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 학살, 고문, 성폭력, 재산상의 손실과 같은 범죄는 분명히 인간사회의 정치적 실천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해 주체가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질서유지와 정의의 수립을 위해서 분명히 가해의 사실과 책임 주체 규명, 피해자에 대한 구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과거의 공권력의 불법적인 행동에 의해 저질러진 각종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적절한 보상(배상)을 실시하는 등의 일련의 조치를 우리는 과거청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과거청산인 이유는 분명히 과거는 ‘지나갔으며’, 돌이킬 수 없지만, 잘못된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정치, 법, 제도, 그리고 과거사의 책임자가 여전히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그대로 남아있으며, 피해자가 생존해 있는 경우,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공공질서의 정상적인 작동이 어렵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지 않고,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해주지 않는다면 법, 정의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서훈과 포상, 처벌과 구제, 새로운 역사서술 등이 주로 왕조 혹은 정치권력의 교체 과정에서 반복되었는데, 현대사회에서는 대규모의 전쟁, 혁명, 쿠데타 등의 사건과 더불어 공권력의 행사가 대단히 조직적이고 은밀해졌으며, 과거의 공권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않는 경향이 있기 많기 때문에 포상과 처벌 이전에 진상규명이 우선적인 과제로 자리 잡았다. 즉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떠한 처벌과 보상도 가능하지 않으므로 과거청산에서 진상규명은 현대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의 오류를 시정하는데서 가장 일차적인 작업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과거청산은 주체와 권력의 성격에 따라 인민재판 등의 ‘거리의 정의’(street justice)와 같은 보복적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반대로 과거 스페인의 사례처럼 과거의 잘잘못은 완전히 정치적인 사거으로 해석하고 개인의 책임 문제는 완전히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총괄 사면’(Blanket Amnesty) 같은 방식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국가폭력의 죄과를 가진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의 여부와 방식,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의 방식 등은 새로운 정권의 담당주체와 이행기의 성격 등에 따라 상이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거청산 작업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권력의 성격에 직접 좌우되고 어느 사회나 구세력이 계속 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격렬하게 저항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허다한 난관이 부딪치거나 무산되기도 하고 과거청산이 급진적으로 진행될 경우에는 위기에 몰린 구세력이 이것을 빌미로 새 권력을 아예 무너뜨리려 할 수도 있다.
한편 과거청산은 역사적 정리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나 단순한 ‘역사해석’과도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과거청산은 법적 강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과거 국가권력에 의한 반 인간, 반인륜, 반인권적인 사태의 진실을 캐고,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 환경과 가해의 주체를 밝히고, 피해의 사실을 확인한 이후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다. 과거사의 공로와 잘못에 대한 판정 혹은 역사해석은 일단 과거의 진실이 모두 공개되었다는 전제하에, 공동체의 발전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과거의 사실을 재해석하고 그전에는 미처 주목받지 못했거나 인정되지 않았던 측면을 새롭게 조명하여 교훈으로 삼는 일을 말한다. 즉 과거청산은 정치적, 법적 힘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판정과 해석 작업은 특정 정치적 환경 속에서 학자들의 고유하게 추진해야 하는 임무에 속한다. 그래서 지금 한나라당에서 과거청산을 독립된 연구소 등이 주도하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과거청산에 정치적 이해의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아래 과거청산을 역사해석 작업으로 왜소화시키겠다는 의도이다. 특히 과거청산은 주로 과거의 국가 혹은 공권력 범죄를 다로는 일인데 가해의 주체인 국가기관이나 관련 종사자들의 불법행위를 조사하지 못하고 중요한 자료에 접근하지 못하고, 가해자의 고해성사를 유도할 수 없으며, 피해자의 고발을 격려할 수 없다면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과거청산은 인적 청산과 제도적 청산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인적 청산은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고, 제도적 청산은 가해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도덕주의적인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책임소재를 대중들에게 가시화시킬 수 있는 인적인 청산이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까지 감옥에 보낸 나라에서 5.18의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5.18 학살을 가능케 했던 법과 제도의 청산에 소극적인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 하다. 따라서 공권력의 잘못된 행사를 가능케 했던 국가보안법 등 남북 적대와 분단을 지탱했던 법, 제도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반복될 수 있다. 제도와 환경에 대한 강조는 개인의 책임성을 희석시킬 위험성이 있지만, 권력의 톱니바퀴 아래에서 대단히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을 지나치게 매도하게 될 위험성을 막을 수 있다. 제도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과거청산이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고 찢어진 공동체를 복원하는 대단히 미래지향적인 작업이 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2. 과거청산의 중요성
이처럼 국가의 잘못된 권력행사를 가능케했던 조건의 변경 및 직접적 원인의 제거, 책임 주체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러한 공권력 범죄가 재발할 위험성이 있으며 때로는 원한을 품은 피해자가 파괴, 사적인 복수의 형태로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다. 물론 보복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더욱 연장시킬 위험성이 있다. 정확한 책임소재 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응분의 처벌만이 공권력 범죄의 반복 혹은 복수의 악순환을 막고서 사회적 화해(reconciliation)와 통합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다.
