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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자연이 가진 아름다움의 다양성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 남북섬이 세로로 길게 늘어서 있어 아열대부터 준남극지대(sub-Antarctic)까지 기후가 크게 다르다. 또한 활발한 화산운동, 빙하기를 거치며 만들어진 피오르드 지형까지 없는 모습이 없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일본의 후지산을, 반지의 제왕에서는 '중간계(Middle Earth)'부터 오크들이 사는 세계와 엘프들이 사는 깊은 숲까지 여기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우리가 머릿속에 상상하는 여러 모습을 뉴질랜드의 어디선가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 감독들이 비용이 많이 드는 해외 로케 촬영을 뉴질랜드에서 하는 주 이유는 우수한 조명업체, 첨단 특수효과 회사와 상대적으로 싼 물가 등의 다양한 인프라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섬세하면서도 다양하고 때묻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이 큰 이유다.
영화계에서 뉴질랜드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간다. 이런 시기에 한국의 영화 '남극 일기'가 뉴질랜드에서 촬영되고 있다. 6명의 남극 원정대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는 뉴질랜드의 또 다른 한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로케이션 촬영만 두 달이 넘게 걸리는 작품으로서 주된 촬영지는 스노 팜(Snow Farm)이다.
스노 팜은 순하고 친근한 이름과는 달리, 거대한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영화 촬영에는 남극점 도보 도달에 성공한 박영석 대장이 동행했던 후배 오희준 대원과 더불어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탐험 수퍼바이저로 참여, 영화가 더욱 실감날 것으로 기대된다.
남섬의 퀸스타운(Queenstown)으로 날아가 보니 박영석 대장은 아직도 지난 해 남극에 갔을 때의 동상 때문에 얼굴의 양 볼이 검게 상처가 남아 있다. 동행했던 오희준 대원의 얼굴은 깨끗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원정시 걸을 때의 위치 때문이란다. 박 대장은 제일 앞장서서 나침반과 길을 계속해서 살펴보느라 고개를 자주 들어야 했고, 그 때문에 맞바람을 얼굴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의 대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걸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얼굴에 입은 동상의 정도가 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굴의 검은 반점은 불혹을 넘긴 박영석 대장의 열정을 보여주는 영광의 상처다.
유명 자동차 메이커의 시험장들 밀집
스노 팜은 퀸스타운에서 와나카 방향으로 1시간1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새벽 6시30분부터 촬영이 시작이라, 새벽 4시30분에 서둘러 기상했다. 퀸스타운에서 출발한 우리의 캠핑카는 크라운 레인지를 지나, 꼬불꼬불한 고개를 넘어 산으로 올라간다. 날은 아직도 컴컴한데 고도가 올라갈수록 구름이 잔뜩 끼더니 길 주위에 하얀 눈들이 허옇게 뒤덮여 있다. 찌푸린 날에는 폭설에 대비해서 반드시 체인을 챙겨 올라가야 한다.
아침 식사를 하러간 곳은 100년이 넘은 카드로나의 마을회관이다. 운전석 옆자리에서 코를 골던 박 대장, 캠핑카의 뒷 침대에서 자던 오희준 대원, 박상석씨는 차가운 새벽 공기가 싫은지 몸을 웅크리고 차에서 내린다. 뉴질랜드의 깊은 산속, 쌀쌀한 아침에 뜨끈한 김칫국을 한 그릇 마시니 몸이 확 풀린다.
비포장도로의 산길을 지그재그로 약 20분 정도 올라가면 되는데, 일정고도에 도달할 때까지 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친 바위만이 보인다. 건너편에 카드로나(1,934m)가 보인다. 산 정상부는 유명한 스키장으로, 가파른 스키장 슬로프의 모습이 멋지다.
스노 팜은 특징이 없어 보이는 아주 평범한 이름이지만, 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이곳이 결코 평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세계적인 자동차 시험장이 산 정상부에 있다. 벤츠, 아우디, 혼다, 도요다, 페라리, 포르쉐와 미쉐린, 굳이어 등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와 타이어 회사들의 눈길 성능 테스트를 하는 시험장들로, 웬만한 군사시설보다 더한 보안을 하고 있다. 때문에 테스트장 촬영은 할 수 없었다.
그 옆에는 총길이 55km나 되는 노르딕 스키장이 펼쳐져 있다. 노르딕 스키는 일반 스키(알파인 스키)와는 달리 발뒤꿈치가 자유로운 스키다. 폭이 좁으며, 오랜 시간 걷는 데 주로 사용되는 스키다.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이 남극점 원정 시에도 노르딕 스키를 썼다.
