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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에서의 영어 회화(2) *
20. It's on the house. 무료입니다. 공짜입니다
=> 술집이나 식당같은 곳에서 손님에게 안주 등을 무료로 내놓는 경우 “무료입니다.”
= There's no cost.
= It's free of charge.
21. How would you like your eggs?
계란을 어떻게 해드릴까요?
=> 식당 등에서 계란 요리를 주문하면 식당 측에서 “계란을 어떻게 해드릴까요?”
Where is the dining room?
(식당은 어디에 있습니까?)
On which floor is the food department?
(몇 층에 식당가가 있습니까?)
Is there a dining car?
(식당 칸이 있습니까?)
Is the dining car at the front or rear of the train?
(식당 칸은 열차의 앞쪽에 있습니까, 아니면 뒤쪽에 있습니까?)
[계란 요리]
미국에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가면 '어떻게 계란 요리를 해드릴까요?'라고 묻죠.
How would you like you eggs?
어떻게 계란 요리를 해드릴까요?
거기에 대한 답으로는
Soft boiled, please.
반숙해 주세요
부드럽게 삶은 거니까 '반숙해 주세요'
=> 때로는 반숙을 coddled라고 합니다.
Hard boiled, please.
완숙해 주세요.
Sunny-side up, please.
노른자가 위로 오도록 한쪽 면만 익혀 주세요.
=> 터뜨리지 않은 노란자가 마치 태양 같다고 해서 노른자가 위로 오도록 한쪽 면만 익힌 것을 의미합니다.
Over easy, please.
뒤집어서 양쪽 다 익혀 주세요.
=> 이 표현 앞에는 tipped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tip over는 기울이다, 뒤집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양쪽 다 익힌 것을 말하죠.
A scrambled egg, please.
지지고 볶아 주세요.
=> 스크램블이라고 들어 보셨죠. 노른자랑 흰자에 우유를 넣어 뒤섞어서 지진 것이죠. 참 이 scramble이라는 단어는 신문에 잘 등장합니다. 서로 다투다, 쟁탈전을 벌이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한 마디로 서로 지지고 볶는 것이죠.
22. I brown-bag it everyday.
점심을 싸가지고 다닌다
=> '점심을 싸가지고 다닌다'는 말은 미국 사람들은 brown-bag it이라 한다. '먹을 것(it)을 누런 봉지(brown-bag)안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식당 같은데 자기가 마실 술을 가지고 가는 것도 brown-bag it이라 표현할 때도 있으므로 상황에 맞게 잘 표현해야 한다. box lunch라는 게 있는데 미국식 도시락을 의미한다.
23. Can I have a doggy bag, please?
이것 좀 싸주실 수 있겠어요?
=> 미국의 식당에서 leftover food(먹다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가는 경우가 흔한데, 자기가 기르는 개에게 갖다 준다고 해서 doggy bag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자기가 먹을 것이면서 개 핑계를 대고 먹다 남은 것을 싸가는 것이다.
Give me a doggy bag, please. 이라고도 한다.
24. 이 집에서 잘하는 게 뭐죠?(식당)
WHAT'S THE GOOD HERE? / WHAT'S YOUR SPECIALTY?
This restaurant specialized in Kalbi.
이 식당은 갈비를 잘 합니다.
The measures include a step banning student councils from raising funds by running campus cafeterias and installing vending machines. Dissident student groups which has sympathized with North Korean ideology are not allowed to use classrooms at school buildings.
대학측은 식당 운영 및 자판기 설치 등의 수익 사업에 총학생회가 개입하는 것을 금하는 한편으로, 친북성향의 대학 동아리들에 대해서는 동아리방을 제공하지 않는 등 강경 조처를 취하고 나섰다.
25. 왜 "eighty eight(88)"이 '피아노'의 뜻으로, "eighty two(82)"가 '한 잔의 물'의 뜻으로 쓰입니까?
=> "88"이 '피아노'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피아노의 건반수가 일반적으로 88개이기 때문입니다.
I've been right here pounding on the old 88.
(나는 오래된 피아노를 치면서 바로 여기에 앉아 있었다.)
"82"는 1950년대부터 쓰이던 말로 식당 종업원 사이에서 사용되던 일종의 은어입니다. 1930년대 중반에는 "81"이 '물 한 잔'의 뜻으로 쓰여서 "82"는 '물 두 잔'의 뜻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 구별 없이 '한 잔의 물'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26. I'll have today's special.
=>보통 식당에서 그날의 특별 식단을 내놓는데 이것이 today's special이다.무엇을 주문할 때는 I'll have ...으로 시작됩니다. 그날그날 바뀌는 soup 같은 경우에도 soup of the day 라는 문구를 붙인다.
27. May I recommend white wine with fish and red wine with meat dishes?
=>식당에서 흔히 어떤 메뉴를 추천할 때에는 'recommend' 동사를 쓴다. 여기에서는 '백포도주는 생선요리와, 붉은 포도주는 고기요리와 드실 것을 권해드립니다'라는 뜻이다.
28. 저의 아버지는 공무원입니다.
My father works for the government.
= My father is a government official.
= My father works in a public office.
저의 아버지는 사업가입니다.
My father is a business man.
아버지는 서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My father runs a book store.
아버지는 식당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My father runs a restaurant.
아버지는 지금 실업자입니다.
My father is unemployed at the moment.
29. My friend finally arrived at the restaurant and came over to me.
마침내 내 친구는 식당에 도착해 나에게로 다가왔다.
The cafeteria offers fast food, a salad bar, ice cream, and a regular meal of the day.
구내 식당은 패스트푸드(즉석 음식), 샐러드바, 아이스크림, 그리고 그 날의 정식을 제공한다.
After practice I go to work at my part-time job at a fast-food restaurant.
연습이 끝난 후에는 내가 시간제로 일하는 패스트푸드 식당에 간다.
Her parents would often take her to a fast-food restaurant.
그녀의 부모님들은 종종 그녀를 패스트푸드 식당에 데려가곤 하셨다.
As a university student, Minji often went to fast-food restaurants with her friends.
대학생이 되어서 민지는 종종 그녀의 친구들과 패스트푸드 식당에 갔다.
Sometimes she would eat at a fast-food restaurant, but preferred her grandmother's cooking.
때때로 패스트푸드 식당에서도 먹곤 했지만 그녀는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는 음식을 더 좋아했다.
There's a restaurant here that delivers.
근처에 배달해 주는 식당이 있습니다.
Is the dining room still open?
아직 식당이 영업을 합니까?
In case you don't make it, there's a very nice little restaurant across the street that stays open until late.
만약 못 드시게 되면, 길 건너편에 작지만 괜찮은 식당이 하나 있는데 밤 늦게 까지 영업을 합니다.
Because of the impropriety of his costume, he was denied entrance into the dining room.
그는 복장이 부적당하여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했다.
The cafeteria line was so crowded that I found myself jostled past the desserts before I could take one.