진상규명, 처벌과 명예회복, 구제와 포상 등으로 이어지는 과거청산의 일련의 과정은 국가의 기본 방향 수립이며, 국가주도의 조직적인 국민 교육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정치집단의 이해에 종속되어 추진 혹은 좌절될 경우에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특정의 행동을 장려하고 다른 행동을 억제하는 위험성이 있다. 1949년 반민특위의 좌절은 민족을 배반하고 파시즘에 동조했더라도 반공의 노선을 견지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며, ‘반공’의 이름을 빈 어떠한 반사회적 행동도 용인될 수 있다는 국민 교육적 효과를 발휘하였다. 전후 독일에서 나치 협력 세력의 숙청은 독일이 유럽에서 또다시 패권주의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억제하였으며, 일본에서 미국이 일급 전범들을 살려준 것은 일본의 정치나 사회가 또다시 우경화의 길을 걷도록 격려해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오늘날 우경화의 물결 속에서 비록 독일에서 신나치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고는 하나, 독일이 다시 여타 유럽국가를 침략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 재판을 통해 나치 시대의 과거와 명확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1945년 이후 천황제 부활, 전범에 대한 불처벌, 과거사 부인은 왜 오늘의 일본이 새롭게 우경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즉 유럽은 통합의 길로 나서고 있으나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국가간 군비경쟁과 민족주의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패권주의가 여전히 개입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이러한 극명한 차이는 바로 일본의 침략전쟁을 일본 자신이 그리고 여타 나라들이 어떻게 정리했는가의 차이에서 궁극적으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사는 반민특위 실패의 그늘 아래 있다고 볼 수 있고, 오늘의 독일과 일본 역시 전후 전범 처리라는 과거청산의 그늘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면, 과거를 청산하는 것 역시 그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는 역사 만들기, 국가 만들기, 국민 만들기, 법과 질서 만들기 작업이다.
전쟁 혹은 국가폭력은 국제사회 혹은 국내 정치공동체가 전쟁과 갈등이 없는 새로운 질서로 거듭 날 때 완전히 종식될 수 있는 것이라 본다면 가해 책임자의 단죄 등 법적인 처벌은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다. 즉 국가 범죄의 재발과 복수의 반복을 막기 위해 분명한 과거청산이 필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국가 내, 혹은 국가 간 갈등의 극복, 즉 항구적인 평화체제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언제나 억압하려는 충동을 갖고 있으며, 정치권력은 반대자를 없애기 위해 종족 적인 차이, 인종적 차이, 종교적 차이, 지역간의 불평등 등의 사회적 균열의 공간을 언제나 활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전시 체제는 그러한 유혹을 전면화시킬 것이다.
특히 법적인 죄책과는 별도로 다카하시 데스야(高橋哲哉)가 말하는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은 바로 사회 내에서 신뢰의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즉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어떤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는데 기본적 요건인데, 만약 분명한 피해자가 있는데도 가해의 사실이 규명되지 않거나 가해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공권력과 사회의 신뢰성은 확보되기가 어렵다. 설사 가해자가 모두 사망하고,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과 한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앞서 강조한 것처럼 가해와 피해자가 사망하더라도 그들 간에 만들어진 정치 사회적 관계의 틀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이웃에 고통을 안겨준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치 않을 때, 양국이 새로운 갈등이나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가간의 진정한 평화는 구축되지 않을 것이다.
