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50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l9GXLHTKIY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즐겨 찾는 단골 수로 낚시 포인트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유히 수면 위를 날아다니던 백로 한 마리가 수명을 다했는지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참 거시기 했습니다.
숨결이 끊어진 생명체를 보셨습니까? 목숨을 다한 동물을 보셨습니까? 뻣뻣합니다. 끔찍합니다. 참혹합니다. 악취가 새어 나옵니다. 거기에 더 이상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가능성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아침을 맞이했다는 것은 새 출발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20장 38절)
산 이들을 위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이 아침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새 생명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노라. 어제를 잊고 새롭게 살아가거라. 죄로 얼룩진 과거는 내게 모두 맡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 어떤 모습이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하단다. 살아있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내 기쁨이고 내 희망이며 내 행복이란다.”
숨 쉬고 있다고, 목숨 붙어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참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죽어야 가능합니다. 알량한 내 자존심에 죽고, 평생 따라다니던 죄책감에 죽고, 어두웠던 지난 방황의 날들에 죽고, 오랜 상처에 죽고...
때로 의구심이 들 때도 많습니다. “오늘 내 삶이 이토록 구차스러운데, 오늘 내 인생길이 이토록 가시밭길투성이인데, 이런 내 삶이 대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 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 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 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질 하루하루가 시련과 상처투성이뿐일지라도, 기꺼이 견뎌내고 이겨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런 부활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또 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앞에 진정 살아 있는 자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하느님 앞에 있다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_dsrjkxoNZs
++++++++++++++++++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들입니다. 이들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집착하는 것을 잃기 싫어서입니다.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사두가이들을 피터 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라 여기고 싶습니다. 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의 대명사입니다. 피터 팬은 자신이 성장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말하는 부모의 대화를 듣고 집을 도망쳐 어린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들어오기를 초대합니다. 왜냐하면, 혼자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도 160cm에서 성장이 멈추었으며 결혼을 해서도 부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옆집의 어린이들을 좋아했습니다. 어린이들은 결국 전쟁터에 나가서 죽거나 물속에서, 혹은 기차에 뛰어들어 죽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 어린이들이 그렇게 비극을 맞은 것이 배리의 탓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가 더 집착하고 사랑한 아이들부터 그렇게 죽었습니다. 자라야 하는데 멈추고 싶은 마음은 현세주의자라기보다는 실제로 현실도피자입니다.
제임스 배리가 그렇게 어린이들에 집착하였던 이유는 그의 삶이 어린 시절에 머물고 싶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배리의 형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 사고로 형이 사망합니다. 어쩌면 배리는 형이 죽은 탓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고 여겼던 것 같고 어머니도 매일 눈물로 큰아들만 찾았습니다.
어느 날 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데이비드 너냐?” 하고 물었습니다. 배리가 “저, 배리에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배리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렇게 그의 성장은 멈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리는 “나는 형이 죽은 나이 13살이 되면서부터 일부러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은 마치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그 생각만 하게 된 수전노처럼 어머니의 관심에 대한 집착만 남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배리는 형의 흉내를 내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진짜 배리의 모습은 끝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아이들도 사랑을 갈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배리의 집착에 시달리며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배리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태아의 부활은 무엇일까요? 태어남입니다. 태아는 어머니 태중에서 양식을 먹고 보호를 받습니다. 내가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말이고 성장한다는 말은 언젠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로 태어날 일이 없으면 내 손으로 양식을 벌어먹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부활은 무엇일까요?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어린이들도 양식을 먹습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양식을 준다는 말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야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어린이로 남으려고 하는 현세주의자들은 현실도피자입니다.
어른이 되면 양식이 필요 없을까요?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을 버텨도 사랑을 먹지 않으면 4일만 지나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는 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태아는 어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도를 통해 사랑의 양식을 먹으며 그것이 없으면 살 힘이 없음은 압니다.
