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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일(토)
07:00 압구정 현대백화점 공영주차장 집결 및 출발.
11:30 남원도착
11:30 점심(화엄사 근처)
13:00 화엄사(각황전,사사자석탑 외)
15:00 연곡사(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동부도, 북부도)
17:00 농부네 텃밭도서관
18:00 저녁
20:00 소나무 숲을 살리기 위한 문화의 밤 행사
23:00 취침
7/22(일)
07:00 기상
08:00 아침식사
09:00 소나무 숲 산책 및 도서간 자유시간(농부님 강연 포함)
11:00 텃밭도서관 출발
12:00 쌍계사 근처 점심식사
13:00 쌍계사 답사
14:30 칠불암(아자방)
16:00 하동출발
22:00 서울도착 예정
* 답사지는 현지 사정상 변경가능합니다.
1)버스
이종원/명수기/똥구랑땡/우드/with/pony/풍경이/스와니/문라이트/촌색시/안다/동행인/뮈토스/아낙수나문/동행인/포비/맵시/코리안멕가이버/동행인/보리/살수기/이봄날에/가바다/가바다동생/덜깬주님/향기야/바다라네/까마/늘푸름/하늘벼리/짝궁(31명)
2)개별차량
난쟁이 똥자루(하동)/남해대교(남해)/버섶/아라/레오 4804/카메노/도브/유리공주(부산)
단지(상주)희망여행(울산)/날씬이/어린청룡/왕족/옆지기(14명)
섬진강
섬진강의 위치와 물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계곡을 따라서 강으로 모여 바다로 흘러간다. 사람들은 강을 따라서 모여 살면서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왔다. 한강, 낙동강, 두만강, 압록강, 영산강, 섬진강, 금강 등 우리나라의 모든 강이란 강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문학작품을 잉태했다.
원래 섬진강은 가람・사수강・사천・다사강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초부터 두치강으로 불렸다. 고려 우왕 11년(1385)에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광양군 진상면 섬거에 살던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20리나 떨어진 광양군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떼를 지어 몰려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놀란 왜구가 도망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부터 강 이름에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자를 붙여 섬진강이 되었다고 한다.
섬진강은 총 유역 면적은 4896.5㎢이고, 본류의 유로 연장은 212.3km로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긴 강으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남도를 가로지르면서 68개의 제1지류, 129개의 제2지류, 53개의 제3지류, 그리고 15개의 제4지류를 받아들이면서 흐르다가 남해바다로 흘러들어 간다.(남한에서는 4번째로 긴 강이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 신암리 원신암에서 발원하여 전북 임실과 순창, 전남 곡성, 구례, 경남 하동을 지난다. 임실면 강진면 옥정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건설되면서 운암호/옥정호가 생겨났다. 남원에 이르러 요천과 합류하고 곡성의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한다. 구례를 지나면 지리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물을 품어 안고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부터 섬진강 물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며 흘러 전남 광양시 진월면을 지나 남해 광양만에 다다르고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섬진강 유역은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요산으로는 지리산(1,915m) 줄기와 마이산(678m), 내장산 신선봉(763.2m), 무등산(1186.8m), 사자산(666m), 제암산(807m), 존제산(703.8m), 조계산(884m), 백운산(1,217m) 등 고산준령에 둘러싸여 있어 다른 하천에 비해 넓은 평야가 발달하지 못했다.
섬진강 유역의 지질은 선캄브리아기, 소백산계 편마암층, 지리산계 편마암층으로 된 변성암과 이들 암석층을 뚫고 올라온 중생대 쥬라기와 백악기의 화강암이 분포하고 있으며, 일부지역에 신생대 제4기 충적층이 나타나며, 곳에 따라 안산암류로 된 중성 또는 염기성의 화산암을 볼 수 있다. 지역별 지질 분포를 보면 하동, 보성, 진안 등에는 편마암계가 널리 분포되어 있고, 마이산과 그 주변에는 백악기말에 형성된 역암이 나타난다. 남원, 오수, 순창 등에는 중생대 대보화강암과 백악기 화강암이 주로 나타난다. 제4기 충적층은 주로 구례와 남원 등의 하천에 분포되어 있다.
섬진강 유역의 연평균 기온은 11.82℃, 연평균 강우량은 1,400mm로 우리나라에서 강수량이 많은 다우지역 중의 하나다.
섬진강 유역은 모두 인위적으로 형성된 4개의 담수호가 있다. 섬진강 본류 상류지역에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인 섬진강 댐이 건설됨으로써 운암호/옥정호가 생겨났으며,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에 주암댐, 동복댐, 보성강댐이 건설됨으로써 주암호, 동복호, 보성호가 새로이 생겨났다.
섬진강의 명소
섬진강 유역에는 지리산, 마이산, 회문산, 성수산, 강천산, 무등산, 조계산, 백운산, 내장산, 제암산, 존제산, 사자산 등의 유명한 산이 있다. 그리고 성수산 자연휴양림, 세심 자연휴양림, 회문산 자연휴양림, 제암산 자연휴양림, 백아산 자연휴양림, 안양산 자연휴양림 등이 있다. 그리고 섬진강 유역의 사찰들로는 쌍계사, 칠불암,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 태안사, 도림사, 만복사, 송광사, 선암사, 강천사 등이 있다. 지리산 노고단, 옥정호와 운암대교, 진안 풍혈 냉천, 화순 적벽, 화순 물염정, 사선대, 매천사상, 운조루, 청학동 삼성궁, 악양정, 정령치, 성삼재, 여원재, 지리산 온천, 구례 금환락지, 불일폭포, 하동 송림, 하동 포구 팔십리, 압록 유원지, 화개장터, 주암 고인돌 공원, 보성 미력 옹기, 왕시루봉 선교사 별장촌, 쌍계사 차시배지, 광양 매화마을, 구례 산수유마을 등의 명소가 있다.
