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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지성(本然之性)
사람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심성이란 뜻으로, 지극히 착하고 조금도 사리사욕이 없는 천부 자연의 심성을 이르는 말이다.
本 : 근본 본(木/1)
然 : 그럴 연(灬/8)
之 : 어조사 지(丿/3)
性 : 성품 성(忄/5)
(유의어)
기품지성(氣稟之性)
천명지성(天命之性)
천지지성(天地之性)
성리학에서 인물의 성을 둘로 나눌 때 기질의 성에 대비되는 유교 용어이다.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도 한다.
맹자(孟子) 이후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 성선악혼륜설(性善惡混淪說)이 나와서 논란이 분분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장재(張載)와 정이(程頤)가 인물의 성을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본연의 성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기질의 성이라 하였다. 성선설은 본연성의 입장에서 본 것이요, 성악설 및 성선악혼륜설 등은 기질성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 뒤 정주학파에서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 곧 본연성으로서, 순선무악(純善無惡)하며 허령불매(虛靈不昧)하며 혼연전통(渾然全通)해 천지만물에 고루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 보고 있다.
천도(天道)의 운행으로 말하면, 본연의 체(體)는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이요, 그 용(用)은 춘(春)· 하(夏)· 추(秋)· 동(冬)의 사시(四時)이며, 인도(人道)의 심성(心性)으로 말하면, 본연성의 체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요, 그 용은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도심(道心)이니, 양심(良心)이니 하는 것도 그 근원은 본연성에 있으며, 삼강(三綱)· 사유(四維)· 오륜(五倫)도 본연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堯舜) 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본연성에 근거하여 나온 말이다.
유가에서는 다만 기질의 편색(偏塞)과 탁박(濁駁)에 구애받고 물욕에 가리워서 본심이 혼매(昏昧)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 본체의 영명(靈明)함은 결코 질식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러므로 정(靜)할 때에는 존양(存養)을 하고 동(動)할 때에는 성찰(省察)을 하며, 과욕(寡欲)으로 조존(操存)하고 성경(誠敬)으로 함양(涵養)함으로써 방심(放心)은 수렴하고 덕성(德性)으로 기질(氣質)을 승복시킬 때 본연성은 안존하게 되는 것이므로, 배우는 이는 이 점을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중기에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이 생기면서부터 이 본연성에 대한 정의에도 논란이 생겼다. 이간(李柬)은 형기(形氣)를 초월한 것으로 편전(偏全)이 없는 것을 본연성이라 명명하고, 기질로 인해 편전이 있는 것을 기질성이라고 규정해 양성(兩性)을 대립시켜 보려는 견해이었다.
이에 반해 한원진(韓元震)은 이른바 성삼층설(性三層說)을 내세워 이간이 말한 본연성을 일원지리(一原之理)라 명명하고 기질성을 본연의 성이라 규정하고, 본연성과 기질을 묶어서 기질의 성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천지만물이 다 음양지기(陰陽之氣)를 얻어서 질(質)을 이루고 태극지리(太極之理)를 얻어서 성(性)이 되는 것이므로, 성과 질은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서로 섞일 수도 없다"고 말하고, 그 섞일 수 없는 것에서 이(理)만을 가리켜 본연의 성이라고 하며 떨어질 수 없는 것에서 이기(理氣)를 겸해 말할 때 기질의 성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른 바 기질성이라는 것은 본연성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성은 하나일 뿐 둘이 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
결국 이간은 성과 기를 섞어서 볼 수 없다는 견지에서 본연성과 기질성을 갈라서 논했던 반면, 한원진은 성과 기는 서로 떼어서 볼 수 없다는 견지에서 본연성을 기질성 가운데 이의 일변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전자는 본연성에 중점을 두어 인물성이 같다고 주장하였고, 후자는 기질성에 역점을 두어 인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본연지성(本然之性)
이 성어는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심성이라는 뜻으로, 지극히 착하고 사리사욕이 조금도 없는 천부자연의 심성을 말한다. 성리학의 심성론에서 유래되었다. 천명지성(天命之性) 또는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도 한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사람의 성(性)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눈다. 주자(朱子)에 따르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천부자연(天賦自然)의 심성으로 지선(至善)이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은 타고난 기질과 성품을 가리키는데, 타고난 기질의 청탁(淸濁)과 편색(偏塞: 편벽되고 막힘)에 따라 선(善)하게도 나타나고 악(惡)하게도 나타난다.
