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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98년의 아오이 스테나 전투는 시간적으로 그 해의 어디쯤에 배치될 수 있는가? 이 시기의 연대기적 정보들은 대체로 느슨하게 서로 부합되는 맥락 가운데 들어있다. 먼저 봄이 시작되자 필리포스는 아테나고라스에게 선행 부대를 맡겨 "에페이로스를 지나 카오니아로" 보내고(Liv.32.5.9) 며칠 뒤 자신도 출발했다.(Liv.32.5.10) 마케도니아군의 이동 경로는 에페이로스 동부의 산악 지대를 지나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실제로 그 이동은 완전한 초봄보다는 산지의 눈이 다소 녹은 4월 초 즈음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cf>Walbank P p319)
P.빌리우스는 마케도니아군이 아오이 스테나를 점거했다는 소식에 코르퀴라로부터 왔으며, 적군 근처로 군대를 이동시킨 후 여러날 회의를 거듭하다가 T.플라미니누스가 이미 코르퀴라에 도착했음을 듣게 된다.(Liv.32.6.1-4) 이후 플라미니누스의 도착(Liv.32.9.6), 40일간의 대치(Liv.32.10.1), 강화 회담(Liv.32.10.2-8), 다음날의 전투(Liv.32.10.9), 목동의 정보 제공(Liv.32.11.1)과 계곡을 우회하기 위한 별동대의 출진(Liv.32.11.6)이 이어진다. 별동대는 마케도니아군의 뒤로 돌아가는데 3일이 걸렸으며,(Liv.32.12.1) 그 즈음 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Liv.32.11.8)
마케도니아군은 본국에서 아오스 강의 계곡지대까지 오는데는 대략 10일이 걸렸을 것이다. 로마군의 동영지는 아폴로니아였던 것으로 보이며,(Liv.31.40.6) 그렇다면 빌리우스의 도착은 마케도니아군의 아오이 스테나 점거로부터 최소한 5일(첩보가 전해지는데 하루, 빌리우스가 아폴로니아까지 가는데 이틀, 아폴로니아에서 군대가 아오이 스테나까지 가는데 이틀)이 더 필요했을 것 같다. 그는 "여러날"을 회의로 소모했는데 그 기간은 특정하기 어렵다. 일단 이로부터 플라미니누스와 필리포스의 회담까지를 최소 45일로 잡고 다음날의 전투, "그 상태에서" 목동의 출현과 정보의 확인에 걸린 시간을 다시 5일로 놓으면 마케도니아군의 출발로부터 결정적인 전투까지는 적어도 65일 가량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아오이 스테나 전투의 시간적 상한은 대략 6월 초에 오게 된다. 에페이로스 북부에서 기원전 198년 5~8월의 보름은 매달 하순쯤에 발생했다.(*) 그 가운데 5월은, 마케도니아군의 출발이 더 빨랐다면 가능하겠으나 시간적으로 다소 빠듯하게 보이며, 7월 이후는 너무 넉넉하다. 6월 하순이 적당할 것이다. 플라미니누스의 로마 출발은 이로부터 약 2개월 전이었을 것이므로, 대략 4월 하순이 된다.
여기서 이어지는 사건들인 로마군의 에페이로스 통과, 테살리아 전역, 포키스 전역, 아카이아 연방의 배반 및 펠로폰네소스 전역, 로마군의 동계 숙영, 로크리스 강화 회담, 사절단의 로마 도착 등은 그 마지막 사건이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원전 197년의 집정관 임기 시작(1월 6일, 혹은 그 전해 12월 15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발생하는데 무리가 없다.
Kromayer 이후 아오이 스테나 전투의 발생을 6월 하순에 놓는 것은 통설적인 배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리비우스의 글 가운데는 이상의 배치와는 달리 아오이 스테나 전투가 실은 더 늦게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인상을 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기원전 197년도의 임무 배정 과정에서 나온 호민관들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플라미니누스는 종교 행사 때문에 임기의 "대부분(maiorem partem)"을 로마에서 보냈었다고 한다.(Liv.32.28.6) "대부분(maior pars)"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단 그것이 최소한 임기의 절반은 된다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198년의 집정관 임기는 1월 16일, 혹은 12월 25일에 시작되었으므로(Briscoe XXXIV-XXXVII p25) 플라미니누스는 6~7월까지도 아직 수도를 나서지 못했던 것이 된다.