식당의 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나는 밀려서 하나 집어보기도 전에 디저어트부를 지나쳤음을 알았다.
30. Chopsticks are handy eating tools that have been around for a very long time. The Chinese invented them over 2500 years ago. Chopsticks are still used widely today, even though many people in Japan and China are using knives and forks because they want to learn more about Western ways of eating. While interest in using knives and forks is growing throughout Asia, more and more Americans are learning to use chopsticks. They use them mainly when they eat in Asian restaurants. Waiters in most Japanese, Korean and Chinese restaurants in America will give you chopsticks if you ask for them.
젓가락은 매우 오랫동안 있어온 편리한 식사 도구이다. 중국 사람들은 2500여년 전 그것들을 발명했다. 비록 일본과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서구적인 식사 방법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배우기 원하기 때문에 나이프와 포크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젓가락들은 오늘날 여전히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아시아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하는 데 흥미가 커져가는 반면에, 점점 더 많은 미국 사람들이 젓가락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그들은 주로 아시아 식당에서 식사할 때 그것들을 사용한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일본, 한국, 중국 식당에서, 당신이 요청한다면, 웨이터들은 젓가락을 가져다 줄 것이다.
31. Would you care for another bowl of rice?
쌀밥 한 공기 더 하시겠어요?
1.
A : Do you have beer?
맥주 있습니까?
B : Certainly. We have imported beer as well as domestic beer.
물론이지요. 국내산 맥주는 물론이고 수입 맥주도 있습니다.
2.
A : What is the specialty of this restaurant?
이 음식점에서 특히 잘 만드는 요리는 무엇입니까?
B : May I recommend ox tail soup. That's excellent.
꼬리 곰탕을 권해드립니다. 아주 일품이지요.
3.
A : This is really delicious.
이건 정말 맛있군요.
B : Would you care for another bowl of rice?
쌀밥 한 공기 더 하시겠어요?
32. I worked the night shift at a restaurant.
나는 한 식당에서 밤교대 근무로 일을 했다.
I worked the night shift at a restaurant and every Friday night the same 5 deaf men would come to eat. They usually came very late and often stayed past the closing time. One night when they had stayed well past the closing time, I asked my boss if he could please give them some kind of sign that we would like to close the restaurant so they would 1eave. He reached up and shut off the music.
나는 한 식당에서 밤교대 근무로 일을 했으며 매주 금요일 밤에 똑 같은 다섯 명의 귀머거리가 음식을 먹으러 오곤 했다. 그들은 주로 매우 늦게 왔고 자주 폐점 시가 이후까지 머물렀다. 어느 날 밤에 그들이 폐점 시간 훨씬 이후까지 머무를 때 나는 사장에게 우리가 식당 문을 닫으려고 하니 그들이 떠나야 된다는 어떤 종류의 표시를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다가가서 음악을 꺼버렸다.
33. 이 열차는 급행입니까, 완행입니까?
Is this train an express or a local?
이 열차는 잭슨행의 직행입니까?
Is this a through train for Jackson?
급행은 여기에서 섭니까?
Does the express stop here?
식당차가 붙어있습니까?
Is there a dining car on train?
기분 전환 겸 한국 음식이 어때요?
How about Korean food for a change?
음식이 싱거워요.
It tastes flat.
이곳은 음식물 반입금지 구역입니다.
You're not allowed to bring food in here.
제가 음식을 데워 올게요.
I'll go warm up some food.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나요?
Do you care for any particular food?
한국 음식이 입에 맞습니까?
How do you like Korean food[dishes]?
음식이 아까워 죽겠어요
I hate to waste food.
= I hate to see food go to waste.
34. 무료로 드리는 거예요.(음식점이나 주유소 등…)
It's on the house.
그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에요.
That dish is hard to make.
이 사람들 모두에게 내일 점심과 저녁을 먹일 만큼 음식이 충분 한가요?
Do you have enough to feed all these people lunch and dinner tomorrow?
음식이 남으면 내일 점심으로 싸 가면 돼요.
If you have food left over, you may take it for lunch tomorrow.
What can you prepare the quickest?
(음식점에서) 뭐가 제일 빨리 되나요?
이곳은 음식물 반입금지 구역입니다.
You're not allowed to bring food in here.
한국 음식이 입에 맞습니까?
How do you like Korean food[dishes]?
제가 음식을 데워 올게요.
I'll go warm up some food.
음식이 싱거워요.
It tastes flat.
매운 음식은 제 식욕을 당겨요.
Hot food sharpens(increases, satisfies) my appetite.
cf) 식욕을 잃게 하다: spoil my appetite
기분 전환 겸 한국 음식이 어때요?
How about Korean food for a change?
저녁에 이태리 음식을 먹었다.
I had Italian food for dinner tonight.
식사 중에 입을 음식을 채우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안다.
It's not good to speak with your mouth full at table.
나는 음식 투정을 하지 않는다.
I don't complain about food.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OO이다.
My favorite food is OO.
나는 집에서 요리된 음식을 좋아한다.
I just like home cooked meals.
나는 중국 음식을 좋아한다.
I like Chinese foods.
나는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I like lean foods.
나는 기름진 음식은 싫어한다.
I don't like fatty foods.
기름진 음식은 위에 좋지 않다.
Fatty foods are not good for the stomach.
음식, 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They suffered from the shortage of food, water and medicine.
음식을 준비했다.
I prepared the food.
음식 찌꺼기를 버렸다.
I threw away the scrapes[leftover].
저 지방 음식을 먹어야 한다.
I have to have low-fat diet.
지방질 음식은 다 줄일 것이다.
I will reduce all the fatty foods.
음식을 절제해야 한다.
I have to eat in moderation.
단 음식을 줄여야겠다.
I will cut down on sweets.
우리는 추석 음식을 만드느라 바빴다.
We were busy preparing Chuseok food.
추석이라 특별한 음식을 만들었다.
We made special foods for Chuseok.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은 송편이다.
Song Pyun is the typical food of Chuseok.
건강한 음식, 특히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
We should eat healthy food, especially much fruits and vegetables.
의사는 나에게 빵과 단 음식을 줄이라고 하셨다.
The doctor advised me to eat less bread and sweets.
음식을 삼킬 때, 목이 아팠다.
My throat hurt when I swallowed food.
나의 이 메일 친구는 그 나라의 음식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쓴다.
My key pal writes a lot about the food culture of his country.
35. '독서와 정신의 관계는 음식과 육체의 관계와 같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Someone said, 'Reading is to the mind what food is to the body.‘
맛있는 음식과 마실 것이 많았다.
There were a lot of delicious foods and drinks.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다.
I was served with delicious food.
나는 모든 종류의 음식을 요리할 수 있다.
I can cook all kinds of dishes.
그 음식은 나의 입 맛에 맞는다.
The food is pleasant to my taste.
나는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었다.
I put my heart into the food.
그 음식은 입에서 녹는 듯이 맛있었다.
The food melted in my mouth.
