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그는 누구인가?
1964년 의친왕비 사망시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나 의친왕의 자제가 12남9녀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셨다
1877년 3/30일 고종과 귀인 장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민비의 투기로 궐박으로 나오게된다
이후 민비의 심경변화로
1891년 24세의 나이로 의화군에 봉하여지고
1893년 김사준남작의 딸 김수덕을 아내로 맞이하나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고
1894년 청일전쟁 축하차 보빙대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1895년 특파대사로 유럽을 순방한다
1900년 미국유학에 나서고
1900년 8월 대한제국의 건설로 의친왕에 봉해진다
1904년 안창호 정재관등과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공립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됨
1905년 귀국후 6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제로 취임하고
1910년 한일합방이후 독립운동 투옥 석방등-
1919년 10/10일 중국으로 기차타고 망명을 시도하려나 여성편력(애첩 최효신과 동행을 시도)
결국 10/11일 열차를 타고 탈출하나--좌절 한양으로 호송된다
이사건로 직위와 재산등을 맏아들 이건에게 모두 넘기도 연금상태의 생활을 한다
1955년 8/15일 성북구 별장 성락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래에 의친왕의 가계도가 있지요
좌 의친왕의 맏이 이건 의친왕 우측은 둘째 이우공
의친왕과 양복입은 분이 큰아들 이건 .군복입은 분이
둘때아들 이우 입니다
아래는 최초로 공개된 고종 황제 가족사진 고종과 순종, 의친왕, 영친왕 등 조선 황실의 마지막 가족사가 담긴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자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 이석씨가 소장해 온 사진은 1915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석씨는 이 사진이 영친왕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귀국한 것을 기념해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2일 공개된 고종황제의 가족사진. 왼쪽부터의친왕, 순종 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셋째아들 영친왕, 고종 황제, 순종 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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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독립운동
독립운동사에서 황실의 역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황실재건회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종엽(32)씨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황실 변수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한황실의 독립운동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다. 이강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한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각별한 사이였다. 3·1운동이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3월3일을 앞두고 계획됐고, 당시 사람들은 고종의 독살설을 대부분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만세 사건인 1926년 6·10 만세 사건이 터진 날은 순종의 인산일이었다.) 안천 서울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이강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뒤에서 조종한 핵심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민족대표 33인은 당시 유명한 요릿집이었던 태화관은 의친왕의 사저였던 사동궁과 담 하나를 끼고 남쪽에 있었습니다. 탑골공원과 태화관은 약 10분 정도 되는 거리고, 사동궁과 태화관은 2분 걷는 거리의 담 하나 앞집입니다.”
30여명 자손을 둔 의친왕, 반일 산아투쟁?
3·1운동이 진압된 뒤 이강이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대동단 사건’으로 기억한다. 대동단 사건은 1919년 10월10일 조선을 빠져나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구한말 대신 동농 김가진(1846~1922)이 이강을 모셔오기 위해 꾸민 사건이었다. 김가진의 며느리인 독립운동가 정정화(작고) 여사는 1987년 펴낸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 이강과 친근한 사이였고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했다”며 “이강에게 (상하이 망명에) 동행할 것을 권유해 이강은 쾌히 승락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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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는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고종이 독살됐다 믿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은 3?운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사진/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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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강은 간호원 출신의 애첩 최효신을 데려가겠다고 떼를 쓰다 1919년 11월10일 기차를 놓쳤고, 결국 다음날인 11월11일 11시 수색발 중국 안동(지금의 단둥) 열차를 탔다. 불행히도 이강은 단둥역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망명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이강은 매일 감시의 눈초리를 그치지 않는 밀정에게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술과 여자에 빠져 30명 가까운(정확한 자손의 수는 아무도 모른다) 자손을 둔다. 안천 서울교대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일제에 대항한 의친왕의 거룩한 산아투쟁”이라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기 힘들다. 당대 사람들은 고종도 국권 회복을 위해 해외 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 이왕직 장시국자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익이 독살한 것으로 믿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2006년 5월 옛 대한제국 황실 자손들의 역사를 정리한 <제국의 후예들>을 쓴 정범준씨는 “황실 독립운동사의 난점은 황실이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과 어떤 영향을 줬는지 명확한 문헌 증거로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황실의 독립운동이 일제의 감시로 은밀하게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인들의 주목을 끌만큼 대단한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황실이 저문 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아무 노력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린 그 사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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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
헤이그 밀사사건 내탕금 받았다는 헐버트 박사의 증언 남아 있지만…
고종이 마련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에 대한 소문은 사실일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긴 힘들지만 이를 방증하는 증언들은 얼마든지 있다.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자리한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가면, 이제는 한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버린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무덤을 찾을 수 있다. 그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 등과 고종의 밀사로 파견돼 구미 언론들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1949년 7월29일 프레지던트 헤스호 편으로 해방된 대한민국을 찾은 뒤 8일 만에 숨졌다.