이기론(理氣論)으로 말하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이(理)에 해당되고, 기질지성(氣質之性)은 기(氣)에 해당된다. 그런데 기질지성(氣質之性)은 고정불변 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수양에 따라 탁한 것(濁)을 맑은 것(淸)으로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유가(儒家)에서는 기질을 정화시켜 지선(至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을 회복하여 발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유가에서 이상으로 삼는 성인과 범인의 차이점은, 성인은 기질이 맑아서 본연지성이 잘 발현되는 반면에 범인은 기질이 탁하여 본연지성이 잘 발현되지 않는 데 있다.
서방의 학자들은 중국의 송, 명리학(明理學)을 가리켜 습관적으로 신유학(新儒學)이라 칭하였고, 중국 학계에서도 이를 용인함으로써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진(秦)나라 이전 시대의 유학을 원시유학(原始儒學), 또는 선진유학(先秦儒學)이라고 한다. 이후 유학사상은 관학(官學)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통치이념으로 부각된 한(漢), 당(唐) 시대에 이르는 동안을 한당유학(漢唐儒學)이라 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에 기초한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가르침인 선진유학 사상 자체의 논리만으로는 불교 및 도교의 거센 도전에 대응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신유학은 형이상의 문제를 깊이 천착(穿鑿)하였다. 신유학은 불교와 도교에서 취한 이론 형식들을 근거로 새로운 이론 체계를 확립하고, 다시 불교의 반인륜성과 도교의 반문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주자(朱子)가 집대성한 신유학의 중점 과제는 우주론(宇宙論)과 인성론(人性論)으로 집약할 수 있다. 주자를 비롯한 일군의 신유학자들은 자연과 사회현상을 리(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간 이해도 이기론(理氣論)에 바탕을 두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한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리(理)로서, 도덕적 본성이다.
반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氣)에 의해 형성된다. 이것은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본능이다. 성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사물의 이치를 끊임없이 궁리하고 인욕(人慾)의 발동을 억제하는 거경(居敬)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육신과 더불어 오욕(五慾), 칠정(七情)의 한계에서 벗어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길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했으면서도 주자를 비판했다. 주자는 공자(孔子), 맹자(孟子) 다음 가는 성인이다. 성인은 하늘의 뜻에 따라 적의(適意)하게 우매한 백성들을 깨닫도록 하는 사람이다. 주자는 중용(中庸)에 나오는 천명이란 말을 본연지성이라고 해석했다. 본연지성이란 불교의 선승(禪僧)들이 쓰는 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 원래부터 들어 있는 근본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불상을 조탁해 놓은 조각가에게 "어쩌면 이렇듯 아름답고 자비롭게 조탁했는가" 하고 묻자, 그 조각가는 "원목을 실어 왔을 때 이미 속에 불상이 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꺼내놓았을 뿐이다"고 말했다. 주자는 선승들의 말을 차용해, 인간의 착함(천명)은 우주의 한 알맹이인 인간속에 원래부터 들어 있었던 것(뜻)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천명을 하늘의 뜻, 그 자체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비가 혼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을 늘 반듯하게 가다듬는 것은 본연지성 때문이 아니고 하늘의 뜻(하느님)과 자리를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다산(茶山)이 천주학(天主學)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사람은 하늘의 뜻과 땅의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다산은 주장했다. 물 한 방울로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불 한 움큼으로 한 도시를 멸망시키기도 할 만큼 자연은 잔인하다. 한데 하늘의 참된 뜻은 강한 자의 힘은 부드럽게 하고 약한 자의 힘은 북돋워주려 한다. 다산은 냉혹한 정글의 법칙에 의해 굴러가는 잔인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정치라고 말했다. 원효(元曉)의 화엄(華嚴)을 깊이 읽을 일이다.
경제 한파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자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의 힘을 부드럽게 해 못 먹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다사롭게 포용하고 나누어야 할 때다. 우리들 삶의 궁극은 한 송이의 꽃이 돼 이 세상에 아름답고 향기롭게 장식되는 일이다. 군자는 도(道)를 근심할 뿐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즉 대저 마음을 기르는 것을 도라 하고, 소체(小體) 즉 몸뚱이 조차 능히 기르지 못하는 것을 가난이라 한다.