즉 중대한 범죄가 처벌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죄’의 개념이 수립될 수 없고, 피해자들에 대해 가해자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게 되어 있다. 범죄자를 단죄하는 행위는 가장 중요한 공동체 유지 활동이며, 최상의 교육활동이다. 그런데 통치 혹은 안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폭력행위에 대해 면죄부가 주어지고, 또 동료 구성원을 살해한 집단이나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 버젓이 살아있거나 심지어는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기득권으로 존재한다면 그 사회의 여타 구성원은 침묵으로 저항하거나, 적극적인 사회관계를 맺기를 포기하고 더 이상 책임있는 주체로 행동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치의 파괴, 사회의 파괴이며 아렌트(Arendt)가 말하는 판단력의 마비상태이다. 이 파괴, 혹은 판단력의 마비상태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와 사회가 건재하는지 파괴되었는지는 그것이 법과 절차,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 운영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움직여지는가를 보면 안다. 그리고 판단력이 완전히 마비되었는지 건재하는지는 정의의 수립 여부 즉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가 처리되는 방식,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보면 안다.
공권력의 생사에서 정의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을 경우 구성원의 이반 즉 사회의 해체를 막을 수 없다. 생과 사가 자신의 의지 밖에 있는 전쟁상황에서 이러한 정의의 부재, 혹은 판단력의 마비가 가장 광범위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전쟁은 겉보기에는 유례없는 사회통합의 시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극도의 불신을 수반한다. 특히 전쟁 중 감옥이나 포로수용소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불신하며, 상대방이 한 눈을 팔면 남의 물건을 그냥 훔쳐가는 등 극도의 무정부성이 드러난다. 그런데 때로는 사회 전체가 이 포로수용소의 확대판인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가난 때문에 도둑질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해체되었을 때, 즉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정의의 기준을 세울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폭력이 광범위하게 자행되나 그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러한 사회해체의 징후가 드러난다.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환경에 의해 상처를 안게된 사람이 그 상처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고, 상처를 입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회에서 인간간의 관계가 수립되지 않는다. 결국 진실의 규명을 통한 정의의 수립은 사회해체를 막을 수 있는 해독제가 된다.
남아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기관이나 가해자의 인권침해 행위를 규명하는 것은 단순히 악이나 심리적 문제점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야의 차이를 밝혀내는 것이며, 역사정치적 환경(냉전, 반식민주의, 인종주의), 구성원이 복종함으로써 도덕적 자제력을 마비시키도록 하는 집단의 영향, 집단적 규범의 내면화,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것을 허용해주는 언어들의 기여 등을 규명하는 것이다.
과거사 진상 규명은 그 목적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 즉 과거의 국가폭력과 국가범죄 사실과 가해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게된 상황들이 공개되고, 피해의 사실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이 알려지면서 사회 내에서 타인이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배경과 상황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이 가졌던 무관심과 공포에 대해서도 같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진실의 규명과 그것을 공론화하는 작업은 바로 고통을 공유하여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피해자 가족들과 피해자 ‘자신만의 것’으로 가슴에 묻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최소한 사회, 혹은 사회적 관계를 다시 수립하는 작업이 된다. 따라서 국가폭력의 진상의 규명과 책임자의 규명과 처벌은 일종의 사회적 정신치료, 국가적 정신치료가 부를 수 있다. 개인의 병과 달리 사회의 병은 진실과 정의를 통해서 치료될 수 있다(Healing with Truth). 물론 이러한 정신치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겉으로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건강성, 즉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과 규범, 도덕률이 밑으로부터 무너진 상황이 초래된다. 용서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지만, 용서는 진상의 규명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떤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자행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용서와 관용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청산은 일차적으로는 정의의 수립, 인권의 보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편법, 부정, 부패, 탈법, 편의주의, 목적지상주의 등의 사회적 정치적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3. 한국 과거청산에서 ‘과거’의 성격과 범위
