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명군의 자질을 갖추었으면서도 폭군으로 몰린 광해군의 생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재위 15년간 이룩한 업적과 백성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만약 반정이 없었더라면 성군이 될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 때문에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은 조카인 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화도에 위리안치되는데 그곳에서 폐비가 된
유씨와 폐세자 내외를 잃습니다. 폐세자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촌인 인조로부터 자진을 명령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폐세자비 역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리고 아들 내외를 잃은 폐비 유씨마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남은 광해군은 청나라의 침략과 맞물려 이리 저리 옮겨지다가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 때가 1641년 (인조 19년) 7월 1일, 향년 67세였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광해군이 과연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었을까요.
그가 세자로 있던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파천한 부왕 선조를 대신해
임금의 역할을 나누어 수행(分朝)하며 전란에 휩싸인 민심을 다독이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에게 저항하며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런 그가 반정으로 폐위된 것은 광해군 개인으로나 조선이란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정세력이 주장한 반명 친청 폐모 살제(反明 親淸 廢母 殺弟)) 중 폐모 살제의 경우는 반 인륜적 요소가 있기에
이 부분은 광해군의 실수라고 역사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광해군의 뜻이었겠느냐를 살필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승하한 후 맞이한 왕비가 인목왕후이고 그 인목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가 영창대군입니다. 광해군이 이미 세자 책봉을 받은 후에 일어난 일련의 변화는 광해군을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생각지도 않은, 그것도 정비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영창대군을 총애하는 부왕의 의중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권을 잡은 소북파에서는 광해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에서
비록 세자의 몸이라고는 하나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광해의 처지가 어떠하였을까. 참으로 막막하고 외로운 처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영창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선조가 살았더라면 광해는 아마 왕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던 차에 1608년(선조 41년)선조가 57세로 승하하면서 16년 동안 왕세자로 지내던 광해가 마침내 조선의 15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이 때 광해군의 즉위를 도왔던 대북파의 이이첨 일파는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했던
전 영의정 유영경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한 뒤 그다음 해인 1614년(광해 6년) 3월 19일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영창대군을 증살합니다. 증살이란 방에 불을 때어 죽이는 것인데 영창대군은 뜨거운 방에서 앉지도 못하고
창살을 부여잡은 채 울부짓다가 죽었고 이이첨과 정항은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합니다. 또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처형하였고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하여 서궁에 유폐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광해군이 직접 지시하였다기보다는 정권을 잡은 대북파의 관리들이 임금의 윤허 없이 한 것으로
광해군은 끝내 영창대군의 사사나 인목대비의 폐비를 윤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인륜을 저버린 패륜적
처사라고는 하나 이러한 폐모 살제 (廢母 殺弟)가 폭군에 해당하는 죄라면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는 왜 폭군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도 임금이 되기 위하여 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였고 더구나 조카인 단종을 폐위한 후
목숨까지 빼앗았으니 당연히 폭군의 칭호를 들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더하는 대목입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명분 중 하나는 반명 친청(反明 親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등을 돌리고 야만족인 여진족 후금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 그것인데,
당시의 국제정세는 의리만 내세울 수 없는 긴박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즉, 만주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을
규합하여 통일을 이룩한 후금은 국력이 쇠약해진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였는데 당시의 정세를 주시하던 광해군은 파병을 하는 체 하면서 후금에 항복을 하도록 밀서를 보내 명과 후금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절묘한 외교력을 보입니다. 이 모두가 나라를 전란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는데,
이를 두고 상국을 배신했다며 1623년(인조 1년) 서인 이귀와 이서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반정의 댓가는 후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란을 자초하는 빌미가 되어 조선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친명배금으로 돌아선 조선에 3만의 군사를 파병하여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을 굴복시키고 " 형제지맹"을 맺었는데 이 전쟁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입니다.
그리고 9년 뒤인 1636년 12월에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을 겪게 됩니다.
그러니까 1636년 12월 2일 청태종 홍타이지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조선은
청나라에 맞서 항전을 하였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가 입성 59일 만에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삼전도로 이동하여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는데 그 예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였습니다. 즉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으로 이것을 아홉 번
행하는 것인데 처음 청나라에서 요구한 것은 반합(飯哈)이었다고 합니다. 즉 임금의 손을 뒤로 묶고 입에
구슬(밥 대신)을 물린 다음 죽은 사람의 흉내를 내며 항복의 예를 올리는 의식을 청나라에서 요구한 것인데
이 의식이 너무나 가혹하다 하여 절충 끝에 삼배구고두례로 완화하였다고 합니다.