맹자(孟子)는 내 안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길렀던 사람이다. 그는 이 기운이 의(義)와 도(道)를 합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이 기운이 부족한 것이야 말로 걱정할만한 일이다. 이는 실로 물질적인 궁핍함보다 더 급한 일이다. 근심하는 바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생동안 고운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집에 걱정없이 살았다고 했을때 도(道)를 듣지 못하고 죽었다면 죽는 날 몸과 이름도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그 물질적인 것이 공작과 비취새, 범과 표범, 황새와 두루미나 거미 따위와 다를 것이 없다(즉 동물과 같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새벽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물질적인 만족을 취함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호연지기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군자가 볼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너무 깊어서 그들이 말하는 진(眞)과 망(妄), 유(有)와 무(無)의 상은 유가에서 말하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분별과 같은 말이다. 즉 가슴속에 진망유무(眞妄有無)를 분별하는 능력을 길러서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안다면 배고픔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한들 이 한 몸을 위해 노력하는 마음으로 깨달음을 위한 공부를 한다면 더 좋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산이 말하되 공부를 하려면 식견이 있어야 하는데 깨달음이 없다면 여기저기 이말 저말을 들으면서 우왕좌왕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되고, 귀가 얇아져서 의심만 많아지고, 배울수록 궁금증이 더해진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계를 위한 노력보다는 영혼의 각성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누구나 처음부터 되는 일은 없다. 차근차근 살피고, 곁에서 일깨워주면서 알아가는 것이다.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주희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며 다른 하나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본연지성은 인간을 비롯한 온우주 만물의 원론적 본성을 말한다. 따라서 본연지성은 태초로부터 영원히 순선무악(純善無惡)하다. 성선설이란 곧 본연지성이 선함을 말한다. 반면 기질지성이란 만물의 현실적 성격을 말한다. 기질은 각 사물마다 서로 다르다. 따라서 기질지성의 품격 또한 우주 만물이 각기 다르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순전히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 나뉜다. 본래 성리학이 말한 우주적 차원의 원리에는 우주의 물리적 질서와 도덕적 규율이라는 두 가지 맥락이 있지만, 주희 사상체계에서 중시되는 것은 물리적 질서보다는 도덕적 규율이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분은 이런 윤리적 특성이 반영된 독특한 우주론적 설명방식이다.
우주 만물이 저마다 다른 기질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주 만물은 도덕적 위계질서 속에 있게 된다. 우주 만물들은 인간, 동물, 식물, 무생물로 범주화된다. 인간의 기질지성이 가장 본연지성과 가까우며 그 다음 동물, 식물, 무생물 순으로 기질지성이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설명한다.
이황의 천명신도(天命新圖)를 보면 이런 위계적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머리가 하늘을 향해 있으므로 가장 기질지성이 맑고 깨끗하다. 동물은 머리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수평으로 걸쳐 있다. 개와 호랑이가 네 다리로 걷는 모습을 통해 이런 기질지성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물은 인간보다 기질지성이 탁하고 지저분하다. 반면 식물은 머리, 즉 뿌리를 땅에 처박고 있다. 하늘에 거스르고 있는 형상이다. 당연히 기질지성의 품격이 가장 뒤쳐진다. 무생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본연지성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은 채 탁하고 더러운 기질지성 뒤범벅이다. 도덕적으로 가장 열등하다.
자못 웃음을 자아내는 이런 설명을 성리학자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천명구도(天命舊圖)를 수정해 이황이 '천명신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헌데 이런 우스꽝스런 신화적 발상은 현실에서 대단히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만물의 도덕적 품성, 즉 기질지성이 다르다는 확고한 신념은 신분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순식간에 변질된다. 인간과 동식물 사이에 도덕적으로 넘사벽이 있는 것처럼 인간들 사이에서도 사농공상의 신분에는 넘사벽이 존재한다고 그들은 보았다. 양반과 천민이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인간과 짐승이 교미하는 것처럼 막대한 패륜이다.
한편 만물을 도덕적 위계질서로 파악하면서도 조선조 성리학자들은 폭포와 나무, 강과 산을 사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분은 현대 유전학의 성과에 힘입어 어느 정도 그 창의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본연지성이란 모든 개체에 DNA가 있음을 의미하며, 기질지성은 각 개체가 가지는 개별적 DNA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본연지성이 선하다는 테제는 DNA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명제로 대체되며, 기질지성이 도덕적으로 차이를 보인다는 테제는 개체마다 타고난 DNA의 배열이 생명체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명제로 대체될 수 있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분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순전히 성리학자들의 영감에 의해 제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창의적인 발상 가운데 과학의 힘을 빌려 그 이론적 정당성이 확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과학적 탐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철학책은 일종의 가설 모음집이며 과학은 이를 검증하는 탁월한 심판이다.
