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0년 경 아시아 서부-트라키아 남부 상황 개략. 주황색(마케도니아 왕국과 점령 지역), 진한 청색(페르가몬 왕국), 진한 초록색(로도스 공화국과 그 속령), 빨간색(뷔잔티온), 연한 노란색(셀레우코스 제국령).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필리포스 5세는 타소스, 렘노스, 퀴클라데스, 카리아 등지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된다. 발칸 방면의 추정 실지 경계는 마로네이아 서쪽의 검은 선.
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프로폰티스 연안과 아시아 서부가 지니는 의미는 복잡하여 간단히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 전쟁은 필리포스 5세의 기원전 201년 아시아 원정과 기원전 200년 트라키아-헬레스폰토스 정벌의 직접적인 연장선에서 발생한 측면이 있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분명 전쟁의 발단 부분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기원전 200년 가을 무렵에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 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로마군이 일리리아에 상륙했으며 페르가몬, 로도스 함대도 그리스쪽으로 오면서 사실상 이 동부 지역은 주요 전장에서 이탈해 버린다. 그러다가 필리포스가 카리아와 트라키아에 만들어 두었던 점령지의 대부분을 기원전 197년 이래 셀레우코스 제국이 차지해 버리면서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단계에 이르러 이 지역이 다시 국제적인 분쟁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위의 지도는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전략과 추이 시리즈가 막바지까지 가는 동안 아시아쪽의 지리적 정보가 너무 불균형하게 결핍되었기에, 이를 다소나마 벌충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 근저에서 내가 지닌 정보력이 매우 비루한 탓에, 앞으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다음은 현재 상황에서의 몇가지 노트이다.
이 시기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는 아주 크게도, 작게도 그릴수 있다. 위의 지도에서는 작은 쪽으로 방향을 잡아 왕국의 영토는 약 9,000평방km로 그려졌다. 영역 획정의 주된 문제는 뮈시아의 동부와 프뤼기아 북부에 있다.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당한 후 페르가몬 왕국이 수여받기로 했던 영토 가운데는 "프루시아스(비튀니아 왕)가 빼앗아갔던 뮈시아 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은 고대 기록에서 프뤼기아 "에픽테토스"라고 불린 지방과 동일시될만한 정황이 있는데, 코튀아이온, 도륄라이온 등을 포함시킨 스트라보의 설명이 옳다면 그 지방은 프뤼기아 북부에 커다랗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 된다.
만약 프뤼기아 "에픽테토스"가 이 시기에도 페르가몬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왕국의 영토는 근 43,000평방km에 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정황상 페르가몬 왕국이 셀레우코스 제국 패배 이전에 마지막으로 프뤼기아 북부 땅을 점거할 기회는, 셀레우코스 왕족으로 아시아에서 왕을 "참칭"했던 아카이오스가 패망한 사건(기원전 214년)보다 늦게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오늘날 터키의 발리케시르 주 중부의 온천 지대(파묵추)에서 발견된, 안티오코스 3세가 신하(아시아 총독 제욱시스)에게 기원전 209년에 보낸 서한을 새긴 석주는 아카이오스 패망으로부터 몇년이 지난 이 시점에 동부 뮈시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였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 석주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종교 정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사료인데, 사실 정확히 어디에 있던 물건인지 완전히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J. Ma는 석주가 발견된 파묵추가 성소가 들어서기에 알맞은 곳이며, 또 석주 자체의 크기가 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그 일대의 물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J. Ma, 『Antiochos III and the cities of western Asia minor』p291)
따라서 나는 프뤼기아 북부(그곳이 "프루시아스가 빼앗아간 뮈시아 땅"이건, 아니건)는 마케도니아 전쟁기에 페르가몬의 땅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토 문제는 응당, 인구로 대표되는 다른 세력 지표와도 직결된다. Beloch는 기원전후 뮈시아, 뤼디아, 카리아의 인구 밀도를 평방킬로미터당 50~60명으로 추정했고(프뤼기아는 20~25명) 그 결과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에만 대략 600만명이 살았다는 계산을 얻었다. 아나톨리아의 제국령 전체 인구는 1,150만~1,350만명으로 역시 매우 높게 나왔다.
그러나 Beloch의 이러한 계산은 그 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는 그것이 너무 높게 추산되었다는데 동의한다.(cf>McEvedy-Jones, p136) 이제 만약 지금 다루는 시기 뮈시아의 인구 밀도를 30~40명으로 낮추어 잡는다면 위 지도의 영역을 기준으로 페르가몬 왕국 내의 주민은 약 30만명이 된다. 그렇다면 페르가몬 왕국은 당시로서는 그다지 크지도, 매우 작지도 않은 정도의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J. Ma, "Antiochos III and the Cities of Western Asia Minor" (1999). K. J. Beloch, "Die Bevölkerung der griechisch-römischen Welt" (1886). C. McEvedy & R. Jones,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