섬진강의 문학
섬진강 유역은 예부터 남도의 풍류와 멋을 간직한 고장으로 경외의 대상인 지리산을 품고 있는 지역이다. 남원의 광한루원은 고전 소설인 ‘춘향전’이고, 섬진강의 동쪽과 서쪽에 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가 발달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남원을 무대로 ‘만복사저포기’라는 한문소설을 쓰기도 했다. 지리산을 무대로 한 시와 소설, 여행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섬진강은 많은 문인들을 낳아서 길렀다. 섬진강 상류지역인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은 김용택 시인의 고향이고, 작고한 조태일 시인은 섬진강 중류지역인 전남 곡성군에 있는 태안사에서 태어났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오지리는 소설가 공선옥의 고향마을이다. 그 밖에 고은, 곽재구, 민병일, 박라연 등의 시인이 섬진강을 노래했다. 섬진강 하류지역인 하동군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한 소설가 김동리가 단편소설 ‘역마’를 썼고,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에서 태어난 조선의 마지막 선비 황현은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 만수동과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에서 거주하면서 ‘매천야록’을 남겼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소설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박경리가 이곳을 소설의 무대로 삼은 사연은 자신의 딸이자 시인 김지하의 부인인 미술사학자 김영주가 불교 미술 연구의 일환으로 탱화 자료를 수집하러 다니는 길에 동행했다가 우연히 평사리를 발견하고 '토지'의 무대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경리는 그 때 평사리를 들른 이후에 다시 평사리를 답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작품 집필의 절대적인 배경자료로 삼은 적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집필하기 위해 어렸을 때 자신이 살았던 곳이기도 한 벌교 일대를 여러번 답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평사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토지'의 배경이 실제 평사리와 다르다면서 '사실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입장과는 반대로 작가는 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소설쓰기를 했다. 박경리와 조정래의 소설쓰기 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는 각자의 세계관과 예술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섬진강
다른 강들과는 달리 남류하여 배역의 강으로 찍힌 섬진강은 원래는 사수강, 사천, 두치강으로 불렀다. 지금의 이름은 고려 우왕 11년에 왜구들이 경남 하동 쪽에서 강을 건너 광양 쪽으로 침입했을 때의 일화로부터 기인한다. 즉 이때 진상면 섬거에 살던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8킬로미터나 떨어진 지금의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떼를 지어 몰려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왜구들이 놀라 도망쳐 광양을 피해갔다는 것이다. 해서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을 붙여 섬진강이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두꺼비 강이 되었다.
이런 지리적 상황은 이후에도 이곳은 왜구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고 정유재란시 왜구의 전라도 공략으로 많은 피해를 본 곳이다. 이는 섬진강변이 남원 전주를 거치는 유일한 길이란 말이고 강 좌우 연안 산에는 산성들이 만들어 지고 여러 곳에 포구와 진이 자리하고 있다. 옛길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용되는 것이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팔공산에서 발원(약간의 이견은 있음)하여 섬진강댐에 이르게 되며, 남동류하여 순창에서 오수천, 곡성읍 경계에서 요천, 압록에서 보성강 등의 지류와 합류하여 광양시와 하동군에서 남해와 만나는데 68개의 물줄기가 모이는데 희고 고운 모래가 유명하다. 마지막 화개천의 물이 합하는 곳에 산의 물산과 수산물이 만나는 큰장 화개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곳 아래가 섬진나루로 1932년 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 영·호남의 주요 교통로였다.
섬진강은 동쪽에는 낙동강, 서쪽에는 영산강과 동진강, 북쪽에는 금강과 만경강유역이 접하고 있다.(문화의 교류와 밀접) 유역면적(4,897㎢)과 본류의 길이(225km)로 볼 때 남한에서는 한강과 낙동강, 금강에 이어 4번째로 크고 긴 강이다. 하지만 서울과 반대로 흐르는 강이라 밉살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인 섬진강댐이 1929년 건설되어 운암호(옥정호)가 만들어졌으며,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에 주암댐, 동복댐, 보성강댐, 상사댐이 건설되 주암호, 동복호, 보성호, 상사호가, 섬진강 하류인 광양에 수어호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섬진강은 먹어도 제대로 위장에 오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물은 줄고 오염물질은 늘어 예전의 섬진 청류는 지금 상상하기가 어렵다.
은어
몸길이 약 15-20여 cm의 민물고기로 하천으로 올라오면서 성장하는 1년생으로 은광어(銀光魚), 은구어(銀口魚)라고도 한다. 9∼10월이 산란기에, 모래와 자갈이 있는 장소를 이용하며, 1주일만에 부화한 은어는 바로 바다로가 근해에서 겨울을보내고 수온이 비슷해지는 3∼4월에 태어난 하천으로 거슬러 올라오며 여름에 대부분 성장한다. 연어와는 반대로 성장한다.
특히 물이 깨끗한 강 밑바닥에 자갈이 깔려 있는 곳을 좋아하며 즐기는 먹이는 돌에 붙은 이끼다. 전남의 경우 섬진강과 탐진강에서 볼 수 있으며 은어는 기생충이 없어 고급식용어로 알려졌으나 최근 오염이 심해지고 있다.
다슬기
우리나라 냇물에 흔한 연체동물로 물고둥이라고도 한다. 깨끗한 하천에 주로 서식하고 2급수와 3급수 지표생물로 껍데기는 높이 약 30mm, 지름 약 12mm가 보통이며, 큰 것은높이가 60m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에 아홉 종류가 있는데 껍질에 나사모양의 띠가 10개나 되는 것도 있으나 대개 뾰족한 끝부분이 부식되어 없어지고 3∼4층만 남는다. 껍데기 표면은 황록색으로 흑갈색의 띠가 있으나 흑색으로 오염된 것도 있다. 주로 냇물 속의 바위나 자갈에 붙어 있는 조류(藻類)나 물고기의 배설물 같은 것을 먹고 산다. 주로 ‘올갱이 국밥’의 원재료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즐겨 먹는 향토음식이나 양식이 어려워 공급이 달린다고 한다.
깨끗한 물에 사는 다슬기는 "사라지면 수중 생태계도 무너져 결국 죽은 하천"이 된다.