본연지성(本然之性)
개요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래의 성품으로 보편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가 성리학에서는 우주자연과 만물의 존재와 현상을 이(理)와 기(氣)로 설명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성이원론(性二元論)의 입장을 취한다. 이기(理氣)를 혼합해서 말할 때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하고 기(氣)의 섞임이 없이 이(理)만을 가리켜서 본연지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천지지성(天地之性)ㆍ천명지성(天命之性)이라고도 한다.
용어의 의미변화
인간 본성의 선악(善惡)에 대한 문제는 맹자(孟子)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의 성삼품설(性三品說)과 성인정탐설(性仁情貪說) 등이 대표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들이라 할 수 있다. 성(性)에 대한 이러한 논의들은 송대(宋代) 성리학에 이르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양면으로 나누어 보는 데까지 이르렀다.
장재(張載)는 정몽(正蒙) '성명(誠明)'에서 "형체가 생긴 뒤에 기질지성이 생기는데 그것을 잘 회복하면 천지지성이 보존된다"라고 하여 처음으로 성을 양분하여 보고 있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의 보편적 본성을 '천지지성'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지지성은 즉 본연지성을 의미한다.
그 후 정이(程頤)는 장재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다. 그는 '이정전서(二程全書)' 권18에서 "성은 불선(不善)이 없다. 불선이 있는 것은 재(才)이다.… 성은 하늘에서 온 것이고 재는 기에서 온 것이다"라고 하여 하늘에 근거한 무불선(無不善)의 성과, 기품(氣稟)에 근거한 유선유악(有善有惡)의 성을 상정했다. 정이의 성에 대한 이러한 구별은 종래부터 논의되어 오던 성에 대한 다양한 학설들이 제기해 온 문제들을 해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곧 성선, 성악, 성유선유악, 성무선무불선 등의 설들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과제를 본성과 기질성의 구별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곧 맹자의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欲)에 해당하는 것을 기질지성으로 이해함으로서 해소했다. 이것은 주자(朱子)에 이르러 보다 체계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는 '정몽'의 '성명'을 주(注)하면서 "음양(陰陽)의 기가 교운(交運)할 때 기로 인하여 생기는 일본만수(一本萬殊)를 기질지성이라고 하고, 태극(太極)의 본연지묘(本然之妙)이며 이일분수(理一分殊)에 있어서는 만수(萬殊)의 근본이 본연지성이다"라고 했다. 기질지성은 기에 의해 이루어진 각자의 개별적 성을 말하며, 본연지성은 존재에 내재한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태극, 곧 리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곧 일음일양하는 것을 도’라 하고, ‘계지자선(繼之者善), 곧 그것을 계승한 것을 선, 성지자성(成之者性), 곧 그것을 이룬 것을 성(性)’이라고 했는데, 주자는 천도(天道) 곧 태극의 생생지리(生生之理)를 인간이나 만물이 받아가지고 있는 것을 본연지성이라고 했다. (주자대전 朱子大全 정자서 程子書)
곧 일음일양하는 생생의 과정을 통해 인간과 만물이 발생하듯이 천지나 만물이 이 생생(生生)을 계속하거나 잇는 것은 천도의 측면에서 보면 명(命)이고 인간 자신으로서는 불가역(不可易)한 본연지성이다. 이것이 인간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한국에서의 해석
우리나라의 경우 이황(李滉)은 기질지성을 칠정(七情)에 배속시킴에 대하여 본연지성을 사단(四端)에 배속시켜 설명했다. 그는 퇴계전서(退溪全書) ‘답기명언논사단칠정제이서(答奇明諺論四端七情第二書)’에서 성을 본연과 기품의 두 가지로 나누는 것처럼 정(情)도 사단과 칠정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또 이기(理氣)가 발할 때 이(理)가 주가 되면 본연지성, 기(氣)가 주가 되면 기질지성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 대 칠정, 본연지성 대 기질지성으로 확연히 구분한 것으로 후에 이이(李珥)는 이를 비판했다.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그는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단은 칠정에 포함되고 본연지성은 기질지성에 포함된다고 했다. 선악의 가치문제에 있어서 그는 칠정가운데 선일변(善一邊)이 사단이고 본연지성이 될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이는 사단이나 본연지성을 초월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정(情)이나 현상적인 기질지성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원불교에서 의미
원불교에서는 ‘본연의 성품’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불교의 본래 마음과 유가의 본연지성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곧 불교의 본래마음으로서 성품은 ‘본연 청정한 성품이며 원만 구족한 성품’이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성품이라 하는 것은 허공에 달과 같이 참 달은 허공에 홀로 있건마는 그 그림자 달은 일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이, 이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 청정한 성품 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대종경 천도품 9)"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성품은 본연의 체(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2)이며, 마음의 근본(정산종사법어 무본편 1)으로 청정무애한 본래 마음이다. 성품은 성리학적 이기론(理氣論)에 따른 리만을 지칭하는 의미의 본연지성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으나,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원불교 사상의 전체 흐름에서, 특히 정산종사 사상의 기저에 성리학적 사유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다음의 내용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곧 성품을 "일념미생전이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다. 이 우주에 나열되어 있는 것이 성품 아님이 없다(한 울안 한 이치에)"고 하여 '중용'의 사상을 대입하고 있다.
