮다 싶은 사람 자식들이 왜 그렇게 많이 미국이다 일본이다 유럽이다 하고 뺑소니쳤는지 알아? 물론 속셈이 따로 있는 사람도 만만찮다 이거지. 전쟁? 그게 그리 쉽게 날까? 육이오가 그렇게 쉽게 터진 전쟁 아니다. 그런 거 있지. 동네 꼬마들 노는 거 보면 힘 센 녀석이 저보다 힘 약한 애들 불러놓고 괜히 말 걸어서 심심하면 쟤가 너 이긴다더라 쟤한테 질 수 없잖느냐라고 쌍방에다 성질을 돋구어 놓고 싸움질시켜서 은근히 말리는 척하는 거...... 그러면 힘 약한 애들은 비슷한 또래에게 당하기 싫어서도 강한 녀석에게 누룽지나 껌 같은 걸 줘가며 잘 보일려고 하기 마련이지. 국제정치사를 보면 힘 없고 조그만 나라가 큰 나라한테 깝신거리고 덤빌 땐 더 크고 힘센 나라가 부추겼다는 사실을...... 약소국가는 그래서 억울한거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가 총을 들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우리 나라에 만약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봐.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올 건 틀림이 없지만 꽁무니 뺄 가짜 애국자들이, 가짜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이거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더 한심한 것은 이중국적자가 그렇게 많다는 것을 알면서 눈 딱 감고 자리 맡기는 친구들이지. 용감하게 그 잘난 놈의 나라 국적을 왜 못 버리는지 생각 좀 해 봐라." 혜라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멋적게 웃었다. "만약 내가 죽거든 내 일기장과 내가 쓰던 노트를 당신에게 남겨 주고 싶어. 그 정리되어 있을 거야. 난 남이 볼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일기를 거짓으로 쓰는 여자가 못 돼. 당신이 해결할 문제도 많겠지만 당신에게 도움 되는 일도 많을 거야." "자꾸 사람을 으스스하게 만들지 마라." 그녀가 자꾸 죽음을 얘기할 때마다 나는 섬뜩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예감은 자꾸만 그녀의 죽음이 연상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난처럼, 내 마음을 떠보기 위해 장난치는 거라고 여겼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코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에펠 탑 근처를 돌아 나폴레옹이 안치된 묘역과 군사박물관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사람 많이 죽인 사람이 영웅 대접을 얼마나 대포 하나 총 하나하나에까지 조각을 해 넣은 그들의 예술 감각이 차라리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사람 죽이는 무기에 예술적 조각을 담는다고 해서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원자탄을 피카소의 그림으로 포장을 한들 무엇하며 미사일을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으로 포장을 한들 어쩌겠다는 것인가? 사람 죽이는 무기의 포장은 차라리 해골로 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지 모른다. 거리에서 연설을 해대는 노인의 열변을 혜라가 귀담아 듣고 피식 웃었다. 가로 옆 벤치의 잔디밭에 노인들과 호기심 가득 찬 어린이들과 여행객들이 앉아서 박수도 치고 야유도 해 가며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도 꽤 가슴 뿌듯해 보였다. "수상이 사회당 출신인데 한마디로 수상이란 작자는 코미디언이라는 거야. 고만 웃고 싶으니까 조용히 물러나서 쓰레기 하치장의 두목이나 하라는 거야." 혜라가 들리는 대로 통역을 했다. "안 잡혀가냐?" "우와, 당신도 웃길 때가 있네. 왜 잡아간다고 생각하지?" "수상을 어떻게 욕하고 그러냐?" 나는 짐짓 어리석은 체하고 이렇게 물었다. "국민이 심부름 잘하라고 시킨 거니까 욕할 수 있는 권리도 국민에게 있는 거 아냐?" "그래도 그렇게 높은 사람을 어떻게......" "얼굴에다 토마토 케첩도 내던지는걸." "그러니까 쪼다가 할 짓은 아니지." "나도 프랑스로 와서 이중국적자가 될까 부다. 