이때 그가 남긴 말이 헐버트 박사 한국 방문을 주도한 김을한씨의 저서 <인간 영친왕>에 기록돼 있다. “저는 소위 헤이그 밀사사건 당시에 고종황제께서 막대한 내탕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본인에게 위탁한 것이 있어서 상해 노중(露中)은행에 예금한 바가 있는데, 그 후 한일합병에 성공한 일제가 그것을 알고 전부 몰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고종황제와 본인만이 아는 비밀로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기어이 이 일을 결말지어야 하겠습니다.” 그는 “은행에 맡긴 증서와 모든 관계 서류를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갑작스레 숨졌고 고종의 막대한 내탕금의 행적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 밖에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선우훈이 고종의 7촌 조카이자 매국노 이지용의 증언을 모아 <사외비사- 덕수궁의 비밀>이란 책을 써냈는데 이곳에도 고종이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누어 담아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이용익에게 시켜 비밀장소가 담긴 지도를 들고 탈출을 기도하던 직전에 시해당했다”는 진위를 확인하기 힘든 얘기가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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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순헌황귀비 엄씨 =
영친왕 + 의친왕비 이방자여사 = 이진 (어려서 죽음), 이구 (작년에 사망)
고종 + 귀인장씨 =
의친왕 + 의친왕비 덕인당 김씨 = 소생없음.
수관당 정씨 = 이건
수인당 김씨 = 이우
수인당 김씨 = 이건, 이곤 (이우의 모친인 수인당 김씨 사후에 입궁한 것으로 보임)
수현당 정씨 = 이방
수경당 김씨 = 이현
수덕당 이씨 = 이영(옹주), 이진(옹주)
수완당 김씨 = 이찬(옹주)
수길당 박씨 = 이숙(옹주)
송씨 = 이광
전씨 = 이종
함씨 = 이갑
조씨 = 이창
홍씨(홍정순)= 이석, 이정, 이용(옹주), 이현(옹주)
김씨(김혜수) = 이황, 이장(옹주), 이민(옹주)
김씨(김금덕) = 이공(옹주)
당호가 없는 사람들은 조선이 망하고 난 이후에 의친왕의 첩이 된 사람들로 추정됩니다.
(출처 : '의친왕과 영친왕에 대한계보 좀 알려 주세요..'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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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의 생모 상궁 장씨( 張氏 )의 최후에 관한 기록]
세자(순종)은 이미 양도( 생식기능 )가 못펴서 인해 고질이 돼 명성황후가 후사를 이을 수 없음을 탄식해 왕자 리강( 李堈 )의 득남을 헤아리고 기다려 세자의 대통를 이으려 했다. 고로 리강은 점점 박대치 않게 보여 완화군( 完和君 )을 대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신묘( 辛卯, 고종 28년 )년 겨울에 이르러 주상( 고종 )에게 리강을 의화군( 義和君 )으로 봉함을 권했다. 의화군 리강은 상궁( 尙宮 ) 장씨( 張氏 )에게서 났다.
리강이 태어나니 명성황후는 성내어 날카로운 칼을 짚고 장씨 처소에 이르러 창에 칼 꽂고 외치며 왈, " 칼 받아라! " 했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곧 한 손으로 칼자루 쥐고 한 손으로 창을 밀치며 나가 굽히고 엎드려 목숨을 애걸했다. 모발은 흩어져 구름처럼 드리워졌고 얼굴은 가려졌다.
( 황후는 ) 불쌍히 생각해 칼을 던지고 웃으며 왈, " 마땅히 대전의 사랑을 받아 지금 죽이기 불가하다. 그러나 궁중에 거처하지는 못한다. " 하며 장사를 불러 결박하고 음부 두쪽 살을 도려내 밖으로 내쫓았다. 장씨는 그 형제들에게 의지해 10여 년을 살다 상처로 고생하다 죽었다. - <매천야록> 갑오( 甲午 )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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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어머니 장씨에 대한 기록, 이해경님 글 오류있다.