중용의 천명지위성은 천명이 곧 성임을 단정하여 규정한 것으로 송대 성리학자들의 이기설에 의해 형이상학적 의미로 해석된다. 송대의 정이천(程伊川)은 "하늘의 측면에서는 ‘부여하는 것(命)’이요, 사람의 측면에서는 본성이다(이정유서 二程遺書 권18)"라고 하여 본연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또 소태산대종사가 '대종경' 수행품 16장에서 수양력을 얻어 나가는 두 길로서 기질수양과 심성수양을 제시하고 이들을 함께 닦아야만 완전한 수양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법문에서 이러한 점을 유추할 수 있다.
▶ 本(근본 본)은 ❶지사문자로 木(목; 나무) 아래쪽에 표를 붙여 나무의 뿌리 밑을 나타낸다. 나중에 나무에 한하지 않고 사물의 근본(根本)이란 뜻으로 쓰였다. ❷지사문자로 이미 만들어진 상형문자에 선이나 점을 찍어 추상적인 뜻을 표현하는 것을 지사문자(指事文字)라고 한다. ‘근본’이나 ‘뿌리’를 뜻하는 本(근본 본)자는 전형적인 지사문자에 속한다. 이미 만들어져 있던 木(나무 목)자의 하단에 점을 찍어 나무의 뿌리를 가리키는 本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本자는 나무의 뿌리 부분을 가리킨 지사문자로 나무를 지탱하는 것이 뿌리이듯이 사물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인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근본’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本(본)은 (1)자신(自身), 이의 뜻으로 쓰는 말 (2)영화(映畫) 필름 등의 한 편(篇)을 세는 단위(單位) 등의 뜻으로 ①근본(根本) ②초목의 뿌리 ③초목의 줄기 ④원래(元來), 본래(本來), 본디 ⑤근원(根源), 원천(源泉) ⑥본원(本源), 시초(始初) ⑦마음, 본성(本性) ⑧주(主)가 되는 것 ⑨바탕 ⑩자기(自己) 자신(自身) ⑪조상(祖上), 부모(父母), 임금 ⑫조국(祖國), 고향(故鄕) ⑬본, 관향(貫鄕: 시조(始祖)가 난 곳) ⑭그루(초목을 세는 단위) ⑮판본(版本) ⑯본(서화를 세는 단위) ⑰책, 서책(書冊) ⑱원금(元金), 본전(本錢) ⑲본가(本家) ⑳농업(農業), 농사(農事) ㉑근거하다, 근거(根據)로 삼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비로소 시(始), 뿌리 근(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끝 말(末)이다. 용례로는 사물이나 현상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성질을 본질(本質), 자기 바로 그 사람을 본인(本人),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중심이 되는 조직이나 그 조직이 있는 곳을 본부(本部), 신문 기사에서 일컫는 그 신문 자체를 본보(本報),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신문을 본지(本紙), 잡지 따위에서 중심이 되는 난을 본란(本欄), 시조가 난 땅을 본관(本貫), 사물의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는 부분을 본말(本末),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을 본래(本來), 근본에 맞는 격식이나 규격을 본격(本格), 본디의 마음을 본심(本心), 자기에게 알맞은 신분을 본분(本分), 애당초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뜻을 본의(本意),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을 본성(本性), 강이나 내의 원줄기를 본류(本流), 본디 그대로의 것을 본연(本然), 생활의 근본이 되는 주된 사업이나 직업을 본업(本業), 사물의 생겨나는 근원을 근본(根本), 사업의 기본이 되는 돈으로 이윤을 얻기 위하여 쓸 재화를 자본(資本), 사물의 근본을 기본(基本), 무대 모양이나 배우의 대사 따위를 적은 글을 각본(脚本), 금석에 새긴 글씨나 그림을 그대로 종이에 박아 냄을 탁본(拓本), 나라의 근본을 국본(國本), 원본을 그대로 옮기어 베낌 또는 베낀 책이나 서류를 사본(寫本), 원본의 일부를 베끼거나 발췌한 문서를 초본(抄本), 문서의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베낌 또는 그런 서류를 등본(謄本), 조각한 판목으로 인쇄한 책을 각본(刻本), 근원을 뽑아버림을 발본(拔本), 자기 집에 편지할 때에 겉봉 표면에 자기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쓰는 말을 본제입납(本第入納), 사람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심성이란 뜻으로 지극히 착하고 조금도 사리사욕이 없는 천부 