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200년(혹은 실제로는 기원전 201년부터?)에 아테나이 영토(~아티카)에서 벌어진 공방전은 앞선 시리즈에서 생략되었다. 그 전역의 전반 부분은 로마의 對 마케도니아 전쟁 선포 과정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둘러싼 사건과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지중해 고대사의 큰 난제 가운데 하나이다. 1급 사료로 널리 인정되는 폴리비오스의 글 가운데 해당 부분이 대거 소실된데다, 리비우스의 설명 속에서는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는 강한 의혹을 둘러싼 오랜 논란이 있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문제와 얽힌 부분은 일단 제외시키고, 아티카 전역의 발생 경위와 기원전 200년 가을의 전황만을 다룰 것이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아테나이는 유명한 엘레우시아 비의(秘儀) 행사 도중에 일어난 "대단할 것 없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haudquaquam digna" causa. 이러한 평가는 아마도 폴리비오스의 영향이다. Habicht p197) 결국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 휘말려들었다.(Liv.31.14.6) 즉, 기원전 201년의 늦여름 쯤에 열린 비의 도중에 두 명의 아카르나니아 젊은이가 무단 입장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모른채 데메테르 신전에 들어갔고, 그 결과 사형을 당했다.(Liv.31.14.7-8)
아카르나니아측은 이 사건을 "쉼마키아"의 맹주인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에게 알리면서 개전 허락과 지원을 요청했다. 필시 여기서 왕의 동의를 받아 군대가 아티카로 쳐들어가 약탈을 벌였고,(Liv.31.14.9-10) 이에 뒤이어 아테나이는 페르가몬, 로도스와 손을 잡고 마케도니아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Liv.31.14.10-15.5)
이후 기원전 200년 가을 로마군이 일리리아에 상륙할 때 까지 마케도니아군의 아티카 침입은 세번 보이는데,(Liv.31.16.2, Polyb.16.27.1, Liv.31.22.6-7) 바로 세번째 공격과 그로부터 촉발된 긴박한 상황으로 넘어갈 것이다. 기원전 200년 가을 즈음에 아티카를 공격하던 마케도니아군은 코린토스에서 온 지상군이었는데, 같은 시기 해안을 위협하던 칼키스 "해적"들도 아마 역시 필리포스의 명령을 받아 출동했을 것이다.(Briscoe p116*)
그에 맞서는 아티카의 방어 병력으로는 페르가몬 병사와 용병들, 3척의 아테나이 아프락토스가 확인되고,(Liv.31.24.9, 22.6) 여기에 더하여 C.클라우디우스 켄토가 지휘하는 3단선 20척(+병사 1,000명)의 로마 함대가 도착하면서 위험 상황은 일단 해제된다. 로도스 4단선 3척도 나타났는데, 그 합류 시점은 다소 애매모호하다. 어쩌면 켄토의 도착 이전에 이미 방어 배치 된 상태였을 수도 있다.(Liv.31.22.6**)
이제 다소간 세력이 갖추어진 연합군은, 함대를 출동시켜 느슨하게 방어되고 있었던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향했다. 연합군 함대는 새벽을 틈타 기습 공격을 가해 시가지를 점령한 뒤 곡창, 병기창 및 그에 저장되어 있던 대량의 물자와 공성기 등을 불태워 버린 뒤 돌아갔다.(Liv.31.23.1-10) 칼키스 함락 사태의 소식을 접했을 때 필리포스는 데메트리아스에 있었다. 아테나이 공격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면, 그는 필시 예정을 앞당겼을 것이다. 왕은 서둘러 5,000명의 경보병과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에우보이아로 넘어갔으나, 연합군이 철수하기 전에 도착하지는 못했다.(Liv.31.24.1-2) 필리포스는 다시 빠르게 군대를 이동시킨다. 왕의 군대는 보이오티아로 넘어가, 아티카로 진격을 시작했다. 아마 리비우스의 주장처럼, 그는 당한 방식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던 것 같다. 즉, 야음을 틈타 기습적으로 아테나이를 들이쳐서 함락시키는 것이다.(Liv.31.24.3)
여기서부터 마케도니아군의 잇따른 아티카 주요 도시 공격 시도와 실패, 그리고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 및 파괴가 이어지게 된다. 아테나이 기습은 미처 군대가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척후병에게 발각되면서 실패했고, 그 후의 공세도 페르가몬, 로마군의 증원이 도착하자 포기되었다.(Liv.31.24.4-25.1) 일단 물러난 필리포스는 엘레우시스 기습을 시도했지만, 여기도 방어가 만만치 않았고 연합군 함대가 증원을 위해 피라이우스를 출발한 탓에, 또 실패로 돌아갔다.(Liv.31.25.2)
