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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격상합시다. 인격에서 신격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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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격상합시다. 인격에서 신격으로!
오늘 저는 오늘 나눔의 주제를 이렇게 정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격상합시다!
한자어에서 격상格上이란 격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격상이란 자격을 높이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격을 높이는 것을 말함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인격화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인격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인격화해야 합니다.
요즘 반려견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어린이를 태우는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가고,
제가 볼 때 개를 완전히 인간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를 완전히 인격화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프란치스코를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사람은 비인격화하고
개만 인격화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을 비인격화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사람을 어떻게 비인격화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을 개돼지처럼 대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인격적 상대로 여기지 않음이 다른 하나입니다.
개돼지처럼 대하는 것은 비인격화 정도가 아니라 짐승으로 격하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저지르는 죄중에 이보다 더 나쁜 죄가 없겠지만
사람을 인격적 상대로 여기지 않음도 못지 않은 죄입니다.
그를 관계에서 배제하고,
그를 대화에서 배제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는 것,
이것이 개는 인격화하면서 사람은 비인격화하는 것인데
개도 인격화하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사람은 더더욱 인격적으로 대하는,
그런 사람이 될 때 남을 인격화하면서 자신도 인격적인 사람이 되겠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인간의 격을 높이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도 인격자가 되는 것은 엄밀히 얘기하면
격상이 아니라 제 자리를 찾게 된 정도라고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격상은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 모두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요 자녀일 뿐 아니라 신들입니다.
이것이 불경스럽다면 하느님은 큰 신이시고 우리는 작은 신들입니다.
아무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격상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는 유대인들의 말처럼
우리가 스스로 신으로 자처하면 신이 되고 격상할 수 있는 겁니까?
이에 대해 주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 신이니
하느님 말씀을 받음으로써 신이 된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주님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아버지 않에 있고
아버지께서도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개가 사람과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인격화된다면
인간이 하느님과 말씀을 주고받으면 신격화되겠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우리도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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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8일 금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아리우스파와 유대인이 같은 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사람”이라고 하고, 당신들(아리우스파]은 그분께 ‘당신은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은 똑같이 그분께 ‘당신은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고 외치며 똑같은 신성모독의 무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며, 그분께서 참된 탄생을 통한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그분의 말씀이 두 분의 본성이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라는 진술임을 부인합니다. 당신들은 그 대신 우리에게 새롭고 기이하고 낯선 신을 제시합니다. … 요컨대, 당신들은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탄생으로 인한 아들이 아니고, 실상 신이 아니며,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피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대성당을 위한 돌 하나
성경의 우주 안에서 오직 그대만 간직해야 할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대의 개인적이고도 매우 내밀한 주석은 의미의 대성당을 건설하는 데에 중요하다. 다시 말해 역사의 순례자인 교회가 주체가 되어, 자신에게 말씀을 건네오신 신랑께 혼인의 응답이요 경의의 표시로 드리는 저 공동체적이고 전체적이며 보편적인 주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경의 각 구절은 하느님께서 당신 입으로 내뱉으신 소리와도 같다. 이 소리의 음파는 “세상의 극변에 이르기까지 퍼져나가야 하고”(시편 19,5), 또 이 음파를 인식하는 각 사람의 마음이 제공하는 공명 상자를 통해 반향을 울려야 한다.(018)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성령 열매성월 1주간 온유 /절제✝️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 1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리옹의이레네오
이단자들을 거슬러
아들이 인간이 되심-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
조금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그러면서 그는 그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로마 14,9).
코린토인들에게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 1,23)
바오로는. 수난당하고 무덤에 묻혔으며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그리스도를 결코 알지 못했다. 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래서 바오로는 그분을 인간으로 불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1코린 15,12)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1코린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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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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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의대 교수는 의대생들이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지에 적어낼 때 감점을 아주 크게 한다고 합니다. 보통 답을 몰라도 자기 나름의 답을 적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의대 교수는 의사가 생명과 연관된 직업이기에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진찰하고서 잘 모르겠다며 아무 약이나 처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분명합니다.