과거청산은 분명히 공권력의 잘못된 행사로 인한 주민의 부당한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과거청산은 피상적으로 보면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로 국한된다. 이후에 발생한 모든 국가 폭력, 학살, 고문, 의문사 사건 등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의 특성 상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을뿐더러 국가의 정신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 이전의 문제를 과거청산의 범위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선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 부일협력자 문제를 살펴보면 당시의 한국 백성들의 고통은 식민지 상황, 주권의 상실, 책임 있는 공권력의 부재라는 상황이 초래한 것으로서 식민지 체제를 극복, 청산하려는 이후의 독립된 국민 국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민족 구성원이 고통을 당한 사실, 고통당한 사람들의 실태와 규모, 그리고 그러한 피해와 손실에 대한 배상의 청구를 해야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남북의 분단,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군사정권의 등장, 그리고 성장지상주의의 시절을 반세기 거쳐오면서 대한민국은 이러한 임무를 등한시 하였다. 한일 협정과정에서 일제하 강제동원이후 사망, 혹은 피해를 입은 조선인의 고통을 몇 푼의 청구권 자금으로 무마했으며, 추후 개인 보상의 길을 막았으며, 피해 실태와 규모에 대한 기초조사 조차 게을리 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국가가 국민의 국가로서의 기본 임무를 방기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부일협력자 규명 문제는 그들이 반공을 무기로 이후 지배층이 되면서 사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핵심적 과거청산 과제이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협력하여 동족을 죽음과 고통으로 내몬 죄과에 대해서는 해방당시의 시점이라면 처벌 대상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미 당사자가 거의 사망하였으며, 그들에 의한 피해 역시 민족 구성원 개개인에 국한된다기 보다는 국가, 민족 전체에 관한 것이므로 단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반민주, 반인권적인 외세 파시즘에 부역했는지 밝히고, 그러한 행위가 이후 60년 동안 한국역사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규명하는 선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 개인에 대해 OX 식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고, 식민지 협력의 양상을 보여주고 생계형 친일과 출세형 친일을 구분하여 국민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그들의 역할과 이후의 모습 등을 추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 문제는 전쟁 상황에서 발생한 군, 경, 준군사조직의 민간인 살상, 혹은 여타의 반인도적인 가해 사실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미 거창, 노근리, 제주 4.3 관련 명예회복, 진상규명 작업이 어느정도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것을 아우르는 총제적인 전쟁 정리 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은 남북간의 분단 및 대한민국의 존립의 기초가 되어 왔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민감한 영역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쟁 중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권적인 사태역시 그냥 미루고 넘어갈 수는 없는 사안이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있기 때문에 가해 책임자 규명 문제는 대단히 신중해야 하지만 육하 원칙에 따라 억울한 피해의 모든 정황을 밝혀내고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이나 유사 전쟁 상황이 도래할 경우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군사정권 이후의 공권력에 의한 피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지니고 있지만 이미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행한 바 국가권력에 의해 발생한 각종 의문사, 피해 사건을 축으로 하여, 각종 간첩 조작으로 의심되는 사건, 법살(法殺) 즉 법적인 절차를 거쳤으나 그 수사 및 형 집행과정이 극히 심각한 의혹을 갖는 사건 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시가의 과거청산 문제와 달리 여기서는 각종의 공안기구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질 가능성이 높고 부차적으로는 군과 경찰의 역할에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이 중에서 광주 5.18 관련 사건은 이미 어느 정도 과거청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차후의 과거청산 작업에서는 제외될 것이며, 80년대 민주화 관련 의문사 사건 역시 미진한 부분에 대해 추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민주화와 무관한 각종 의문사로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군사정권 하에서의 국가폭력 문제는 현재의 권력구조 및 지배질서와도 직결되어 있는 사안이며 가해자가 대부분 생존해 있거나 현직에 있기 때문에 조사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억압기구로 군림해왔던 공안기구가 진정으로 국민의 보호자로서 거듭나고, 민주주의를 역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리해보면 과거청산의 범위는 공권력의 반인권적, 반인륜적 행사로 인한 피해사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해석이나 판단이 요구되는 과거의 모든 사건이 과거청산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피해의 사실이 분명하고, 가해의 정황이 어느정도 드러난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시기는 넓게는 동학에서부터 시작해서 90년대 초까지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경우 실제적으로는 학술적인 조사연구에 초점이 주어질 것이고, 문민정권 이후의 공권력 피해는 현재 설치되어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활동을 통해서 어느정도 포괄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92년 노태우 정권까지를 잡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 여기서 일제시기 같은 경우 일본 정부의 협조를 얻지 않을 수 없고, 한국전쟁기 같은 경우는 미국 측의 자료협조가 불가피하다. 특히 미군정기 같은 경우는 한국의 국가주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발생한 공권력 피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숙제로 남는다. 그리고 한국전쟁기처럼 북한 인민군, 혹은 중공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혹은 피해 문제 역시 과거사 조사 대상에 포함될 수는 있으나 일제시기, 미군정기처럼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이 그에 관한 자료를 갖지 않고 있으며 또 일차적으로는 책임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우선 국내 가용자료나 생존자들을 통해서 피해의 규모나 피해 실태를 먼저 조사하고 관련 자료 조사는 이후 해당 국가와의 협조 하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4. ‘과거청산’의 내용과 원칙