[ 내 아버지 의친왕은 격동의 구한말인 1877년 3월 30일(丁丑年 2월 16일)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태어나신 곳은 북부(北部) 순화방(順化方) 사재감(司宰監) 상패계 자하동에 있는 범숙의(范淑儀, 철종의 후궁이며 금릉위 박영효와 결혼한 영혜옹주의 생모)의 궁이었으며, 생모는 귀인(貴人) 덕수(德水) 장씨(張氏)이다.
그러나 민비는 자신의 궁녀인 장상궁이 고종황제의 애기를 낳은 것을 알고, 이는 자신에 대한 장상궁의 크나큰 배신(背信)이라 생각해 장상궁을 불러 칼로 찌른 후 애기와 함께 궁밖으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후 장귀인은 그때 입었던 상처로 10여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외가집에서 교육을 많이 받으신 외삼촌으로부터 학문과 서예를 배우면서 유년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
하지만 민비가 왕세자(순종) 다음에 낳은 대군(大君)들이 모두 유아(幼兒)시절에 죽고 왕세자 역시 몸이 허약해 후사(後嗣)가 걱정된 민비는 고종황제께 말씀을 드려서 1891년 당시 15세가 된 아버지를 궁궐로 데려다가 관례(冠禮: 성인 의식)를 시키고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하셨다.
한편, 아버지께서 궁에 들어오실 때 모시고 들어온 최(崔)고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를 어릴 때부터 양육하다시피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은 언제나 주방 가까이 있다가 아버지께서 찾으시면 즉시 대령하였고, 아버지께서 남기신 음식을 "황송해서 못 버린다."며 자신이 다 먹었던 충복(忠僕)이었다. ]
출전: <나의 아버지 의친왕>= 이해경 지음 도서출판 眞 1997. 6. 발행
위에 인용한 기록은 의친왕 이강 공의 따님이신 이해경씨의 저술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 수록된 의친왕 생모 덕수 장씨, 즉 장 상궁에 대한 기술을 소개한 글이다.
물론 집안 간 확실한 한 혈육지간 사이의 특정한 인믈이 쓴 것이기 때문에 그 안의 기록들을 믿는다, 못믿겠다는 밀고 땡기는 식의 논란을 벌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 가운데 아래의지적하는 것들 몇 가지는 분명한 오류이므로 바로 잡는다.
1) 의친왕이 태어난 시기와 장소는 고종실록에서조차 일체 언급이 나와있지 않으므로 실재적으로 이해경님께서 위의 기록대로 밝힌 것 자체 옳겠다고도 보겠으나 한 의젓한 왕자로 태어나신 의친왕 탄생 기록이 실록에 보이지 않음은 참으로 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해경님 기록 자체를 믿을 도리밖엔 없겠는데, 정확한 출전을 밝히지 못한 관계로 더 좀 정확한 사실 여부는 자료로서 찾아보아야 할 사항이다. 이해경님은 이같은 기록 남기시기까지 무슨 자료를 근거로 아버지 의친왕의 태어나신 시기와 생년월일, 탄생지를 알아내셨을까? 좀더 구체적이랄 수 있는 전거(典據)를 알았으면 좋겠다.
2) 아버지 의친왕의 생모를 귀인 장씨라 함은 오류다.
의친왕을 잉태하여 생산하던 시기에는 그녀는 한 궁녀의 신분에 불과하였다. 귀인은 한참 훗날 1900년 숙원의 첩지에서 한참 높여 귀인으로 봉해졌는데, 그녀의 지위는 이 이상 높여지진 못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무덤 한 옆의 표석에는 "귀인 장씨지묘"로 새겨진 푯말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무덤 한동안 서삼릉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장귀인 무덤 옆에는 의친왕의 묘도 가지런하게 모셔져 있었다. 의친왕이란 표석도 없는 가운데 오직 귀인 장씨 무덤이라는 푯말을 본 순간의 감상기를 이해경님은 이렇게 밝혀 놓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하기 위해 사동궁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 의친왕이 잠들어 계신 서삼릉(西三陵)을 찾았다.
그러나 그때 나의 놀라움은 형용할 길이 없었다. 물론 추운 겨울 날씨 탓에 묘소의 주변이 삭막하게 느껴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서삼릉의 광경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아프게 했다.