추측의 위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추측을 삶의 전반에서 취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추측, ‘아니면 말고’ 식의 말들, 한 가지 모습만을 보고서 ‘그 사람은 ~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는 모습 등등….
이 추측은 과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똑같이 범했던 죄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라는 예수님 말씀이 신성모독이기에 돌로 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의 경우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때에만 해당했습니다. 율법해석가인 랍비 압바우(300년)은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느님이요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나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굳이 따진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죄에만 해당하지, 신성모독 죄는 아닙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로마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기에, 사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믿으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일들이 계속됩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이 그 사랑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제 더는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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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기도란, 내 뜻을 하느님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를 묻는 순간이다(성녀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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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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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말씀이 되는 일, 곧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 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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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방식이 꼭 최고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 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게는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 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시선도 그러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방식으로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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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마고르 미싸빕
선과 악이 뒤바뀌면 의인이 죄인처럼 단죄당하고 악인이 선인처럼 위장하여 현실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동족들에게 박해받던 예언자 예레미야가 따돌림당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하느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이 기도에서 사면초가로 고립된 자신의 처지를 사람들이 놀려대는 말이 히브리어로 ‘마고르 미싸빕’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반항하는 동족 유다인들이 돌로 치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과 물로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믿지 않더라도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아서라도 하느님은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때는 요시아 왕이 한창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기원 전 7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아의 개혁은 신하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제들의 고질적인 부패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남유다 왕국은 급속하게 몰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 등 주변 강대국들은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어떻게든 애써야 했으나, 요시아 왕과 백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가짜 예언자와 가짜 사제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안팎이 어렵던 시절인데도, 이 청맹과니 예언자 사제들은 딴청을 피우며 멍청한 낙관론을 유포하였습니다(예레 5,12). 그러나 예레미야가 받은 하느님의 말씀은 정반대로 ‘소름끼치는 무서운 일’(예레 5,30-31), 즉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빌론으로의 유배였습니다(예레 20,4-5).
그런데도 유배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도 지배자만 바뀌었을 뿐 강대국의 지배는 지속되었고, 이제는 자기 땅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께 대적하려 드는 못된 버릇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가르치신 바를 들으면서도 되려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몰고 가면서 돌을 던져 죽이려고까지 드니까, 답답해지신 그분께서(요한 10,32)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 즉 아담의 후손이자 노아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느님께 관한 특별한 신앙적 교훈을 듣고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정체성으로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주변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반사해서 전해 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일을 하고 계신 분을 신성모독자로 간주하고는 돌로 쳐서 죽이려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감쪽같이 벗어나셨습니다(요한 10,39). 이렇게 하여,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의식조차 걷어 차 버렸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현실도 예레미야 당시나 예수님 당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선과 악을 뒤바꾸어 놓은 범인들은 ‘檢言政判’, 즉 검사들과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판사들입니다. 특히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선서를 했던 검사들은 어이없게도 범죄를 대놓고 저지른 후에는 ‘일단 도망가고, 잡히면 부인하고, 백을 쓰면’ 처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고제규, 2021.11.17., 시사인). 작년 ‘채널A 검언 유착 사건’, ‘라임 술 접대사건’, ‘고발 사주 의혹 사건’ 등 모두 검사들이 연루된 사건에서 수사 대상이 된 검사들은 휴대전화를 폐기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며 검찰권력 뒤에 숨었습니다. 가증스럽게도 죄를 지은 검사 출신들이 숨는 권력의 백그라운드는 죄인을 재판에 넘길 수도 또는 넘기지 않을 수도 있는 기소권 독점 현실과 선택적 정의를 편리하게 구사하는 타락한 검찰입니다. 