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체 면적을 다 합쳐도 현재 중국, 한 개 국가의 면적보다도 작습니다.
물론 인구도 중국이 더 많습니다.
그 이야기는 옛날에도 별로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아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전 취미로 전사(戰史)를 보는 사람이라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1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 전체 전력을 다 합쳐도 중국 1개 국가의 전력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미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간단한 예로 1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몽골군이 유럽 동부를 휩쓸고 있었으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14세기전까지 유럽이 전세계 역사에서 얼마나 후진 지역이었는가를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문명(미케네 문명)이 자랑찬 청동기를 문화를 꽃 피울 때, 고 옆에 소아시아에는 철기 문명이었습니다. 물론 중국, 인도도 철기죠.
그리고 그러한 이오니아 문명은 그들이 그렇게 바르바로이라면서 야만족으로 비유하던 마케도니아 지역의 철기 문명을 가진 도리아인이 남하하면서 끝장납니다.
뭐 말이 좋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마 제국 어쩌구 하는데, 로마 제국 최대 강성기의 면적을 다 합쳐도 진시황의 제국보다 작습니다. 문화는 더 말할 것도 없죠.
과학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던 서기 5세기까지 유럽에는 그 간단한 등좌도 없어서 전부 경기병뿐이 없었던 반면, 동양에서는 최소 기원전 2세기에 중갑기병이 등장합니다. (우리 고구려 벽화를 보세요.)
백년 전쟁이 일어나던 14세기에 프랑스 기사대를 혼쭐내줬다는 영국 대궁병의 존재가 단순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죠.
뭐 동양에서는 최소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안감과 겉감을 달리한 복합궁이 개발되어 실전에 사용되었습니다. 뭐 서기 9~10세기에는 화약도 실용화하죠.
유럽사를 조금만 공부하신 분들은 금방 이해하시겠지만, 로마 제국 멸망후 유럽국가들간의 전쟁 배상금 혹은 포로에 대한 교환자금이 금은등 순수광물로 이루졌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제대로된 기축통화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로마 제국 시절에는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그나마 로마제국 시절에도 전세계 역사에서 후진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유럽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중세 암흑기에 빠지게 되자 무려 700년 이상 발전은 커녕 퇴보를 면치 못했으니 말을 더 해 뭘하겠습니까?
단순한 과학기술이나 전력지수만이 아닙니다. 문화도 형편없었습니다.
지금 당장 서양의 유명한 예술가 이름을 쭉 열거해보세요. 철학자여도 상관없습니다.
아마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 빼고는 전부 르네상스 이후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아마 철학과만 아니라면 이럴 공산이 크죠.)
바로 15세기 르네상스가 전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인간들이 깨어난 시기입니다.
뭐 과학기술적인 면에서는 15세기의 유럽인들이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들이나 아프리카의 원주민보다 나을 수는 있겠지만, 형편없는 종교적 도그마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원시 샤머니즘의 형태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여자는 마녀라고 잡아죽이고, 갈릴레이를 지구가 돈다는 소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태워죽이려고 하고(뭐 그 갈릴레이가 교황청에 의해서 해금된지는 20년도 안된 일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맞아죽을까봐 지동설을 자신이 죽은 다음에 발표하게 만든 유럽인들이 미개하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있어 더 미개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러나 유럽인들이 종교적 도그마에서 탈출하게 되자 무섭게 발전합니다.
무려 700년 이상 긴 잠에 빠져있던 유럽 사회에서 그것이 다소나마 해소되자 그 동안 쌓여있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열정을 막을 것이 거의 없어진 것이 그들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14세기에 이르러 르네상스와 함께 찾아온 대항해시대라는 탐험러쉬도 유럽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단 신대륙에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되자 유럽 사회는 이러한 광물을 통해서 지난 700년간 상실했던 기축 통화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상업 경제가 발전하게 되니 이가 바로 '상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이 아닙니다.^^)
뭐 300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강대한 신대륙의 잉카제국을 몰락시킨 것은 천운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여기에는 잉카의 전설이 큰 역할을 했는데 그건 언제 시간이 나면 설명하도록 하죠)
르네상스는 유럽 사회의 전반적인 것은 변화시키게 되는데, 그것은 특히나 신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기존 구교가 가지고 있던 종교적 도그마가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유럽 제국간의 전쟁이 잦았던 것도 유럽의 과학 기술 발전에 일조를 하게 됩니다.
