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잔을 기울이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붉게 포를 뜬 과메기 접시를 앞에 두고 보니 푸른 소주병 하나쯤은 곁에 놓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 서울 마포구청 근처의 구룡포 과메기 전문점이었다 . 요즘은 서울에서도 과메기 전문점을 쏠쏠하게 볼 수 있다 . 구룡포 토박이라는 주인 아저씨가 투박한 손으로 소주 한 병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 과메기를 먹으러 간다는 말에 아는 시인 하나가 냉큼 따라붙었다 . 시인에게 물었다 . 맛이 어때요 ? 근래 들어 과메기가 부쩍 매스컴에 오르내리다 보니 , 과메기가 처음이라는 이 시인도 제법 과메기 쌈을 쌀 줄 안다 . 노란 배춧잎 위에 마른 김 한 장을 얹는다 . 초장을 듬뿍 찍은 도도록한 과메기 한 점을 올리고 , 물미역도 쪽파도 주섬주섬 챙긴다 . 마지막으로 마늘 한 쪽 올리더니 손바닥 위에서 도르르 말아 한입에 넣는다 . 꾸덕꾸덕 , 구룡포 겨울 바람에 얼마른 과메기가 시인의 입 안에서 헤엄을 친다 . 나는 시인의 대답을 기다린다 . “바다 맛이 날 줄 알았는데 . 왜 , 해물탕을 먹으면 바다 맛이 나잖아요 . 그런데 과메기에서는 바람 맛이 나네요 .” 내 입에서 웃음이 터진다 . 시인의 대답은 더없이 정확하다 . 며칠 전 다녀 온 구룡포의 시리디 시린 겨울 바람이 떠올라 , 나는 대신 푸른 소주잔을 냉큼 비워버린다 . 과메기 덕장으로 뒤덮인 겨울 구룡포 주변 바닷가
포항 앞바다의 아주머니들은 겨울이 가장 바쁘다 . 기껏해야 두 달 반 정도의 부업거리라 낭창거릴 수가 없다 . 새벽 두 시부터 작업장에 모여 앉아 칼을 쥐고 도마를 바투 당긴다 . 바닥에는 언 꽁치들이 상자째 부려져 있다 . 무릎 사이에 끼운 나무 도마의 귀퉁이에는 못이 박혀 있다 . 꽁치를 한 마리 들어 못에다 탕 , 치면 열이면 아홉 꽁치의 눈이 못에 가 박힌다 . 그렇게 고정시킨 꽁치의 살을 꼬리쯤까지 날카롭게 베어내고 , 다시 뒤로 돌려 반대편의 살점을 베어낸다 . 순식간에 꽁치의 붉은 살점만 오롯이 남는다 . 한편에서는 그렇게 포 뜬 꽁치를 바닷물과 민물에 번갈아 씻어낸 다음 대나무에 척척 걸쳐둔다 . 대충 손짐작하는 것 같지만 어김없이 막대 하나당 스물다섯 마리다 . 세월이 말해주는 노련함이다 . 털모자를 귀밑까지 깊게 눌러 쓴 인부들이 하르르 건조대를 밀고 파도 곁으로 간다 . 작업장의 짠내는 어느새 바람에 다 씻겼다 . 그러고 보니 경북 포항에서 구룡포를 지나 영덕까지의 해안선은 과메기 덕장들로 가뭇하게 줄을 그어둔 듯하다 . 푸르고 투명했던 꽁치의 등은 차가운 겨울 바람에 얼었다 말랐다를 반복하며 까맣게 그을었다 . 붉은 속살은 맑은 기름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 스무 마리씩 짚으로 엮었거나 혹은 포를 뜬 과메기들을 나무에 척척 빨래처럼 가지런히 널었다 . 꽁치의 내장으로 배부른 갈매기들도 오동통 살이 올랐다 . 어디건 비슷한 풍경이다 . 포항 앞바다의 겨울은 해마다 그렇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 흰 파도가 빵 부스러기 같은 바람을 꽁치 속살에 뿌려대고 있었다 . 그러니 과메기에서는 바람 맛이 날 밖에 .
청어가 과메기가 된 사연
늘 숨겨진 이야기가 재미있다 . 어쩌다 포항 앞바다의 사람들은 과메기를 먹게 되었을까 . 물고기야 구워도 먹고 끓여도 먹고 날로도 먹는 것을 , 왜 하필이면 얼렸다 말렸다 하면서까지 먹게 되었느냐는 말이다 . 그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 예전 이 바다에는 청어가 무척이나 흔했다고 한다 .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뱃사람들이 그저 그물만 던지면 떼로 올라오는 청어를 배 안에서 먹을 밥 반찬이나 할 요량으로 배 지붕 위에다 대충 던져놓았던 것이 , 제 스스로 찬 새벽바람에 얼었다가 또 한낮의 빼꼼한 햇살에 녹았다가 그렇게 과메기가 되었다는 이야기 . 또 다른 줄기로는 ,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바닷가 나뭇가지에 청어가 꿰어 있는 것을 보고 한 점 집어 먹어보니 너무 맛이 좋더라 , 그래서 겨울만 되면 그렇게 청어를 구해다 처마에 걸어 얼말려 먹었다는 것이다 . 무엇이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 어떤 방식으로든 지나간 시간은 새겨져 있기 마련 . 우리가 읽을 수 있건 없건 . 뼈를 추려낸 청어의 붉은 속살에 물어볼까나 . 무엇이 진실이냐고 . 너의 처음이 어떠하였느냐고 . 시작이야 어찌 되었건 예부터 청어 산지로 유명했던 포항 앞바다의 사람들은 대나무에 청어의 눈을 꿰어 부엌 창문이나 처마에 매달아 놓았단다 . 바깥의 차가운 바람과 밥 지을 때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거듭 얼마른 청어는 궁중 진상품으로도 그 이름을 높였단다 .