앞에서 과거청산은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보상과 배상, 각종 기념사업 위령사업, 역사교육 등으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판정과 해석의 일부가 넒은 의미의 과거청산의 몫이기는 하나 과거청산은 역시 진상규명을 초점으로 할 수 밖에 없고, 진상규명이 없이는 다른 모든 작업은 진전될 수 없다. 따라서 진상규명 작업은 한국에서의 과거청산 작업의 중심 축이 되어야 한다.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에서 보았듯이 진상규명은 고립된 피해자의 가해 상황과 가해자를 밝히는 데서 그칠 경우 가해의 원인을 제대로 밝혀낼 수 없고, 따라서 가해환경의 규명과 확인작업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 경우 개인의 책임의 몫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가 상당한 논란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과거청산에서 처벌 문제는 언제나 논란거리다. 하급관리의 행동은 대체로 상급자의 명령이나 묵인 하에서 이루어졌고, 상급자는 상황의 논리 혹은 정치적 환경에 부응하여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해체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최고권력자 혹은 상황논리에 기대어 면죄부를 주장할 수 있다. 이 경우 명령계통없이 자의적으로 한 행동을 분명히 단죄의 범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고, 일단 최상의 명령자가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과거청산이 어느 정도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단 공소시효 범위 내에 있는 경우에도 처벌 자체는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특히 가해자가 그것을 반복할 위험성이 현저히 낮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실제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상정되어 있는 과거사 관련 법안 중에서도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거의 없다. 처벌을 거친 다음의 정치적 사면보다는 진상규명을 통한 오히려 ‘사회적 처벌’이 더욱 바람직하다. 즉 과거의 잘못된 공권력 행사의 책임이 밝혀질 경우에도, 그 책임을 법적으로 묻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물어서 그러한 잘못된 권력행사에 부역할 경우 사회에서 인정받으면서 살아가기가 대단히 힘들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특히 처벌문제로 정치 사회가 분열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은 매우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더 이상 간첩, 혹은 좌익의 멍에 때문에 온갖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고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그 동안 연좌제 등에 의해서 공권력의 피해자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도 대단히 중요하다.
보상 문제는 가장 뜨거운 쟁점이고, 또 다루기도 어렵다. 공권력의 잘못이 시인되는 경우 피해자들을 달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질적 보상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당성이 없는 정권은 진상규명을 포기하는 댓가로 보상, 배상을 통해 피해자들과 협정을 맺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보상의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피해자들 간에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과저청산에서 이러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향후에는 이러한 일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선 진상규명- 후 보상, 배상 원칙이 분명히 확인되어야 하고, 불가피하게 보상, 배상이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개인차원의 보상은 최대한 축소시켜야 한다. 개인차원의 보상은 공권력 피해로 인한 우선의 물질적 궁핍을 완화시켜 줄 수는 있으나, 차후에는 당사자나 사회 전반에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고, 나아가 과거청산 작업 전체의 정당성을 허물수도 있다. 그리고 과거사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여 후대의 교훈으로 남기는 작업에도 큰 짐으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진상규명이 불철저한 상태에서 피해자의 보상이 요청되는 경우 결정 이전에 사회적 합의를 거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진상규명이후 보상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에는 상징적인 보상 정도로 마무리 하거나, 경제능력이 없는 노약자들에 대한 복지 차원의 보상, 치료 교육비 지원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90년대 이후 진행된 과거청산 작업 중의 상당부분은 진상규명 작업을 생략한 채로 명예회복, 보상으로 나아간 경우가 많다. 거창사건 및 노근리 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근리 사건의 경우처럼 이미 명예회복 법안이 제출된 경우에는 그대로 진행해야 하지만, 새로운 조사와 진상규명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졌고 위령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보상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거창 사건의 경우에는 진상규명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상 건 해결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 두 사건은 당시에는 여러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했으나 당시의 특수정황, 유족들의 끈질진 노력 등에 결부되어 사실상 ‘특권’이 된 역사적 사건들인데, 이 사건의 해결이 다른 사건의 해결에 기여를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과거청산 작업의 형평성이 크게 손상될 수 있다.
