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문경시산악회’와 함께, 2018년 6월 산행/epilogue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 써놓은 ‘아이세여 나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를 읽을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 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 없이 슬프게 한다.
휠더린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자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서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를 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 한날을.
도회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랜 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 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밭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 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 현.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우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 안톤 슈낙(Anton Schnack)의 산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 전문이다.
그렇게 안톤 슈낙을 슬프게 했던 것들로, 지치고 힘들었던 내 젊은 시절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그때로 끝이 아니었다.
그 젊은 시절에서부터 일흔 나이를 넘어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연들이 불현 듯이 내게로 다가와 나를 슬프게 했다.
참아서도 감당해냈고, 스스로 감정을 억눌러서도 감당해냈다.
어떤 경우는 그저 세월이 흘러서 잊혀 짐으로써 감당한 것들도 있다.
그런대도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내게 다가오고는 한다.
이번 ‘재경문경시산악회’ 회원들과 어울려,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던 이번 6월의 산행에서도 그랬다.
동행이 되어준 회원들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일부 편견적 시각 때문이다.
‘효계라며?’
풍문에 그런 말이 들려온 것이 그랬다.
지난해 11월에 우리들 ‘재경문경시산악회’를 창설해서 혼신을 다해 이끌어 가시는 김규진 회장님이 문경시 외곽인 호계면 출신이라고 얕잡아보고 한 말이다.
우리 고향땅 문경의 명문인 문경중학교 12회 동문으로 내게는 한 해 선배가 되는데도, 그런 것은 안중에 두지 않고, 거슬러 거슬러 까마득한 옛날에 살던 곳을 가지고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얕잡아 보니, 내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편견이라면, 더 옛날로 거슬러 우리 고조 증조할아버지가 호남 땅인 전라남도 화순 곡성에서 사셨던 것으로도 나를 얕잡아 볼 것이고,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누구 못지않게 공부를 잘 했음에도 오로지 대학을 못 다녔다는 것으로도 얕잡아 볼 것이고, 검찰부이사관의 직급으로 명예퇴직을 했음에도 초임이 국가공무원 9급인 검찰서기보였다는 것으로도 얕잡아 볼 것이고, 나름의 소신에 따라 혼기를 미리고 있을 뿐인데도 우리 막내 아직 장가 못 보냈다고도 얕잡아 볼 것이다.
그런 편견, 내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흔들릴 내가 아니다.
나는 곧 나다.
우리 ‘재경문경시산악회’ 회원 모두가 꼭 나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