지리산개요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915m이다.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地理山)이라 불렀고, 또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하는 지리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흘러내리는데,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과 봉황산에서 흘러온 섬진강이다. 이들 강으로 화개천, 연곡천, 동천, 경호강, 덕천강 등 10여 개의 하천이 흘러들며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 ‘지리산 12동천’을 이루고 있다.
지형은 융기작용 및 침식·삭박에 의해 산간분지와 고원·평탄면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어 있다. 최고봉은 섬록암(閃綠岩)으로 되어 있고 주변은 화강암·화강편마암의 지질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국보·보물 등의 문화재가 많으며, 800여 종의 식물과 400여 종의 동물 등 동식물상 또한 풍부하다.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
신라 5악의 남악으로‘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地理山)이라 불렀고, 또‘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신비함만큼이나 많은 이름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품 같은 곳이다. 지리산에 올라서서 내려보며 이야기를 해야 쉽겠지만......
1만 5천봉의 우리나라 제일의 명산으로 이야기되며, 백두대간의 남쪽 끝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으로 품이 너른 영산이다. 큰 산은 15개의 큰 골짜기 사이로 들과 마을과 사람과 사연을 모듬고 있다. 산의 형세가 누운 소와 같은데 구례쪽으로 머리를 하고 있어 구례쪽을 "내지리" 경상도쪽을 "외지리"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높이 1915m의 천왕봉을 주봉으로 반야봉과 노고단이 지리산 3봉으로 꼽힌다. 그런 산은 영, 호남의 경계상에 자리해 남부지역의 지붕과 같으며 3도 5시·군, 15읍·면에 걸친 대략 320㎞, 800리에 이르는 산이다. 대부분이 산악으로 계곡 주변에 만들어 진 농지는 겨우0.3%에 불과하다. 기온의 일교차와 한서차, 표고차가 큰 편이고, 강수량도 많은 편이다. 얼음은 10월 중순 쯤 얼고 4월말 경에 녹으며, 단풍은 9월말부터 들기 시작한다.
야생동식물의 서식에 맞는 환경으로 1,300여종의 식물과 421종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세석고원의 철쭉군락, 반야봉의 구상나무군락, 천연기념물인 사향노루, 하늘다람쥐, 반달가슴곰, 수달 등이 관심을 갖게 한다.
현재의 지리산은 과거의 땔감과 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되어 숲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도 몰래 희귀나무나, 분재를 캐가거나 수액 채취로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국립공원에 맞는 대책의 강구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산 골 깊은 곳에 도를 닦는 그들은 답을 알지도 모르겠다. 1967년에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오고 있다.
지리산 10경
① 노고운해(老姑雲海):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구름 바다 주변의 철쭉, 진달래와 콤비
②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 단풍이 10월 중순이 절정으로 은근함이 멋, 삼홍의 명소
③ 반야낙조(般若落照): 반야봉에 앉아 서북병풍이 황금빛 그림자 드리우면 호접한 사념의 세계 맛봄
④ 섬진청류(蟾津淸流): 300리 물줄기의 지리산 푸른빛이 어울어지고 은빛백사장의 거룻배
⑤ 벽소명월(碧沼明月): 벽소령의 한(恨) 머금은 듯 적막한 밝은 달빛
⑥ 불일현폭(佛日懸瀑): 쌍계사 뒷 계곡의 동양화 같은 포말 날리는 2단 폭포와 주변 절경
⑦ 세석철쭉(細石정 ): 오뉴월의 연분홍 철쭉 바다의 낭만적 세석고원
⑧ 연하선경(烟霞仙景): 연하봉의 이끼 드리운 기암괴석과 꽃, 그리고 트인 전망
⑨ 천왕일출(天王日出): 천지개벽 같은 오색빛의 회색구름바다를 연출하는 동틀녘
⑩ 칠선계곡(七仙溪谷): 흰 바위 위로 시퍼런 계류가 흐르고 떨어지는 지리산 최고의 계곡
빨치산 이야기
지리산 자락과 함께 떠오르는 색깔 붉은 색, 그 색의 한켠에 부정과 비극의 의미로 남은 말이 빨치산이다. 영화 "남부군"으로 다소 부드러워진 느낌이나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쉽지 않은 단어다.
빨치산은 "파르티잔(partisan)"의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나온 말로,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나, 지금은 유격대원의 의미로 에스파냐어의 "게릴라"와 구별되지 않는다. 즉 유격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非正規軍)을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빨치산은 주로 적의 배후에서 통신·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하고 인원을 살상한다. 일반주민의 도움 없이는 가능하지 않고, 그 지방의 지리·지형에 밝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전후에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흔히 떠오른 이름 이현상,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지리산은 피의 산하였다. 1952년 빨치산 대몰살의 현장이었던 대성골, 거림골, 빗점골, 의신부락 등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지리산의 주요 도로는 이때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죄 없는 수많은 민간인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것은 더 슬픈 일이다.
14연대 반란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지리산의 빨치산은 지창수의 주도로 제주도 폭동진압에 출동을 거부한다 명분으로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22일 아침에는 지리산 자락의 구례 등지도 점령한다. 이후 14연대 반란군 패잔병들은 그 후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의 문수골, 화엄사골 등으로 숨어든다. 지리산이라는 넓은 지형과 보급 투쟁에 용이한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투쟁에 들어간다. 그러나 호남지구 전투사령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로 정비하면서 반란 지도부가 사살되고 1,000여 명의 유격대는 대부분 투항, 사살되어 200여명 밖에 남지 않자 그 공백을 좌익 동조자들의 입산으로 매꾸면서 민간인 피해가 늘었다고 보여진다.
군사적 지도를 맡은 이현상은 게릴라의 원칙으로부터 이탈된 모습으로 전개되고 대대적인 동계토벌 작전이 진행되면서 빗점골에서 이현상 등이 사살되면서 빨치산이 54년 4월경에는 100여명에 불과해 빨치산은 종말을 고했다. 여러 이유로 투쟁은 실패했다. 해방구를 만들 만한 공간이 부족했던 점, 식량과 무기를 제대로 보급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민중들의 지지와 협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처는 너무도 컸다. 이유 없이 죽어간 곳곳의 양민 학살 사건과 남겨진 사람들 간의 갈등은 아직도 이 산자락의 삶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록이 없는 사실에 대한 살아있는 증언이 필요함에도......
