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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대상에 대한 나의 상태를 말한다. : 욕망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표기된 욕망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부족이라는 단어만으로 서술어의 기저를 유추하기는 힘들다. 라캉식의 욕망은 어떨까. 라캉에게 욕망은 항상 자신의 대상에서 빗나가며, 결여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소망 충족이 직면해야 하는, 무의식적, 역동적 갈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라캉은 욕망의 완전한 충족의 '구조적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대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욕망이란 상태는 결핍에서 온다. 나에게 없는 대상이,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대상으로 인식될 때 욕망이 생성된다면 욕망하는 나는 현재 불행한 상태인가? 혹은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정서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욕망은 긍정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하기 힘든 까닭은 욕망의 다양성에 있을 것이다. 욕망은 그것의 속성과 상관없이 타자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나와 나의 외부인 타자 모두를 포함하는 장(場)은 사회라는 개념을 포괄한다. 욕망하는 상태를 ‘나는 x를 욕망한다.’로 설명할 수 있다면 결국 나라는 주체와 x의 관계는 나 그리고 x를 구성하는 환경에서 포착될 것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나를 괴롭게 한다. : 유가와 도가의 충고
결핍에서 욕망이 생성된다면 욕망은 행위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만약 욕망의 대상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타자에게도 욕망되는 대상이라고 한다면 나와 타자의 욕망은 충돌하게 된다. 욕망의 실현은 언제나 바람직한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우리의 행위가 옳고 그른지는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게 된다. 내가 바라는 욕망을 일으킬 때, 그 욕망이 진리에 따라 일어나도록 수양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유가와 도가의 주장이다. 이들은 세속의 욕망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사상이 상보적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사상적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욕망을 제어해야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사상이 출현한 사회적 배경이 동일했음에서 기인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욕망에 관한 유가와 도가의 입장을 살펴보기 전에 둘의 세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사상은 정치철학적인 태도에서 관점을 달리한다.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볼 때, 유가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인의예지의 덕을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하였다. 도가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연적 존재의 일부이며, 사회적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위자연의 태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두 학파의 사회적 실천관이 선명하게 갈린다. 유가는 인간의 사회적 책임과 수양·교육을 강조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인위적 노력을 통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인위적 가치가 완성된 형태로서 인의(仁義)가 실현되는 왕도정치를 지향한다. 유가는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세상의 인간질서 규범으로 삼강오륜을 제시하였다. 도가는 자연적 상태의 변화법칙을 수용하고, 무위·자연적 평화에 관심을 지니면서 소국과민(小國寡民)과 무위(無爲)의 정치를 주장한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유가는 인간을 사회 안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따라서 사회 질서에 통합되는 개인의 욕망은 옳은 것으로, 질서에 위반되는 욕망은 그른 것으로 보는 태도를 견지한다. 여기에서 당위성을 파악하는 기준은 인의(仁義)가 될 것이다. 이와 상반되게 도가는 인간을 사회 질서 안으로 편입하려는 시도 자체를 그른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적인 상태는 보다 정확하게는 ‘유가적 인위를 부정하는 상태’가 될 것이다. 이는 노자의 소국과민이라는 소규모 조직이 효율적인 통치를 목적으로 했음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의도적인 구성으로 보아야 한다. 이 논고에서는 유가와 도가의 정치철학적 면모를 통해 욕망과 사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이다.