이 부당하고 사악한 현실을 정상화시켜 놓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정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억울한 피고인을 보호하고 적폐를 청산해야 할 검사들이 거꾸로 적폐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스스로 적폐가 되어 악랄한 활약을 하는 바람에 대선판까지도 뒤집어 놓아서, 피의자로 수사를 받아야 할 사람을 최고 권력자로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취임도 하기 전이지만 벌써 국민적 저항의 기운이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눈앞의 작은 이익에 팔려서 넘어갔던 ‘묻지마’ 지지 여론까지 깨어나면, 머지않아 뒤바뀐 현실을 제대로 돌려놓으려는 복원력이 거세게 작동할 것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단, 세상의 그 빛은 태양이 시간이 되면 떠오르듯이 저절로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나라의 공동선과 정의에 깨어있는 이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을 몰아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며 의로운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종내는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피력하던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하느님을 믿으라고 분부하신 예수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어둠의 악은 조만간 ‘마고르 미싸빕’이 되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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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문학으로 성경 읽기’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미니코 페티의 ‘걸작과 습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도미니코 페티는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거의 습작의 수준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성을 기울인 걸작이었습니다. 걸작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에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도미니코 페티의 걸작은 그곳에서는 그리 높게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걸작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작으로 그렸던 작품은 독일의 뒤셀도르프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걸작에 있지 않았습니다. 습작처럼 그렸던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그림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Ego pro te haec passus sum. Tu vero quid fecisti pro me.)”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영국의 해버걸이라는 여성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 영혼을 울리는 성가를 작사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똑똑하고 잘났던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겸손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헌금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방인이었던 시렙다 과부의 집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을 치유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굳이 방문하지 않고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학력, 능력, 업적, 재물, 명예, 권력, 신분’과 같은 것들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습작’이라고 생각하는 ‘겸손, 희생, 나눔, 인내, 기도, 봉사, 절제’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셨던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키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베로니카였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성소국장으로 지냈습니다. 교구장이신 추기경님, 주교님들, 국장신부님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교황님의 한국방문을 준비하는 모임에도 함께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생활의 ‘걸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5년도 감사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주교님, 다른 국장신부님들이 많아서 저는 그리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경기도의 작은 성당에서 3년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신자수도 적고, 헌금도 적고, 할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생활의 ‘습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습작’과 같았던 그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사제생활 중에 다시 돌아가고픈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예수님의 모습에서 결코 ‘걸작’의 품위를 찾기 어렵습니다. 가시관을 쓰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습작’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걸작과 같은 빌라도의 권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헤로데의 신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대사제 가야파와 안나스의 율법에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이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려고 하는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요?
사순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오만 그리고 교만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 이기심, 자존심, 명예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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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 “한결같이 늘봄”을 사셨던 분 -
어제 강론시 제가 예수님께 지어드린 “늘봄”이란 호가 참 마음에 듭니다. 마침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감사합니다. 작년 여름 ‘늘봄 마을’로 이사왔는데 바로 예수님 마을이네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강론 댓글을 보니 참 잘 정했다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주의 요셉 수도원을 ‘배꽃 마을’이라 부르는데 ‘늘봄 마을’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아마 1주일 정도 지나면 배꽃 만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요즘 봄꽃들 만발한 파스카의 계절입니다. 아마 일년중 가장 꽃들 많이 피어나는 시기일 것입니다. 인고의 겨울을 지내고 부활의 봄에 피어난 꽃들이라 한결같이 청초淸楚합니다. 올들어 세 번째 인용하는 제 좋아하는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1999.3
요즘 개나리꽃들의 샛노란 청초함이 단연 눈길을 끕니다. 우리나라 산하의 대표적 봄꽃은 아마 개나리와 진달래일 것입니다. 역시 오래전 써놨던 “개나리”란 시도 나눕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2001.4.11.
파스카의 계절 “늘봄”같은 예수님입니다. “늘봄”에 하나 더하여 “한결같이”란 호를 예수님께 붙여드리고 싶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한결같이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본기도시 ‘한결같이’가 들어간 두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주님, 저희가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한결같이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소서”
그러고 보니 한결같이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진짜 늘봄 마을이자 예수님 마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 서울교대부국을 방문했을 때 동산에 세워진, 이미 고인인 된 서울교대부국 교장으로 재직중 병사한 '박대한' 제 친구의 “한결같이”란 글이 새겨진 기념비도 감동이었습니다. 아마 제 친구의 좌우명이었던 듯 합니다. 교직원들은 물론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변절자들과 배신자들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제 주변을 보면 우리 수도형제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처럼 언제나 한결같이 늘봄을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평범하나 확실한 성인들입니다. 오늘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두 권의 새책이 반가웠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일독一讀 하려 합니다.