그 똑같은 음식을 매일 먹는 것이 이젠 질린다.
I'm sick and tired of having the same food every day.
그 음식은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
The food goes against my stomach.
그 음식은 내 몸에 맞지 않는 것 같다.
The food seems to disagree with me.
그 음식은 상했다.
That food has gone bad [rotten].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OO이다.
My favorite food is OO.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I shared my food with others.
냉장고에 있는 남은 음식을 먹어야 했다.
I had to eat some leftover in the refrigerator.
음식을 실컷 먹었다.
I ate foods to the full.
그 식당은 음식이 맛있고 가격도 적당해서 매우 인기가 있다.
The restaurant is very popular because the food is delicious and the prices are reasonable.
음식이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It took a long time for me to be served.
음식 맛이 매우 좋았다.
The food was fantastic!
The food was out of the world!
식당에서 음식을 많이 주었다.
The restaurant was generous.
음식을 좀 남겼다.
I left some food.
남은 음식을 싸 가지고 갈 봉지를 달라고 했다.
I asked for a doggy bag to take it with me.
남은 음식은 싸 달라고 했다.
I asked them to put the leftovers in the doggy bag.
엄마는 건강에 좋은 음식만 좋아하신다.
My mom likes to have good food for her health.
음식 맛이 없었다.
The food tasted terrible.
음식이 형편없었다.
The food was awful.
음식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 있었다.
There was something strange in the food.
음식 맛이 밋밋했다.
The food tasted bland.
음식 맛이 뭔가 이상했다.
Something's wrong with this food.
음식이 덜 익거나 더 익었다.
Each food was either undercooked or overcooked.
He is very particular about food.
그는 음식에 대해 까다롭다.
뜨거울 때가 제일 맛있어( 음식)
It's best while it's hot.
자극성 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속이쓰려요.
I have heartburn whenever I eat spicy food.
The way to a man's heart is through his stomach.
맛있는 음식을 해 주는 것이 사랑을 받는 지름길이다.
The fewer the better cheer.
맛난 음식은 먹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as well (=besides, into the bargain) : 게다가, 덤으로
He gave me food and money as well.
(그는 내게 음식과 게다가 돈까지 주었다.)
furnish A with B (=supply(or provide) A with B) : A에게 B를 공급하다
They furnished the expedition with food.
(그들은 탐험대에 음식을 공급하였다.)
I don't like rich food.
난 기름진 음식은 싫어.
네가 너무 못생겨서, 너의 어머니가 널 구석 에다 놓고는 고무줄 총으로 음식을 먹였다던데.
You were so ugly that your mom used to stick you in the corner and feed you by
slingshot.
미안하지만 손님이 찾으시는 음식 물건은 여기 없습니다.
Sorry, but we don't serve your kind.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What's your favorite dish?
음식이 아까와 죽겠어요.
I hate to waste food. (=I hate to see food go to waste)
음식 맛 좀 보세요.
See if you like the taste.
36. 참고 기다리세요. 곧 나옵니다!(음식점에서)
Keep your shirt on. It's coming right up!
Have you ever tried Korean dishes?
한국 음식을 잡숴 보셨읍니까?
Have you ever tried Korean dishes?
한국 음식을 먹어 보셨읍니까?
"Yes, I like Korean food so much."
"네, 한국 음식을 매우 좋아해요."
This food is terrible.
이 음식 형편없군요.
What is this like?
이건 어떤 겁니까? (메뉴표의 음식을 가리키며)
What's your speciality?
이 집에서 특히 잘하는 음식이 뭡니까?
May I ask for just a bit more?
조금 더 주시겠어요? (음식)
Would you like to try Korean food for dinner?
저녁식사에 한국 음식을 드시겠어요?
This food turns my stomach.
이 음식이 속을 역겹게 하는군요.
I'm not fussy about food.
저는 음식에 별로 까다롭지 않아요.
Can I taste this food?
이 음식 맛 좀 볼 수 있을까요?
"Give me a doggy bag, please."
먹다 남은 음식을 좀 싸 주세요.
This food does not agree with me. 이 음식은 내게 안 맞다.
The analysis of the food showed the presence of poison. 그 음식물을 분석한 결과 독이 있음이 드러났다.
37. The expiration date has passed.
유효기간이 지났다.
=> 통조림이나 우유등 상하기 쉬운 음식의 유통기한이 지나 “유효기간이 지났다.”
38. I threw up.
토했습니다.
=> 속이 좋지 못해 음식물을 토해 내는 경우 “토했습니다.”
39. There's something in my food.
음식에 뭔가 들어 있습니다.
=>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 속에 이물질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음식에 뭔가 들어 있습니다.”
Something is floating in my soup.
국에 뭔가 떠 있다.
40. 전형적인 한국 음식은 주식인 쌀밥과 여러 가지 종류의 반찬으로 이루어져 있다. 쌀밥은 가끔 보리가 섞이는데 물에 끓임으로써 간단히 지어진다. 가장 잘 알려져 있고 흔히 밥상에 오르는 반찬은 김치인데, 김치는 일종의 소금에 절인 배추이다. 그밖에 야채와 생선과 고기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된 반찬의 종류는 아주 많다.
→ 주식인 쌀밥: a main dish of boiled rice ex) 밥을 짓다:boil rice; cook rice
→ 흔히 밥상에 오르는 반찬: most widely served side dish
→ 종류는 아주 많다: the list of ~is endless
(ANS) A typical meal consists of a main dish of boiled rice and side dishes of various kinds. Rice, sometimes mixed with barley, is cooked simply by boiling in water. The best known and most widely server side dish is kimchi, a kind of pickled cabbage. But the list of different kinds of side dishes is endless; all kinds of vegetables, fish, and meat, cooked in various ways.
41. 추석에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흔히 외국인들은 추석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망설이게 된다. 추석은 추수에 감사하고 가족들이 서로 모여 음식을 나누기는 하지만 추수감사절과 똑같은 명절은 아니다. 추석을 '가을 달맞이 축제'라고 부르는 것도 알맞지 않다. 이 날 한국사람들에게는 조상을 추앙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날 추석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석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진정한 주체성을 발견하고 그를 확인하려는 데 한국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추석은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망설이다: have a hard time deciding what to call the occasion
→ …라고 부르는 것도 알맞지 않다: nor is it properly called~
→ 한국의 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추석: Chusok deeply rooted in the culture of Korea; Chusok with a special importance; have a remarkable significance
(ANS) Because there are so many levels of meaning to Chusok, foreigners often have a hard time deciding what to call the occasion. It is not the same as Thanksgiving celebrations, though it includes the thanks for the harvest and the family gathering and eating. Nor is Chusok properly called an autumn moon festival, for the more important meaning to Koreans is to be found in the veneration of the family ancestors. Probably the most important thing about Chusok today is its very Koreanness. At a time when the people of this country are deeply concerned to discover and affirm their true national identity, events with a long history in the culture of Korea a special importance.
