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이론에 의한 불교 수행체계 / 그릇 비우기
머리말
흔히 `저 사람은 그릇이 크다`라든가 `그릇이 작다`는 등의 표현을 쓴다.
사람의 마음을 그릇에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마음 도량이 넉넉한 사람은 그릇이 크다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릇이 작다고 비유한다.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도 `마음을 비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 이는 일체의 사심 없이 공명정대하게
매사에 임하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역시 마음을 하나의 그릇에 비유한 표현이라 간주할 수 있다.
불가에서도 이런 표현은 발견된다.
예컨대, 쌍계사 입구 일주문의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1)入此門內 莫存知解 無解空器 大道充滿
"이 문안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
알음알이가 없는 빈 그릇에 큰 도가 충만하리라." 1)
알음알이는 기존의 고정관념, 선입견 등을 말한다.
각자의 마음그릇에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그득하다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마음그릇을 비워야만
참다운 도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그릇이론>이라는 것은
일단 사람마다 저마다의 마음그릇이 있다고 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한계로서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규정이다.
이제 부터 마음공부를 그릇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 단계로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 그릇 비우기: 참회(懺悔)를 통한 자기정화
둘, 그릇 채우기: 발원(發願)을 통한 자기전환
셋, 그릇 키우기: 기도(祈禱)를 통한 자기확장
넷, 그릇 없애기: 참선(參禪)을 통한 자기확인
다섯, 그릇 만들기: 행불(行佛)을 통한 자기창조
하나, 그릇 비우기: 참회를 통한 자기정화
1) 개요
마음공부의 첫걸음은 그릇비우기이다.
예컨대, 그릇에 어떠한 물건이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
이처럼 내 마음 속에 이미 고정관념이 가득하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채울 수가 없다.
마음그릇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자기발전의 첫째단계인 것이다.
2)마음가짐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그릇을 비울 수가 있을까?
불가에서 전통적으로 마음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참회이다.
참회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죄인시하는 것은 아니다.
2조 혜가 대사에게 3조가 물었다.
"제자는 몸에 풍병이 걸렸으니, 화상께서 참회해 주옵소서."
2조가 말했다.
"죄를 가져오너라. 참회해 주리라."
3조가 양구하다가 다시 말하였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2조가 말하였다.
"그대의 죄는 다 참회되었으니, 불법승에 의지해서 살라."2)
여기서의 풍병이란, 문둥병을 말한다. 문둥병에 걸린
3조 승찬스님은 자신의 죄업이 막중하다고 생각하여,
2조 혜가대사에게 참회를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혜가대사의 답변은 의외였다. 죄를 가져오라고?
스스로 죄 많은 중생이라 생각하던 승찬스님은 죄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죄의 성품은 안팎이나 중간에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찾아보아도 내놓을 죄가 없었으니, 더 이상 죄의식에 얽매여
지낼 필요가 없었다. 죄는 본래 없다.
죄의식이 있을 뿐. 그렇다면 죄의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천수경>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百劫積集罪 一念頓蕩盡
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卽名爲眞懺悔
백겁 동안 쌓인 죄가 한 생각에 사라졌네.
마른 풀에 불붙듯이 깡그리 다 타버렸네.
죄에는 자성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 만약 소멸하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도 없고 마음 멸해 둘이 함께 공해지면
이것이 이름 하여 진정한 참회라네.3)
결국 진정한 참회는 스스로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것들이 깃들어 있는 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3)방법
이렇게 해서 한 생각에 단박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가 않다면 다시 참회방편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번뇌의 실체를 임시나마 인정해주고 충분히 해탈시켜
내보내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것이다.
4) 죄의 반연이란 삼독(三毒) 즉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의 나쁜 인연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들을 하나씩 떠올려서 인정하고 내보내도록 한다.
내보내는 좋은 방법은 부처님께 맡기는 것이다.
구체적인 요령은,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욕심 부리고 성내고 어리석었던 일 등의 순서대로 참회한다.
부처님이 바로 앞에 계시다고 가정하고, 마치 할아버지와 대화하듯이
"부처님, 이러저러하게 욕심을 내었습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하고 다짐한다.
이 때 중요한 관건은 `무조건적인 참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조건부 참회는 의미가 없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 안에서 하는 참회가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앞사람에게서 빰을 얻어맞았다 하자.
그리고 화를 내었다면, 나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손 치더라도 참회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성 상에
불 댕긴 것을 참회하는 것이다.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것은 `나만 잘났다`는 생각이다.
남의 험담하는 것도 결국 `나 잘났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인과법을 철저히 믿지 않아 안달하거나 초조해 하는 것도 어리석음이다.
결국 생각나는 것은 모두 참회꺼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잘못을 참회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잘한 일까지도
모두 참회하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이미 분별심이다. 또한 잘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함은 이미 자성 상에 파장을 일으켰다는 반증이다.
흰 구름이든 먹구름이든 하늘을 가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4)효능
이런 식으로 꾸준히 참회를 하다보면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마음그릇에 담겨있던 온갖 분별의식이
비워지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밝고 가벼워지니
세상이 온통 밝고 아름답게 보인다. 환희심이 솟아난다.
어떤 사람은, 참회하기 전에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진정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첫걸음이다.
자기를 돌아봄이 잘 안된다면 그만큼 아상(我相)이 강한 것이다.
남의 눈 속의 티는 잘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다 보면
비로소 진정한 자신에 눈뜨기 시작한다.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흠뻑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를 통해
얻게 되는 귀중한 결실이다.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을 사랑하려 한다면,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없다면,
언제 어디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할 수 있을까?
- 본 마음 * 참 나 / 쌍계사 국사암 -
이 글은 bbs 불교방송에 게시된 < 월호스님의 글 모음>에서 퍼온 것입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