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 집을 짓게 하소서 (이어령)
작지만 단단한 영혼의 집
*출처=셔터스톡
내가 살 집을 짓게 하소서
다만 숟가락 두 개만 놓을 수 있는
식탁만한 집이면 족합니다.
밤중에는 별이 보이고
낮에는 구름이 보이는
구멍만 한 창문이 있으면 족합니다.
비가 오면 작은 우산만한 지붕을
바람이 불면 외투자락만한 벽을
저녁에 돌아와 신발을 벗어놓을 때
작은 댓돌 하나만 있으면 족합니다.
내가 살 집을 짓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맞이할 때 부끄럽지 않을
정갈한 집 한 채를 짓게 하소서
그리고 또 오래오래
당신이 머무실 수 있도록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집을 짓게 하소서
기울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집을
지진이 나도 흔들리지 않는 집을
내 영혼의 집을 짓게 하소서.
이어령(1934~2022), 대한민국의 교수,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는 어릴 적 빨간 지붕의 이층 양옥집에 사는 것이 꿈이었다. 방 한칸이 없던 가난하던 시절, 그가 꿀 수 있는 큰 꿈이었다.
미국에서 연방 검사이던 그의 딸 이민아는 헌팅턴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샀다. 넓은 응접실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집 앞 비치에는 커다란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이어령 교수는 이 모습을 보고 "행복하구나. 우리가 꿈꿔온 집을 네 힘으로 장만했구나"라는 말을 딸에게 전했다.
이후 이민아는 그 집을 버리고 마약,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잃은 많은 아이들까지 품을 수 있는 진정한 집을 갖기 위해 '사랑의 집'을 세웠다. 그는 그 사랑의 집을 위해 자신이 꿈꾸던 '빨간 지붕의 이층 양옥집'을 버린 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위암으로 인해 사망한 딸을 흙에 묻고 나서야 딸이 꿈꾸던 집이 어떠한 집인지 알게 되었다. 작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영혼의 쉼이 있는 집이었다.
당신이 진정 꿈꾸는 집은 어떤 모습인가? 겉으로 화려하기 보다 비바람에도 기울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내면이 단단한 영혼의 집을 짓길 기도한다.
이어령 교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그는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성의 오솔길> 등 160권이 넘는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다.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향년 89세, 영면에 들었다.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