기념사업, 역사교육은 과거청산의 마지막 수순이다.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회구성원이 이러한 잘못된 역사에 대한 공감대를 갖고서 스스로 역사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념사업 역시 과거사를 과대하게 포장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동일한 비중을 갖는 역사적 사건들이 차별적으로 기념되고 기억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기념사업역시 앞의 보상 문제와 마찬가지로 형평성과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킬 수 있고, 단순한 정부 행정업무의 하나로 될 경우에는 아무런 정신이나 의미를 담지 않는 의례적인 행사로 그칠 위험성이 높다. 그래서 기념사업은 우선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워야 하며, 동시에 각 기념사업 주체와 기관이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하고 사업과 비전을 공유하며, 공동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조정되어야 하며, 중앙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있어야 한다. 기념사업이 과거 사실을 박제화하거나 공로자에 구리옷을 입히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의 당면 사회적 의제들과 소통을 해야 하며, 민간의 전문가들이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학술적 해석, 그리고 판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친일법안, 민주화 보상 법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부분은 가장 역사적 평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학계의 논의와 성과를 충분히 반영해야 하며, 사회적 합의에 기초해야 한다. 현재 민주화 보상 법안 관련 시행세칙 마련이 난항을 겪는 이유도 바로 권위주의 통치의 성격 및 그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해석 여부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 친일진상규명법에 계속 논란을 벌이는 이유도 바로 그동안의 극우반공체제와 성장주의가 친일, 민주화의 개념 자체에 대한 사회적 토론의 공간을 열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주 4.3 위원회의 경우 진상조사를 마무리했는데도 불구하고 개념 규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과도한 형태의 처벌적 판정, 반대로 과도한 형태의 ‘유공자 인정’ 모두 과거청산의 기본 정신과는 배치될 수 있다. 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친일의 기준은 정치적으로 결정되어서는 안되며, 정서적 반감에 인도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과 행적을 밝히고 지금의 시점에서 그 과오의 역사적 의미를 따지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유공자 인정 역시 피해자의 요구가 거세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타협해서는 안되며, 또 정부의 입장에서 별로 부담없다고 해서 남발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공권력 저항자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일고 있지만 이 역시 학계의 의견이 충분히 개입해야 한다. 처벌과 포상은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과거청산이 법적인 차원에서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이 점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과거청산의 기본 모형은 뉘른베르크의 승자의 패자에 대한 처벌 방식과 남아공화국과 같은 진상규명을 전제로 하여 화해를 초점에 두는 모델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자는 승전국의 정의가 패전국에게 강요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특수상황이 아닌 이상 후자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의문사위원회의 경험은 후자에 가까운 것이지만 처벌을 배제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자와 통하는 바가 있다. 이번에 한국에서 포괄적 과거청산이 추진된다면 이것은 전세계 어느 곳에도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종합적인 것이 될 것이다. 친일진상규명, 민주화 보상 문제가 포함되어 있어서 한편에서는 역사적 평가, 해석의 차원도 있지만, 주로는 오래된 사건이고의혹 사건이 많기 때문에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그리고 법적 정치적 처벌이 아니라 거시 역사적 교훈을 줌으로써 사회적 처벌의 효과를 노린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또 다른 양상을 지닐 것이다. 요약하면 한국의 과거청산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최대로 하고 처벌은 배제하고, 보상은 신중하게 해서 공동체을 복원하고 화해를 추진하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5. 과거청산의 주체와 기구 문제
과거청산의 주체는 과거청산의 방향을 좌우한다. 현재 야당에서는 현 정치권이 이것을 주도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중립적인 민간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피해자가 주체가 될 경우, 과거청산은 보복적 양상으로 전개되거나 한풀의 차원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과거청산 작업에 가해자들나 그와 같은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이 주도를 하거나 그 집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경우 그 작업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 4.19 당시 발포 책임자 처벌이 무산된 것, 제주 4.3 위원회에 군 관련자들이 들어와서 조사 작업 자체가 지연되거나 방해를 받은 것도 그 예라 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청산에서 강력한 이해관계를 갖는 두 집단이 개입해 들어올 경우, 그것이 무력화되거나 역사적 의미가 반감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위험성이 높다. 그래서 현재의 야당이 경계하는 정치권 주도의 위험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과거청산도 정치권력의 힘을 입지 않고서는 진행되기 어렵다는 딜레마가 있다. 즉 정치적 힘이 강하게 작용할 경우, 과거청산은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완전히 중립적인 조직이나 기관이 나설 경우에는 법적인 뒷받침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오직 도덕적인 청산, 즉 역사적 평가 밖에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순수 민간, 중립적 민간인사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편에서는 그럴듯하지만 다른편으로 보면 과저청산 자체를 맥빠지고 무기력한 작업으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정치권이 합심하여 입법안을 마련하되 수행과정에서는 나름대로의 국민적 대표성을 가진 민간이 개입하여 전체의 일정을 조정하고 진상규명, 처벌과 보상, 기념사업 등이 국가와 사회의 먼 대의에 맞게 진행될 수 있도록 참여, 감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의문사위의 경험은 민관 합동기구의 성격을 갖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그러나 “간첩의 군 장성조사” 공격이 보수언론에서 제기되면서 민간 측 조사관, 위원 참여에서 상당한 견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 이후의 위원회 구성 시에도 개혁적 시민단체 관련자가 참가할 경우 보수언론이나 야당에서는 중립성 훼손을 강조하면서 구성 자체에 대해 심각한 반론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위원의 선임에 있어서 정당 간의 적절한 지분 나눠먹기는 대단히 위험하다. 