O.Leuze는 만일 우리가 플라미니누스의 늦은 출발을 인정한다면,(그는 1~3개월 가량 늦출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적 실재성이 의심되는 어떤 한 사건이 실제로 발생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넓어지게 됨을 지적했다.(Leuze, Hermes58. H.2[1923]) 그 사건이란, 리비우스의 기원전 198년 연대기 가운데서 페르가몬 사절이 전해왔다고 하는 "안티오코스 3세의 페르가몬 침공"이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198년도의 고위 행정관 임무 배정과 군대 편성을 설명한 뒤, 문제의 에피소드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이 보낸 사자들이 집정관들에 의해 원로원에 소개되었다. 그 사자들은, 지키는 군대가 없는 페르가몬 왕국을 안티오코스 왕이 침략했으며, 이에 로마군이 대신 방어를 하러 가 주거나 혹은 아탈로스 왕이 귀국해서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원로원은 안티오코스 왕에게 "페르가몬을 침략하지 않으면 고맙겠으며, 로마 인민의 동맹이자 친구인 군주들끼리는 싸우지 않는 것이 옳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Liv.32.8.9- 16) 연대기의 그해 말 부분에는 후일담으로, 로마가 개입해 준 덕분에 안티오코스의 침략이 멈추었다며 어느 시점엔가 페르가몬 사절이 감사의 선물을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붙어 있다.(Liv.32.27.1)
이 에피소드에는 대단히 많은 문제가 있다. 먼저, 페르가몬 사절의 탄원 시점은 플라미니누스가 아직 임지로 떠나지 않았을 때이므로, 통설대로라면 기원전 198년 4월 말 이전이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안티오코스 3세의 페르가몬 침공이 알려진 것은 그 공격이 필시 기원전 199년 가을과 그 다음해 봄 사이에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탈로스 왕은 기원전 199년의 작전이 끝나고(대략 추분경. Liv.31.47.1) 엘레우시아 비의에 참석한 뒤 아시아로 떠났다.(Liv.31.47.2) 이는 마땅히 귀국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원전 198년도에 왕이 다시 출정하기 전에는,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군이 대신 방어를" 해 주어야 하거나 "아탈로스 왕이 귀국"해서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 될 수 없다. 또한,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98년 여름까지도 5차 시리아 전쟁으로 인해 아직 코일레 시리아에 있었음이 거의 분명하다.(Liv.33.19.8) 따라서 그가 페르가몬 왕국을 기원전 199년 가을~기원전 198년 봄에 침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로마 원로원이 안티오코스를 "동맹이자 친구"라고 불렀다는 것도 매우 이상하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이때 이미 로마와 동맹 관계였다면, 안티오코스는 어째서 기원전 195년과 기원전 194년에 새삼스럽게 동맹 체결 의사를 드러냈는가?(Liv.34.25.2,57.6, Ma p279)
사실 위의 문제들이 반드시 회피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첫번째 사항의 경우, 기원전 198년에 아탈로스가 만약 3월 초에 출정했고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침공이 바로 뒤이어 일어났다면 그 소식이 4월 중순쯤에 로마에 당도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물론 이러한 배치는 제법 빠듯하게 보이며, 플라미니누스의 출발을 늦춘다면 최소한 위의 시간표 만큼은 보다 자연스럽게 다듬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정론은 타당한가? 플라미니누스의 늦은 출발설은 기원전 198년의 함대 활동을 매우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리비우스에 의하면 집정관(**)이 필리포스와 대치에 들어갔을 때 즈음 집정관의 형 L.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코르퀴라로 갔다가 이미 함대가 출발한 것을 알았고, 케팔레니아 근방(※)에서 이를 따라잡은 뒤 피라이우스로 갔다. 그리고 같은 시기 아시아에서 아탈로스 왕의 함대와 로도스 함대가 왔고, 이 두 함대는 퀴클라데스 쪽에서 합세하여 에우보이아로 갔으며 L.플라미니누스도 이들의 도착 소식을 듣고 역시 에우보이아로 왔다고 한다.(Liv.32.16.1-9)