42. 추수축제일이나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나라도 많고 조상을 추앙하는 날을 정해 놓고 있는 문화권도 많다. 그러나 한국의 추석은 그 유례가 드물다. 역사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추석명절은 2000년 전 신라 3대 왕 재임시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추석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추석은 일년 추수를 하늘에 감사하는 날이며 또한 다음해에도 풍년이 되기를 기도하는 날이고, 일가친척에 은혜를 베푼 선조에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날이다. 또한 추석은 말할 것도 없이 가족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날이며, 밤에는 휘영청 밝은 만월의 달빛 아래서 원무를 추는 행사가 벌어지는 날이다.
→ 「추수축제일이나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나라도 많고」는 영어로는 many countries를 주어로, have를 동사로 하여 나타내도록 한다.
→ 조상을 추앙하는 날을 정해놓다: observe the veneration of ancestors(observe는 「특정한 날을 규정된 방법으로 축하한다」는 뜻이다.
→ 한국의 추석은 유례가 드물다: The Korean Chusok has no parallels./ No one has anything quite like the Korean Chusok.
→ 재임시: during the reign of~
→ 일가친척에 은혜를 베푼 조상에 감사의 제물을 바치다: offer sacrifices of gratitude to one's family ancestors for all they did for the clan and family
→ 가족이 서로 모이는 날: the day for family reunion/gathering
→ 휘영청 밝은 만월의 달빛 아래서: in the light of the full moon
→ 원무: circle dance
(ANS) Many nations have harvest festivals and Thanksgiving days, while many other cultures observe the veneration of ancestors, but no one has anything quite like the Korean Chusok. Historians tell us that the Chusok festival originated during the reign of the third king of the Silla Kingdom nearly 2,000 years ago. Chusok involves many things. It is an offering of thanks to heaven for the harvest, an appeal for the good fortune of another harvest in the next year, and an offering of sacrifices to one's family ancestors for all they did for the clan and family. In addition, of course, there are family gathering, much hearty eating, and such activities as the circle dance in the light of the full harvest moon.
43.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인스탄트 식품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우리의 식사유형은 크게 변하였다. 식료품점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여러 인스탄트 식품들이 전통적인 음식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산업사회에서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인스탄트 식품은 일에 바쁜 사람들이 시간과 정력을 절약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식문화가 급격히 변화하자 일부 부도덕한 식료품 생산업자들은 인스탄트 식품의 대량소비를 기화로 소비자의 건강을 해치는 불량식품을 생산하는 사례가 일어났다. 차제에 보건당국이 우리 주변의 불량식품을 뿌리뽑기 위해서 전면적인 행정감사를 시작한 것은 적절한 조처라 하겠다.
→ …가 도래함으로써: with the advent of~; with the emergence of~
→ 식사유형: the dietary pattern
→ 식료품점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인스탄트 식품: instant food items that are readily available in groceries
→ (그런데) 음식문화가 급격히 변화하자…: But as the food culture changes radically,…/ But in the wake of the drastic change in the food culture,…
→ 일부 부도덕한 식료품 생산업자: some immoral food producers
→ 불량식품: unwholesome food items; substandard food products
→ …의 대량소비를 기화로: taking advantage of the mass consumption of~
→ 차제에: at this juncture; under/ in these circumstances
→ 전면적인 행정감사: an all-out administrative inspection; a nationwide investigation
→ 뿌리뽑다: root out
(ANS) The dietary pattern in our country has largely changed nowadays with the advent of an era of instant food. Many of traditional dishes have been replaced by instant food items that are readily available in groceries. In industrial societies, such a phenomenon is inevitable, since fast food makes it possible for busy hardworking people to save time and energy.
But in the wake of such a drastic change, some immoral food producers have been producing unwholesome food items potentially harmful to the health of consumers, taking advantage of the mass consumption of instant food.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is more than appropriate that the public health authorities should have conducted an all-out inspection to root out substandard food.
44. 나머지 음식은 싸 주세요.
Can you wrap this up, please?
Can I have a doggie bag?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 대답했다.
He replied between the bites.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 대답했다.
He replied between the bites.
The best way to lose weight is to avoid eating fatty food.
체중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방질의 음식을 피하는 것이다.
That food smells awful-is it safe to eat?
그 음식은 냄새가 역겨운데 먹어도 괜찮을까?
I bet you can't eat all that food that you've got on your plate. Is that a challenge?
접시에 있는 음식을 다 먹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한번 도전해 볼래?
I think it is a sin to waste food.
나는 음식을 낭비하는 것도 죄라고 생각한다.
Please save some for me.
음식 좀 남겨둬요.
What is the typical diet of the koreans?
What is the diet of a typical korean family?
- 한국인들은 무얼 먹고 사나요?
45. diet -
(1 주로 먹고 마시는 음식.
(2) 체중 조절이나 혈당조절, 혈압조절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먹는 음식.
(3) National Assembly 우리나라 국회 / Diet 내각책임제 하에서의 의회
46. 난 이제 너 한테 질렸다.
I`m sick and tired of you.
/ I`m fed up with you.
/ I have had it with you.
/ I`m up to here with you.
(난 이제 너 한테 질렸다.)
I`m fed up with this lousy meals.
이제 이 지독한 음식에 진저리가난다.
47. I eat like a bird.
난 소식(小食)을 한다.
* Eat like a bird, and exercise regularly
`소식을 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라' 는 미국 diet 전문가들이 비만에 걸린 사람들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
`운동한다.'는 work out 이라고 한다.
87. 이번에는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중에 식사량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와 반대로 과식을 하다는 pig out을 씁니다.
너는 핏자를 너무 많이 먹어.
You pig out on pizza. (전치사 on을 주의하세요.)
You eat too much pizza.
48. 반대로 `돼지같이 먹는다.'는 말 그대로 eat like a pig 라고도 하고 pig out 이라고도 한다.무엇을 과식한다고 할 때 과식하는 음식은 on이라는 전치사 다음에 가져오면 된다.
즉, You pig out on pizza.라고 하면 `너는 피자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뜻.
cf) What`s your secret? (날씬해진 사람을 보고) 비결이 뭐니?
49. What's your favorite dish?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
* dish라고 하면 막연히 접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접시 모양 비슷하게 생긴 것도 일컫는다. 예를 들어 satellite dish라고 하면 위성안테나를 일컫는다. 그리고 사기 그릇은 옛날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이 되었으므로 보통 china라고 한다.
50. Can I have a doggy bag, please?
이것 좀 싸주실 수 있겠어요?
* 미국의 식당에서 leftover food(먹다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가는 경우가 흔한데, 자기가 기르는 개에게 갖다 준다고 해서 doggy bag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자기가 먹을 것이면서 개 핑계를 대고 먹다 남은 것을 싸가는 것이다.
Give me a doggy bag, please. 이라고도 한다.
51. on the house 무료로, 공짜로
* ' on the house ' 가 왜 '비용을 무료로' 라는 뜻이 되는지?
