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로 둘러싸인 집
성혜영
툇마루에 놓인 동생 기저귀를 슬쩍 가지고 나간 여섯 살 소녀.
냇가 한쪽에 자리 잡고 기저귀의 똥을 털어내며 된장 같다고 생각했다. 바로 아래 냇물에서 빨래하던 아낙네들이 서로 웃으며, 뭐라고들 했다.
“얘야, 똥 기저귀를 바로 위에서 빨면 어떡하니? 요 아래에서 빨아야지”
그 일이 무안했던지 두 번 다시 냇가로 기저귀 빨러 간 기억은 없다. 한 번의 기억인데,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그 냇물에선 아이들과 곧잘 송사리도 잡곤 했다. 위아래로 길게 흐르는 그 물줄기는 빨래터도 되고, 물놀이장도 되었다. 집 옆에는 구름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동네 아이들과 떼를 지어서 ‘구름산’에 올랐다. 길가에 난 산딸기를 따 먹는 재미가 오롯하다. 그때는 ‘뱀딸기’라고도 했다.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 오빠는 그러지만, 나는 안 속아 /
내가 따러 갈까 봐 그러는 거지
우리는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다시 산을 올랐다.
한참을 오른 후에 바위에 붙어있는 이끼를 돌로 문대어 손톱에 발랐다.
진홍색은 아니지만, 흐릿하게 물이 들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시흥 소하리는 내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 우리 집안의 선영도 광명에 있다. 종가집인 우리 할아버지 위세가 대단하여 시쳇말로 남의 땅 안 밟고 다닌다고 했다. 구름산조차도 할아버지 것이었다고 했다. 그곳은 우리 육남매와 사촌들의 천국이었다. 우리 집 둘레와 구름산 아래 언덕배기에는 감나무가 빽빽했다.
늦가을이면 우리 집안 곳곳은 감으로 점령당했다. 장롱 서랍까지 감이 들어앉았다. 서랍에 모셔져 있는 감이 저절로 홍시가 되면, 한 개씩 작은 종지에 담아 숟갈로 퍼서 먹는 맛은 꿀맛이다. 천연 감기약이라고도 하는 홍시를 많이 먹고 자라서인지 나는 감기로 고생한 기억이 없다. 떫은 땡감은 침 담그기를 해서 삭혀 먹었다. 방마다 항아리에 감을 넣고 따뜻한 물에 소주, 소금을 넣어 담요로 며칠간 덮어두면 맛있는 침시가 되었다.
여섯 중 셋째인 나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영등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시흥에서 영등포에 있는 은행까지 출퇴근을 하셨다.
이사한 집은 일본식으로 지은 은행 사택이었는데, 얼마 후 그 집을 산 날엔 축제를 벌였다. 크고 넓은 우리 집은 양쪽 높은 축대 사이 대문으로 가려면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곳은 동네 아이들 놀이터였다. 우리 집 축대 위로 동네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선 채 물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인가, 고아원 인가? 웬 아이들이 이렇게 모여있누”
그 집 울타리는 복숭아, 아카시아로 둘러 처져 있었다. 밭에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심어 감자 캐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엄마는 육 남매가 먹게끔 감자, 옥수수, 찐빵 등을 한가득 쪄 놓았다. 여섯 그릇에 나누어놓고 우리가 학교에서 오기를 기다리셨다.
그 시절 간식으로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셈이다. 부모님도 사이가 좋으셨고 우리들도 우애가 좋아서 물 흐르듯 별 일없이 행복하게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대낮인데 아버지도 계시고, 집안 분위기가 묘했다. 막내가 디프테리아로 갑자기 먼 길을 떠났다고 했다. 간밤에 아파서 새벽에 병원에 갔는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언니를 많이 따르고 좋아해서 내가 학교에 가려면 몰래 가곤 했었다. 처음 겪는 슬픔이었다. 세 살배기 막내딸이 떠난 그 날 엄마는 무당을 불렀다.
울타리에 있던 복숭아 나뭇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무당은 빙의된 듯 떠들어댔다. 동생으로 빙의된 무당은 내게 나뭇가지를 갖다 대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행위가 좋은 곳으로 가라는 ‘씻김굿’이었던 것 같다. 막내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아이가 다섯인데도 퀭했던 우리 집.
또다시 엄마의 배는 불러오고 학교에 다녀오니 예쁜 아기가 엄마 곁에 누워있었다. 예쁜 그 아기는 내가 지금 제일 소중하게 꼽고 있는 우리 집의 막내 여동생이다. 다시 아들 셋, 딸 셋의 육남매가 되었다. 나보다 딱 열 살 아래 막둥이를 아버지는 늘 너희 다섯하고 못 바꾼다는 말로 예뻐하셨다. 엄마만 남겨둔 채 칠십 넘기고 서둘러 가버리신 우리 아버지.
인정 많은 아버지는 젊을 때 추운 겨울 퇴근길에, 풀빵을 몽땅 사오시곤 했다.
빵을 다 팔아야 그 사람이 집에 갈 수 있다며... 술이라도 한잔하신 날엔 허리에 여섯을 매달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다니며 기차놀이를 했다.
추억이 많은 곳이어선지, 기가 센 큰집이어선지 감나무와 복숭아가 있는 두 집은 오십이 넘도록 꿈에 자주 등장하던 집이기도 했다.
2021. 한국산문 1월호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