이후 왕이 한동안 아카이아에 가 있는 사이 장군 필로클레스가 마케도니아-트라키아인으로 구성된 2,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에우보이아로부터 와서 엘레우시스의 연합군을 유인해 낸 뒤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역시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리고 필로클레스는 작전을 바꾸어 성채에 공격을 가했다가 밀려났다.(Liv.31.26.1-4)
아카이아에서 별 성과 없는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필리포스는 필로클레스와 합류하여 다시 한번 엘레우시스를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로마 함대가 증원군을 싣고 왔다. 방어는 강화되고, 공격은 중단되었다.(Liv.31.26.5) 엘레우시스 공략을 포기한 필리포스는 필로클레스에게 병력의 절반을 주어 아테나이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피라이우스를 치러 갔다. 그러나 엘레우시스를 방어한 병사들이 또다시 로마 함대에 타고서 피라이우스로 왔고, 공격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Liv.31.26.6-7) 이제 필리포스는 또 목표를 바꾸어 아테나이로 진격했다. 하지만 진군 도중에 회랑 성벽의 폐허(피라이우스와 아테나이를 잇는 유명한 성벽.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패배했을 때 파괴된 후 기원전 4세기 초에 복구되었으나, 이후 다시 파손되어 여기서는 여전히 부서진 채로 등장했다.)에서 반대로 적군의 기습을 받아 밀려나고 말았다.(Liv.31.26.7-8)
계속된 실패 끝에 필리포스가 선택한 것은, 리비우스가 일종의 분풀이로 해석한 약탈과 파괴 활동이었다. 신전이나 무덤 등 일반적으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곳들도 재난을 전혀 피해가지 못했다.(※) 아마도 초겨울쯤에, 필리포스는 보이오티아로 물러났다.(Liv.31.26.9-13) 보이오티아는 기원전 197년 봄까지도 쉼마키아의 일원이었으므로, 적국의 왕이 돌아갔다고 해서 아테나이의 방어 태세가 완전히 해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Habicht p201) 그러나, 전쟁중 아티카에서 벌어진 대결의 소식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기원전 200년 가을 아티카 전역에서 마케도니아 병력은 필리포스와 필로클레스의 군대를 합쳐 7,300명까지 확인된다. 그러나 이 군세가 한꺼번에 아티카를 공격한 경우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아카이아에서 돌아올 때 필리포스는 코린토스에 상당한 병력을 남겨두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리포스의 군대가 넘어온 후 연합군이 보인 방어적인 자세는, 이 전역에서 그들의 병력이 마케도니아군에 미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 같다.
연합군 전력의 강점과 핵심은 역시 함대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함대를 써서 에우보이아의 대요새 칼키스를 함락시켰고,(※※) 아테나이와 엘레우시스, 피라이우스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연달아 빠르게 병력을 수송하여 효율적으로 도시들을 방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은 큰 성과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이 교외 지역을 파괴한 탓에 연합군의 아티카 방어전은 피투성이 성공으로 끝이 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필리포스 5세의 마케도니아군은 예의 빠른 지상군 기동으로 전장을 누볐다. 그러나 그 속도는 해로 활용의 비중이 큰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칼키스에서 불탄 대량의 공성기는 아티카 공략에 쓰일 예정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 함락을 초래한 안이한 방어 태세는 이후 마케도니아군의 운용 방식을 현저히 제한한 치명적인 실태였다.
마케도니아 왕국과 反 마케도니아 연합이 벌인 전쟁의 규모에 비해 아티카는 비교적 좁은 무대였으며, 참가 병력도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아티카 전역이 지니는 의미까지 작지는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그것은 로마의 참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아울러 아테나이가 연합군 편으로 참전하고 방어된 것은 연합군 함대가 에게해를 제압하는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전쟁중 아티카의 함대 기지로서의 기능은 Liv.31.45.1,47.1, 32.16.5,9,23.13. 아테나이 함대의 활동에 대한 증거로는 Briscoe, p117.)