주차장에 올라서니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다. 몇 개의 재미없게 생긴 자주색 박스형 건물들이 군사시설물 같은 느낌을 준다. 아침이라 마침 일출이 시작되는데 계곡 건너편인 카드로나 정상에서 시작해 계곡쪽으로 노랗게 타 내려가기 시작한다. 일출이 시작되면서 흰 눈에 반사되는 샛노란 빛 때문에 눈이 떠지지 않는다. 정상부에서 스키장으로 가는 오른쪽 도로와 접근 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좌측 길로 갈라지는데, 영화 촬영장은 좌측으로 간다. 이곳 주차장에서부터는 눈이 너무 많아 4륜구동 자동차로 갈아탄 후에 다시 10분 정도 더 올라간다.
눈이 울퉁불퉁한 산 정상의 바위들을 모두 뒤덮어 부드러운 구릉으로 만들었다. 눈에 반사되는 빛이 너무 강렬해, 실눈을 뜨고 보지 않으면 그냥 편평한 평원으로 보인다. 이곳 촬영 현장을 상상해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기후가 좋은 날에는 흰 도화지를 가로로 반을 접은 뒤에 상단에 파란 색을 칠하면 된다. 둘째 기후가 좋지 않은 흐린 날에는 흰 도화지를 펼친 후에 아무 것도 그리지 않으면 된다.
오렌지색 스프레이로 길옆의 눈 위 이곳 저곳에 표시해놓은 것이 보인다. 운전사에게 물어 봤더니 역시 '화이트아웃' 때문에 해놓은 조치라고 한다. 흐린 날의 화이트아웃(Whiteout) 현상은 찢어지는 듯한 바람소리만 없으면 평안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두려움은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바람과 눈에 의해 천지가 온통 백색이 되어 방향감각이 없어지는 상태가 된다.
이곳은 심하게 눈보라가 치게 되면 체감온도가 영하 30℃ 이하로 내려가며, 시계가 2~2.5m로 극히 짧아진다. 이런 곳이니 남극일기 촬영장으론 제격이다. 남극대륙 자체를 제외하곤, 남극을 재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스노 팜이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 뚫고 트래킹
남극일기 촬영장에는 이미 50여 명의 촬영 스태프들이 촬영을 위한 대형 크레인과 바람을 일으키는 대형 송풍기 등 복잡한 장비를 설치해놓고 분주히 촬영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촬영해야 할 장면들의 먼 배경에서조차 발자국 하나 없는 완전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눈을 보호하고 있다. 촬영장의 불 곁에는 스크린을 통해서 눈에 익은 송강호, 유지태, 김경익씨 등의 배우가 진한 커피를 마시며 대사를 위해 입을 녹이고 있다. 함께 커피를 마시고 간단한 인사를 한 후에 필자는 오희준 대원, 박상석씨와 스노 팜 정상부의 봉우리를 향해 출발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 우리 일행이 도착한 날은 포근한 날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한 걸음씩 발을 떼기가 쉽지 않다. 조그만 언덕처럼 보이는 작은 구릉으로 올라가자 앞의 크라운 산맥(Crown Range)의 흰 봉우리가 멋지게 보인다. 촬영장에서는 산의 하얀 정상부만 보였지만, 조금 높은 곳에 올라오니 산 하단의 풍요로운 녹색이 보인다. 흰 눈이 부드럽게 덮여 있어 그림자가 생기지 않아 거리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저 멀리 촬영장의 사람들이 눈앞의 작은 생물들처럼 조그맣게 꼬물거린다.
언덕 정상부에 올라가니 작은 울타리가 나오고, 울타리를 넘으면 야전막사처럼 생긴 반 원통형의 산장이 나온다. 산장 입구에는 하얀 양머리뼈가 문 위에 걸려 있는데, 오래된 건물의 느낌과 함께 분위기가 썩 잘 어울린다. 산장의 이름은 봅 리 산장(Bob Lee Hut), 건물의 외형은 볼품없지만, 건물 내부에는 목재를 연료로 쓰는 난로가 가득히 쌓인 땔감과 더불어 놓여 있고, 아름다운 서던 알프스가 한눈에 뵈는 커다란 창이 다른 한쪽에 나 있다. 온기를 잘 보관할 수 있도록 건물의 천정이 매우 낮게 건축되어 있다.
이곳에서부터 트래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무 것도 없는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며 걷는 맛이란….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는 흰 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남극점 탐험대원이었던 '힘'의 사나이 오희준 대원이 선두에, 그 뒤에 겁 많은 필자가, 제일 마지막에는 상석씨가 차례로 간다. 선두는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어 길을 내야 하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심한데다가 눈의 깊이가 일정하지 않아 넘어지기 일쑤다. 그나마 계곡으로 내려갈 때는 신나게 내려가지만, 오르막 길은 정말 쉽지 않다.