화엄사
1)화엄사 개요
지리산 화엄사는 신라사찰 가운데 지리산에 세워진 1호 이다. 그리고 한국 10대 사찰의 하나로 조계종 19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화엄사에는 각황전, 석등, 4사자 5층 석탑 등 국보 3점과 보물 5점 천연 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사찰문화재 29점이 보존돼 있다.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54년)에 인도 승려 연기가 만들었으며, 선덕여왕 11년(642년) 자장이 다시 세우고, 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의상이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1979년 발견돼 『 신라화엄사경』에 의해 화엄사는 8세기 중엽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가 창건한 절임이 밝혀졌다는 설이 나왔다. 이 절은 신라 불교의 대가람(절)으로 크게 발전해 억불 정책을 썼던 조선 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다 한다.
벽암스님 제자 계파스님은 스승의 명을 받아 장륙전 충창불사를 시작했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밤새 부처님께 기도를 하다 한 노인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다음날 아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는 노인에 말에 따라 아무도 몰래 길을 떠났다. 한참 길을 가다 한 노인 만났는데 간혹 절에 찾아와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던 노파여서 스님은 매우 난감했다. 그러나 스님은 간밤의 계시를 떨쳐버릴 수 가 없어 가난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 노파에게 장륙전 건립 시주를 권했다.
노파는 하루종일 간청하는 스님정성에 감복, 『이 몸이 죽어 왕궁에서 태어나 큰 불사를 하리다.』며 길가 늪에 몸을 던졌다. 스님은 너무도 놀라 멀리 도망쳤다. 그 후 스님은 돌아다니다 서울에 이르렀는데 유모와 나들이 나온 공주가 스님을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매달렸다.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꼭 쥔 채 펴지 않던 공주손이 스님이 만지니 신기하게도 펴졌다. 그리고 손에는 장륙전(丈六殿) 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자초지종을 듣고 장륙전을 불사할 수 있도록 시주했다 한다.
마침내 장륙전이 완공되자 계파 스님은 이 웅장한 건물은 대왕을 깨우쳐 보전 (寶殿)을 중건했다 하여 이름을 각황전(覺皇殿)으로 고쳐 불렀다. 국보 제 67호인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여수의 진남관, 통영의 세병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목조 건축물이다. 2층이지만 내부가 통층(通層)으로 되어 있다. 그 규모의 장엄함과 함께 빛바랜 단청에서 고색 창연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원래 이름 장륙전은 부처님의 몸을 장륙금신(丈六金身)이라 하고 석가여래 모습 만한 장육의 금불상을 모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각황전 앞에는 6m가 넘는 거대한 석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으로 섬세하면서도 시원하며 국보 제 12호이다.
각황전 왼쪽에 108계단을 오르면 효대(孝坮)라 불리는 높은 언덕이 나오는데 이곳에 국보 제 35호인 4사자 5층 석탑이 있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으로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이형석탑이다.
가운데 스님상은 연기 어머니라 전해진다. 그리고 화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동서로 나란히 5층 석탑이 서 있다. 동쪽의 그것을 동5층 석탑이라 하며 서쪽의 서 5층 석탑이라 하는데 각각 보물 제 132호와 제 133호로 지정돼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벽암각성대사가 다시 지은 화엄사 대웅전은 조선 중기 이후의 대표적 건축물로 보물 제299호로 지정돼 있다. 화엄사의 수많은 불교 유적은 얼핏 산만하게 배치된 듯 하지만 화엄사의 대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 화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공간이다.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 서 있는데 일직선 가람 형태에서 느낄 수 없는 다른 그 무엇이 느껴진다. 일주문은 다소 소박한 편이며 금강문과의 사이에 화엄사 중창주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있다.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위해 지은 보제루가 있는데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이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커다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놓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화엄사에는 또 눈길을 끄는 것이 천연 기념물38호로 지정돼 올벚나무이다. 벽암선사가 마음의 눈을 뜨면 세상의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심었다 한다.
2)화엄사각황전(국보 67호)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3) 화엄사각황전앞석등(국보 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4)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화엄사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6)화엄사영산회괘불탱(국보 301호)
가로 7.76m, 세로 11.95m에 이르는 거대한 화면에 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보살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십대제자, 2구의 분신불, 시방제불(十方諸佛) 등이 적절하게 배치된 군집도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중앙에 높다랗게 마련된 단(壇)의 연화좌 위에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는 본존불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키모양 광배를 지니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과 함께 삼존상(三尊像) 중심이지만, 하단부에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사천왕상 2구와 더불어 마치 오존도(五尊圖)처럼 구성되어 있다. 사천왕 중 나머지 2구는 화면 상단 좌우에 그려놓아 네 모서리를 지켜주는 것과도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을 위시한 각 상들의 형태는 균형잡힌 모습으로 둥근 얼굴에 어깨 또한 동그스름하게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각 상의 이목구비는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기다란 귀를 하고 있다. 육계가 뾰족해진 석가불의 머리에는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가 뚜렷하며, 커진 화면과는 달리 사용한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여 각기 상들에 개성과 함께 세련미를 더해주고 있다. 홍색과 녹색 위주의 색조는 밝고 화사한 중간색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주며, 특히 화려한 채색무늬와 금색무늬는 한층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늘씬하고 균형 잡힌 형태에 치밀하게 장식된 꽃무늬와 작고 둥근 꽃무늬,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등은 17세기 중엽경의 불화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괘불도는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7)화엄사 대웅전삼신불탱(보물 1363호)
중앙의 비로자나불탱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노사나불탱,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탱을 각 한 폭씩 그려 봉안한 것으로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도는 화면 중앙 상단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과 8대보살, 4위의 타방불과 6위의 제불, 사자와 코끼리 탈을 쓴 성중(호계대신(護戒大神), 복덕대신(福德大神))들이 에워싸듯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키 모양 광배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지권인을 짓고 있는 본존불은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감이 있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길다란 귀를 갖추었으며, 다자색 법의의 깃을 따라 연두빛과 분홍빛깔의 보상화문이 장식되어 다소나마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보신(報身)인 노사나불도는 설법인(說法印)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상 2위, 4위의 타방불, 3신장과 4금강이 주위에 빙둘러 배치되어 있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는 있으나, 둥근 머리광배에 보관을 쓰고 귀걸이와 목걸이·팔찌는 물론 온몸에 영락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살형 불상으로서의 꾸밈이 돋보인다.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도도 유난히 몸광배가 큼직한 키형 광배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좌우 협시보살(문수(文殊)·보현(普賢))을 포함한 6대보살과 함께 2구의 사천왕상을 그리고, 그 위로는 흔히 등장하는 타방불 대신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존자를 위시한 10대제자 및 4금강과 3신장, 용왕·용녀를 에워싸듯 배치하였다.
