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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등은 영친왕(왼쪽이 이등, 오른쪽이 영친왕)
황태자 책봉은 행운만은 아니었다. 이등박문은 황태자의 일본 '유학'을 요구했다. '유학'은 명분일 뿐 사실상 볼모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수학원(修學院: 대한제국 황족·귀족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면 될 것을 멀리 일본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냐"고 반대했지만, 이등은 위협과 설득을 번갈아 구사하며 기어이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성사시켰다. 1907년 말 태자태사(太子太師) 자격으로 영친왕의 유학길에 동행하면서 이등은 "매년 여름방학에 한 번씩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영친왕은 학습원(學習院: 일본 황족·화족 교육기관)과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를 거치며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이등은 영친왕(왼쪽이 이등, 오른쪽이 영친왕)에게 최고의 교사를 붙여 공부시켰다. 1909년 동경을 방문한 한국의 일본관광단 일행을 자기 저택으로 초대해 두 친손자와 영친왕이 함께 군사체조를 하는 모습을 보이며 소위 '일선(日鮮)융합'을 선전하기도 했다. 13세 소년 영친왕은 이등의 '특별한 대접'에 감춰진 정치적 음모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등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3개월 동안 상복을 입기도 했다.
애초의 약속과 달리 영친왕은 이등의 사망 이후에도 귀국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는 1911년 7월 모친 순헌황귀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처음 귀국을 허락받았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 황족 나시모토 친왕의 딸 마사코(方子)와 결혼했고, 일본군 장교(일본 육군 보병중좌 시절)로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40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영친왕은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광복을 맞았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돼 그들에게 동조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해 그의 귀국을 막았다. 1961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2년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으나, 이미 몸은 반신불수여서 들것에 실린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렸다. 일본으로 떠난 지 56년 만의 영주 귀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