부활을 믿고 싶으면 이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부활할 것임을 직감합니다. 여러 번 해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피조물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창조자가 주는 양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양식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현실도피자입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영화 ‘암살’(2015)에서 이정재는 몸에 총알이 7개씩이나 박히고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일본에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는 김구 선생 밑으로 들어가 정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본에 팔아넘겼습니다. 김구 선생이 점점 의심하자 그는 자신의 동료들도 죽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독립투사가 희생됩니다.
하지만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반민특위 법정에 세워졌고 증인들은 죽어갔습니다. 독립은 했지만, 일본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던 것입니다. 그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죽이고자 했고 죽였다고 믿었던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작은 골목길에서 이런 마지막 대화가 나옵니다.
“안오균?...!”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16년 전인가?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고 안 믿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라 이 세상에서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고 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야만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믿는 이들은 독립투사처럼 삽니다. 문제는 부활이 있고 난 뒤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먹어야만 산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다면 성장하여 부활하란 뜻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현세주의자로 살다가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부활은 성장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0,27-40 :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않는 특별한 분파였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던 사두가이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모여들었다.
이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22,29-30)고 하셨다. 하느님의 권능은 너무나 크시다.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4-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써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장차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가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인간이다. 이러한 삶을 살도록 결심하며 기도하자.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삼성 그룹을 창업한 고 이병철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천주교 사제에게 24가지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은 재물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질문은 성공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질문은 권력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질문은 죽음, 신, 종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 차동엽 신부님은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에서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답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얻었지만, 원하는 것을 가졌지만 죽음 앞에서 성공, 권력, 명예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은 후에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우리는 ‘사필귀정, 인과응보, 회자정리’라는 말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기 마련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에는 상응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만남은 헤어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과 비슷합니다. 마치 땅 위를 기어 다니던 애벌레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같은 것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생명의 연속성에서는 같은 면이 있지만, 그 기능과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식과 기준으로 부활이후의 삶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삶이 또한 부활이후의 삶에도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태양은 혼자의 힘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비나 구름 그리고 어둠과 함께 있을 때 빛은 비로소 빛이 된다. 사막의 모래알을 비출 때 태양은 저주지만 풀잎 이슬 위로 쏟아지면 축복이다 태양이 이슬에 젖는 순간마다 태양빛은 새로워진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밤을 통해서 새벽의 빛을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홍수를 주신 것이 아니라 홍수로 인해 아름다운 무지개를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하여 아름다워지는 생명을 주신 것이다. 태양은 흑점의 어둠이 있어 빛나는 것이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예쁘고 깨끗한 모습으로 태어나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평화롭게 동동 떠다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은 죽기 전의 마지막 모습으로, 허리는 굽어서 지팡이를 짚고 머리는 호호백발에 이는 전부 빠진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부활하라면 아마 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담이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들은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고, 지금의 교회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회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신앙은 부활 신앙에 근거하며 신자들은 이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삶이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비웃으며 성경을 근거로 부활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 중 신명기 25장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낳은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 (신명25,5-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루카20,35)라고 말씀하시며 육신 부활의 좋은 증거로 하느님께서 선조들과 맺으신 계약을 제시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을 하고, 또 그렇게 믿으며 살았을까요? 우선 사두가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우리는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들은 유다교의 대제사장과 고위 성직 계층의 직책을 독점하는 상류 지배층, 귀족층 그룹으로,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며 영적인 존재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직위와 재산을 독점한 기득권자들이고 이를 유지, 확장하기 위해서 친 로마적이며 반민족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수락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했지요.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외세와 결탁하여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어도 부와 권력을 독점한 채 지극히 현세적인 삶만이 모두인 양 살면서, 현재에서 잘 사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기에 하느님의 심판도 믿지 않았으며 현세에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신앙, 하느님의 심판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며, 당연히 그것을 부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마카베오기 하권은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믿음과 희망을 지킨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일곱 아들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미래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부활에 대한 분명한 선언을 한 넷째 아들은 자신과 자신을 죽이는 왕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부활에 대한 인식에 있음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이 되자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2마카7,14)
하느님을 믿으며 죽어가는 이들의 부활 신앙은 인간적인 아쉬움,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온갖 불가능을 뛰어넘어 영원한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부활 신앙은 현실의 고통을 이기며, 모든 시련을 극복하는 힘을 주었습니다.