그래서 아침 든든히 먹고 나와서 이튿날 새벽까지 수상이란 작자 욕만 실컷 할까 부다." "난 또......" 그제서야 내가 장난으로 말을 걸고 있다는 걸 알고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나라에서 없어진 것 가운데 정말 아쉬운 게 하나 있었다. 어떤 공원 안에서 열혈청년과 열혈노인들이 정부의 잘못을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신랄하게 비판하던 그 작은 모임을 없앤 것이었다. 어떤 소갈머리 없는 친구가 얼마나 출세에 눈이 뒤집혀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말 아쉽기 한이 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정경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그 장소에서만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욕을 하든 내버려 두는 그 포용력이 없이 어찌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땅일 수 있을까? 서양에서 바보제라고 해서 일년 중 일정한 기간 동안엔 그 겁나는 법황이나 황제나 군주들까지도 실컷 욕하고 비판하는 축제가 있었다고 했다. 우리 나라가 그걸 그냥 두었더라면 후손들에게 얼마나 멋진 조상을 두었는가 하는 자랑이 되었을 터인데 왜 그런 걸 소갈머리 없이 없앴을까? 아마 뒤가 구려서이겠지. 바보제가 없어진 것도 뒤가 구린 법황이나 황제나 군주들의 계락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정치한다는 그 가짜들 짓이겠지. 에라, 이 천하에...... 하나님, 그리고 보면 당신도 꽤 시시한 양반이오. 뒤도 구린 것 같고. 당신이 당신 비판하고 욕하는 걸 안 참으니까 덩달아 소갈머리 없는 친구들이 그러는 거 아닙니까? 당신을 비판하면 당신 패거리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쇼? 그게 바로 당신이 시시하다는 증거올시다. 하나님, 그래서 졸개는 잘 둬야겠습니다. 졸개들 하는 짓 보면 두복 하는 짓 쉽게 아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삼각산이든 남산이든, 백두산이나 한라산이나, 한국인들 귀찮으면 후지산 꼭대기든지 알프스 산이든지, 좌우간 어디든지 장소를 정해서 그 자리에서만은 하나님 욕을 하든 마귀들을 존경한다고 악을 쓰든 내버려두는 아량쯤은 가져 줄 용기는 없으슈? 내가 이렇게 지껄이면 또 그 소갈머리 없는 졸개들이 나한테 눈부라리고 되바라지게 악쓰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위해 진정으로 하는 소리라는 것 좀 알고 졸개 단속 좀 잘해두쇼. 내가 이런 얘기할 때까지 그 생각 못했다니 하나님도 참 너무하쇼. 하나님 우리도 몽땅 소갈머리 좀 갖게 해 주십쇼. 나부터 말입니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그대가 머문자리
https://cafe.daum.net/sara3040
삶의 이야기
|
좋은글방
|
명상 명언
|
끝말 잇기
|
최신글 보기
검색
카페정보
그대가 머문자리
플래티넘 (공개)
카페지기
다움
회원수
92,637
방문수
2,154
카페앱수
1,041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친구 카페
이전
다음
ㆍ
하나방송국 자료실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연재 소설방
[김홍신] 인간시장(9권) 88. 죽어도 좋아
하 얀 비
추천 1
조회 201
08.06.19 08:27
댓글
5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댓글
5
추천해요
1
스크랩
0
댓글
미혜
08.06.19 12:00
첫댓글
혜라는 정말 종찬이를 도와주고 죽는걸까?
나리아리
08.06.19 18:19
잘봤어요^^
새처럼
12.09.18 13:58
좋은글 감사,,^^^^^
그리운남촌
14.08.29 22:28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4 12:59
감사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첫댓글 혜라는 정말 종찬이를 도와주고 죽는걸까?
잘봤어요^^
좋은글 감사,,^^^^^
잘 읽고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