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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도 奇山度 (1878~1928)】 " 을사오적 암살단, 이근택 습격 사건"
1878년 10월 16일 전라남도 장성(長城)에서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 호는 의재(毅齋)이다. 부친 기재는 유학자로 사종형인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1896년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모로 참전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호남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구례의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산화한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의 사위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서울을 오가며 젊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확대해갔으며, 그 과정에서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기독교인이 되었고 ‘을사조약’ 늑결 직후 상동교회에서 열린 청년 지도자들의 회합에 참여하였다. 이 모임은 전덕기 목사를 비롯하여 각지의 청년회 대표들이 을사늑약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고 집결한 비밀 집회였다. 이때 김구 등 20여 명의 지도자가 상동교회에 모였다.
기산도 생가 터(전남 장성) [판형2] |
기산도 등의 이근택 습격 보도(『대한매일신보』 1906.2.23) [판형4] |
을사늑약 전부터 이근택과 이지용·이하영·박용화를 ‘4간(奸)’이라 하여 이들을 암살하는 의열 투쟁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1905년 10월 10일경 국민교육회의 연회가 여릴 때 이들을 주살하고자 동지인 손효경(孫孝慶)과 함께 갔다. 그런데 이 자리에 이지용(李址鎔)과 이근택(李根澤)이 없고, 이하영(李夏榮) 혼자 있자 그를 죽이는 것이 양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또한, 적신을 죽이는 것보다 그 부형(父兄)을 죽이는 것이 적신의 예기를 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근택의 부(父)인 이민승(李敏承)을 죽이기로 하고, 10월 27·28일경에 김성초·송창영·이근철·이종대·박종섭·박경하·안한주 등 7인과 함께 각각 칼과 총·쇠망치를 들고 잠입하였다가 다른 사람들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1월 17일 ‘을사오적’이 망국 조약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11월 27일 상동교회의 모임에 참석하여 상소 투쟁에도 나섰다. 그러나 큰 성과 없이 서명한 이들이 구속되자, 다시 ‘오적’ 처단을 추진하였다. 매국 적을 처단할 것을 계획하던 중에 이종대(李鍾大)의 집에서 김석항(金錫恒)을 만났다. 김석항 역시 1905년 (음)8월에 유약소(儒約所)를 설립하고 매국적의 처단을 계획한 지사였다. 김석항의 지원을 받아 단도 3자루와 육혈포 1정을 매입하고, 서울 니동(泥洞)의 한광국(韓光國) 집에서 숙식하면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석항은 송요철(宋堯哲)로부터 당백전 3만 냥을 변통하여 결사대의 경비로 사용하게 하였다. 1906년 2월 16일 밤 12시경에 이범석(李範錫)·이근철(李根哲)과 함께 이근택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근택은 오후 7시경에 퇴궐한 후 8시경에 손님 6명의 방문을 받고 이들과 대화를 나눈 후 11시경에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후실은 옆에서 『국문잡기(國文雜記)』를 읽고 있었다. 3인은 이근택의 집으로 들어가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이 칼로 찔렀다. 이근택이 이때 황급히 방의 촛불을 끄자, 칼로 그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마구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였다. 이근택과 그의 후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하인이 달려오자 3인은 역시 칼로 하인의 배와 얼굴, 다리 등 4곳을 찔렀다. 이어서 집 안에서 경호하던 병정 6명과 순검 4명이 달려왔다. 일본 헌병과 순사도 이근택의 집에 설치한 설렁줄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남쪽의 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탈출한 뒤였다. 이근택은 중상을 입은 채 호송되어 새벽 2시경에 한성병원 특별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한 달여 치료를 받고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며 하인 역시 자신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가 군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3인의 결사대는 이근택을 공격하면서 그 형제들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이근택을 공격한 같은 날에 동생 이근상의 집에 기왓장이 투척되었으며, 형인 이근호에게는 입궐하라는 명령을 거짓으로 전달하였다. 이근택 습격 사건은 당시 조야를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 이완용 등 ‘을사5적’들은 밤에 낮처럼 불을 켜 놓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으며, 그중 어떤 자는 왜병에게 진수성찬으로 대접하면서 경호를 청하기도 하였다 한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22일 자에 체포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5적 처단’ 결행 직후에 체포된 듯하다. 이때 기산도만이 아니라 이범석 등 12명이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공초에서 자신과 뜻을 함께하여 ‘5적’을 주살하기로 한 이가 800여 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5적’을 주살한 이는 “고민충정(故閔忠正, 민영환), 조충정(趙忠正, 조병세)과 심참정(沈參政, 심상훈)”이라고 하였다. 기산도의 공포를 근거로 참정대신 심상훈(沈相薰)이 2월 18일 밤에 체포된 것으로 보아, 기산도도 2월 18일경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경무청에서 이근택의 피습 사건을 수사하여 관련자 이외에도 수십 명을 체포하였다. 심상훈과 참령 강창희(姜昌熙), 그리고 정위 송헌면(宋憲冕)도 체포되었으나 이들은 2월 26일에 군부 관방장 이강하와 함께 석방되었다. 전 참찬 허위(許蔿)의 후실과 훈동(勳洞)에 사는 객주(客主) 송소사(宋召史)도 체포되었고, 허위의 종형도 체포되었다. 전 경무사 구완희(具完喜)는 그의 별실이 이근택의 집에 갔다는 이유로 별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구완희 집에 있던 빈객들로도 모두 압송되었다.