마카베오가 전하는 한 가족의 삶은 부활을 믿는 자들의 삶이고,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삶은 부활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대조적인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믿음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보게 됩니다. 분명히 입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처럼 현실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으며 권력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삶은 분명 부활을 믿는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지요.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현세를 살면서도 영원한 것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11월 위령 성월은 우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근본적인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사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터득해 갑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만, 그 체험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들은 동물들과 달라서,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이라도 독서나 학습 등의 간접 체험을 통해서 익혀 나가고, 이 간접 체험은 우리 삶의 질적 차원을 완전히 상승시켜 놓았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독서와 학습을 통해서는 세상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신앙을 통해서는 부활과 하느님의 나라라는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 나라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간접 체험을 통한 삶의 질적 상승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원의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질문은 역시 이 현세의 삶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삶과 죽음, 인연과 악연 등의 고통이 없는 온전한 기쁨의 세계입니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리 큰 감동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부활은 소생과 다르다.>
예수님의 그리 길지 않을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복음에 아주 드물게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부활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항자로서 잘 알려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록된 율법, 즉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여 모세율법의 자구(字句)를 고집하였으므로, 바리사이들이 중시하는 구전의 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의적으로는 영혼의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 및 천사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마르 12,18; 루카 20,17; 사도 23,18), 오직 부유한 평안만을 추구하였다.
실제로 사제들을 포함한 부유층과 귀족계급들이 이에 속하였고(사도 4,1; 5,17), 로마인의 지배까지도 평화와 복지를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환영하였다. 따라서 예수에 대하여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격한 증오를 표시하여 예수를 단죄하고 처형, 사도들을 박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실로 극단적인 예를 들어 예수를 곤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아들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의 아내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대를 잇게 하는 수혼법이다.(신명 25,5-10; 창세 38,8)
그러나 사두가이파들의 맹점은 내세를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한 데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을 소생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선 죽은 후에 맞이할 새 세상이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실제로 일어날 일은 우리의 상상 밖이다.
내세란 현세의 모든 생명질서가 무너지고, 죽음 자체가 완전히 극복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내세의 부활은 이승의 차원이나, 죽었다가 소행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세의 질서, 철저한 시간과 공간, 즉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우리가 부활의 차원의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져 있으나 하느님에게는 오직 현재의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한다.
이를 일컬어 ‘순수현재’ (pura praesentia)라고 한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다면 과거가 있는 것이고, 끝이 있다면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요, 하느님 또한 그들의 하느님이시며,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탈출 3,6)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즉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섬길 수 없으며, 오직 산 사람만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살아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사하시는 것이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그것은 영적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 22,39-40).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아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며,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게 하소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이 되게 하소서.
생명의 끝이 아니라
씨앗이 죽어 열매를 맺듯,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게 하소서.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b)
<부활의 자격!>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후사를 잇기 위한 수혼법의 예로 한 여자가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루카20,33)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20,35-36.38)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모든 이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자들에게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지금부터 부활의 자격을 갖춘 이들의 하느님',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있고, 저 세상에서도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올바르게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큰 은총이 바로 '이제와 영원한 생명과 부활'입니다.