그 당시 묘소에는 봉분이 두 개 나란히 있었는데, 오른 쪽은 아버지 의친왕의 묘였고, 왼쪽은 아버지를 낳으신 할머니 장귀인(張貴人)의 묘였다. 그리고 두 분의 묘 가운데 "장귀인"이라는 커다란 비석이 있었으며, 왼 쪽 묘 앞에만 상석(床石)이 하나 있었고, 석등(石燈)은 세 동강이로 부러져 뒹굴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묘에는 아무런 표식(標識)이 없었고 그 묘가 바로 의친왕의 묘라고 설명을 듣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의 묘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가매장이라지만 모자(母子)를 부부(夫婦)처럼 같이 모시고 있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왜 되돌아와서 이 꼴을 보아야 하나? 이런 비참한 꼴을 보지 않겠다고 비겁하게 도망갔던 내가 아닌가?'라는 후회스러움이 가슴에 가득했으며,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는 우리 가족의 처지가 너무도 한스러워, 미국에 있는 직장일로 병원에 누워계신 생모에게는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미국으로 되돌아 가고 말았다......<이하 생략>...
[ 나의 아버지 의친왕] pp. 32~34 인용.
다시 이 책의 뒤로 넘어가보면 정준(丁俊)의 글 <축복받지 못한 탄생>이란 의친왕 초기의 생애를 말하는 글 가운데에,
" .....의친왕의 생모 장씨는 원래 평민의 딸로 태어났으나 궁중에 들어가 상궁이 되었는데, 일찌기 민비의 양오빠인 민승호의 편에 서서 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 공을 세워 민씨 척족정권 아래에서 제법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 때는 민비와 침식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이 지내기도 했으나, 어떻게 되었던지 임금의 아들(의친왕)을 낳게 되면서 민비의 질시(嫉視)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는 아들과 함께 궁중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그래서 임금의 아들로 태어난 의친왕은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외가에서 자랐다.
.....이하 생략....<앞의 이해경님 소개분과 내용 같음>
이후 생모 장씨는 의화군이 의친왕으로 책봉되면서 1900년 숙원(淑媛: 종4품)으로, 2년[* 6년이 맞음] 뒤 1906년에는 귀인(貴人: 종4품)으로 사후(死後)에 추존(追尊)을 받았다.
<같은 책 > pp. 225~226. 인용.
이 글에 나온 잘못부터 바로 잡는다.
의친왕 생모 장씨가 덕수 장씨인 것만은 사실인데, 어느 누구의 딸임을 밝힌 사연은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아 궁금하다.
입궁하여 어느정도의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상궁이라는 막중한 대임(大任)을 맡을 수 없다. 의화군을 생상하고 난 뒤에도 그녀는 줄곧 상궁이란 지위 없이 일개 궁인으로 지냈다. 상궁은 어림도 없는 소리일 뿐이다.
요즘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그녀 출현 벽두부터 장상궁으로 내세워 이미지 부각 시켰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한참 세월 흐르면서 1900년 숙원이 되었다가 1906년 귀인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귀인" 첩지는 그녀가 죽은 뒤에 받은 첩지는 아니었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올린 장귀인, 의친왕 관계의 글에서 이런 명백했던 사실 자세하게 밝힌 바 있으므로(실록에서 보이는 기록 등 포함하여) 더 설명을 하진 않겠다.
외가에서 어린 유년시절을 자란 의친왕이라 했는데 그 외가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는가? 그것이 많이 궁금하다.
2) 왕비가 질투하여 모자를 내쫓는 과정에서 의친왕 어머니 장궁인을 몹씨 학대하고 모진 악형을 가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서 산지 얼마 못되어 죽었다는 것은 <매천야록>에나 나오는 기록이다.
그야 고문당해서 그랬든지의 여부는 모르지만, 왕비로부터 받은 고초에 시달리지 못해 일찍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900년 숙원이 되었으며, 1906년 귀인의 첩지를 받은 의친왕의 생모이었기에 필요 이상의 넘치는 야사류에 근거 자료를 끌어다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해경님의 자료의 군색하던 나머지 손에 잡히는데로 자료를 찾던 중 아마 <매천야록>의 기록을 보았던 것 같다.
이 부분은 이미 정확하게 바로 잡았으므로 중언부언 하지는 않기로 한다.
이처럼 한 세대를 살다 간 어느 인물의 사실적 생애를 제대로 밝힌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얼기설기 쓰기 쉽고 막연한 추측으로 버물려서 쓰고 난 뒤의 발표된 글들 보면 그냥 하품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의화군의 생모 덕수 장씨에 대한 생애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 갖는 것 좋으나 드라마 "명성황후"에서와 같이 모질고 한 악인의 표상이나 되는 듯한 독한 여인이 아니었기에 혹시라도 시청자들, 드라마에 비쳐진 장씨의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작가가 마냥 허구로만 썼었던 부정하고 싶은 의친왕 생모의 인식을 하루빨리 탈피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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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군 어머니 귀인 장씨의 생존시기는 엄연하게도 고종실록에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