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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리는 파리
[ 몽마르트르의 가난뱅이 음악가 에릭 사티 ]
20세기 초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연주하면서 입에 풀칠을 하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대음악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었습니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습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곡을 사용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나는 너를 원해 Je te veux 쥬 트 브>나 <짐노페디> 등.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는 1866년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925년 59세의 나이로 몽마르트르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사인(死因)은 간경변이었습니다. 독한 압상트주를 입에 달고 다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낭만과 개성의 몽마르트르를 대표하는 예술가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올라가는 여러 길 중의 하나
* 쉬잔 발라동과의 단 한 번의 연애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술집에서 처음 쉬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쉬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입니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사티는 자신의 무척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습니다.
* 쉬잔 발라동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쉬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였습니다. 사티가 쉬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쉬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위트릴로입니다. 그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지만 쉬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습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습니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사티의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습니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죠.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잔하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습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습니다.
* 쉬잔이 그린 에릭 사티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었고...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입니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요. 쉬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습니다. 쉬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라고...
결국 쉬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쉬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습니다.
* 몽마르트르 언덕길 중의 하나
[ 낭만과 예술의 고향, 몽마르트르 ]
몽마르트르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해발고도 130미터의 언덕을 이루고 있어 파리 시내 전경을 조감할 수 있습니다. 몽마르트르 일대는 마네,모네,고흐,로트레크,드뷔시,피카소,위트릴로,에릭 사티 등 많은 예술가들이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해서 당시 이들의 일화들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전설을 기억하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 현장을 찾기 위하여 일년 내내 이 언덕을 허덕거리면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은 순교자의 언덕(Mont des Martyrs)에서 유래되고 있습니다. 3세기경 파리 최초의 주교였던 생 드니가 언덕 아래 블랑슈 광장에서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로마군에 의해 순교하면서 생긴 이름입니다. 참수당한 그는 자신의 목을 들고 파리 북쪽의 생 드니까지 걸어갔다고 합니다.
몽마르트르 꼭대기에는 높은 돔을 가진 백색의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사크레 쾨르 성당이 우뚝 서있습니다. 사크레 쾨르(Sacre Coeur)라는 말은 성스로운 심장이라는 뜻으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성심성당>이 되겠지요. 이 성당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프러시아에 참패함에 따라 프랑스인들의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 사크레 쾨르 성당, 관광객들이 인사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크레 쾨르 성당 바로 옆에는 테르트르 광장이 있는데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분비는 이곳은 수십명의 화가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아 이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자신의 풍경화들을 그려 판매하고 있습니다.
대개 몽마르트르 언덕을 찾는 관광객들은 사크레 쾨르 성당의 웅장한 모습에 감탄하면서 시원하게 펼쳐진 파리시내를 감상하고 이어서 테르트르 광장에서 이들 화가들에게 자기 초상화를 그리게 하거나 하면서 몽마르트르 언덕을 내려가는 순서로 몽마르트르 순례를 마치곤 합니다.
* 테르트르 광장의 화가들
그러나 몽마르트르의 진면목은 사람들 시선과 발길이 미처 닿지않는 좁은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몽마르트르 일대는 지난 1백 수십년동안 수많은 보헤미안들이 살다간 ‘보헤미안의 정신적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이들 보헤미안들이 살았던 뒷골목과 집들을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한 것이죠.
* 보헤미안은 그 어원을 프랑스어 보엠(Boheme)에 두고 있습니다. 원래는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서 유랑민족 집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통적인 삶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는 시인과 배우,음악가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몽마르트르는 당시 유럽 각국에서 온 보헤미안 기질을 가진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오늘날에도 예술의 거리,낭만의 거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들 예술가들의 보헤미안적 삶과 사랑, 죽음을 이해 할 때, 비로서 몽마르트르 언덕의 진면목과 만나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 몽마르트르 언덕의 명소 ]
< 고흐의 집 >
고흐가 본격적으로 자기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남프랑스 아를로 가기 전 동생 테오와 함께 거처했던 집입니다. 고흐는 이곳에서 몽마르트르 언덕에 대한 여러 그림을 남겼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래에서 소개하지만 르누와르의 유명한 그림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에서 배경이 되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르픽 거리를 따라 쭉 내려오면 54번지에 있습니다.
<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포도밭 >
* 고흐가 그린 당시의 몽마르트르 언덕
고흐가 화폭에 담기도 했던 장소인데 아직도 일부가 남아있어 경이롭기도 했습니다. 파리 시내의 모든 포도밭은 도시화 과정 중에 모두 없어졌지만 이 포도밭만은 남았는데 이는 파리시에서 상징적으로 남겨 두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을이 되어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가 오면 파리 시장이 참석하는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나오는 포도주는 실제로 약 300병 정도의 적은 양이라고 합니다.