이 큰 은총을 얻기 위해서 얼른 '필요한 자격을' 갖춥시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부활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굳게 희망하면서',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 방식대로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방식대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제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위하여 화이팅~~~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음 이후>
루카 20,27-40 (부활 논쟁)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죽음 이후>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지만
죽음 이후의
삶을 믿습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지만
죽음 이후의
삶을 희망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믿기에
죽음 이후의
삶을 희망하기에
죽음을 향한
삶을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흉악 범죄자들이 종종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합니다. 그런데 이 범죄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쓴 글이나 그들이 하는 말에는 거의 ‘나’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라는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우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 함께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사회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생각하고 바라볼 때 많은 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만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고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점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제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되는 길도 열립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부활했을 때, 이 일곱 형제 중에서 누가 형수의 남편이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런 곤란한 상황을 하느님께서는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당시 과부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보살펴야 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사두가이파들은 편협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만 맞다는 생각을 가지면 닫혀 있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 집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
<나이 듦>
나이 듦을 확실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 멀리 건널목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고서도 힘들어 뛸 수 없을 때, 약병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의 처방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주름이 낯설어 보일 때, 무엇보다 “신부님도 이제 늙었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렇다고 나이 듦이 싫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 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이 든 내가 젊었을 때의 나보다 분명히 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화도 잘 내지 않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기다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지난날보다 분명히 성숙해진 ‘나’이기에 지금이 좋습니다. 과격한 운동을 할 수 없어도 걸으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암기력이 예전만큼 좋지는 않아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쳤던 젊은 날이라면, 이제는 사랑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늘 좋은 순간만을 선물해주신 주님의 사랑에 오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 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산 삶이 기억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빛, 부활의 희망, 희망의 천국>
-“죽음은 새 새명의 시작입니다”-
“주님,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시편9,3)
요즘 거의 한달 이상 아침 수도원 산책때 마다 부르는 ‘바다’라는 옛 동요 제1절입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요즘 거의 한달 이상 저녁 수도원 산책 때마다 부르는 ‘바다’라는 옛 동요 제2절입니다.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위령성월慰靈聖月 11월은 희망성월希望聖月이자 성인성월聖人聖月이라 언급했던 일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은 우리 모두 성인이 되기를 소망하며 지내는 희망성월이자 성인성월이요 이 또한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입니다.
지옥과 천국을 정의합니다. 지옥과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하느님을 등질 때 지옥이고, 반대로 희망의 하느님을 향할 때 천국입니다. 똑같은 천국에서 하느님을 등지면 지옥이고, 똑같은 지옥에서 하느님을 향하면 천국입니다.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 죄이고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 지옥과 천국은 선택이자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Becoming Love”(사랑되기),
이번 ‘토마스 머튼의 삶과 영성’을 주제로 한 연피정 모토였습니다. 줄줄이 생각나는 소망들이었습니다.
“Becoming Faith”(믿음되기)
“Becoming Hope”(희망되기)
“Becoming Truth”(진리되기)
“Becoming Good”(선善되기)
“Becoming Beauty”(아름다움되기)
이런 존재론적 변화라면, 영적여정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이,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을 믿는 자들인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소망일 것입니다. 단적으로 “Becoming God”(하느님 되기), “Becoming Jesus”(예수님 되기)가 궁극의 희망이자 소원인 것입니다. 이런 희망이 생생할 때 행복한 선종이요 죽음은 새 생명의 시작이 됩니다.
이런 희망이 생생할 때 참으로 넉넉하고, 홀가분하고,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초연한, ‘텅 빈 충만’의 행복한 가을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만추의 가을이 되어 모두가 단풍으로 물드니 모두가 초연한 아름다움에 향기입니다. 봄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와는 비할 수 없는 가을 단풍 특유의 초연한 아름다움과 향기입니다. 만추晩秋의 일출日出도 아름답지만 만추晩秋의 일몰日沒의 평화로운 아름다움은 그 격格이 다릅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답은 이런 하느님께 대한 궁극의 희망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죽음에 대해 많이 말해도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알 수 없는 최종 인생 시험이 죽음의 날자입니다.
하루하루가 죽음을 준비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잘 살았어도 무지와 허무중의 죽음이라면, 슬픔과 회한 가득한 절망의 죽음이라면 얼마나 그 인생 억울하고 허망虛妄하겠는지요! 바로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의 주인공 안티오코스 임금의 최후의 죽음이 그러합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가네.”