이근택의 집을 출입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인조 수염을 걸쳤던 것으로 보인다. 결행 과정에서 인조 수염 하나가 대청에 떨어졌고, 상점 주인의 증언에 의해 이근철이 ‘범인’으로 밝혀짐에 따라 함께 체포된 것이다. 「형사재판원부」의 「판결선고서」에 의하면 김석항·김일제·기산도·박경하·박종섭·이종대·안한주·손성원·송요철·정재헌·현학표 등 11명만이 재판을 받아 1906년 5월 13일 자로 각각 징역 3년에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선고서」에 의하면, 위의 11명 외에 함께 행동한 정순만·이석·손효경·김성초·송창영·이태화·박용종·김필화 등 8명은 모두 도주하였다 한다. 이때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주범’으로 지목된 김석항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07년 7월 3일 옥중에서 병으로 순국하였는데, 옷 속에는 유서가 있어서 의분을 불러일으켰다.
기산도 추모비(전남 고흥) [판형2] |
옥고를 치른 후 고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9년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려고 상경하였다. 이때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던 김철(金澈)을 서울의 재동의 심재설(沈載卨) 집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된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철은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국내 각지에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또한 의무금을 모집하고자 왔다면서 같이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철의 취지에 찬동하고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 특별위원에 임명되어 김철로부터 사령장을 받았다. 1919년 (음)4월 22일 김철을 전남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에 있는 부친의 집에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을 근거로 하여 인근의 동지를 물색하였다. (음)4월 25일경에는 김철과 함께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의 김종택(金鍾澤)을 방문하여 국민대회 취지서와 선포문 등의 문서를 보여주면서 동참을 권유하자, (음)5월 15일 이인행(李仁行)을 데려와 함께하게 하였다. 또한, 5월 상순경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의 박균상(朴均庠) 집에서 박은용(朴殷容)을 만나 독립 자금 모금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여 약속을 받았다. 박은용은 1907년 기삼연 의병진에 종군한 의병 출신으로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하기도 한 인물이다. 또한, 1907년 광양에서 의병 투쟁을 한 황병학(黃炳學)도 참여시켰다. 이들은 전라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에 들어갔다. 우선 (음)5월 상순경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의 김요선(金堯璿) 집을 방문하여 180원을 받았다. 김철은 우선 이 돈 중에서 60원을 건네고 6월 26일 김요선의 집을 출발하였는데,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지역 특파위원의 책임을 띄고 김종택·이인행·황병학·박은용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음)7월 하순경 조면식·김창규·안창선·이화영·이선근·조용준·김형석·최재학·김학수·황용주·윤용섭 등을 만나 국민대회 취지서·선포문·고유문 등을 보여주면서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모두 499원을 모금하였다. 그렇지만 김철과 연락이 끊기고 위험이 노출됨에 따라 8월 초순경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동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1919년 10월에 김종택이 부하들과 서울에서 부호 홍종욱(洪鍾郁)의 집에서 370원이 든 적금통장을 강탈한 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결국 군자금 모금 활동마저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김종택은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920년 5월 5일 광주지방법원의 공판을 받았다. 이에 따라 7월 19일에 판결을 받았는데, 황병학·박은용과 함께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인행은 징역 1년 형을 받았다. 김종택은 공판에 회부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미체포된 김철에게는 궐석재판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왼쪽 다리가 절단되었으며, 출옥한 후 불구의 몸으로 계속 항일 투쟁을 위하여 전전하다가 1928년 장흥의 차가운 방에서 “유리개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丏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목비(木碑)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