겨울 별미 과메기의 본거지 , 포항 죽도시장
포항의 죽도시장은 동해안 최대 규모의 수산물 시장이다 . 개복치와 고래 , 상어부터 시작해 해삼과 멍게 , 문어 , 물가자미 , 열기 등 숱한 바닷것들로 눈이 흐벅지다 . 날선 바람에 손이 시려도 , 고인 물에 바짓자락이 젖어도 귓가에 이명 같은 파도소리가 떠날 새 없다 . 날이 유독 차가워 요사이 포항 근해에서는 꽁치가 나지 않는다더니 , 고무 앞치마를 두른 젊은 상인 하나가 나무 궤짝을 열자마자 바닥에 푸른 꽁치들이 쏟아진다 .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금세 오글오글 모여든다 . 아주 드물게 들어온 근해의 꽁치란다 . 투명하게 푸른 꽁치의 등이 날렵하다 . 마음 같아서는 그냥 손에 들고 한입 베어물고 싶다 . 열 마리에 오천 원 . 검은 비닐봉지에 주워담는 상인의 손이 재바르다 . 말 한마디 걸어볼 새가 없다 . 꽁꽁 언 남태평양산 꽁치들은 대번 기가 죽는다 . 원양 꽁치의 가격은 열 마리 사천 원 . 천 원 차이가 나지만 근해의 꽁치가 몇 상자째 동이 나도록 원양 꽁치는 소복이 쌓여만 있다 . 근해 꽁치가 드물어 원양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래서 조금 아쉽다 . 시장 골목 몇 개를 지나도록 과메기의 행렬은 끝이 없다 . 과메기 손질에 익숙한 포항 토박이들이야 짚으로 엮어 통째 말린 스무 마리짜리 두름을 사지만 타지에서 온 손님들은 상인들이 일일이 손으로 껍질을 벗겨 말끔하게 손질한 과메기를 집는다 . 그래서 가게의 점원들은 저마다 하는 일이 나누어져 있다 . 좌판 한쪽에 앉아 쉼 없이 과메기의 껍질을 벗기는 일과 포장된 과메기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택배 포장을 하는 일이 그것이다 . 손질이 안 된 스무 마리 한 두름은 칠천 원이지만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손질된 과메기는 열네 마리가 만 원이다 . 열네 마리라고는 해도 반으로 베어져 있으니 스물여덟 쪽이다 . 서너 사람이 먹어도 충분할 양이다 . 서울 , 대구 , 전주 , 제주까지 하루에도 수백 팩이 택배를 통해 전국으로 나간다 . 희한한 것은 , 죽도시장의 상인들 대부분은 인터넷을 통한 배달 시스템을 전혀 구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 그들의 유일한 홍보 수단은 그저 , 입소문이다 .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이 다시 주문을 하고 , 친구에게 소개를 해주고 , 회식 때 단체 주문을 하는 식이란 거다 . 택배 상자 안에는 물미역과 배추 , 쪽파 , 김 , 마늘 , 초고추장까지 모두 들어간다 . 그저 상자를 열고 먹기만 하면 된다 . 하물며 나무젓가락까지 들어가니 말이다 . “우리가 인터넷을 우예 아노 ? 묵어보고 맛있으이까 사람들이 전화해서 보내달라 카는기지 . 그라믄 또 우리는 고맙고 .” 하기는 , 맛보다 더 빠른 홍보 수단이 뭐가 있겠는가 . 옆에서는 물미역을 팔던 아주머니 한 분이 이미 돈을 치르고 가는 손님을 다시 불러 세운다 . 손님이 뒤돌아보자 미역 한 무더기를 손에 말아 내민다 . “서울서 왔지예 ? 그라믄 쪼매 더 가 가소 .”
시장 구경만으로도 애틋하게 배가 부르다 . 죽도시장의 붉은 포장 너머로 너울너울 , 해가 넘어간다 . 겨울이 되면 포항 시내 곳곳의 주점들은 메뉴판이 따로 필요 없다 . 어디서건 과메기로 통한다 . 가격도 어디나 같다 . 한 접시 만삼천 원 . 십 년 전 가격이나 별 차이가 없다 . 처음엔 비릴 것 같아 젓가락을 쉽게 못 내밀던 이들도 물미역에 돌돌 말아 한 점 먹고 나면 이내 손놀림이 빨라진다 . 그 맛에 익숙하지 않은 손님들을 위해 과메기 살을 잘게 찢어 야채와 함께 버무려 놓은 과메기 무침 등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 아무래도 껍질을 잘 벗겨낸 투실한 과메기 회가 단연 일품이다 . 과메기가 사랑받는 건 , 해 바뀌는 겨울이 제철이라는 것도 한몫 한다 . 오랜만에 만난 벗들이 기울이는 술잔에 과메기 집의 밤은 길고도 길다 . 추억과 정담이 과메기 속살과 어우러져 , 입 안에서 바람 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
첫댓글 침이 고인당 어째서일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