“꽃동네 40년사”(1976-2016)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전하는 삶의 깨달음”
꽃동네의 창설자 오웅진 신부 없는 꽃동네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말들도 많지만 제가 볼 때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닌 오웅진 신부 역시 예수님을 닮아 한결같이 늘봄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를 보면 예수님과 예레미야 역시 한결같이 늘봄을 살았던 분임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의 삶입니다. 사실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제1독서의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친구들까지 등을 돌린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주님께 바치는 다섯 번째 고백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로 미싸빕은 “사방에서 공포가!”를 뜻하는 말마디로 예레미야가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와중에서 터져 나오는 예레미야의 하느님 찬양과 구원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랑하는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는 오늘 독서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 말씀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들어도 감동스럽게 마음에 와 닿는 고백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20,9)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예표처럼 생각됩니다. 끊임없이, 참 집요하고 끈질기게 따라 붙어 예수님을 괴롭히고 공격하는 유다인들입니다. 제자들은 어디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 혼자서 계속 겪는 고난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신원이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늘봄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음은 아버지와의 상호내주相互內住의 깊은 내적 일치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눈밝은 많은 이들은 이런 예수님이 일으킨 무수한 표징을 알아보고 피신중인 예수님을 찾아와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백하며 예수님을 믿습니다.
참으로 예나 이제나 우리와 함께 한결같이 늘봄의 삶을 사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중에 우리 또한 한결같이 늘봄의 정주생활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해 주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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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우리는 살면서 타인을 향해서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 돌은 비난과 비방의 돌일 수 있습니다. 그 돌이 비난과 비방 수준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백 번 양보해서 상처까지도 괜찮다고 애써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 상처를 통해서 물론 아프겠지만 하나의 성장통이 될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논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해서 항상 허용이 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허용이 되고 또 용납이 되는 범위는 그 사람이 그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범위 내에서는 괜찮을 수가 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면 한 영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급기야는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을 등지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한 영혼 하면 그냥 쉽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일 겁니다. 우리가 돌을 던질 때 만약 그 영혼이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금쪽 같이 아끼는 영혼이라고 가정한다면 과연 쉽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아마 그렇다면 쉽게가 아니라 던질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도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는 그 수하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가해를 가하고 싶어도 그 사람 뒤에 있는 배경 때문에 쉽게 가할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세상 정치에서 보더라도 권력 앞에서는 이런 논리가 적용됩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그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힘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정말 귀한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는 세상 논리와 하느님이 사시는 하느님 나라의 논리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들이 돌을 던지는 이유는 단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다는 이유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성모독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돌을 던진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하나의 스승 정도의 예언자 정도로 생각했고 또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전혀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신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보지 않는 것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아서 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보려고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려고 하는 의지를 막은 것은 바로 자기만의 고정관념과 의식 때문입니다. 그게 자기의 눈을 가려서 그 의지를 막은 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그런 관념에서 탈피했더라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의 사람으로 설령 본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신 일을 보면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은 신뢰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 일을 역사하시는 분은 분명 하느님이 하심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의도의 뒷 배경에는 이런 뜻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때는 예수님의 신성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논리를 다시 서두에 말씀드린 것과 연관지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보면 이런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겁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돌을 던지는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 우리도 그당시 유다인들처럼 우리의 행동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영안이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서 가려져서 실제 우리가 돌을 던지는 그 대상이 우리가 생각한 그런 영혼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는 아주 귀중한 영혼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에게 한 행위가 언젠가 하느님 심판대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듣게 될지를 한번 묵상해보게 된다면 이는 우리가 어떤 한 영혼을 단순히 판단하고 쉽게 생각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그렇게 된다면 만약 그 영혼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받은 영혼의 상처로 인해 그 영혼이 말로 하기 힘든 고초를 겪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대가를 분명히 하느님 심판대에서 하느님께서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 대해 던지는 그 돌이 지금은 나에게 오지 않지만 아니 이 세상에서는 안 온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의 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돌의 위험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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