이 문제를 평소부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사가 참여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여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으면서 가해자나 피해자 어느 쪽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인물이 선임되어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동안 과거청산 관련 기구가 중복, 난립함으로써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할 수만 있지만 향후에 구성될 과거사 위원회는 가능한 단일한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좋고, 그것이 어렵다면 여러 위원회의 활동을 조정, 통괄할 수 있는 상위의 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과거 가해자의 방해를 막고, 피해자의 요구를 적절히 제한하면서 국민의 입장에서 미래지향적인 과거청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위원 및 조사관의 선발절차는 투명해야 하며, 모든 활동은 완전히 노출되어야 한다. 기구의 활동은 한시적이어야하며, 미진한 것은 이후의 다른 조직으로 승계되어야 한다. 진상조사를 주 임무로 하는 위원회의 활동이 일단락 되면, 이후의 과제는 주로 학자들의 몫이 될것이다. 역사해석, 역사교육작업은 이 때부터 시작될 것이다.
강정구 교수와 역사담론을 읽는 시각
나인호(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이슈의 배경
최근 한 사회학자의 발언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미 2001년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논란을 빚었던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지난 7월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칼럼이다. 강교수는 칼럼에서 “6·25 전쟁은 후삼국시대 각국이 삼한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아울러 그는 만약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에 끝났을 테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며,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 명에게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발언으로 강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발언을 둘러싼 공방은 이제 그를 불구속 처리하느냐 아니면 구속 처리하느냐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그의 발언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자신의 한국현대사 독해법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교수의 발언은 단순히 정치이데올로기의 잣대에서 감정적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학술적인 차원에서 보다 진지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의 현대사 독법에 대한 학술적 비판도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강교수는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의 역사방법론이 갖는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일까?
‘역사추상형 비교방법’이란
강정구 교수는 자신의 독특한 역사 독해 방식을 이른바 역사추상형 비교방법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만약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되었을 것이다.’라는 반(反)사실적 역사가정(non-factual historical hyperthesis)에 입각해 일종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한 후, 이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방식이다.
강교수는 가상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시공간을 ‘1945년 8월에서 대략 1946년 2월에 걸친 순수해방공간’으로 가정했다. 이 공간은 ‘외세의 개입 없이 조선사회의 내적 역사동력에 의해서 조선의 역사가 진행되었을’ 시간적 공간이다. 그는 이 순수해방공간의 역사적 시점에서 연구대상인 종속변수와 관련된 역사 구조적 조건을 밝혔다. 그리고 다시 이 역사 구조적 조건을 외세의 개입에 따라 왜곡되지 않고 내재적으로 지속하였을 것을 전제로 논리적 극대화를 꾀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종속변수에 대한 역사적 추상모형을 설정했다. 역사적 추상모형이라는 준거틀을 가지고 그는 실제의 역사모형과 비교하면서, 양 모형 간의 차이를 발견하는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외세의 영향력에 의한 결과물로 간주했다.
고증과 추론의 역사 연구 방법론
물론 ‘반사실적 역사추론법’은 강정구 교수가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남북전쟁의 경제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계량사 연구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또한 체계적인 방법론이 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간접적으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가 제기했던 ‘실제로 어떠했는가? ’라는 고증뿐만이 아니라, ‘만약 ~했다면(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역사추론의 문제제기를 부단히 해왔다. 그 이유는 ‘가정법 역사추론’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해 역사적 사건 및 진행 과정의 현재적 관점을 풍성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복원하려는 데에 있지 않다. 역사가 유용한 이유는 그것이 현재를 지탱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의미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연구는 객관적 사실을 정리하는 따분하고 나른한 메마른 작업이 아니라, 신선한 상상력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는 해석이자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강교수의 역사 독해법은 고무적이다. 그는 확실히 지배적인 현대사 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역사를 읽으려 했다. 산을 보려면 산으로부터 거리를 취해야 하듯이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관념들로부터 거리를 취하면서, 냉전구조로 각인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나름대로 명확히 진단하고 있다. 그러면서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통일이라는 당위적 좌표를 역설하고 있다.