이 삼신불탱은 18세기 조계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스님 외 많은 화원(13명)들이 동원되어 그린 수작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4m를 넘는 거대한 3폭의 화면에 삼신불을 완전히 갖춘 매우 드믄 예로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보물 제1042호, 1759년)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8) 화엄사서오층석탑사리장엄구(보물 1348호)
1995년 화엄사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의 해체보수공사시 탑 내부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일괄유물로 탑 건립시 함께 내장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백지묵서다라니경(白紙墨書陀羅尼經)은 고려시대 이전의 서적이나 기록이 거의 전존(傳存)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의 종이, 글자체, 문자 등 서지학적 혹은 불교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탑인(塔印)은 한국 고대인쇄사에 있어서 초기단계를 알게 해주는 국내 유일의 실물자료이다.
청동불상범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한 불상주조용 틀로서 불상의 대량생산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외 유물은 사리장엄법(舍利莊嚴法)이나 조각양식, 금속공예 기형과 기법, 청자에 대한 인식과 사용, 부녀수식(婦女首飾), 대중교섭사(對中交涉史) 등 당시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어 서지학, 미술사등 학술연구와 문화재적인 가치가 크다.
운조루
구름속을 나르는 새가 사는 집이란 뜻으로 1776년 지어진 100칸의 상류집이다. 금귀몰이라는 명당에 터를 잡고 "하늘이 이땅을 아껴 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은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구역으로 구분된다. 이 건물을 들어가면서 보는대로 현재의 상태에서 건물을 그려보면 먼저 입구에 큰 연못이 있고 긴 행랑이 있는데 그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고 그 솟을 대문의 살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다. 이 사랑채는 큰사랑(주인이 거처, 손님 접대, 숙식 제공- 이산루, 족한정, 운조루, 귀만와등의 현판이 있었음)과 아랫사랑(안주인의 몸종이 거처-귀래정, 농월헌)으로 나뉜다.
사랑채의 꺾이는 부분이 중문간이다. 이곳을 들어서면 안채가 나오는데 그 형태는 ㅁ자형이다. 그 중문간에는 "타인능해"라는 글귀가 쓰인 뒤주가 있다. 안방은 안주인의 일상 거처이며, 대청은 집안의 큰일을 치는 중심지로 안방과 건넌방을 연결한다. 건넌방은 자녀들과 며느리방으로 이용된다. 그리고 안방 부엌자리가 거북모양의 돌이 나왔다는 곳이다.
그리고 사당은 안채 담밖 동쪽 상단에 있다. ㅁ자형 안채의 서쪽은 정지 구역, 중앙은 안방과 대청, 동쪽은 건너방과 곡간이며 남쪽은 곡간채이다. 그리고 2층의 다락이 많아 물건 보관에 많은 공간을 할애하였다. 비를 맞지 않고도 건물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는 구조로 5량으로 대공 없이 서까래를 걸친 특이한 구조이다.
이곳은 이름처럼 루가 많다는 특징이 있으며 안채는 민간인 주택 구성인 반면, 사랑채는 루와 대청을 겸하고 있는 궁전 주택의 모습을 모인다. 또한 일자형 행랑도 궁전주택의 영향으로 보이며, 중문간을 통한 내·외채의 구별도 흔치 않은 경우다. 또한 규모에 비해 장식적 의장이 생략된 수수한 건물이며, 툇마루에 툇기둥을 생략한 특이한 구조다.
연곡사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54번지에 있는 절로 544년(진흥왕 7년,추정) 연기조사에 의해 세워진 절이다. 현재는 화엄사의 말사이지만 선종계통의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흔적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족하나 현재 남아 있는 유물들을 통해 판단해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 절의 규모를 확장했으나 임진왜란으로 1차 불에 탔던 것을 소요대사가 중창을 하고, 영조 때는 왕가의 신주목(위패목)을 봉납했던 곳이다. 한말 의병에 의한 저항, 한국전쟁 시 다시 모든 건물이 불에 태워져 거의 폐사 직전이었던 것을 1980년경부터 종인 화상에 의해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리산 자락의 다른 절들에 비해 규모에서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조각성이 뛰어난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피아골 단풍으로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곳이다. 주요 건물로는 대적광전(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 요사채, 선방 등이 있으나 모두 1981년부터 중건된 것으로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 관심을 끌수는 없다. 이곳은 반야봉 남쪽 기슭의 계곡 구릉지대 남향으로 그 규모를 넓히고 있다
(1) 동부도(東浮屠)
대적광전 뒤편에 있다. 국보 제53호로 연곡사 3기의 부도 중 가장 연대가 빠른 통일신라 말의 조각 양식을 보이는데 솜씨가 뛰어나다. 아래 기단에는 구름속의 용을, 그 위에 사자 2마리를 눈에 띄게 새겼다. 가운데 기단에 무기를 든 팔부신중을, 탑신 받침엔 가릉빈가를 새김 하였다. 그리고 지붕마루 끝면에는 풍탁을 걸어두었던 구멍이 있다.
