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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25) 십자가 위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걸까?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INRI는 라틴어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의 약자로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뜻이다.
“‘인리’가 뭐예요?”
알파벳을 읽게 된 무렵, 부모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 느닷없이 ‘인리’가 뭐냐고 물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리’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은 바로 십자가 위에 적힌 문구, ‘INRI’를 보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INRI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약자이기 때문에 보통은 ‘인리’라고 읽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얼 의미할까요?
INRI는 라틴어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의 약자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의 죄명입니다. 이 문구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요한복음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을 십자가 위에 달게 했는데 히브리어·라틴어·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하고 저자가 말했다’라고 고쳐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빌라도가 “한 번 썼으면 그만”이라면서 이 죄명을 그대로 붙였다고 합니다.(요한 19,19~22 참조)
마르코복음서는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마르 15,26)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마태 27,37), 루카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고 죄명이 쓰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죄명이 ‘임금’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수석 사제들이 항의한 것처럼, 사형집행자 입장에서는 ‘임금’이라는 죄명은 ‘자칭 임금’이라는 의미로 적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임금’이라는 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요 임금이며 사제가 되고 하느님 자녀들 곧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3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는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왕직에 참여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이 왕직에 참여하는 방법이 나오는데요.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786항) 십자가에 적힌 문구를 바라볼 때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알기 쉬운 미사 전례] (25) 주님과의 일치인 영성체
밥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닮으라는 부르심
많은 사제의 모델이신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는 크리스마스카드에 ‘밥이 됩시다’, ‘제가 밥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문구를 즐겨 쓰셨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영혼과 육신이 허기진 이들을 위해 ‘밥’이 될 만큼 자기 자신을 내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람이 담겨 있지요.
어찌 보면 ‘밥’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얕잡아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이기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앞서는 사회에서, ‘밥이 됩시다’라는 말은 자신이 구원하려는 사람들 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닮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영성체는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먹으라는 간절한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과 일치하는 행위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한 적절한 준비로 신자들은 “교회가 정한 공복재(영성체 전 한 시간)를 지켜야 합니다. 또한 몸가짐(행동, 복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님이 되시는 그 순간에 걸맞은 존경과 정중함과 기쁨을 나타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7항)
영성체 예식은 사제의 영성체, 교우들의 영성체, 영성체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후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초세기에는 미사에 참례한 교우들은 특별한 장애가 없으면 모두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셨습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아니즘 이단에 맞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성체 성혈도 지존하신 하느님의 몸과 피임을 강조하다 보니 교우들은 강한 경외심으로 차츰 영성체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체 신심 행위인 성체조배와 성시간 등이 영성체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세 중엽에 마음과 정신으로 영성체를 해도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과 거의 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영적인 영성체인 ‘신령성체’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영성체 기피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에서는 모든 신자에게 최소한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는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하도록 의무 규정으로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현재의 「로마미사경본 총지침」에서는 “사제와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바로 그 미사에서 축성된 성체로 주님의 몸을 모시고, 미리 허용된 경우에는, 성작에서 성혈을 모시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이러한 표지들을 통하여, 영성체가 현재 거행되는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85항)라며, 희생 제사에 대한 온전한 참여인 교우들의 영성체를 권장합니다.
교회는 “성체와 성혈 양형으로 할 때에 표지로서 더 충만한 형태를 지닌다”(「로마미사경본 총지침」 281항)라고 하며 양형 영성체를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한 가지 형상만의 영성체로도 그리스도를 참된 성사로 온전하게 모두 다 모시는 것이므로, 그 효과와 관련하여 오직 한 가지 형상만 모시는 이들도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로마미사경본 총지침」 282항)임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는 이제 우리가 함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 우리를 하나의 백성, 한 몸으로 결합하고, 당신을 닮아 먹히기 위해 쪼개진 빵이 되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들 각자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사랑의 성사」 88항)라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씀은 영성체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전례-기도하는 교회 (5) 전례를 ‘거행(擧行)’하는 이유와 의미
전례를 거행하다 혹은 미사성제를 거행한다는 표현에서 거행(擧行)은 의식이나 행사를 절차에 따라 치름을 뜻합니다. 이 말은 라틴말 ‘celebrare’(거행하다), ‘celebratio’(거행)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낱말들은 형용사 ‘celeber’(유명한, 성대한)에서 온 말로, ‘모이다’ 혹은 ‘참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celebratio’(거행)는 일차적으로 축제나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말 중에서 (명절 혹은 제사) ‘지내다’라는 단어가 ‘거행하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거행’은 축제나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인간학적 관점은 교회가 전례를 거행하는 신학적 이유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인간은 축제 거행을 통해서 생존을 위한 일상-주로 노동-이 주는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삶의 본질-가족, 친구, 행복, 자유, 신념 등-을 회복하고 누리게 됩니다. 축제는 잠시 이루어지는 일상과의 단절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전례 거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실존을 본질적인 것들로 채우는 축제의 시간입니다. 매 주일과 축일에 거행하는 미사성제는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우고 삶을 회복하는 축제의 장입니다.