거대 서사의 부속물로 인간의 역사가 전락
그러나 문제는 ‘가정법 역사추론’을 위한 강정구 교수의 방법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에 있다. 한림대 전상인 교수는 강교수의 방법론에 분석적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그는 강교수가 취한 ‘반사실적 역사추론’ 자체의 연구 방법론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강교수가 구체화한 ‘역사추상 모형’은 많은 점에서 타당성이 결여된 것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면 외세의 개입이 없던 ‘순수해방공간’ 개념이 과연 사실적 추론의 대상으로 적절한 역사적 개념인가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해방공간 자체가 외세의 개입으로 조성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강교수가 생각하는 역사 개념 자체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란 구조와 체제, ~주의(ism),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모델, 인과관계, 그리고 필연성과 역사진행궤도로 이루어진 과학적 거대 서사이어야 한다. 이러한 거대 서사 속에서는 살아서 숨 쉬고 행동하며 고통 받는 인간 개인은 단지 거대 이데올로기와 체제, 사회 경제적 구조와 계급, 그리고 민족이라는 정치적·사회적 범주의 구성 요소로서 호명되거나, 혹은 통계자료의 숫자로만 존재하게 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채 단지 거시사의 서사구조를 구성하는 부속품으로 인간이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강교수의 ‘역사추상 모형’에 등장하는 주체들은 단지 민족과 외세, 위대한 정치가와 혁명가, 정당과 사회단체들뿐이다. 강교수의 ‘순수해방공간’ 속에 그 당시의 민초들, 그들의 일상과 경험, 그들의 기억, 그들의 꿈, 그리고 그들이 부여했던 다양한 의미들은 어디 있는가?
가상의 역사는 서사문학이 되어야 한다
거대 서사의 사회적 당위성으로 인간 현상을 규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사실상 강교수의 ‘역사추상 모형’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과학적 역사를 표방하는 모든 역사연구 패러다임에 가할 수 있는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실제를 강조하는 역사 실증주의나 상상을 강조하는 가정법 역사추론은 이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객관적 설명의 욕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인간과 동시에 우리의 현실적 삶을 이해하길 원한다. 따라서 의미 있는 현대사 연구의 주제는 강교수가 제기한 바와 같이 “왜 남과 북은 민족사적 핵심과제에서 전혀 다른 역사행로를 해방공간부터 걸었는가? ”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를테면 이제껏 민족사적인 패러다임에 포섭되지 않았던 모든 과거의 파편들을 재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래로부터의 관점에서 해방 당시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방식, 그들의 희망과 공포, 그들의 습속과 태도와 같은 주제를 연구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보통사람들의 기억과 회상을 연구하고, 이것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추적함으로써, 단지 거대한 현실의 변화에 순응해야할 뿐인 그다지 용기도 없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과 그들의 현대사 인식을 재구성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종교·문화·예술 등 온갖 탈정치적·탈이데올로기적 주제들을 다루어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교수가 준거하는 가상의 역사 자체는 오늘날 역사적 필연과 당위, 역사적 객관성과 과학성의 권위에 식상한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가상의 역사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과학적 추론을 포기해야 한다. 가상의 역사는 철저히 허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학이 아닌 감동을 주는 서사문학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숨 쉴 여유조차 없는 현실과 실제의 역사에 지친 사람들에게 모든 유토피아적 상상을 북돋우며, 새로이 희망을 충전해주는 휴양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역사 결정론과 역사담론의 포로들
강정구 교수는 남한 사회 곳곳에 포진한 ‘보수 골통’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강교수 역시 그들만큼 권위적이다. 그들이 철의 반공논리에 입각한 역사관을 가지고 강교수를 심판하려는 것처럼, 강교수 역시 민족 정통성의 잣대로 모든 사대주의자들과 사대주의적 역사를 심판하려 한다. 그들과 강교수 모두에게는 오직 하나의 올바른 역사만이 존재한다. 양자 모두는 역사 결정론과 거대사로 구성된 권위주의적 역사담론의 포로들이다. 그래서 이들 간의 싸움은 비장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조금은 편안하게 온갖 비동시적이고 다양한 의미들이 서로 소통하며 덧칠되는 놀이공간으로 역사를 바라다 볼 수 없을까? 진정 냉전의 종식을 바란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