탑 아래 부분이 높기는 하나 안정감을 잃지 않았고, 이 부도는 도선국사(827∼898년) 부도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2) 북부도
국보 제54호로 동부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양식이 동부도를 많이 따르고 있어 조각 양식이 비슷하다.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며, 정확한 주인을 알 수 없지만 현각선사의 탑비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구름무늬가 조각된 8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연꽃무늬를 새겨 가운데 돌을 지탱하고 있다. 탑신 각 면은 문짝, 향로, 사천왕상으로 장식되었고 지붕돌은 나무로 만든 건물의 기왓골 등을 정성 들여 새기고 그 위에 가릉빈가 등 각 부분의 조각이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특기할 것은 아래받침과 가운데 받침의 돌 재질이 다르다는 점이다. 한 돌로 만들어진 지대석과 하대석은 암갈색이고 중대석 받침부터 상륜부는 적갈색을 띤다.
(3) 삼층석탑과 현각선사탑비
이 삼층 석탑은 보물 151호로 절에 들어서는 일주문의 좌측에 있다. 3층의 네모꼴로 아래 부분이 3중으로 기단이 특이하다. 탑신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었고, 탑신에는 기둥(隅柱)이 조각되었다.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1967년 1월에 3층 지붕돌 복원공사 때 윗기단 안에서 높이 23.5cm의 동(銅)으로 만든 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소박하고 푸근한 탑의 하나로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서북편에 위치한 이 부도 비는 보물 제 152호 지정되었다. 옛 탁본에 의하면 고려 979년(경종 4)에 세웠다고 하며 현재 비문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여의주를 문 거북이 납작히 업드린 상태로 앞발을 살짝 들었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등위에 구멍이 있는데 물빠짐을 위해서인 것 같다. 등사면에 안상과 귀꽃이 특이하다. 이수 가운데에 <현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이 음각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에 깨뜨려졌고 동부도 비의 경우처럼 현각선사 비는 귀부와 이수 모두 불을 맞아 돌이 적갈색인 것으로 보아 일본군에 의한 탄압 방화 때문에 더 많은 훼손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현각선사의 탑비의 명문을 알 수 있는 비편은 6개 224자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그 글씨체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4) 서부도
절의 서북쪽에 있는 보물 제 154호로 지정된 부도는 탑신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일명 소요대사 부도라고도 한다. 소요대사는 1649년에 입적했고 부도는 그 다음 해에 세워졌다.
아래받침은 둥그렇게 감겨 올라가는 느낌의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상단 윗면 주위에는 홈이 파졌는데 뒤쪽과도 연결되어 물 빠짐 장치로 보인다. 가운데받침, 윗받침은 연꽃이 새겨졌고, 탑신은 문비를 새기고 다른 면에 신장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
옥개석 끝에 큼직한 귀꽃이 솟아 있으며, 상륜부는 완전한 상태며 새 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벼슬을 늘어진 모습이다.
(6)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순절한 고광순 의병장을 기리기 위해 구례 군민이 1958년에 세운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빼앗기자 항일의병이 일어나는데, 고광순은 담양 사람으로 1907년 8월 26일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진을 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전과로는 당일 화개에서 왜병 10여명, 27일에는 왜병 수명, 9월 6일에는 왜병 10여명 죽이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이처럼 여러 차례 전과를 보였으나 불행하게 야간기습에 패하고 10월 11일 연곡사 옆에서 전사했으며, 연곡사도 의병 활동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불태워졌다. 비는 앞면에 <의병장고공광순순절비>, 뒷면에 행적을 새겼다. 주위를 돌로 정리하고 자연석 위에 올려 놓아 다소 쓸쓸해 보인다.
*동부도
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면, 부도는 유명했던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이다.
부도의 구성은 석탑과 같아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이 부도는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부도 외에도 서부도(보물 제154호), 북부도(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부도는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 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 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피아골
지리산의 느낌으로 피아골을 빨치산과 연결하여 이야기하고 1955년대 반공적인 내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나 제목의 느낌은 반대다. 이런 역사와는 상관 없이 피아골은 원래 오곡의 하나였던 피(稷)를 많이 재배하였기 때문에 나온 이름으로 바로 그곳에 피밭골(稷田谷)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러 문학 작품과 수기들을 통해 이 지명을 접하면서 슬픈 지리산의 역사와 함께 각인된 듯 하다.
피아골은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에 자리잡은 계곡이다. 가을날의 피빛 단풍으로 지리산 10경의 반열에 든다. 기실 홍염에 불타는 단풍이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어 그렇지 피아골은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곳이다. 봄날에 피어난 철쭉은 명경 같은 계곡에 얼굴을 비추고 여름날 엔 한 올의 햇살도 허락치 않을만큼 녹음이 우거진다. 가을의 단풍은 두말할 나위 없고, 겨울엔 인적드문 호젓한 설국의 산길을 선사한다. 계곡초입에 지리산 제일의 거찰이었다는 연곡사와 국보급 문화재가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피아골은 가을철을 제외하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지리산 등산로 중 호젓한 곳에 속한다. 그러나 계곡안에 들어서면 단번에 뛰어난 흥치에 압도당한다. 연주담, 삼홍소 등 속을 알 수 없는 심연과 집채만한 바위들이 어울려 풍치가 뛰어나다. 매표소부터 피아골산장까지 6km는 그런 계곡을 건너다니며 오르는 길이라 눈이 즐겁다. 계곡 또한 가파르지 않아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다. 피아골 산장에서 임걸령까지 2km는 계곡에서 멀어져 가파른 산등을 올라가야하기 때문에 소금땀을 흘려야 한다.
여름철에 물놀이 하기에 좋은 곳은 연곡사에서 직전마을까지,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산장까지다. 계곡입구부터 삼홍소까지가 특히 아름다운데, 가을이면 삼홍소란 이름에 걸맞게 온 골짜기를 붉게물들인 단풍과 붉은빛에 젖은 계곡물과 삼홍소바닥의 바위까지 붉어 장관을 이룬다.
