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맥주의 맛을 내는 맥주이지만 알코올 함량이 적은 맥주를 라이트 비어(light beer/lite beer)라고 부른다. 가벼운(light)이란 형용사를 붙여 ‘가벼운 맥주’란 뜻이다. 덜 취하면서 맥주를 즐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공략한 맥주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었고, 결국 라이트 비어는 맥주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었다. 라이트 비어는 1970년대 후반부터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맥주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2015년 이후 다시 맥주 시장의 판도가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라이트 비어는 더 많은 사람이 원하고 소비하는 맥주를 만들어 판매한 맥주 회사의 마케팅 전략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맥주 이야기가 아니다. 라이트 비어를 만들어낸 맥주 회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교회가 더 넓은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로 동일한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2012년 5월 21일 자 ‘타임’에는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가 시도한 소위 ‘다니엘 다이어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엘리자베스 디아스(Elizabeth Dias)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종교 섹션이 아니라 건강 섹션에 실렸다! 그녀는 다니엘 다이어트에 참여한 새들백 교회의 1만 5,000명의 교인이 뺀 지방은 26만 파운드(130톤)에 달한다고 썼다. 실로 어마어마한 성공적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라이트 비어와 다니엘 다이어트의 차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당시 이 기사에 대한 짧은 평론을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이 썼는데, 그는 성경이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새들백 교회는 다니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놀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닐까? 10대 소년들로서 지배국인 바벨론으로 끌려와 바벨론의 사람으로 길러지고 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왕의 진미를 거절했던 신앙적 행동이 이제 배부른 시대, 배부른 나라에 사는 배부른 교인들에게는 그저 다이어트 교과서로 전락한 느낌을 어찌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 지나친 비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새들백 교회가 기발하게 개발한 다니엘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맥주 회사들이 시장을 확장하려고 만든 라이트 비어의 전략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위기의 음식 정결 규례를 해석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게 된다. 음식 정결 규례를 주로 건강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현상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우리가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맛과 거품은 똑같은 맥주이지만 알코올 함량과 열량을 줄인 라이트 비어와 비슷하게, 기독교의 모양과 맛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사실 있어야 할 중요한 핵심이 빠진 기독교가 지금의 대세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이메일로 구독하던 한국의 한 기독교 신문 기사 중에 ‘맛있는 전도, 부침개 전도특공대’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던 적이 있다. 나는 특정한 교회의 특정한 전도 프로그램과 그 전도의 열심을 폄하하려는 의도 없이 말한다. 그때 나는 이건 또 뭔가 하는 심정으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았고, 전도의 문이 막혀버린 이 시대에 어떻게든 전도를 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먼저는 보기 좋았다. 사진들을 보니, 무더운 대낮에 길에서 불을 때고 부침개를 부치며 땀을 뻘뻘 흘리는 부인들, 그리고 마실 음료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주는 학생의 모습들이 들어왔다. 전도는 귀한 일이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들려주고 그 영혼을 살리는 일의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뭔가는 좀 아쉽다고 느꼈다. 부침개전도특공대라? 그리고 맛있는 전도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한 생명의 영원이 걸려있는 이 일, 매를 맞고 돌에 맞으며 감옥에 들어가며 전했던 복음과는 뭔가 그림이 겹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린애들이 ‘전도’ 하면 “아, 부침개요?”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면 너무 심한 혹평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열심으로 어떻게든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애쓰던, 사진에서 본 분들의 열심과 수고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두렵다. 하지만 내 마음에 인상 깊게 드리워졌던 느낌은 우리가 지금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길목에 이미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보았던 ‘주기도문 드리기 운동 본부’가 생각난다. 당시 내가 검색해 본 바로는 “하늘을 향해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소리 내어 주기도문을 드리면 범사에 축복이 온다”고 주장하며 주기도문을 일천 번 반복하는 운동이었다. 몇 번 했는지 정확하게 세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그 운동본부는 친절하게도 주기도문 계수기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가벼움의 극치를 넘어 이단적 수준, 바알 종교의 수준으로 가버린 경우를 보았다. 문제는 이런 행태들이 기독교 안에서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없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일들을 그저 현대적인 현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가벼운 기독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에덴동산에 쫓겨난 이후로 언제나 있었던 현상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평생 받은 고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하던 일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발한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그들이 부끄럽지 않게 그런 일을 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더 많은 추종자를 얻고 그들로부터 더 많은 인기와 물질을 얻어내려는 탐욕 말이다. 가벼운 기독교의 시대에 진짜 기독교를 전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어찌 예레미야 선지자뿐이겠는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 모두가 그랬다.
신약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사람들로부터 의심과 비난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그가 가벼운 복음을 전하기를 거부하고 진짜 복음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많은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행세하던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이었다. ‘혼잡하게 한다’는 헬라어는 ‘물을 타서 희석한다’(water down)는 뜻이다. 당시에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포도주에 물을 타서 ‘라이트 와인’을 파는 부도덕한 포도주 상인들이 있었는데,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한 셈이다.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탔던 이유는 더 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더 큰 시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죄를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복음, 회개를 말하는 대신 손쉬운 할례의 행위를 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벼운 복음을 전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가벼운 복음을 다른 복음, 가짜 복음이라고 선언했다(갈 1:7-9).
‘가벼운 기독교’는 결코 현대적 현상이 아니다. 다니엘서를 다이어트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을 염불이나 주문 외듯이 외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은 라이트 비어와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는가? 나는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현상을 우려한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기독교를 보면서 A. W. 토저는 이렇게 우려했다. “약은 약이로되 고칠 수 없고, 독은 독이로되 죽일 수 없는 기독교가 되었다.” 너무나 물을 많이 타버렸기 때문이다.
가벼운 기독교(light Christianity)는 사람의 살을 빼주고 잠깐의 기분 전환을 신선함을 제공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없는 기독교다. 우리는 조금은 오르막길처럼 느껴질지라도 진짜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를 찾고 그 산으로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아이쿠~~~~
진짜 기독교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