자연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본디의 관념을 본유관념(本有觀念), 일이 처음과 나중이 뒤바뀜을 본말전도(本末顚倒), 본디 내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뜻밖으로 얻었던 물건은 잃어 버려도 서운할 것이 없다는 말을 본비아물(本非我物), 사람마다 갖추어 있는 심성을 본래면목(本來面目), 근본과 갈린 것이 오래 번영한다는 뜻으로 한 가문이 오래도록 영화로움을 본지백세(本支百世), 기본이 바로 서면 길 또한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뜻을 나타냄을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을 빼내고 원천을 막아 버린다는 뜻으로 사물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그 뿌리째 뽑아 버림을 이르는 말을 발본색원(拔本塞源),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다는 뜻으로 사물의 질서를 일컫는 말을 물유본말(物有本末), 어떠한 것의 근본을 잊지 아니함을 불망기본(不忘其本) 등에 쓰인다.
▶ 然(그럴 연/불탈 연)은 ❶회의문자로 燃(연)은 통자(通字), 肰(연)은 동자(同字)이다. 개(犬) 고기(月=肉)를 불(火)에 구워 먹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然자는 ‘그러하다’나 ‘틀림이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然자는 犬(개 견)자와 肉(고기 육)자, 火(불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글자의 조합으로만 본다면 이것은 개고기를 불에 굽고 있는 모습이다. 然자의 본래 의미는 ‘까맣게 타다’였다. 개는 가죽을 벗기지 않고 껍질째 불에 그슬려 익혀 먹는다. 그러면 껍질이 새까맣게 타게 되기 때문에 然자는 ‘까맣게 타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그러하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火자를 더한 燃(그을릴 연)자가 ‘그을리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然(연)은 ①그러하다, 틀림이 없다 ②그러하게 하다 ③명백하다, 분명하다 ④그러하다고 하다 ⑤~이다 ⑥듯하다 ⑦허락하다, 동의하다 ⑧불타다, 불태우다 ⑨밝다 ⑩그런데, 드디어 ⑪그러하면, 그리하여 ⑫그렇다면, 그러면 ⑬그러고 나서, 연후(然後)에 ⑭그러나, 그렇지만 ⑮그런데도, 그렇기는 하지만 ⑯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接尾辭) ⑰원숭이의 일종(一種)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모양을 자연(自然), 도리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당연(當然), 뜻밖에 저절로 되는 일을 우연(偶然), 겉 모양이 장엄하고 엄숙한 모양을 엄연(儼然), 알고 보니 정말이나 정말로를 과연(果然), 아득하여 분명하지 않은 모양을 막연(漠然),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를 천연(天然), 마음이 환하게 풀림을 석연(釋然), 침착하고 여유가 있음을 유연(悠然), 어떤 목적이 없이 되는대로 하는 태도가 있음을 만연(漫然), 그윽하고 멀어서 눈에 아물아물 함을 묘연(杳然), 갑작스러움을 돌연(突然), 확실히 단정할 만하게를 단연(斷然), 넓고 텅 빈 모양을 확연(廓然), 아주 정확한 꼴을 확연(確然), 그리 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음을 필연(必然), 고요하고 엄숙함을 숙연(肅然), 아직 정하여지지 아니함을 미연(未然),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크게 놀람을 아연실색(啞然失色),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함을 위연탄식(喟然歎息),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런 대로 묵인한다는 말을 의수당연(依數當然), 조용하고 적적하여 아무 소문도 없음을 적연무문(寂然無聞), 흥미를 잃어 가는 모양을 이르는 말을 흥미삭연(興味索然)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性(성품 성)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生(생; 풀이나 나무의 싹틈, 타고난 모양, 성)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마음(心)을 합(合)하여 성품을 뜻한다. 