Dinner is on me. 저녁은 내가 살께.
Lunch is on me. 점심은 내가 살께.
= I'll buy lunch for you.
It's on me.
돈은 내가 내겠다.
음식점에서 자주 오는 손님에게 서비스를 내놓는 경우
It's on the house. 이것은 서비스입니다.
It's our service.(x) <= 틀린 표현.
Beer is on the house. 맥주는 공짜입니다.
52. French fries 가 '감자 튀김'이라는 뜻이던데 왜 그런지요 ?
=> 음식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프랑스 입니다. 답부터 말하자면 이 감자튀김 요리를 처음 프랑스에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French toast – 식빵 요리 (달걀과 우유를 섞은 것에 담가 살짝 구운 빵 요리를 말합니다. 디져트용)
* French dressing - 식초,기름,향료를 배합한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소스.
* French fries - (영: chips) 감자를 길죽하게 잘라 튀긴 것.
* Potato chips - (영: crisps) 감자를 둥그렇게 잘라 튀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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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원(元)나라 – 대몽고제국(大蒙古帝國)
(1)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 또는 대원국(大元, 중세 몽골어: 예케 유완 울루스), 약칭 원(元)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카안 울루스이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보르지긴 가문의 수장이었던 쿠빌라이 칸은 고비 사막 남쪽, 화북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대몽골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남쪽으로 이전했다. 먼저 카이펑開平으로 옮겼다가 훗날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를 세우고 다시 그곳으로 이전했다. 대원 울루스라고 불렸으며 아울러 이때부터 중국식 국호로는 '대원大元'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시기를 ‘원 왕조’라고 부른다.
몽골인들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화북 지역을 다스렸는데 1271년에 쿠빌라이 칸이 모든 세력을 모아 원나라를 개창하였다. 이후 쿠빌라이 칸이 국가의 기틀을 잡고 남진하여 남송을 멸망시키고 정복왕조를 건국하였다.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을 모두 통일한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다른 칸국들과 종속 관계를 끊고 독자적으로 현재의 중국과 몽골 지역들을 지배했으며, 일본, 대월, 참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정복왕조 중에 하나이며, 1368년에 명나라의 군대에 밀려 몽골 지역으로 쫓겨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몽골 지역에서도 원나라 황족들은 북원을 세워 원나라 왕조를 지속해나갔다.
(2) 역사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몽골어로는 다이 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ön Yeke Mongγol Ulus), 즉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다. 원나라는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다. 중국을 지배한 원나라의 경우 한족들은 몽골제국에 대해 한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한다. 원나라가 성립된 전후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다. 민족을 4등급으로 나누어 한족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중국 학자 신력건에 의하면 당시 몽골 원나라는 이전 동아시아에는 퍼지지 않았던 후기 불교이며 성적 샤크라를 중시하는 티베트의 라마교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원나라에 있는 모든 몽골인들은 샤크라 라마교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군인 1명당 100명의 한족들이 배당되어 한족들이 칼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감시하였고 라마교를 핑계로 한족여성들은 몽골 군인들에게 초야권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당시 한족들은 첫째 아이는 살해하는 풍습까지 생겼다. 이런 초야권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원나라에서의 기록에만 보여지는 특수한 문화로 동아시아에서는 한족에게만 가해지는 지배 방법이였다.
(3) 몽골 제국의 재편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 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내 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 훗날의 상도(上都)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 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 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아리크 부케의 항복으로 인해 대칸의 지위는 다시 통합되었으나, 중국 서쪽의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에서의 대칸의 위신은 큰 타격을 입었다. 1269년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차가타이 가문의 바라크와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 그리고 주치 가문(킵차크 칸국 혹은 금장한국(Golden Horde))의 여러 왕이 탈라스 하반에서 모여 중앙아시아의 대칸령을 분할해 쿠빌라이에 대항해 자립의 태도를 명확히 했다. 이윽고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가 중앙아시아 여러 왕 사이에서 맹주의 지위를 확립하고, 하이두의 반항은 몽골 제국을 동서로 나뉘게 된 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하이두의 난)
그 사이 쿠빌라이는 중국식 정치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고,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중국 북부의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옮겼다. 지방에는 몽골 제국의 금나라 공략의 과정에서 자립해 몽골에 귀의하여 화북 각지에서 호족 노릇을 하던 한족 현지군벌(한인호족)들을 평정하고 그리고 마침내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6] 이라고 하고 기존의 중원을 통일한 왕조의 맥을 잇게 된다. 이로써 칭기즈 칸이 세운 거대한 몽골 제국은, 서부의 여러 칸국들과 중국의 대칸령 사이의 느슨한 연합으로 재편되었다.
(5) 몽골의 중국 정복
원나라 건국 당시 쿠빌라이의 세력은 몽골 고원과 기존 금나라가 점유하던 화북 지역에 불과했다. 장강 이남에 버티고 있던 남송은 원나라가 공격을 하여 조공을 하고 있던 상태였지만 원나라를 위협할 만한 군사력도 갖춘 터라 남송을 그대로 두는 경우 원나라의 지배가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몽케 칸의 대에, 남송의 재상인 가사도(賈似道)에게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군을 몰아 후난성과 장시성을 유린하였고 남송은 허페이 지역과 항저우에서 대몽항쟁을 벌였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3번의 원정을 통해 광저우까지 함락시키고 남송에 남은 것은 수도와 항저우 지역뿐이였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켜 남송의 도시들을 차례로 유린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에 수차례 원정 정벌을 하여 남송과의 전쟁은 수십년이나 지속되었다. 몽골인들과 여진족 등은 남송 도시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유린하였고 남송은 그때마다 쿠빌라이와 협정하여 조공을 보냈으나 남송은 점점 약해졌다. 남송의 여러 도시들이 정복되어 함락되었고 남의 한족들은 강이민족 몽골을 몽고라고 폄하하며 한 저항을 했으나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원나라는 군인이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질렀고 특히 항주의 피해는 심각하였다. 1274년 쿠빌라이는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함락되어 남송군이 전멸되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지역의 명칭을 모두 개편하였고 남송이 있던 지역을 모두 성(省)으로 나눠 행성을 설치하고 몽골인 통치자들을 보내 각 행성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각 지역을 성(省)으로 나누어 불렀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사로잡혀 원나라의 수도로 연행되었고 황족의 여성들은 기생관으로 이동시켰다. 남송의 귀족들은 이민족을 섬길 수 없다며 저항하다 죽었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쿠빌라이는 원정 정벌하였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투항한 한족들은 어느정도 벼슬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한족들은 이민족이였던 몽골군에 투항하지 않고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전락하였다. 몽골인들은 한족들의 토지를 빼았아 거대한 농장들을 만들었고 한족들은 재산을 빼았겨 흩어졌다. 몽골인들은 계급을 4단계로 나누어 1단계 계급은 몽골인과 색목인, 2단 계급은 부마국 고려인과 투항한 여진족과 거란, 3단계는 복속된 화북 한족 그리고 4단계 최하층은 남송인으로 나누었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구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 때인 1301년 하이두가 죽자, 1304년 긴 시간 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왔다. 이 상황을 가리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라고 불리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는 정치 경제의 센터가 되어, 마르코 폴로 등 수많은 서방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강남의 항만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되었다.