쌍계사
전남 구례읍에서 21km지점,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리에서 운수리까지의 6km구간에는 벚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바로 이곳 지리산 남쪽기슭에 신라 성덕왕 21년(72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스님이 창건한 쌍계사가 있다. 처음 이름은 옥천사였으나 그 후 문성왕 2년(840년)에 진감선사가 대찰로 중창시킨 후 887년 정강왕이 선사의 도풍을 앙모하여 ‘쌍계사'로 개칭하였다.
자연미가 살아 숨쉬는 청학루 보물 제925인 팔상전 영산회상도가 소장된<팔상전> 지금의 절은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인조 10년(1632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다. 봄철의 벚꽃이 특히 유명하며 계곡의 맑은물, 기암과 고목들이 어울려 빼어난 경승을 이룬다. 경내 볼거리로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 쌍계석문,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47호)를 지나 북쪽 500m 거리의 국사암 뜰에 천연 느릅나무(사천왕수), 또한 동북쪽으로 2km 남짓거리에 청학봉과 백학봉의 두 계곡을 끼고있는 높이60m, 폭3m의 불일푹포(지리산 10경 중의 하나) 등의 이름난 곳이 있다.
신라 성덕왕때 당의 혜능대사의 머리를 모셔와 이곳 땅 아래 안치하였다는 곳이다. 한편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신라 흥덕왕3년(828년) 김대렴이 당나라 사신으로 처음으로 차 나무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남쪽 줄기 쌍계사 일원에 심었다고 하며 일주문 못미쳐 차시배 추원비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 차밭에도 차 시배지 기념비(도기념물 제 61호)가 있다.
1)쌍계사 구층석탑
이 탑은 고산스님이 인도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올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삼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 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이과와 전단나무 부처님 일위를 모셨다.
2)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대웅전 앞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비석으로 신라 진성여왕 원년 (887)에 건립되었다. 신라 헌강왕의 칙명에 의해 신라 최고의 문호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진감선사의 전기비이다.
3)쌍계사 마애불
대웅전 동쪽 경내에 있는 큰 암석 한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두껍게 양각하였다. 그러므로 감실안에 봉안한 것 같이 보이는 특이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마치 승상으로 보일 만큼 소박한 형상이며 조성년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불일폭포
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의 하나이다. 쌍계사에서 3km지점에 있어 쌍계사를 답사한 후 불일폭포를 등산하면 좋은 여행이 된다. 쌍계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4백m쯤 오르면 국사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삼법화상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건립하여 수도하던 곳으로 삼법화상이 입적한 후 110년 만에 진감선사가 중건했고, 이로 인해 국사암이라고 이름 지었다. 또 이 국사암 입구에는 진감선사가 심었다는 사방으로 뻗은 네가지로 된 거목인 사천왕수가 특이하다. 숲속을 지나면 널따란 불일평전에 불일 휴게소로 불리는 아담한 집과 정원이 특이하다. 이 휴게소에서 약 2백m 가량 깍아지른듯한 비탈길을 내려가면 거대한 깊은 곳에 있는 불일암 밑의 만길절벽에 흘러 내리는 불일폭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처럼 중간의 학연에서 돌려 다시 쏟아져 내린다.
높이 60m, 폭 3m의 지리산 유일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거폭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 폭포이며, 계절에 따라 수량의 차이는 있으나 연중 단수의 고갈은 없다. 폭포밑에는 용추못과 학못이 있어 깊은 자연의 신비를 안겨주기도 한다
칠불암
쌍계사 북쪽 20리 되는 곳인 지리산 토끼봉(1533m) 아래 800m 고지에 있는 절이다. 연담 유일(1720-1799)이 쓴 칠불암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지리산 옥부선인이 부는 옥피리 소리를 들은 일곱 왕자가 입산하여 6년만에 도를 깨닫고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선사 옥보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7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을 짓고 수행하여 6년만인 103년 8월 보름에 성불했기 때문에 칠불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라 옥보고는 이 절의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 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칠불사는 1948년 여순반란군토벌 때 불에 타버려 다시 지었다. 신라 때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지었다는 아자방의 2중 온돌이 복원되어 있다.
1.아자방의 역사
신라 효공왕( 897~911)때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을 아자(亞字)모양으로 구들을 놓았는데 초기에는 한번 불을 때면 100일 가량 따뜻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8년 12월 15일 여순 반란 사건 반도 토벌 작전 때 마산 주둔 17연대 하동 파견 부대가 소각 전소시켜 아자방은 온돌만 남아 있었는데 통광 스님의 노력으로 1982년 현재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아자방은 넓이가 8㎡이고 방안의 네구석70cm 높은 좌선처이며 중앙의 십자형 낮은 곳은 경행처인데 『칠불선원 사적기』에는 신라 6대 지마왕 8년(119)에 소축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곳에서 서산대사가 정진하였고 조선 순조 28년(1828) 대은대사가 율종을 수립하였다. 이 아자방은 이중 온돌구조로 되어 있는데 방안 네 모퉁이와 앞 뒤 가장 자리 쪽의 높은 곳은 좌선처(坐禪處)이며, 십자형(十字形)으로 된 낮은 곳은 좌선하다가 다리를 푸는 경행처(輕行處)이다. 이 아자방은 유명해서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 졌으며, 방 구조의 탁월한 과학성으로 인해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 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2.아자방과 전설
이 아자방은 1976년 경남지방 문화재 144호로 지정된 곳이고 이제 수도승들에게 개방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정진하여 도를 깨친 승려들이 예로부터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수도하는 승려라면 누구나 지켜야될 3대 규칙이 있는데 첫째 묵언, 둘째 장좌불와, 셋째 하루에 한끼만 식사하는 1종식 등이라 한다. 천년간을 단 한번도 이 규칙을 어긴 적이 없는 이 선방은 수도승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는 것. 칠불사 보재루에 보면 어떤 스님이 돌을 등에 짊어지고 가는데 호랑이가 뒤에서 그 돌을 떠받치고 있는 그림이 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아자방과 연관된다. 옛날 어떤 스님이 쌍계사와 칠불사를 오가며 수도를 하였는데 밤에는 장좌불와의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하는 아자방에서 참선을 하고 낮에는 잠을 쫓기 위하여 큰 돌을 등에 짊어지고 쌍계사까지 행선을 하였다고 한다. 매일 쌍계사와 칠불사의 10km나 되는 험한 길을 등에 돌을 짊어지고 오가던 중 어느날 갑자기 돌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니 호랑이가 그 돌을 떠받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아자방이 개방되면 많은 수도승이 앞을 다투어 찾아 올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곳의 형태 자체가 누울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3. 아자방 이야기
조선 중엽, 지리산 칠불암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오가며 수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음, 칠불암 스님들이 도가 높다지. 어디 내가 한 번 직접 가서 그들을 시험해보리라."
