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의 정운(丁芸) 연서(戀書) 서한집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서한집
행복(幸福)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1916-1976) : 시조시인.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이다.
♣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게 행복이란다
♣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靑馬)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丁芸)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움
청마(靑馬)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같이 요지경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통영 중앙동 우체국은 유치환이 찾아와 사랑하던 여인 이영도(시조시인•당시 미망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또 썼던 곳이다.1947년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만난 뒤 그는 196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 때까지 쉬지 않고 이영도에게 편지를 써서 붙였다.
20년간 5천통이 넘는 편지를 받은 이영도는 그것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고 67년 청마 사후 200통의 편지를 추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한집을 냈다. 우체통을 가만히 만져본다. 유치환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속에는 정인(情人)을 향한 애절한 가슴앓이를 담고 있었다. 이미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신분과 남편을 사별하고 홀로 딸을 키우는 미망인의 신분은 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통영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펜을 놓을 때까지 20여 년간 거의 매일 이영도를 향해 썼던 편지는 그 자체가 시였고,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그 자체의 사랑이었다.
♣ 경상북도 청도에서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성장해 스무 살에 출가한 이영도는 딸을 낳은 뒤 얼마 후 남편과 사별하면서 평탄치 않은 삶을 시작했다. 겨우 스물한 살 때였다. 한동안 시댁과 친정의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두 식구의 생계는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므로 이영도는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의 가사교사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유치환은 두어 달 전 같은 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해 있었다.
서른일곱 한창 나이 때인 유치환의 가슴속에 스물아홉의 청상과부 이영도는 하늘에서 막 내려온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아로새겨졌으리라. 유치환은 그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낸 편지의 구구절절이 한결같이 ‘사랑의 시’였다. 하지만 유치환은 처자식을 거느린 한 가정의 가장이었기에 설혹 이영도의 마음이 흔들렸다 해도 그들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결실을 맺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유치환은 3,4년 뒤 통영여중을 그만두고 대구로, 부산으로 학교를 옮겨 다니지만 편지 공세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영도는 50년대 후반 통영여중 교사직을 내놓고 부산으로 이사했고, 유치환은 3,4년 뒤 부산 경남여고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두 사람은 똑같이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이들이 해후했는지 어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유치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이영도 역시 서둘러 부산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거처를 옮긴 사실로 미루어 그의 죽음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생전의 이영도가 ‘그 일’에 대해서는 늘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던 것처럼 누가 어떻게 생각했든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정규웅, 중앙일보 문화부장 역임)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 이가서>
♣ 이영도는 생애에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20년 동안 이영도의 가슴속에 사랑의 불꽃을 심어주었던 유치환, 그리고 이영도를 시조의 세계로 이끌어 68년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를 펴내기도 했던 오빠 이호우였다. 유치환은 67년 2월 13일 부산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숨을 거뒀고, 이호우는 70년 1월 6일 뇌출혈로 쓰러지더니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기이하게도 이들 세 사람은 똑같이 환갑을 앞둔 만 59세를 몇 달씩 전후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영도의 외동딸도 어머니의 20주기를 지낸 뒤 똑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 정운의 향내 머금은 작품들은 첫째로 연정의 아름다운 향기가 넘친다고 할까.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실실히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이것은 '비'의 전문이다. 딸은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지키는 방안의 허적, 그리고 젖어내리는 밤비의 냉기 속에서 청춘의 타오르는 불꽃을 오로지 시조로써 달래야 했던 정운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54년)에 실렸던 작품('무제Ⅰ')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 선생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정운 선생은 40년대말~50년대말 통영에서 10여년간 머물렀고, 50년대말에 부산으로 옮겨 와서 67년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정운은 사랑에 대해선 퍽 용감하고 솔직하였다. 정운과 청마의 사랑은 청마가 정운에게 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서한집에 절절히 기록되어 있지만 뜨겁고 열렬했던 그들의 사랑은 찬탄할 만하다.
애타는 심정을 시로 서로 화답하고 당신이 주신 시를 수놓은 그 병풍 아래 누워야 잠이 들고 하루에 한 장씩의 편지를 주고 받아야만 진정이 되는 사랑은 참으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정운의 향내 머금은 작품 세계는 두번째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보리 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길고/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이것은 정운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보리고개'다. 보릿고개의 절박한 삶을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눈이 오시는 날에 동작동 墓地를 걷는다/뜨겁게 목숨을 사뤄도 사무침은 돌로 섰네/山河도 고개를 숙여 이 絶叫를 듣는가'.
이것은 '落花'의 일부이다. 여기서 보듯 정운 선생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세월을 보낸 시인이었다.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고 풀 한 포기에도 사랑과 연민을 보냈다.
♣ 이영도는 우선 다른 젊은 여인들이 청마의 연서(戀書)를 책으로 묶어 내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여인들 문제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이 지상에서 청마를 진정으로 사랑한 당사자는 자신이라는 징표를 남겨두기 위해서다. 청마가 운명하자마자 연서뭉치를 상품화하는 행위를 부도덕으로 밀어붙일 것이 염려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운명한 지 불과 한달 사이다.
이영도는 이 때 평소 청마와 자기 사이의 다리를 묵묵히 놓아 주던 최계락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계락은 당시 국제신보의 문화부장이었다. 이영도가 최 부장을 은밀히 만나 의논한 끝에 청마의 연서를 최계락의 안목으로 가려 뽑는 조건으로 책으로 묶기로 했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표제가 붙여졌다. 청마 시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 연서집은 2만5000부가량 팔려 나갔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다. 수익금은 뒷날 '현대시학사'에 넘겨져 정운 문학상의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 청마의 편지는 마치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은 Lyricism 으로 가득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묶여져, 그 수익은 이영도의 뜻에 따라 후진 양성을 위한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희사된, 청마의 연애편지 중 한 편을 소개하며 그들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 사랑하는 정향 !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 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