(6) 쇠퇴기
몽골은 남송을 정벌했으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일본 공격에 실패하여 많은 몽골인들이 죽자 원나라는 이번엔 복속된 남송인들을 일본으로 보내 1281년 다시 일본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태풍과 가마쿠라 막부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쩐 왕조에게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남송을 배신하고 투항한 한족들은 그만한 대우를 원했지만 몽골인들의 지배는 가혹하였고 한족들은 빈번히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군들은 모두 평정되었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한족들의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패배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로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또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 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모친 코코진 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옹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귀족들이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옹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다음해 1323년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계승한 시데바라가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겨우 제위가 안정된 것은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쓰러진 끝에,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던 태평왕(太平王) 엘 테무르에게 묶여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에르 테무르의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엘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성인이 된 칸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지배에 대한 한족들의 불만과 공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7) 명(明)나라의 건국
1348년 절강의 방국진(方國珍)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크토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대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 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육박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북원으로 존속하였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명나라 건국은 단순히 몽골민족의 패배는 아니였다. 원나라를 지나면서 지배층이던 몽골민족의 피가 강제적으로 한족 피지배층에게 주입되었고 피지배층 한족들은 극심한 차별 속에서도 원나라에 충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명나라 건국에도 당시 칼 등을 소지할 수 없었던 한족들을 대신에 몽골 민족들이 주원장에 협력하여 명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에 몽골민족들은 명나라에서도 군사적으로 지배층에 있을 수 있었다. 즉 화북에서는 먼저 황하의 개수 등에 의해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일로 인해 원나라의 구심력이 일시적으로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지배층에 있던 몽골 장수들의 지원으로 인해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할 수 있어서 당시 군사 부분에서는 명나라 때에도 몽골인들이 지배층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족의 관리 중에는 한족이 피지배층이면서도 몽골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고 앞에서 나온 가노를 시작으로 원 왕조에 충성을 다하여 명나라군과 반란세력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많았고, 1367년 명나라군에게 붙잡힌 호부상서 장욱은 주원장의 항복권고에 대해 “몸은 강남에 있어도, 마음은 삭북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처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8) 북원(北元)
북원에서는 1388년 토구스 테무르의 자손이 끊어지면서 쿠빌라이 가문의 대칸 세습이 끝나고, 쿠빌라이 왕조인 원나라는 단절되었다. 차하르 칸국은 나름 힘을 길러 다얀 칸 때에 이르러 대원황제를 다시 선포하며, 명나라에서 오는 한족 이주민들을 시켜 귀화성이라는 중국식 도시를 짓게 하기도 했다.
(9) 영향
원나라 시대에는 민족성 다양성에 힘입어 다양한 문화적 발전이 일어났다. 소설과 연극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며, 특히 백화문을 사회 각계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 중앙아시아와 중원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며, 동양과 서양 간 교류도 전보다 훨씬 활발해졌다. 몽골 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문화권들의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고, 수없이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중화권으로 쏟아져 들어옴에 따라 중국의 문화에도 대변화가 일어났다.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무역과 상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페르시아, 중동 등에서 뻗어있는 무역로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이 시장 경제를 촉진하였다. 원나라 황실은 불교를 신봉했는데, 특히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다. 원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들어온 무슬림들은 중동의 발달한 천문학, 약학, 의복, 식생활들을 동아시아에 전파하였으며, 당근, 튤립, 레몬, 멜론, 설탕, 솜 등의 고급 작물들도 원나라 시대에 동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서양의 악기들도 도입되어 중국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는 이슬람교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아시아 지역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와 로마 가톨릭도 관용적인 원나라의 종교 정책에 힘입어 중국으로 진출했고, 티베트 불교를 포함한 불교도 전성기를 누렸다. 다만 도교는 원나라의 박해를 받아 세가 주춤하기는 하였다. 유교도 중요시되었다. 원나라는 선대 황조들의 본을 받아 유교적인 관료제를 채택하였고, 유교적인 과거제를 통하여 관리들을 임용하였다. 이는 금나라 통치 시절 이후 북부 중국에서 단절되었던 유교적 학풍을 되살렸던 것으로, 한족 통치를 원할히 하기 위하여 실시했던 것이다. 원나라에서는 워낙 넓은 영토를 통치하다 보니 탐험 문학도 발달하였고, 지도학, 지리학, 과학도 크게 발전하였다.
원나라 대에 중국에서 발명된 물건들도 많이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정제된 질산 칼륨, 인쇄술, 도자기, 카드 게임, 약학 등이 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에서는 활발한 무역에 힘입어 칠보와 유리 공법이 발달하였다. 원나라는 뒤이어 중국을 통치한 명나라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초대 황제 주원장은 몽골이 군사적으로 중국을 통치한 방법에 감탄하여 이들의 군사 기지들과 요새들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정도였다.
서양인들이 동양으로 여행을 왔다가 남긴 첫 기록물이 바로 원나라 시대에 나왔다.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저술한 동방견문록이 바로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시대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저서에 '칸발리크'라는 도시를 다녀왔다고 적었는데, 이 것이 바로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였다. 동방견문록은 당시 동방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던 서양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국적인 분위기와 생생한 묘사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책 내용을 분석하면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다녀온 시기는 1299년으로 보인다. 다만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가장 핵심적인 건축물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았고, 전족 등에도 한마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에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동방견문록이 실제로 마르코 폴로의 모험에 기반하여 쓴 것이며 대부분이 매우 정확하고 독특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원나라 정부는 다양한 공공 사업을 벌였다. 쿠빌라이 칸의 핵심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저명한 천문학자 곽수경이 있었는데, 그는 원나라가 태음태양력을 정확히 365.2425일로 계산하는 것에 업적을 남겼다. 이는 현대의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한 것과도 26초의 오차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정확한 수치였다. 원나라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도로와 수로 사업도 활발히 벌였다. 기근을 대비하기 위하여 제국 전역에 곡식창고들이 지어졌고, 수로를 건설하여 농지를 개간하여 생산량을 늘렸던 것이다. 원의 수도였던 대도에는 거대한 인공 연못, 언덕, 산, 공원들과 함께 거대한 칸의 궁전이 지어졌고, 이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전해진다. 대도는 이 때 대운하의 종착점으로 기능하며 경제적인 부를 누렸는데, 이는 대운하가 원나라 시대에 재정비되어 내지와 해양을 연결하며 중국 내부의 무역, 일본, 고려, 심지어는 유럽까지도 활발하게 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인 여행가들은 이 대운하를 통하여 새로운 작물들, 수수새속, 이국적인 요리법 등을 들여와 중화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이전에도 북위 등 많은 이민족 국가들이 중국 전역을 통치하였고 한족들에게 있어서 이민족 지배자가 중국을 통치하는 것은 흔한 일이였다. 이전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도 중국 북부 지역을 통치하기는 하였고 그때도 여전히 한족이 세운 송나라가 남부 지역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었으나 금나라에 조공하였다. 몽골 역사학계는 보통 원나라를 몽골 제국의 후신으로 보며, 이 때를 몽골의 최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몽골인들은 하늘을 숭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몽골족들은 이같은 세계관에 입각하여 원나라를 '생명, 행복, 평화, 힘의 근원이자 이 외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라고 찬양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원나라를 중국의 왕조로 평가하지 않는 역사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원나라 시대에 한족이 전혀 절대로 융화되지 못했고 오히려 한족들은 2등 시민으로 대우받았기 때문이다.