"같은 시기" 등의 전환구는 대개 엄밀성이 느슨하다. 그러나 위 대목에서 제시된 정보들은 실제로 서로 잘 연결된다는 점이 주목되며, 이는 플라미니누스 형제의 임지 도착과 세 함대(로마, 페르가몬, 로도스)의 출정이 대략 비슷비슷한 시기에 발생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만일 그것을 7월 초나 8월초 쯤으로 본다면 세 함대의 출발은 계절적으로 괴이하게 늦었던 것이 된다.(※※) 아울러 이러한 배치는 아오이 스테나 전투 이후의 사건들도 너무 늦은 계절로 미루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일 아오이 스테나 전투를 8월 하순으로 본다면 여기서 엘라테이아 공성 시작까지 단 두달만 걸렸다고 해도 후자는 10월 하순으로 가게 된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11월이나 그 이후로 늦추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코린토스 공성 포기와 함대의 철수는 그보다도 더 늦다. 물론 그런 계절에도 군사 행동이 꼭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해 후반 로마군의 활동 가운데 리비우스의 글 속에서 예외적으로 늦게 일어났다는 힌트가 있는 것이 오푸스 공략 뿐임은 유의될 필요가 있다.(§)
만약 플라미니누스의 임지 도착이 6월 초였다면 어색함이 다소간 줄어들기는 한다. 그런데 이 경우, 플라미니누스의 로마 출발은 대략 5월 하순의 일로 떨어지게 되므로 이 시점에서 그의 임기 소진은 4개월(1월 16일 시작일 경우)이나 5개월(12월 25일 시작일 경우) 가량으로, 그것이 임기의 "대부분"이었다는 호민관들의 주장은 여전히 거짓으로 보인다. 물론 Leuze는 호민관들의 발언이 과장된 것이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maior pars"의 어감이 만들어냈던 수정의 필요성은 크게 퇴색된다. 너무 심하지는 않은, 적당한 과장이 어떤 것인가 하는 판단의 기준은 모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플라미니누스의 출발을 늦춘다는 것은 곧 P.빌리우스가 아오이 스테나에서 대치한 시간을 더 길게 잡아야 함을 의미한다. Leuze는 빌리우스가 회의로 소모했다는 "여러날(per multos dies/많은날 동안)"에 주목하고, 만약 통설대로라면 이 기간은 길어야 보름 남짓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것은 "per multos dies"의 어감과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여러날"에 대한 재검토 시도 자체는 정당해 보인다. 날짜 계산에서 사실상 가장 모호했던 부분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어진 Leuze의 논의는, 역시 애매한 표현의 어감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보름 정도 회의를 하는 것이 "per multos dies"의 일이 되지 못할 까닭이라도 있는가?
이상의 관찰을 종합해 볼때, Leuze의 수정론은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다른 사건 배치들이 어색해진다는 점에서 크게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안티오코스 3세의 페르가몬 침공"에 좀 더 시간적인 여유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독보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꼭 그 정보에 진실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부여한다 해도 이것만이 가능한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오이 스테나 일대에서 기원전 198년 5월부터 9월까지 보름밤의 날짜는 각각 5월 25일, 6월 24일, 7월 23일, 8월 21일, 9월 20일이었다. 이는 Cartes du Ciel로 재확인하였다.
**"집정관"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만약 P.빌리우스였다면 "multos dies"가 상당히 짧았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이어지는 설명에서 L.플라미니누스를 "집정관의 형제frater consulis"라고 소개했으며, 이는 "집정관"이 T.플라미니누스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Walbank P p320.
※사메 섬(Liv.32.16.3:"Samen insulam"). 사메의 정확한 위치에는 호메로스의 "이타케"가 어디였는가와 유관한 논란이 있다. 오뒷세이아에서 사메는 이타케 근처에 있는 섬으로 나온다. 케팔레니아에는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었는데, Briscoe는 여기에서 리비우스가 기록한 사메는 그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Briscoe XXXI-XXXIII p194. Plin.NH.4.54에서는 케팔레니아와 자퀸토스 인근의 도서들을 소개하면서 사메를 역시 거론했다.