저 아래의 계곡 밑에 있는 눈 위에 깊은 구멍이 보여 희준에게 뭔지 보고 올 것을 부탁했다. 계곡 밑은 쌓인 눈이 많이 몰려 있어 눈의 깊이가 훨씬 깊다. 허리 정도만 빠지지만, 실제 깊이는 2~3m가 더 된다.
깊이 2m의 눈구멍 속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그 옆에서는 파란 이끼가 자라고 있다. 이런 눈 속에서 오히려 모든 만물이 편안히 휴식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느 쪽으로 셔터 눌러도 '작품' 나오는 정상
오희준 대원이 돌아올 때까지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눈이 깊어 선두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가는 수밖에 없다. 파란 하늘과 흰 눈만이 망막에 들어 눈을 감으면 그 대비색(보색)인 노란 색이 눈 안에 가득하다.
이 단조로워 보이는 하얀 눈밭 트래킹은 실제로는 결코 단조롭지 않다. 한 걸음 뗄 때마다 깊이가 완전히 달라 푹푹 빠지는 눈길은 흡사 어릴 때 함정놀이를 하는 듯하고, 오르막에서 한 걸음을 올라가면 반 걸음 미끄러져 내려오거나, 발이 빠지지 않아 그대로 넘어져 버리기도 한다.
일반적인 트래킹은 일정시간 걸으면 몸에 배어든 즐거운 리듬감이 콧노래를 나오게 하지만, 비틀거리며 아무 박자 없이 걷고 기고 엎어지는 이러한 눈길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불규칙함이 매력이다. 넘어지면서 손을 짚지만 손마저 눈 속에 깊이 빠져버려 얼굴이 눈 속에 박힐 때에는 모두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길 옆(일정한 길이 없지만, 우리가 걷는 곳이 바로 길이 된다)에 발목 높이의 작은 말뚝이 나란히 보이기에 가까이 가 보니 눈에 묻힌 울타리다. 이 지역 전체에 눈이 1m 이상 쌓여있다는 증거다. 차가운 눈 위를 걷지만 온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난다.
겨우 올라간 정상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정상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그림 그 자체다. 블루~화이트~그린으로 연결되는 하늘~눈~초원은 뉴질랜드 남섬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사방의 어느 쪽으로 셔터를 눌러도 모두 아름다운 곳의 정점에 선다는 것,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짧은 트래킹이지만, 나는 두 가지 자그마한 실수를 했다. 하나는 준비 부족, 하나는 눈에서 오는 거리의 착각이다. 우선 눈 위를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가터(한국에서는 스패츠, 각반)를 착용하지 않아, 등산화 속으로 들어온 눈이 모두 녹아 그야말로 얼음물 속에 발을 담그고 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요즘 나오는 고어텍스 등산화는 외부로부터의 방수는 잘 되지만, 안으로 흘러들어온 물은 빠져나가지 않아 곤욕스러웠다. 동상의 초기 증세처럼 거의 일주일 동안 가려웠던 발을 주무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또 하나의 실수는 거리감 미숙에서 오는 착각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것 같은 산 정상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하산시 계곡의 깊이도 그림자 하나 없는 둥그런 사면으로 이루어져 비교할 대상물체가 없었다. 때문에 오감으로 대충 측정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내려가야 했다.
이러한 눈길이 포함되어 있는 트래킹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측정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지도에 의한 거리 계산과 눈(snow)에 의한 핸디캡을 추가로 더해서 트래킹 시간을 계산을 해야 한다. 예상 시간에 의해 물이나 음식의 양과 장비를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실수가 때로는 커다란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에 늘 안전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번 트래킹이 며칠이 걸리는 트래킹이었다면, 동상이나 그 외의 다른 어려움을 겪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목숨을 걸고 산에 올라가는 전문 산악인이 아닌 필자나 대다수 산을 좋아하는 이들의 목적은 산과 대치하는 '정복'이 아닌, '산과 함께 노는 즐거움'과 '산에서 얻는 건강', 그리고 '산으로부터의 배움'이기 때문이다.
/ 글 사진 김태훈 Information Network Ltd 대표
서울에서 컴퓨터 그래픽 사업을 하다가 8년 전 뉴질랜드에 반해 이민간 여행가다. 두 아들, 부인, 어머니와 함께 왕가레이라는 소도시에 정착 했다. 그간 뉴질랜드 곳곳을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캠퍼밴(캠핑카) 여행이나 트레킹 전문회사인 (주)인포메이션네트워크(Information Network Limited)를 운영하고 있다. 연락처 64-27-2774-113 (www.camperv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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