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후회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회개하라 유예되어 있는 날들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젊고 힘있을 때부터, 아니 미룰 것 없이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희망나무, 하느님 꿈나무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 최상의 선물은 행복한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천사와 부활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이라면 결코 선종의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처럼 우리는 천사도 부활도 믿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영적 바리사이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부활의 희망이 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희망의 실체를 명쾌히 밝혀 주십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그 생생한 희망의 실체입니다. 그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미 이런 부활의 희망을 앞당겨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우리에게는 끝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이자 새생명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죽음이 가까울수록 하느님을 만날 귀가의 희망과 기쁨에 설레이는 노년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 위령 감사송 대목이 우리의 영원한 참 희망을 북돋웁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희망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도록 힘을 주십니다. 사실 날마다의 이 은혜로운 미사보다 더 좋은 선종의 죽음 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저는 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아
당신의 모든 업적을 알리렵니다.”(시편73,28).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루카 20,33)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두가이 사람들의 얼토당토 않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에 이스라엘의 결혼 관습이 부활 이후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따지듯 묻습니다. 부활 신앙의 모순을 주장하고 싶은 듯 보이지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5-36)
이 말씀은 우리의 부활 신앙을 선명히 담고 있습니다. 부활 이후의 삶은 이 세상의 육적 질서를 뛰어 넘기에 혼인과 자손 번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정욕과 생로병사는 이 지상에서 육체를 껴입고 있을 때의 일이니까요. 믿음으로써 죽음을 지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간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점점 더 닮아가서, 순수하고 담백하며 정결하고 조건 없이 헌신하는 사랑이 되어갑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우리가 하느님을 오해하게 되는 건 많은 경우 그분을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저 멀리 가상 세계에 따로 떼어 놓고 그곳에서 영들이나 죽은 이들만 상대하신다고 여기는 거지요. 하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으며 이제와 같이 영원에서도,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그분 현존 안을 거니는 신앙인에게 생과 사는 연장선 안에 펼쳐져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이는 살아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라도 그분에게서 존재를 받아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는 모든 이가 그분 눈 앞에 생생히 살아 있고, 인류 최대의 난제인 죽음도 그분과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에 치욕을 안겼던 한 악인의 죽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1마카 6,12-13)
잔혹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정신, 관습을 파괴하던 안티오코스는 목숨을 걸고 항쟁하는 유다인들에게 연이어 패배합니다. 결국 그 충격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지요. 그는 죽음 앞에서 자기 만행을 떠올리며 지금 겪는 고난의 이유를 찾아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짓밟음으로써 하느님을 대적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민족들은 자기네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네가 쳐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네.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화답송)
세상 권력과 재물, 명성과 자기 영광을 좇던 이에게는 생전 자기가 추구하던 욕망과 정욕, 탐욕이 덫이 되어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신 듯 달려온 삶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달리게 되겠지요. 살아 계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업신여겨 생명이신 분께 죽음을 선고했으니, 어쩌면 스스로가 택한 결말입니다.
그들에게 억눌린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에게는 "영원"이 주어집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께 영원히 소중하니까요. 지상의 가난과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을 바라며 소박하고 조촐히 자신을 내어놓은 그들은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더 이상 폭력도 착취도 눈물도 죽음도 없는 곳에서 하느님 앞에 영원히 생생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의 삶을 집착도 회피도 아닌 충실한 수용으로 껴안고, 눈을 들어 영원을 희망하며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믿고 희망하며 생명을 충만히 이어나갑시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영성체송)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Z9S2zeQs8k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가슴 뛰는
감사의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부활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누구의 것이냐며
지극히 인간적인
물음만을 던지게 됩니다.
삶이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제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 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과
무관하지 않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고귀한 모습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더없이 소중한
우리의 만남입니다.
우리의 혼인을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를
누구의 아내로만
축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삶의 참뜻을
우리는
참된 사랑으로
깨닫게 됩니다.
부활의 삶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의 삶으로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로 이끕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소중한 만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