※※Leuze는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을 준비했다. 그는 아시아에서 두 함대가 왔다는 문장 서두의 "Eodem tempore(같은 시기에)"가 그 앞 문장과 관련이 없으며, 페르가몬 함대와 로도스 함대가 "동시에" 출발했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 표현의 통상적인 용례와는 맞지 않는 해석일뿐더러(Walbank P p322) 로마 함대의 늦은 출정은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Leuze는 자신의 해석과 비슷한 용례가 Liv.37.60.1, 37.33.1, 39.7.6에서도 발견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세가지 예 가운데 뒤의 두 경우는 그 주장의 증거가 되지 않으며, 긍정적으로 보아도 검증될 수 없는 사례 정도인 것 같다. 하지만 Liv.37.60.1에서 쓰인 "Eodem fere tempore" 에는 확실히 기묘한 점이 있다. 그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은 기원전 189년 11월경에 있었던 L.스키피오의 개선식인데, "Eodem fere tempore"에서 연결되는 사건인 Cn.만리우스의 아시아 도착은 그해 봄(Liv.38.12.2)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Liv.37.57-59가 리비우스의 30권대 기록 가운데서도 대표적으로 시간적 배치가 괴이한 부분이라는 점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Rich, Histos5) 예를 들어, 이해의 감찰관 선거는 주관 집정관들이 둘 다 출정하기 이전에 치러졌을 것이므로 아마도 그해의 초 쯤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0월에나 거행된 L.아이밀리우스의 개선식도 그때쯤("Per eos dies")의 일이라고 소개되고, L.스키피오의 개선식이 그 뒤를 따른다. "Eodem fere tempore"가 여기에서 특이하게 쓰였다기 보다는, 연대학적 오류가 그 앞장에서부터 이어져오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런데 또 한편, 이 정보는 아탈로스가 떠난 후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페르가몬을 침공하고, 이 정보가 플라미니누스의 출발 전에 로마로 알려질 가능성을 봉쇄해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Badian은 아탈로스가 로마 원로원의 허락을 받기 전에 귀국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Badian, CP54.
§사실, 리비우스는 아르고스 실함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이 "여름"에 발생했다고 보고했다.(Liv.32.25.12) 그러나 이 진술은 문면에 보이는 것 만큼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여름의 범위는 상당히 애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순히 캠페인 시즌을 뜻한 말로 쓰였을 수도 있고, 폴리비오스는 9월 말까지도 여름이라고 생각했던 정황이 있다.
§§기원전 199/198년의 페르가몬 공격이 진실이라면, 침공군을 지휘한 것은 안티오코스 3세 본인이 아니라 신하 장군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로마의 "동맹"이라는 정보도 아마 안이한 진술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단편적인 정보에서 이렇듯 속속 문제점이 발견된다는 것은 분명 좋지 않은 징후이다. Ma의 관측처럼, 이 에피소드는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훨씬 간단하다. Ma p281. 단, 이는 지나친 편의 추구일 수도 있기는 하다. Magie는 Leuze의 수정론이 지닌 또 다른 문제점을 제시하였다.(Magie p754) 만약 페르가몬 공격이 초여름쯤에 로마에 알려졌다면, 그해 가을에 일어나야 하는 사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즉, ①로마 사절이 안티오코스에게 가서 침공 중지를 약속받고 ②그것이 페르가몬 방면의 장군에게 전달되어 이행된 후, ③이 소식이 그리스에 있던 아탈로스에게 전해지고 ④아탈로스는 로마력 연말 이전에 감사의 선물을 보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반드시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소 서두를 경우 ①45일, ②보름, ③5일, ④1개월이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과정 사이의 인터벌을 합쳐 두세달을 설정한다 해도 ①의 출발이 원로원의 결정이 떨어지는 즉시 이루어졌다면 꼭 이런 일이 못 일어나리라는 법은 없다.
F. W. Walbank, "Philip V of Macedon" (1940). (>Walbank P)
J. Kromayer, "Antike Schlachtfelder in Griechenland: Bausteine zu einer antiken Kriegsgeschichte", Band 2, Die hellenistisch-römische Periode : von Kynoskephalae bis Pharsalos (1907).
J. Briscoe, "A commentary on Livy", books XXXI-XXXIII" (1973). (>Briscoe)
"A commentary on Livy, books XXXIV-XXXVII" (1981).
O. Leuze, "Die Feldzüge Antiochos' des Grossen Nach Kleinasien und Thrakien", Hermes 58. Bd. H.2 (1923).
J. Ma, "Antiochos III and the Cities of Western Asia Minor" (1999).
J. W. Rich, "Structuring Roman history: The consular yaer and the Roman historical tradition", Histos5 (2011).
E. Badian, "Rome and Antiochus the Great: A Study in Cold War", CP54 (1959).
D. Magie, "Roman Rule in Asia Minor" (1950).
첫댓글 매번잘보고있습니다 그런데 글 초반부에 카오니아가 에피로스의 다른이름인줄알았는데 서로아예 다른지역인가요?
카오니아는 에피로스의 일부입니다. 폴리비오스의 글에서는 아오이 스테나 전투가 에피로스에서(Polyb.18.23.4) 있었던 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리비우스 32.5.9의 언급 "per Epirum" 은 에피로스 영토를 완전히 관통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아.. 아오이.. 스테키...
그 상상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