유가에서는 인간의 욕망은 대체로 사회 질서를 와해시킨다고 보았다. 먼저 공자는 인간의 행위나 삶에서 욕망이 앞서면 굳셀 수 없다고 하면서 욕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앞에서도 주지했듯 개인의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생겨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에 따르면 충분하게 수양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다. 욕망의 실현은 언제나 사회적 통합성을 해치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공자에 비해 욕망에 대해 더욱 통찰력 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인간의 욕망은 완전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절히 관리하고 조절해야 하는 감정이다. <인의예지를 함양하고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가 욕망을 바르게 조절하는 것이 된다. 욕망의 과잉은 곧 인간다움의 일탈을 초래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순자는 공자나 맹자보다 더욱 더 철저하게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펼친다. 이때 욕망을 절제하는 기준은 바로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예(禮)이다.> 인간의 욕망은 본능적인 것이므로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순자는 실제로 만족시킬 수 있는 욕망은 처음부터 바르게 실현되는 만족을 추구하기에 가능한 것이고 예를 지키지 않는 것, 즉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은 엄격한 절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간의 욕망은 엄격하게 마음으로 절제해야 하는 것이지만, 마음의 바른 인도와 통제를 거쳐서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은 많을수록 좋다고 본 것이다.
도가에서 볼 때 인간의 욕망은 타고날 때부터 지닌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자연적인 속성으로 이것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욕망을 ‘저절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위적 욕망이 없는 경지로서의 무욕은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소거(掃去)하고 최소한의 욕망을 지니면서 무위의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삶과 세상의 욕망을 말한다.> 도가는 정치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유가에서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사상이다. 도가의 관점에서 인간이 그릇된 욕망을 품는데 기인하는 것은 사회에서 주장하는 이념적 가치이다. 결국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유교적 사회 그 자체이고 권력에 의해서 질서라고 주장되는 체제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삶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속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 욕망은 사회 질서를 통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므로 제거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장자는 “이른바 온전한 삶은 인간의 모든 욕망이 모두 알맞게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도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욕망은 제거해야 될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위자연의 원리에 따르도록 장려해야 하는 삶의 바람직한 힘이다.> 그러나 이는 노가가 유가의 정치관에 반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때 역설적으로 사회 참여적인 태도가 된다. 결국 유가·도가 사상에서는 욕망을 사회 질서/개인의 삶을 옳게도 그르게도 할 수 있는 요인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욕망은 사회적 동인(動因)으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집단에 내재된 ‘어떠한 대상 혹은 상태’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주-너 자신의 욕망을 알라! : 들뢰즈의 욕망이론
기록으로 남아 회자되는 삶까지도 현존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들뢰즈만큼 다방면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이도 없을 것이다. 들뢰즈의 감각이 빛나는 부분은 욕망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다. 그는 욕망을 생성의 동인으로 보았다. 칸트에 의하면 욕망은 "그 표상들을 통하여 이 표상 대상들의 현실성을 생기게 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따라서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들을 낳게 하는 어떤 내적인 힘으로 이해된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생산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욕망하는 생산'이며, 이것은 결핍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생산의 능동성을 의미한다. 유가의 사상가들이 사회질서를 와해시키기에 욕망을 부정적으로 본 것과는 반대되는 선상에서 들뢰즈는 욕망이 갖는 사회 변혁적 힘에 대해 긍정적인 논의를 펼친다. 이른바 욕망의 사회적 생산을 포착해낸 것이다. 그가 욕망의 생산적인 힘을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욕망은 헤게모니의 전복을 가능케 하는 민중의 잠재력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욕망이 억제 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욕망이라도 일단 욕망이 생기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 비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욕망은 사회를 뒤엎는다.>는 발화로 확실시 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사회 질서의 가능 바탕을 욕망의 배치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들은 욕망은 어떻게 작용하는 가를 질문하면서 욕망이 왜 스스로 권력에 예속되려고 하는지를 해명하면서 근대 사회와 개인들을 분석하는 독특한 틀을 제시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의 유사점이다. 중국 고대 사회는 정쟁의 시대였다. 