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4대 미인이라 하여 양귀비(楊貴妃),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 서시(西施)를 들지만 서양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권위가 단연 압권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수하 중 프톨레마이오스란 자가 있어 마케도니아의 멸망 이후 이집트로 건너가 왕조를 세웠는데, 여왕일 경우 '클레오파트라'라 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로 태어난 클레오파트라 7세(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다)에 이르러 신하에게 자리를 빼앗긴 클레오파트라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시이저를 찾아가 지지세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데, 이때 시이저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간 모종의 3각관계가 발생한다. 시이저 사후 권력 공백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나누어 맡고 있던 三頭정치 시대(3명의 정치가가 비교적 균등하게, 그러나 불안정하게 권력을 나누어 갖는 체제)에 이르러서도 안토니우스 장군과 클레오파트라의 세기적인 스캔들은 여전히 유효해서, 안토니우스는 정숙한 부인 옥타비아와 가장 유력한 시이저의 후계자 자리조차 내던졌기에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지구의 모든 표면이 어쩌고…" 하는 파스칼의 경구로도 후일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실상 클레오파트라는 용모에 있어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실제의 미모 그 자체는 결코 누구나 경탄할 만큼 그렇게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플루타르크, 안토니우스傳). 물론 덧붙여진 찬사가 있긴 하다. "그녀와의 교제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대화시 설득력 있는 태도와 함께 주위 사람을 향기롭게 감싸는 태도는 뭔가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그렇다면 권력자의 주변을 감싸고 도는 아첨꾼들이 미사여구로 포장의 극대화를 기했던 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랬단다', '∼었었단다', '∼었었다고 그랬단다', '∼었었다고 그랬다고 전한다'로 이어지다가 종내 그런 것인 양 굳어져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美)의 기준이야 제각각이라 어디에든 고정화시킬 일은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 시대적, 문화적 기준에 따라 보편적으로 설정된 합의야 있겠기에 각종 미인 대회가 존속하는 것일 게다. 연전에 미스 이탈리아에 사상 초유로 흑인이 선발되었다고 해서 시끌벅적했던 것도 지금껏 관행상 미의 기준이라 여겼던 것이 도전받았다는 뜻일 것이니, 해마다 선발되는 미인들이 그 시대 그 사회의 최고 미인이란 것도 어불성설이겠고, 더구나 미인대회의 선발기준을 사회 일반의 여성들에게 적용한다는 것도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다. 즉 美에 대해 접근해 보는 '부분적 미' 일뿐 결코 일반화된 시각이나 기준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오파트라든 누구든 영 못생기기야 했으랴만 용모만으로 길이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은 정녕 아닐 터이다.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바로 그들의 개성미다. 세상에는 건강미니 청순미니 하며 언어상으로 갖다 붙인 부분적인 미야 많을 것이나, 하나의 획을 그을 만한 역사적 소용돌이의 중심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기까지 그들이 지닌 기질, 지식, 교양, 품격, 언어구사 능력(실제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와 이집트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했다고 전한다), 섭외력, 상황대응력 등을 총체적으로 더한 개성미야말로 진정 그들이 지닌 매력의 근원지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생명력을 가지는 종합적인 아름다움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고 보면 미의 기준에 대한 시선은 외부가 아닌 나 자신으로 향한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자신 아닌 그 누구도 자신의 개성을 따를 순 없을 것이니, 개성미는 오로지 본인만이 보듬어 가꿀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적 표현으로 바꾸면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가 아닌,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걸맞게 나는 오늘도 나를 가꾸며 내가 내 이름을 불러간다면', 아마도 이미 존재한 여러 클레오파트라들 외에도 많은 클레오파트라들이 잇달아 등장할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개성미여, 영원할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