원나라 황실의 색은 백색이었다. 금속을 상징하는 색깔인데, 이같이 나라의 상징색에 원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나라 시절부터 거슬러 온 것이다. 중국 전통의 용무늬 장식은 일 칸국에게도 전파되었다. 일 칸국에 피지배층인 한족들은 칸들을 중국식 호칭인 '황제'로 불렀다.
(10) 정치
쿠빌라이는 중국식의 행정기구를 완비시켰는데 내각에 해당되는 최고 행정관청인 중서성(中書省), 군사(軍事)를 다루는 추밀원(樞密院), 감찰기구인 어사대(御史臺)는 모두 송대(宋代)의 형태를 답습한 것으로서 이 점에서도 몽골로부터의 이탈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중국 왕조에서 볼 수 없었던 특색도 많았다. 칭기즈칸은 제국(帝國)의 영역이 확대되자,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의 농경문화권에 도시를 중심으로 점령지 행정관(行政官)을 두어 민정(民政), 징세(徵稅) 등의 정무를 총괄하게 했다. 이것이 다루가치로 불리는 관직으로서, 원의 시대가 되자 각 지방 관청 및 군관구(軍官區)에 설치되고 원칙적으로 몽골인을 임명함으로써 감찰기구의 성격도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이 다루가치 위에는 이미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 대다루가치가 총괄적으로 설치되었는데, 대다루가치의 관할범위를 하나로 묶어 중서성(中書省)의 출장기관인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몽골제국시대의 행성은 정토(征討) 등에 수반되는 중앙의 임시 출장기관인 동시에 지방 행정부도 겸했었는데, 원대(元代)에 와서 특히 강남을 통일 한 뒤로는 11행성으로써 중앙 직할지인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산시(山西), 내몽골(內蒙古) 이외를 구획하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지방구획의 단위인 성(省)은 이 때의 원나라 행성(行省)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각 행성 아래에는 명칭만 송을 계승한 노(路), 그 밑에 주 (州)·현(縣)을 두어 그것을 축(軸)으로 하여 한족(漢族) 통치가 전개되었다.
(11) 신분 제도
원나라는 자국인 제일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국족)→색목인→한인(여진(女眞), 발해(渤海), 고려(高麗)를 비롯하여 한인세후(漢人世侯) 아래에 있던 중국인)→남송인(남인)의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하였다. 10 가구의 한인당 한 명의 몽골 병사의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몽골족은 이들의 반란이 두려워서, 여러 사람이 만나거나 모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10 가구에 오직 하나의 부엌칼만 가질 수 있게 하는 등 차별 정책이 극심했다.
물론 이러한 조항이 실시된 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 강남 지역에서는 송대부터 터잡고 살아온 한족 호족들의 자치가 실시되는 지역이 태반이었다. 애당초 몽골은 이 차별 정책을 중국 전토에 시행할 만한 행정 역량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잘 알고 있는 원나라측에서 갈아엎으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자체 분열로 그럴 여력이 없었다.
중국 중세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의 Frederick W. Mote 교수에 의하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철경록 등에서도 나온 것처럼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자들이나 정복 과정에서 얻은 포로들은 노예가 되었지만 의외로 귀족[10]들이 망했고 양민들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11]
원나라 왕조 아래에서 한족이 몽골인을 노예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 중국 학자들은 더 이상 '4계급'(class)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4계층'(rank) 또는 '4지위'(level)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4계층은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권력(social power)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특전(previlege)을 규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몽골인들이 속해 있던 계층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한인' 또는 '남인'으로 폄하된 중국인들 가운데서도 몽골 정복 이전의 중국 사회에서와 같은 부와 지위에 따른 계층 구분이 계속해서 존재했다. 한때 자신들만의 사회에서 명성과 특권을 누리던 중국 상류층들에게 있어서 원나라의 제도가 이전보단 현상 유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담보해주지 못했던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몽골 정복 초창기에 노예상태(servitude)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 사회는 일시적인 진통을 겪었을 뿐 영구적으로 변형되지 않았는데, 몽골의 서투른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 덕분이었다.[12]
이에 따르면 원나라 통치 시기 '4계층' 구분은 귀족들에게나 적용되는 특전(previlege)의 정도였을뿐 일반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구분짓는 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상기했듯 행정 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인들은 제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한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강남을 아예 한족들의 자치에 맡겨 두고 중앙에만 신경 쓰게 되니, 이로서 동시대 남송인들은 고려인들과 달리 몽골풍을 강요당하지도 않았고,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천자만이 시행할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개최하는 등 사실상 중세 유럽의 봉건 국가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남송 사회가 누릴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특혜의 배경엔 몽골 침략 당시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국가 지도부의 공덕이 있었다. 몽골은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투항하는 금과 남송의 귀족 및 군벌들에게 영지를 분봉하고, 왕부를 설치해 자치를 실시하도록 했는데, 전체 원 국토의 1/3을 이 왕부가 관할하고 있었으며, 왕부의 호족들은 원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독자적인 징세권과 징병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몽골인들은 한족들로만 이루어진 군사 조직인 '한군만호부'도 두었는데, 지휘관들은 그 직위와 둔전을 대대로 세습했다. 이러한 토대가 결국 중국이 몽골의 지배를 1세기만에 종식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는바[13], 몽골의 침략에 오랜 기간 항전하며 권리를 관철시켜나간 국가 지도부의 항전 의지와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2) 문화
몽골제국은 멀리 유럽에 펼쳐진 대제국으로서 참치(站赤) 제도가 정비되자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실크 로드를 왕래하는 대상(隊商)도 증가하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기를 띠고 유럽의 선교사나 상인·여행가가 속속 동방 세계를 방문했다. 그리고 송나라의 경제력을 이어받아서 해상무역을 더욱 활성화 시키고 중통원보교초, 지원통행보초 등의 지페를 유통시켜서 어음이 사용되고 금융업이 발전했다. 그리고 바닷길과 하천으로는 양쯔강과 대운하, 해안지대의 시박사를, 육지로는 중국 지역에만 1500개나 존재할 정도로 많은 역참을 이용하여 물자의 유통량과 속도를 모두 크게 증가시켜서 원나라의 부는 세계 어디를 봐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서방 문화의 유입 가운데서 중국에 전래한 이슬람 문화는 그 영향이 가장 현저하여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의 자연과학이나 미술에는 주목할 것이 많다. 중국의 전통 문화는 원조(元朝)가 무시했기 때문에 정체했다. 특히 유학의 경시는 학문 발전의 장해가 되었다. 반면 서민 문학은 성행하여 중국 문학사에서 한문·당시(唐詩)·송사(宋詞)와 견주는 대표적인 문학의 하나인 원곡(元曲)이라 불리는 희곡(戱曲)이 융성했다. 회화에서는 송의 원화체(院畵體)나 문인화(文人畵)의 화풍을 엮은 명장(名匠)이 배출되었다. 또한 원조의 종교 정책은 극히 관대하여 이슬람교·그리스도교가 상당히 퍼졌고, 티베트 불교도 티베트에서 전파돼 중국 불교 역사에 이채를 던졌다.