원래 전쟁과 과학기술은 밀접한 관련을 가지거든요.
그리고 유럽과 동양과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30년 전쟁을 지나고 나서는 완전히 역전됩니다.
유럽에서 제작된 화포와 총포가 동양의 그것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이죠.(30년 전쟁기에는 유럽인들이 동양에서 화포를 산 흔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뭐 대항해시대로 캐러벌등의 원양 항해가 가능해진 함선에 이러한 신무기가 장착되었다면 상황은 뻔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이 황금의 땅인 엘도라도는 찾았는지 몰라도 또 다른 동방의 황금 제국 중국을 침략하지는 못했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유럽이 대항해시대로 신대륙과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향료제도를 장악해도 건드리지 못한 지역이 몇 군데 있죠?
일단 근처에 강성한 투르크 제국을 식민지화 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와 동남부 유럽지역은 여전히 이슬람의 손에 떨어져 있었죠.
중국도 식민지화 할 생각을 한 것이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입니다.
그전에는 택도 없었죠.
조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유럽 세력들이 대항해시대에 유일하게 강제 개항시킨 일본 역시 솔직히 강제 개항이라기 보다는 제한적이고 자발적인 양식의 개항이었습니다.
뭐 당시에 일본은 임진왜란 전의 전국시대였으니 화약이 필요했기에 개항한 것이니까요.(일본에 화약 기술을 전래한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아니라 포르투칼인들이었습니다.-화약 기술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극동에서 가지지 못한 최고급 기술이었으니까)
뭐 일본의 개항도 에도 시대에 오면 도쿠가와에 의해서 2개 항구에 제한적인 것으로 변하지 말입니다. (에도 시대에 일본은 또 낮잠자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안 하려고 총과 칼로 불상따위를 만들고 있었으니 과학기술이 발전할 리 만무!)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과학기술 차이가 역전된 또 다른 이유인 동양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극동 지역에서 국가간의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 뿐입니다.
그것도 생각보다는 빨리 끝난 편이죠.
그 뒤로는 일본은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조선은 사회 변혁을 겪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정 불안에 시달렸고, 그나마 중국은 가장 많이 유럽의 변혁을 눈으로 실감하며 이러한 기술 역전을 느끼고 있었지만, 여전히 중국의 전력이 앞선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항해시대에도 외국 문물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며 고래부터 있어왔던 육상과 해상을 통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데에 만족했습니다.
뭐 무협지나 무협영화를 즐겨보신 분들이라면 금새 아시겠지만, 중국에서 기축 통화로 은전이라는 은이 사용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생각해보세요.
답은 명나라 때부터 자주보입니다. 그리고 그건 유럽 대륙에 대규모로 신대륙의 은이 유입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동양이 비교적 평화로웠던 반면 유럽 대륙은 그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단 말씀입니다.
멀게는 투르크 위시한 이슬람세력과 맞서고 내부에서는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서 싸우고, 국가간의 영토 싸움, 심지어는 국내에서 귀족파, 왕당파, 공화파로 나뉘어 내전 상태였으니, 군사력과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밖에 없죠.
유럽은 15세기 이후 하루도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단 말씀입니다.
또한 전쟁을 하려면 자원과 물자도 엄청나게 소모되죠?
그러니까 죽기살기로 식민지 개척해야 했고, 또 식민지를 안정화시키 위해서 군사력이 필요하게 되니 과학기술 발전하고....
물론 우리와 일본이 비교적 고립된 지역이기 때문에 평화로웠던 반면, 중국은 끊임없이 주변 민족들과 소규모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력들이 과학기술 발전을 요구할 만큼 머리가 좋은 상대가 못되었더란 말씀입니다.
총 없이도 이기고, 포 없이도 이기는데 뭐하러 그런 것 개발하려고 하겠습니까?