< 오 라핑 아질 술집 >
포도밭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 술집은 당시 피카소,르누와르,모딜리아니,로트레크,위트릴로 등의 화가들과 드뷔시,에릭 사티 등의 음악가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는 유명한 명소입니다. 보기에는 시골의 아담한 농가가 연상되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 라핑 아질(Au Laping Agile>은 날쌘 토끼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밤에는 가수들이 나와 우리 귀에 익숙한 옛날 샹송들을 들려줍니다. 반드시 예약을...
< 에릭 사티의 집 >
에릭 사티는 최근에 <짐노페디>, <나는 너를 원해(Je te veux)> 등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음악가입니다. 사티도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제2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야 현지에서 서서히 알려졌습니다.
사티의 집은 사크레 쾨르 성당 뒤쪽으로 돌아 내려오면 바로 cortot 거리 6번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독신으로 무척 가난하게 살다간 사티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집이었습니다. 사티는 당시 몽마르트 언덕 아래에 위치한 술집 <검은 고양이,Le Chat Noir>로 저녁에 출근하여 피아노를 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음악인이었는데 항상 검은색 모자와 검은색 정장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사티는 청중들에게 “내 음악을 구태여 귀를 쫑끗하고 들으려고 하지 말라, 분위기가 어수선해도 그냥 들리는 대로 편하게 들어라”라고 얘기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사티의 음악은 그냥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독특한 선율의 특징이 있습니다. 맨 아래에 사티의 <Je te vous,쥬 뜨 부>를 올려 놓았으니 감상들 바랍니다.
< 물랭 드 라 갈레트 >
* 르누아르의 그림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르누와르가 그렸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의 무대가 되는 장소입니다. 지금은 카페로 바뀌어 있는데 그림으로 보면 상당히 넓은 장소인데 안에 건물들이 들어서서 좁게 보여지더군요.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lette)>는 19세기 말경 파리지앵들로부터 사랑받던 무도회장으로, 일요일 오후가 되면 젊은 파리의 연인들이 모여들어 햇빛을 받으며 춤과 수다를 즐기던 장소였습니다. 르누아르는 이곳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하여 근처의 코로가(街)에 아틀리에를 얻고 1년 반 가까이 매일 이곳을 드나들면서 수많은 스케치와 습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120호나 되는 대형 캔버스를 아틀리에에서 몽마르트르의 무도회장까지 매일 가지고 가서 현장의 정경을 직접 묘사하였다고 합니다.
초여름의 햇빛이 나무 사이를 비추는 서민적인 야외 무도회장에서 무리를 이룬 젊은 남녀들이 춤과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의 다양한 동작들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명암을 쓰지 않고도 햇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창조해 내는 르누아르의 기법이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입니다.
< 피카소의 작업실, 세탁선(Bateau Lavoir) >
* 세탁선 앞에서 한장 찰칵
몽마르트르 언덕을 뒤편으로 한참 내려가면 피카소의 명성이 알려지기 전 젊은 시절 그가 작업했던 집 <바토 라부아>라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 작업실은 피카소 뿐만 아니라 브라크, 모딜리아니 등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세탁선>이라는 이름은 이 집이 당시 세느강에서 세탁을 전문으로 했던 배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렇게 불리워졌다고 하네요.
이 시대의 피카소의 그림을 <청색시대>라고 부릅니다. 청색을 많이 사용해서 그랬겠지만 아무래도 스페인에서 처음 와서 알려지기도 안했지만 무척 가난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런 색조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겠죠.
< 파리 최고의 카바레, 물랭 루즈(Moulin Rouge) >
파리 최고의 카바레 <물랭 루즈>는 1889년 10월 5일 지금의 피갈지역 지하철역 근처에 문을 열었습니다. 때마침 열리는 파리 세계박람회에 맞추어 개장하였는데, <물랭 루즈>의 개장을 이른바 벨 에포크 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벨 에포크(La Bell Epoque)란 ‘좋은 시대’라는 뜻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습니다. 예술·문화가 번창하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을 한 신사 숙녀가 넘쳐흘렀습니다. 물랭루즈와 레스토랑 맥심으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꽃의 파리를 이루었다. 이와같이 1900년대 초의 파리를 아는 사람들은 한없는 애착심을 가지고 이 시대를 ‘좋은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벨 에포크에 관하여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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