(13) 음악
원나라 시대의 음악을 호악(胡樂, 오랑캐 음악)이라고 하였는데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도입된 원나라 악기가 해금과 태평소다.
(14) 미술
원대의 화가는 화원계(畵院系), 문인계(文人系), 거기에 산수화의 이곽파(李郭派) 등 셋으로 대별된다. 원대에는 화원(畵院)의 제도는 없었고, 남송의 멸망과 더불어 화공(畵工)은 후원자를 상실하여, 거의 대부분 저장지방(浙江地方)의 한 양식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화원계의 화인에 비하여 문인화가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어 동원(董源)·미불 미우인(米友仁) 등과, 또 한편으로는 이곽파의 화가들도 이성(李成), 곽희(郭熙) 등을 스승으로 받들고, 북송(北宋)으로의 복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송의 여러 선학들의 예술의 본질은 상실되어 자연을 관찰하는 의욕도 희박해지고 기법상으로도 조잡하여, 산수화로서는 구도에 있어 통일성이 결여되고 화면의 원근 표현도 성공을 보지 못하였다. 조맹부에서 비롯된 복고운동은 원말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吳鎭), 예찬(倪瓚)의 4대가에 이르러 남종(南宗) 산수화풍의 전형이 완성케 되었다. 명말의 동기창(董其昌)은 4대가 이후에 규범이 될 수 있는 강렬한 개성적인 작가는 없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방 아무개’라고 낙관한 산수화가 이의적(二義的)인 모사(模寫)는 아니고 독립된 작품으로서 성행하게 되었다.
(15) 문학
가무(歌舞), 음곡(音曲), 연기(演技)를 통합한 중국식 오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원곡, 즉 원잡극(元雜劇)이야말로 바로 몽골 왕조의 지배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성숙하여 발전한 것이다. 원잡극은 희극(戱劇) 등(직접적으로는 金의 院本雜劇)을 계승하여 생겨난 것으로 배우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대사를 말하고 동작을 보이는 것인데, 대도(大都)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북곡(北曲)이라 불린다.원의 곡은 4막으로 이루어지며 비파(琵琶)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악기를 구사한다. 정말(正末), 정단(正旦)을 비롯하여 충말(沖末), 정(淨), 축(丑) 같은 배역이 정해지며, 주역의 말(末)과 단(旦)만이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구어(口語)를 한껏 구사하고 과거(科擧)의 문이 막힌 지식인층에서 작자(作者)를 끌어들여 신선한 문예의 한 장르로서 지위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대표작은 『서상기(西廂記)』 『한궁추(漢宮秋)』 등이다. 북곡이 엄격한 규칙을 갖는 데 반해 원의 중엽 이후 강남(江南) 지방에서 일어난 남곡(南曲)은 자유롭고 무대의 변화가 많고 화려하다. 남곡의 대표작으로는 『비파기(琵琶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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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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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필명 엘리스 벨(Ellis Bell)로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자 유작 소설이다.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 신부가 성공회 사제였던 가정환경상 에밀리는 어린시절을 사제관이 있던 영국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서 보내면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길렀으며, 어른이 된 후 요크셔 벌판의 폐가(TopWithens)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을 썼다. 캐서린(Catherine Earnshaw)과 히스클리프(Heathcliff)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게 장점이다. 출간당시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20세기에 토머스 몸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한국어판은 범우사 등의 문학전문출판사들에 의해서 역간되었다.
(2)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줄거리
1801년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폭풍의 언덕에 세입자인 락우드씨가 찾아온다. 자신이 세든 집인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인 히드클리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거칠었고 잘 곳도 변변하지 못하여 감기에 걸려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과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가정부 넬리 딘에게 그동안 있었던 두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듣는다.
이야기 1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었던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데려온다. 가족들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소년에게 경계심을 갖고있었는데, 특히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한다. 죽은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히스클리프를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 프랜시스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힌들리는 결국 히드클리프를 머슴처럼 가혹하게 학대한다.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같이 자랐던 친구이자 애인인 캐서린까지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아들인 에드거에게 사랑을 품자, 이에 상심한 히드클리프는 가출한다.
이야기 2
몇 년후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 히드클리프는 몸이 약했던 아내 프랜시스의 죽음이후 폐인이 된 힌들리를 도박으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린다. 알코올 중독으로 힌들리가 죽자, 그는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에게 자신이 당한대로 앙갚음을 하여, 무식한 머슴으로 키운다. 새끼 뻐꾸기가 다른 새의 알들을 내치는 것처럼,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 머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서 결혼한 뒤, 인권을 짓밟는다. 히드클리프와의 만남이후 결혼전부터 갖고 있던 정신착란이 심해져서 죽은 캐서린만 찾는 무관심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이사벨라는 런던으로 달아나서 아들을 낳는다. 한편 에드거는 죽은 아내가 남긴 외동딸 캐시를 곱게 키운다.
이야기 3
여동생이 병으로 죽자 에드거는 런던에 가서 조카를 몰래 데려오지만 12살의 철없는 꼬마 캐시의 말실수로 발각된다. 히드클리프가 아들을 데려갈 것이 분명하자, 에드거는 마지못해서 조카를 폭풍의 언덕에 데려다 준다. 까다롭고 버릇없는데다가 허약하기까지 한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지만,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서린과 결혼시켜서 드러시크로스를 먹어치울 생각을 한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시와 강제로 결혼시켜, 탐욕을 채운다. 딘은 셋방을 구해서 어릴적부터 모셔온 캐시 아가씨를 다시 모시고 싶어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야기 4
1802년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가던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에 다시 온다. 전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는데, 딘 아주머니는 히드클리프가 죽었다고 했다. 비가 몰아치는 날, 눈도 못 감고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어턴과 캐시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결혼을 앞두면서, 폭풍의 집과 드러시크로스저택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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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선물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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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6. 이솝우화 10권(오디오 CD 포함) : 할인 가격 30,000원
7. 10주 완성 영어 회화(1권 -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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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 도서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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