중국의 주변 민족들에게 딱히 부숴야할 성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화포 기술을 발전할 필요도 없고, 중국 자체 넓이만 해도 유럽 대륙보다 큰데 더 영토 욕심 낼 필요도 없고....
뭐 그런 이유죠.
저는 앞서 말씀드린데로 전사학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라면 이것만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기원전 3세기경에 쓰여진 '손자병법'과 19세기에 쓰여져 유럽 전술 서적의 효시가 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비교해보라고 하죠.
무려 2000년 이상 차이가 남에도 손자병법이 더 우수한 서적이라는데 이견을 달리할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가끔 만약에 하며 가정해 보는것이 있는데.아편전쟁(중영전쟁)에서 청이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청일전쟁(비록 같은 문화권 나라끼리 전쟁이지만)에서 청이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계속 청이 지배력을 행사할수 있었을까? 만연한 부패가 계속 쌓이고 교만해져(전쟁에 패해서 고치려고 하고 자성하므로)결국에는 서
사실 중국 고대의 뛰어난 행정시스템이나 유가철학(물론 권력과 자기민족 중심으로 타협 한)을 바탕으로한 나름대로의 부족하게나마 인(仁)의 정치를 추구했다는 것. 식민지배는 가열하지 않고 관용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 이런 것들은 유럽의 역사와 얼핏 비교해도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의 지배방식이
옹호되어선 안되지만 적어도 백여년전이나 수십년전의 전통적인 서양제국주의자들의 방식보단 나아졌다는 확실합니다. 서양은 이런 앞에서 웃고 뒤에서 이용하는 이런 지배방식을 알게 된지 불과 수십년 밖에 안됐다는 거죠. 그전엔 종교의 차이에서 나타난 괴리감에 압도된 것으로 보이고 또 동북아의 농경중심국의 온화
함같은 것이 부족할 수 있는 사냥과 장사 그리고 전쟁을 중심으로 국가를 지탱했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실제 그리스나 로마의 문명은 아랍문명의 변주였을 뿐이라고도 말하죠. 탈레스가 말한 물도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 말한 수학적 세계관도 아랍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뿐더러 그것이 조잡하지
서양의 일체감이 형성 된 시기가 언제인지 묻고 싶습니다? 아리안족+기독교+유럽지역.. 언제부터 이런 등식이 성립했을까요. 헌팅턴의 문명충돌류 사고방식에 우리도 모르게 젖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네요. 중세무렵에 본격적으로 생겨났을 동질성은 특정시기에 생겨난 우연한 것인 만큼 그것이 영원할 수도 없고 또 특별한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거죠. 헤브라이즘은 아랍계민족이라 볼 수 있는 유태인들의 것이고 또 이것은 조로아스터교 등 중근동의 신화적 철학적 사고방식에 기원한 것이기도 하죠. 헬레니즘의 뿌리를 만들어낸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 대한 사대주의자의 면모도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마케도니아는 분명히 그리스는 아
유럽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스페인의 해양진출 시대에 스페인 군사력이 당시 일본에 비해서도 우위라고 말할 수 없을겁니다. 운좋게 잉카를 꿀꺽했지만 일본에게 그런 빈틈이 보이질 않았던 것처럼 조선과 교유했더라도 감히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교화의 차원에서 중국에 갔던 마테오 리치 등 유명한 선
정화의 남해원정은 서구의 식민지 개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것 같아요. 명은 당시 중화사상의 역량을 대외로 표출 하기 위해 정화로 하여금 대함대를 파견, 침략의 목적보다는 중국의 우수한 문화와 문물을 자랑했겠죠, 만약 서유럽까지 같었더라도, 그다지 큰 역사적 이변은 없었을 듯 합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박수 보냅니다..
제가 가끔 만약에 하며 가정해 보는것이 있는데.아편전쟁(중영전쟁)에서 청이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청일전쟁(비록 같은 문화권 나라끼리 전쟁이지만)에서 청이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계속 청이 지배력을 행사할수 있었을까? 만연한 부패가 계속 쌓이고 교만해져(전쟁에 패해서 고치려고 하고 자성하므로)결국에는 서
구열강들엔 언젠가는 대패 당하고 일본등에게데도 대패 당할수 밖에 없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한적 있습니다.