사람이 타고난 마음의 경향을 일컬음이다. ❷회의문자로 性자는 ‘성품’이나 ‘성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性자는 心(마음 심)자과 生(날 생)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生자는 초목이 올라오는 모습을 그린 글자로 ‘태어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태어나다’라는 뜻을 가진 生자와 心자를 결합한 性자는 ‘타고난(生) 심성(心)’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천성이 있다. 어떤 아이는 말수가 적고 얌전하지만 어떤 아이는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꼭 이런 비유가 아니더라도 性자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심성을 뜻한다. 워낙 원초적인 것을 뜻하다 보니 때로는 이성 간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性(성)은 (1)사람이나 사물 따위의 본 바탕 (2)만유(萬有)의 본체 (3)남성(男性)과 여성(女性) 또는 암컷과 수컷의 구별 (4)인도(印度), 유럽어(語)에서 명사(名詞), 대명사(代名詞) 따위의 문법(文法) 상(上) 성질(性質)의 하나. (5)성욕(性慾) 등의 뜻으로 ①성품(性品), 타고난 사람의 천성(天性) ②바탕 ③성질(性質), 사물(事物)의 본질(本質) ④생명(生命), 목숨 ⑤마음 ⑥만유(萬有)의 원인(原因) ⑦성별(性別) ⑧남녀(男女), 자웅(雌雄)의 구별(區別) ⑨모습, 자태(姿態) ⑩생활(生活) ⑪오행(五行) ⑫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이나 동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의 바탕을 성질(性質), 성질이 급함을 성급(性急), 성질 상의 경향을 성향(性向), 성질과 품격을 성품(性品),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성질과 심정을 성정(性情), 이성 사이에서 성적 관계를 맺음을 성교(性交), 어떤 물건이 지닌 성질과 능력 또는 기능을 성능(性能), 남녀 또는 암수의 구별을 성별(性別), 그것에만 있는 특수한 성질을 특성(特性), 개인의 천품으로 타고난 특유한 성격을 개성(個性), 급히 심해지지도 않으면서 쉽사리 낫지도 않는 병의 성질 또는 버릇이 되다시피 하여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상태나 성질을 만성(慢性), 이치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는 성품을 이성(理性),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굳어져 있는 좋지 않은 버릇을 타성(惰性), 사물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나 성질을 속성(屬性), 무엇에 알맞은 성질을 적성(適性), 급한 성질 또는 급히 일어나는 성질의 병을 급성(急性), 타고난 성품을 천성(天性), 사람된 바탕과 성질이나 성격을 품성(品性),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을 본성(本性), 세균 따위의 생물체가 어떤 약에 견디어 내는 성질을 내성(耐性),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성질을 음성(陰性), 성품이 고요하면 뜻이 편안하니 고요함은 천성이요 동작함은 인정이라는 말을 성정정일(性靜情逸), 사람의 본성은 여울물과 같다는 뜻으로 여울물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듯이 천성적으로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말을 성유단수(性猶湍水), 도를 통하여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성통공완(性通功完), 정신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슬피 통곡함을 이르는 말을 실성통곡(失性痛哭), 구름 같은 마음과 달 같은 성품이라는 뜻으로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운심월성(雲心月性), 사람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심성이란 뜻으로 지극히 착하고 조금도 사리사욕이 없는 천부 자연의 심성을 이르는 말을 본연지성(本然之性), 습관과 풍속은 끝내 그 사람의 성질을 바꾸어 놓는다는 말을 습속이성(習俗移性), 몹시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대경실성(大驚失性), 오래될수록 매워지는 생강과 계수나무의 껍질이라는 뜻으로 늙을수록 더욱 강직해지는 성품을 이르는 말을 강계지성(薑桂之性)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