또한 인간은 제의(祭儀)나 의식(儀式) 거행을 통해서 함께 모인 이들과 같은 신념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감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그 신념과 가치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제의를 거행하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과 그 질서를 너머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그 질서를 향합니다. 전례 거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가 살아가는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고 그 믿음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라는 말씀에 따라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는 성찬례는 전례 중에서도 교회 생활의 정점이자 원천이 됩니다(전례 헌장 10항 참조). 또한 전례 거행 안에서 상징과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을 초월한 거룩함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전례 거행은 하느님의 거룩함이 현현(顯現, epiphania)하는 장소요 하느님의 구원이 현재화되는 장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례 거행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이 지나간 사건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이루어지는 신비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함께 모인 이들은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축제나 의식의 거행은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일치를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전례 거행은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祕體)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인 교회의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는 각자의 직분과 역할을 행하며 전례를 거행합니다. 이처럼 전례 거행을 통해 구원의 공동체성이 드러나며, 신앙 안에서 서로가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 ‘거행’이라는 표현은 전례에 참여하는 외적이고 감각적이며 사회적인 면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매일, 매 주일 함께 모여 전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그 사랑과 자비를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다른 이들과 형제자매로 한 몸을 이룹니다.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이 전례 거행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이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하는 교회] 삼종기도를 바치는 자세는 무엇인가요? 기도 중에 고개를 숙여 절해야 하나요?
삼종기도는 전례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기도와 관련한 규정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전통 안에서 이어온 기도의 관습은 “어느 모로든 전례에서 이끌어 내고 백성을 전례로 이끌어들여 전례와 조화를 이루도록 마련되어야”(전례헌장 13항) 하므로, 이 관습에 대해 전례 규정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삼종기도를 바칠 때는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무릎 절’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며, 무릎 절은 성체께 대한 흠숭을 뜻합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274항) 성체는 주님의 몸이며, 이 몸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의 결정체이므로, 육화 신비에 대해서도 같은 무릎 절로 흠숭을 드립니다. 결국, 삼종기도는 주님의 육화 사건을 기억하고 그 신비를 흠숭하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미사의 신앙고백 중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신경),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사도신경) 대목에서 ‘깊은 절’을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삼종기도의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부분에서 다시 절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육화 신비를 흠숭하며 무릎을 꿇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부활시기와 주일(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는 일어서서 기도하는데 이는 부활을 드러내는 자세입니다. 특히 부활시기에는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로 시작하는 부활삼종기도를 바칩니다. 부활시기가 아닌 주일에 서서 기도하거나 건강이나 다른 이유로 서서 기도한다면 이때는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부분에 깊은 절로 흠숭을 표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전례력 돋보기]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우리 신자 분들은 본명 축일을 맞으신 분이 있으면 축일 인사를 건네는데, 1년 중 가장 많은 축일 축하가 전해지는 날이 이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로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만큼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초기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기셨고 따라서 이 두 분을 수호성인으로 택한 분들이 많으시지요. 하지만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출신도, 살아온 과정도 무척 달랐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두 분을 한날에 함께 기념할까요?
복음서를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겁도 많고 의심도 많고, 예수님을 배신하기도 한 어쩌면 평범한 우리들 같은 친근한 제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놀라운 대답을 드리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교회의 반석으로 불림 받았으며, 하늘 나라의 열쇠도 받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상징이 열쇠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후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으뜸 제자답게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사도 2,32)이라고 담대히 설교했고, 그 결과 그 자리에서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에도 마치 예수님의 활동을 보는 듯 베드로는 중풍 병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살려 내기도 하며 초대 교회의 반석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말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베드로 1서를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박해가 심해진 로마를 떠나는 길에 만난 예수님이 당신은 베드로가 버린 로마로 가는 길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다시 용기를 내서 로마로 돌아가서 담대히 순교했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베드로가 사형 당하고 묻힌 자리에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습니다.
반면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가 아니었고, 예수님을 직접 뵌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현재 터키 지방 타르수스 출신이었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 받았습니다. 더구나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소아시아,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 익숙했던 바오로 사도만큼 그리스도교를 세계 종교로 확장시키는 역할에 적임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오로가 자신이 세운 공동체에 전한 편지들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복음 전파를 향한 열정,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을 신약 성경으로 읽는 이유이지요.
이러한 팔방미인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선교지는 로마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세 차례 전도 여행을 마치고 쓴 로마서에서 자신은 로마를 거쳐 에스파냐 선교를 희망한다고 밝혔지만(로마 15,23-24) 예수님은 그를 제국의 중심, 로마로 보내셨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게 고발 당했을 때 바리사이들에게는 바리사이의 전통으로 결백을 주장하고, 로마 총독에게는 당당히 로마 시민권자로서 황제에게 상소할 권한을 요구하는 흥미진진한 장면(사도 22장 이하)은 마치 예수님이 이미 바오로 사도를 로마로 보낼 계획을 다 가지고 계셨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결국 바오로는 죄인으로 로마로 압송되었지만 큰 죄가 없었기에 셋집에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이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사도 28,30-31) 그러다가 64년경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로마 남쪽 성밖에 바오로 사도의 참수터로 알려진 ‘세 샘(tre fontane) 성당’이 있는데 참수된 사도의 목이 세 번 튀었고 그곳마다 샘이 생겨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 바오로 대성당이 건설되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연결하는 끈은 바로 로마입니다. 두 분은 로마에서 마지막 활동을 하셨고, 로마에서 순교하시고 묻히셨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로마 교회는 두 분 사도를 같은 날에 함께 대축일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도 베드로 사도상과 바오로 사도상이 함께 있고, 성 바오로 대성당 제단의 양편에서도 베드로 사도상과 바오로 사도상이 함께 신자들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6월 29일에 화려한 불꽃놀이로 두 사도의 축제를 기뻐합니다.
교회의 두 기둥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통해 하느님은 우리 교회에 필요한 분들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사업을 해 나가심을 봅니다. 두 분 사도의 대축일을 축하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렇지만 하나의 믿음과 열정으로 나아가는 그런 신앙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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