사실 중국 고대의 뛰어난 행정시스템이나 유가철학(물론 권력과 자기민족 중심으로 타협 한)을 바탕으로한 나름대로의 부족하게나마 인(仁)의 정치를 추구했다는 것. 식민지배는 가열하지 않고 관용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 이런 것들은 유럽의 역사와 얼핏 비교해도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의 지배방식이
옹호되어선 안되지만 적어도 백여년전이나 수십년전의 전통적인 서양제국주의자들의 방식보단 나아졌다는 확실합니다. 서양은 이런 앞에서 웃고 뒤에서 이용하는 이런 지배방식을 알게 된지 불과 수십년 밖에 안됐다는 거죠. 그전엔 종교의 차이에서 나타난 괴리감에 압도된 것으로 보이고 또 동북아의 농경중심국의 온화
함같은 것이 부족할 수 있는 사냥과 장사 그리고 전쟁을 중심으로 국가를 지탱했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실제 그리스나 로마의 문명은 아랍문명의 변주였을 뿐이라고도 말하죠. 탈레스가 말한 물도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 말한 수학적 세계관도 아랍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뿐더러 그것이 조잡하지
않았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동/서로 나누고 누가 뛰어난지에 대한 생각보다 동/서 구분이 정당한지 묻고 싶습니다.
서양의 일체감이 형성 된 시기가 언제인지 묻고 싶습니다? 아리안족+기독교+유럽지역.. 언제부터 이런 등식이 성립했을까요. 헌팅턴의 문명충돌류 사고방식에 우리도 모르게 젖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네요. 중세무렵에 본격적으로 생겨났을 동질성은 특정시기에 생겨난 우연한 것인 만큼 그것이 영원할 수도 없고 또 특별한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거죠. 헤브라이즘은 아랍계민족이라 볼 수 있는 유태인들의 것이고 또 이것은 조로아스터교 등 중근동의 신화적 철학적 사고방식에 기원한 것이기도 하죠. 헬레니즘의 뿌리를 만들어낸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 대한 사대주의자의 면모도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마케도니아는 분명히 그리스는 아
니지만)이 켈트민족이나 게르만 민족에게 어떤 동질감도 나타내지 않았죠. 이런 특정시대의 우연적인 의식의 산물을 가지고 영원히 편을 가르자는 이야기로 나가면 곤란하죠. 자기 중심주의이고 집단 이기주의의 변형일 뿐입니다.
미국의 저런 통치도 실제론 60년대 후반의 일이죠.
그리고 문명의 변화에 대한 흐름을 읽듯이 이런 식으로 민족의 흐름을 읽으면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서 중국이나 한국이나 오버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 봅니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스페인의 해양진출 시대에 스페인 군사력이 당시 일본에 비해서도 우위라고 말할 수 없을겁니다. 운좋게 잉카를 꿀꺽했지만 일본에게 그런 빈틈이 보이질 않았던 것처럼 조선과 교유했더라도 감히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교화의 차원에서 중국에 갔던 마테오 리치 등 유명한 선
교사들도 우위에 선 입장에서 가르칠 상대이 아니며 오히려 압도된 부분들이 많아 배워야할 뭔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죠.
문제는 나침반이라고 보는뎅ㅇㅇㅇㅇㅇㅇㅇㅇ 차이나가 나침반 가지고 정화의 남해 원정갔다와서...지들이 중심이라면......서... 서쪽으로...안 나갔지요...그런...지나 어리버리....
정화의 남해원정은 서구의 식민지 개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것 같아요. 명은 당시 중화사상의 역량을 대외로 표출 하기 위해 정화로 하여금 대함대를 파견, 침략의 목적보다는 중국의 우수한 문화와 문물을 자랑했겠죠, 만약 서유럽까지 같었더라도, 그다지 큰 역사적 이변은 없었을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글 잘 읽었습니다.정말로서양이 동양을 능가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17세기 중반 페러그래프의 중국 문명에 대한 쇼크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런데 전쟁사에 대한 동,서양의 저러한 비교는 어느책에 잘나와 있나요?서적 좀 추천 바랍니다.
저겨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어느 역사에 편입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