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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제 3부: "완전"의 경험을 갖기 원하는 당신에게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싶다면, 그리고 온전한 삶의 경험을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어떤 믿음과 개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완전의 경험을 갖기 소원하는 당신에게 이 글은 완전의 경험을 지속할 방법을 가르쳐주고,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1) 거듭남과 굴복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완전한 성품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 되는 것은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언제나 구원을 위하여 충분한 것이다. 거듭남이란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거듭난 마음, 그리스도께 굴복된 마음을 가질 때에 새로운 능력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한다. 죄를 미워하고 이전의 쾌락들을 버리게 되며, 새로운 애정, 새로운 관심, 새로운 뜻을 갖게 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 지금까지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했던 것들은 이제 다 버려지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의 매력이 되며 그의 기쁨의 극치가 된다. 괴로운 듯 보이던 순종과 성화의 과정이 이제는 그의 기쁨이 된다. 한때 탐닉했던 죄악에 대하여 애통하며, 자기에 대한 사랑과 허영은 버려지고, 다시는 이전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고, 그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 굴복하는 것과 굴복된 마음과 성품은 완전에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을 중단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이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아니 자주 주님께 굴복하는 일을 그만둔다. 영적인 소홀함이나 부주의로, 그리고 너무 바빠서 주님과의 교통과 주님께 굴복하는 일을 그치고 마음대로 자행자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굴복하는 일을 절대로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언제나 주장하시게 하여야만 죄를 승리하는 일과 완전한 삶과 경험을 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관건은 우리 굴복의 지속성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꾸준하지만, 굴복 여하에 따라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때때로 약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으로, 굴복된 마음과 심령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굴복된 성품과 마음 그 상태 그대로가 완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관점과 평가로 완전을 생각하자
완전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되면, 죄에 대한 충동조차 느끼지 않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 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게 된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평가대로 완전을 이해하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지 내리는 평가로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며,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향하여 “순전한 의인”이라고 하셨고,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이 완전히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가로 자신을 보자.
완전의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계속 자라나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7~19).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하늘에 가서도 계속 자라날 것이다. 거기에는 다 자랐다, 다 이루었다 할 지점이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성경은 완전한 마음의 상태를 경험하라고 말하는 것이지, 다 올라가고 이룬 지점을 말하는 완전주의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도바울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라고 하지 않았는가?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사 43:1)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며, 또 우리를 그렇게 되게 하신다. 그 사실에 감사하자! 때로 인격이나 지식이나 생각이 모자라 실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니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반항하는 동기나 마음이 없고, 죄를 지으려는 의도가 없지만 연약하여 실수할 수가 있다. 어린아이는 인격이 덜 되어 잘못하는 수가 많다. 그럴 때 그 실수하는 어린아이는 가르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동기와 심중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 속에 비록 죄의 본성이 남아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와 소원과 우리 삶의 방향을 보시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 타협하지 않고 주님께 굴복한 성품으로 사는 우리에게 그분의 능력으로 온전한 성품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매우 훌륭하고 영적으로 보이고, 또 착한 선행과 친절로 보이는 일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또 사람이 보기에 틀린 일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 사람의 동기와 심중이 올바를 때가 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시지 않는 분이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품성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품성, 곧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늘 바칠 때에,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고, 우리는 완전한 품성을 갖게 될 것이다.
3) 시작은 주님과 그다음부터는 나 혼자?
의로워지고 완전한 성품을 가지게 되기를 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겪는 경험이 있다.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지만, 그다음은 혼자의 힘과 혼자의 의로 완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 중에 이런 경험이 생기기 쉬운데, 계명을 순종하는 일, 거룩하게 성화 되는 일, 생애를 개혁하는 일 등, 그리스도인 생애의 전반적인 일에 있어서 열심히 순종하는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시작은 그리스도의 의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혼자의 의와 행위로 서려고 애를 쓰다가 낙심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런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힘을 의지하지만, 신앙생활 도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열심으로 주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일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의를 얻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은혜와 언약의 축복 중 하나도 얻을 자격을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축복들을 받기 위하여 오랫동안 희망하고 노력해 왔지만, 그것들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그것들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사상을 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마치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자아를 바라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공로와 능력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일 대신, 무의식중에 내가 주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할 가망이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그분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우리의 의롭다 함이 있고, 우리의 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축복을 구하기 전에 그들이 변화한 사실을 그분께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실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하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형성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죄 많고 속절없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대로 그분께 나오기를 바라신다.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우리는 죄를 깨닫게 되고 용서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마음속에서 회개를 이루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시작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자라는 과정, 곧 성품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도, 생애를 개혁하는 일에도, 죄를 승리하는 일과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나는 일에도, 주님의 도움이 항상 필요한 것이다.
비록 시작은 주님과 함께했으나, 도중에 그들의 심령을 지켜 주시도록 그분께 위탁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에 시작된 은혜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아를 신뢰하는 일이 많다. 일부분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일부분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양심적인 영혼들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기 위하여 그분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시험을 대항하기 위한 경계와 그분의 가납하심을 받기 위한 어떤 특정한 의무 수행에 몰두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승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헛되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을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의 심령은 끊임없이 속박당하고 있다. 그들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의 발아래 내려놓기 전에는 안식을 얻지 못한다. 물론 언제나 깨어 있고, 죄를 승리하며, 거룩한 성화의 생애를 살며 성령의 열매를 삶 속에 맺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령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을 때, 주님께 의탁 되고 그분의 임재 속에 지속적으로 살 때에 이런 일은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선행을 전혀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실수하고 죄 많은 상태 그대로 그리스도께 나가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언제나 어김없이 받아 주신다. 주님과 함께 지속적으로 사는 완전의 경험은, 어쩌면 시작할 때와 같은 감정의 황홀경은 없을지라도, 영속적이며 평화로운 신뢰가 있고, 사랑이 조용하고 충만하게 마음을 채우는 일이 있다.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의 경험을 위해서, 우리는 시작도 나중도 늘 주님과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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