이날 인조는 높은 단에 앉아 있는 청태종을 향하여 삼배구고두례의 예를 올렸는데, 청나라 관리들은 조선 임금의
머리 찧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좀 더 세게 머리를 찧을 것을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침략자에게 무릎을 꿇고 피투성이가 된 이마를 땅에 찧으며
항복의 예를 올리는 굴욕적인 모습을 백성들은 어떻게 보았을까요. 아마도 피눈물을 흘렸을 것으로 믿으며 이 삼전도의
굴욕은 후세에게 길이 교훈으로 남아야 마땅한 데에도 그러나, 후세에도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는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조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자신을 수행하는 하급 관리에게서조차 하대를 당하며 파란 많은 생을
살았던 광해군 , 그가 계속 임금으로 있었더라면 정묘호란도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고 삼전도의 치욕 또한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쉬움이 크지만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타고 정처 없이 흘러만 갑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오랜만에 역사를 뒤돌아 보게 되네요.
정치는 지금도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여요..
정치가 개혁 되기를
저또한 힘모아 기원과
뜻을 전해볼까 합니다..
맞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속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삼전도비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지요.
아무 대책없이 남한산성에 들어앉아 항전하느니 친화하느니 날밤을 새우다니...
그런 통에 백성들은 얼어죽어나갔다지요.
광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가 자초한 치욕이였지요.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을까요. 안타깝지요.
어이구, 조선의 역사 !
영화롭던 날들도 있었지만,
수치스러운 일도 많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머물다 사라져 버린 이야기,
세세하게 잘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하고 싶습니다.
따져보면, 한집안에서 권력다툼이지요.
집권을 해야만, 적을 물리칠 수 있고, 권좌에 앉아서
나를 보호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아닐까요.
그기에, 아부 좋아하는 관리들의 욕심 대문에
왕실이 흔들렸습니다.
조선의 역사는 비운의 역사입니다.
어느 곳 어느자리라도 盡人事待天命 할
인간들의 숙명입니다.
긴글 쓰느라 수고하셨고 소재가 다양하십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역사,
대단히 감사합니다.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보다가 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지요.
권력욕에 의하여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토탄에 빠르린 왕이 바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세력입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이런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이 되는 것이니만큼 다시는 이런 치욕이
없기를 바라면서 부족한 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광해군시대에 간신인 이이첨이 문제였군요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했던 부왕인 선조와 달리
용맹스럽고 현실적인 판단으로
조선을 지킨 왕세자이며 군왕이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생겨서
힘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조선역사에 또 하나의 치욕이 생겼네요
그리고 그 댓가로 인조는 삼전도 굴욕을 당했고요
공자왈맹자왈 비현실적인 명분의 조선이
국가와 백성과 더욱 훌륭할수 있었던 광해군을 말아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로제 님, 글을 쓴 제 취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시네요.
반갑고 감사합니다. 등업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수필방에 자주 오시고 좋은 글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역모에 대한 상소가 있었음에도 막지 못한 건
광해군의 실수라고 합니다. 너무 안이한 대처라고 할 수 있지요.
정치만 잘해서 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 플로라 님 감사합니다.
근자 광해군이 등장하는 보쌈이라는 드라마가 있어
이이첨과 광해의 대립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아까운 인재라는 인식으로, 광해는 역사가들이
다른 안목으로 주시를 많이 하는 임금이지요.
먼 훗날 박정희 대통령을 후세들이 어찌 조명할 지
그 또한 궁금해 집니다. ㅎ 글 흥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항상 건필 유지하시고 즐겁게 일상 보내시기 바랍니다.
보쌈이라는 드라마는 제목만 알 뿐이었는데요,
그런 내용이었군요. 다시 보아야 되겠습니다.
근래에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이 있는 모양입니다.
정파가 다르다고 업적마저 깎아내리는 행위는 옹졸하지요.
그 문제로 또 말들이 많은가 봅니다 ㅎㅎ.
재위기간
굴욕인간
선조는 도망간 수치의 왕이였건만
광해는 전장에서 실전을 치룬 왕입니다
저는 가끔 광해군을 떠올리며
가슴 먹먹했는데
이글을 읽고
댓글 쓰면서
역사는 승자편이라는
이제는 새로운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조명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권력도 권력이기 때문이지요.
현재 광해군과 그 부인은 남양주시 진건면의 산비탈에 초라한 모습으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민간 세도가의 묘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
지적성숙님 감사합니다.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기억력이지만 화암님의 덕분에 다시 한번 인지하고 갑니다
인간의 역사는 참으로 살육과 전쟁의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죠?
한 인간의 몰락이 가져온 퍠해는 엄청나게 크고 깊습니다.
광해군의 폐위로 발생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느냐 하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도 어떤 이유로든 당위성을 논하겠지만, 광해에 대한 역사적 가치가 인문적 접근을 통해 재조명, 재평가 되고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화암님의 광해에 대한 인식과 동일합니다. 강자편에서 기록된 역사가 아닌 객관적 사료를 통한 기술로 후대에 전해져야하지 않을까하는ㆍㆍㆍ.
이 반정은 능양군 인조의 지휘아래 강행된 역모 사건으로 그 명분 중에는 명나라를 배반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인조는 나라를 토탄에 빠트리고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자초하였지요. 결국 어리석은 군주의 무모한 판단이 망국을 불러올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지요. 광해군은 반정을 제압하지 못한 우를 범했지만 오로지 백성 만을 생각했던 영명한 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