이는 본능적인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도래하게 하였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가치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가치의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현대 사회에서는 생존에 대한 위협이 일견 소멸된 듯 보인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출현은 자본에게 권력을 주었고 여전히 우리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탈주하는 유목민은 우리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우리를 자발적 복종 하에 배치하는 사회 질서에 대한 인식을 가진 이들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인식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욕망이 처해진 구체적 환경을 보자. 우리의 일상은 내게 낯선 ‘나의 욕망’을 끊임없이 들이대는 자본의 힘에 가로막혀 있다. 어느새 자본이 모두 임대해버린 거리는 그 공적 성격을 상실하고 모든 공간을 자본의 상품광고에 내줬기 때문이다. 나의 사적 공간은 소거(掃去)되어 버렸다. 자본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자본의 괴물같은 포획력은 종교적, 신분적 질서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전일적 시스템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자본의 절대적 내재성이야말로 우리가 ‘나의 욕망’을 욕망하기보다 이 세계가 제도화한 욕망을 나를 빌어 욕망할 뿐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거해준다. 실상 제도는 언제나 자신의 유지·존속을 위해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욕망과 동거해왔던 것이다. (…) 제도화된 자본은 욕망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필요로 한다.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욕망을 제거하고 통제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처한 수동적 현실을 능동적 만족으로 대체하는 예속과 기만의 심리학을 위해.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항상 제도나 시대의 지배적 관점이 이해하고 평가한 욕망을 이야기해왔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이성의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서 설정된 욕망 이외에 ‘그 자체로서의 욕망’은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욕망이란 주체나 대상에 귀속되지 않으면서 그 결과로서의 주체나 대상을 구성하는 힘으로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현실의 코드화가 형성된 장의 역학관계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욕망은 무엇보다 주체나 개인의 능동적 작용 바깥에서 작동하는 내재적 힘이며 관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욕망의 정치성을 도출하려면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 욕망은 다의적이다. 이제 사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것을 분리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뛰어넘어 우리는 <국가의 탄생> 대신 “민중의 재구성”이라고 부를 만한 집단적 언표들을 생산해내는 인물의 행동하는 발화와 발화의 행위를 만들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집합적 창조야말로 욕망의 정치학의 과제일 것이다. 들뢰즈의 소수성의 정치학에 대응하는 현실적 사례인 68년 5월도 우리의 87년 6월도 가까운 시기에 출현한 촛불집회도 기획된 저항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어떤 특권적인 혁명적 계급이나 미리 주어진 달성해야 하는 변혁의 목표지점도 설정할 수 없는 저항의 슬로건이야말로 지금/여기에서 실행할 수 있는 우리의 정치적 실천일 것이다."
위 논지에서 살펴볼 수 있듯 사회는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기 위해 욕망을 길들인다. 이는 질서 유지에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질서가 유지되는 것을 바라는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들뢰즈는 이를 세계 혹은 제도화된 자본으로 표현한다. 도가에서 강조했듯 정치적 이념은 민중을 복종시키기 위함이지 민중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사적인 욕망이 사회를 구성하는 요인에 대항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욕망의 정치학은 집합적 창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욕망은 현대 사회에서 포착되는 문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작동하는 욕망이 될 것이다.
한편 욕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 징후의 포착과 이후의 탈주
중국 고대사회와 현대의 한국 사회는 대칭되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흘러버린 시간이 무색하게 우리가 애초에 서있던 지점에서 등을 돌려 거울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회는 혼란스럽고 올바른 삶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는다. 유가의 철학자들은 사회가 혼란스러운 까닭을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개인의 문제라 보았고 도가의 철학자들은 사회의 문제를 개인을 지배하려는 이념적 질서에서 찾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우리는 들뢰즈를 읽으면서 기시감을 느낀다. 욕망은 징후이다. 징후는 그것이 야기할 결과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예측하게 하고 사태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한다. 춘추 전국 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제자백가는 패자(敗子)가 아닌 패자(敗者)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서 철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징후의 포착자였기 때문이다. 포착은 관찰에서 시작되고 관찰은 애정에서 시작된다. 확고한 윤리적 기준에 대한 제시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대사회에서 징후로써의 욕망이란 우리에게 윤리적 삶에 대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