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을 때 너는 멈추고 네가 달리면 나는 서 있는 내가 본 녹색등이 너에게는 적색이었다 네가 차가울수록 나는 뜨거워지듯
다시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그때 그 시절 나는, 나를 향해 돌진하는 저 차량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담대한 용기를 지녔을까
세월은 무서운 속도로 흘러갔네
인파로 북적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무수한 보행자들
♤♧ 잠자는 청어
권수진
우리집 안방에 청어 한 마리 반듯하게 누워 있다 백내장 시술 놓친 동태눈을 감은 채 아가미 대신 반쯤 벌린 입으로 숨을 쉰다 해감내 진동하는 어시장 좌판 위에서 살아 펄떡이는 싱싱한 활어들을 다듬던 여자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던 시절을 꿈꾸는지 곤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우리는 그녀의 살점을 발라먹고 자랐지만 늘 가시 많은 가난을 불평했을 뿐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녀를 감싸주지 못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도 한파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파라솔 펼쳐진 고무대야 속을 헤집으며 행상인 북적이는 거리를 파수병처럼 지키던 여자 온종일 노동에 지쳐 골병들어도 병원비 아끼느라 파스만 붙이고 산다 바다에서 육지로 시집온 이후부터 등 푸른 줄무늬 선명하던 옛모습은 사라지고 그녀 몸에선 생선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도마 위 칼질이 난무하는 험한 세상 속에서 토막토막 나버린 그녀의 상처를 위로하는 이는 없었다, 한평생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자갈치 아지매로 거친 삶을 살아야 했던 파도를 짊어진 고달픈 인생이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