그런데 또 한 면으로 우리는 필리포스가 아테나이를 너무 쉽게 적으로 돌린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초 당시의 아테나이는 물론 강국이었다고 할 수 없다. 쉼마키아의 공격을 당하면 즉시 사과하고 굴복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필리포스의 왕국은 엄연히 페르가몬-로도스(+그 동맹국들)와 전쟁중이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굴복 대신 외부의 "친구"들과 손을 잡고 대항해 올 가능성 역시 다분했다. 그렇다면 이미 연합군의 해상 우세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아티카를 적군이 장악할 기회를 열어준 것은 분명한 실책이 아니었을까?
최소한 표면적으로, 아테나이와 적대 행위를 시작한 것은 필리포스가 아니라 아카르나니아 연방이었다. 쉼마키아의 맹주인 필리포스는 가맹국 가운데 하나인 아카르나니아측의 요청을 무시하여 정치적인 부담을 안는 것 보다, 이를 수락하고 쉼마키아의 결속을 꾀하는 편이 이롭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아테나이가 연합군에 가담하더라도 만약 단시간 내에 주요 도시들을 점령할 수 있다면 연합군의 소득을 무효로 돌릴 수 있으며, 근 30년만에 아테나이를 다시 마케도니아의 속령으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관측은 아티카 공격이 마케도니아에 있어 바람직한 결과로 연결 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 차원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아티카 정복의 가능성이 과연 높았는지, 또 마케도니아군은 성공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갖추었는지 여부는 마땅히 별도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전반적인 자료의 부족 때문에 생각하기가 아주 어렵다.
마지막으로 이 전역 당시 마케도니아 군대가 저지른 파괴 행위가 왕국과 필리포스의 이미지에 입힌 타격을 간략하게만 짚어 볼 것이다. 이후 연합측은 그 사건을 프로파간다의 소재로 활용하게 되는데,(Liv.31.30.1-11, 32.19.11-13,21.21) 이런 일은 함의가 애매할 수 있다. 상궤를 넘어선 약탈과 파괴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을 앞세운 프로파간다에 과연 현실적인 힘이 있는가? 내 개인적으로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 것도 있었으며, 필리포스가 지게된 악당 이미지는 쉼마키아의 붕괴에 어느 정도 일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성격상 별로 확실히 말할만한 것은 아니며, 관련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글로 돌릴까 한다.
*필리포스의 또다른 해적 운용 사례는 Diod.28.1.
**리비우스는 로도스 4단선 3척이 "Supervenerunt his" 했다고 썼으며, 이는 그 배들이 켄토의 함대가 오고 나서 도착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아티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로도스 전함들이 로마 함대보다 늦게 도착할 만큼 멀리 있었다고 여기기는 조금 어렵다. Briscoe, p117. Walbank P p138. 한편 비슷한 시기 연합군 함대에 뷔잔티온 전함들도 같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금석문 자료는 Syll.580.
※신전과 무덤의 파괴는 필리포스의 첫번째 아테나이 공격 직후에도 있었다고 한다. Liv.31.24.17-18. 필리포스의 "신전 파괴"는 아시아 원정 과정에서도 드러나며, 페르가몬 왕국은 이에 니카이아에서 이에 대한 변상을 요구했다.(Polyb.18.2.2) 마케도니아군의 당시 아티카 파괴와 연결된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Thompson, Hesperia 50.
※※칼키스 공격은 전략적 가치에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바로 이 공격이 마케도니아측을 자극하여, 원래는 당하지 않았어도 될 대대적인 아티카 침공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당시 필리포스가 데메트리아스에 있었던 것은 국왕의 아티카 친정이 이미 준비중이었음을 방증하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필리포스는 단순히 아카이아 연방의 대회에 맞추어 펠로폰네소스를 방문하려 했던(Liv.31.25.2-11) 것일지도 모른다.
C. Habicht, "Athens from Alexander to Antony"(eng. tran. D. L. Schneider, 1997).
J. Briscoe, "A commentary on Livy", books XXXI-XXXIII" (1973). (>Briscoe)
F. W. Walbank, "Philip V of Macedon" (1940). (>Walbank P)
H. A. Thompson, "Athens Faces Adversity", Hesperia: The Journal of the 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 vol.50 (1981).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