전라감사는 그 길로 칠불암을 향해 떠났다. 칠불암에는 전라감사가 행차한다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칠불암에서 수행 중인 60여명의 스님들은 못들은 체 하고 참선에만 열중했다. 전라감사 일행이 풍악을 울리며 칠불암에 도착했으나 누구하나 마중 나오는 스님이 없었다.
다만 작은 체구에 쥐가 파먹다 만 것 같은 머리털을 가진 어린 동자가 감사일행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감사는 동자에게 소리쳤다.
"여기 스님들은 다 어디 갔느냐?"
어린 동자는 태연히 말했다.
"모두들 부처 되는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웬 황당한 소리인가?'라고 중얼거리면서 선 방문을 열어 젖혔다. 선방 안을 들여다 본 감사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방안에는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은 스님들이 가득하니 제멋대로 자고 있었다.
코를 골고 자는 스님, 머리를 천장으로 치켜들고 자는 스님, 방귀를 뀌며 자는 스님, 얼굴을 쳐 박고 자는 스님, 그야말로 천태만상으로 자고 있었다.
감사는 화가 나서 고개를 쳐들고 입을 해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는 스님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은 무슨 참선인가?"
동자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예, 저 참선은 별을 관하는 앙천성숙(仰天星宿) 참선이라고 합니다."
감사는 고개를 방바닥에 처박고 '푸푸'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스님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무엇 하는 참선인가?"
"예. 그것은 지장보살을 보는 참선이죠."
이번에는 방귀를 뀌면서 자고 있는 스님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저건 번뇌의 어리석음을 깨는 타파칠통(打破漆桶) 참선입죠."
동자의 대답을 들은 전라감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사는 좌우로 몸을 흔들며 자고 있는 스님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저건 무엇 하는 참선인가?"
"예. 저건 바람 앞에 흔들리는 버들가지 같은 풍전세류(風前細柳) 참선이죠."
마침내 감사는 잠자고 있는 스님들을 모두 깨우고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여러 스님들의 공부를 시험해 보겠소. 만일 내가 시키는 일을 못해낼 때에는 스님들의 목숨은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감사는 미리 만들어 온 나무 말을 칠불암 마당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님들 중 아무나 이 나무 말을 타고 마당을 일곱 바퀴 돌도록 하시오. 그것도 내가 마흔을 셀 때까지 다 돌아야 합니다."
선방의 스님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불같은 감사의 호령이 다시 떨어졌다.
"무엇들 하는가. 어서 명령대로 이 말을 타고 일곱 바퀴 돌으렸다."
그때 쥐가 파먹은 머리털을 가진 동자가 나서서 말했다.
"스님들은 모든 것을 제게 맡기시고 그냥 구경이나 하십시오. 아무 염려 마십시오."
동자는 나무 말에 올랐다.
"이랴!"
동자가 회초리를 휘두르는 순간 나무 말은 감사가 마흔을 세기도 전에 쏜살같이 칠불암 마당을 일곱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지리산의 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감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스님들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도가 높은 스님들을 몰라 뵙고 그만 경거망동을 했습니다. 부디 자비로서 용서해 주십시오."
그 길로 산을 내려온 감사는 전주감영으로 돌아와 제일 좋은 장판지를 떠서 칠불암 아자방 선방에 붙이도록 했다. 그리고 장판과 장판의 이음새를 은으로 붙이도록 했다. 그 장판지는 6.25이전까지 전해져 내려왔으나, 6.25와 함께 불타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원래 칠불암 아자방은 아(亞)자 모양으로 된 선방으로 한번 불을 때면 보름 동안이나 방이 따뜻했다고 한다. 최근 칠불암은 통광(通光)스님의 노력으로 복원되었으며 예전처럼 많은 스님들이 오가며 수도하고 있다.
일지스님『 禪 이야기』
농부네 텃밭도서관을 지켜주십시오
27년 전 쯤, 전라도 광양땅 어느 시골마을에 젊은 농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많은 꿈이 있었겠지요. 도시로 나가 번듯한 직장에서 돈 잘 벌며 폼나게 살아보고도 싶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고향마을에서 조그만 도서관을 꾸렸습니다. 책을 접하기 힘든 농촌 아이들과 농민들에게 더 많은 책을 읽히기 위해 틈 나는대로 경운기나 오토바이에 책을 싣고 시골마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의 꿈은 제대로 된 번듯한 도서관 하나를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25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농부님의 숙원사업이던 도서관의 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마당 한 켠에서 초라하게 꾸려오던 도서관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농부님의 노력으로 새롭게 건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새롭게 건립된 도서관에 농부님은 아이들을 위해 화단을 만들고 꽃팻말들도 붙였군요.
전국 각지에서 뜻을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이 책들도 보내주었습니다. 농부님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했습니다.
도서관이 부족한 시골아이들과 학생들에겐 농부님의 텃밭 도서관은 훌륭한 독서의 장소이며 또한 놀이공간이 됩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농부네 텃밭도서관을 모범사례로 참관하러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농부님이 일구신 텃밭과 화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자연학습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하나로 어울리는 대동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문화적 이벤트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된 시골사람들에게 풍부하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 문화적 허기를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농촌 아이들과 농민들을 위해 만들었던 농부네 텃밭 도서관은 이제 전국 각지의 도시인들에게 고향같은 마음의 안식처로 발전하게 됩니다. 어른들에겐 어린시절의 추억을 재현하는 장소가 되고 아이들에겐 신나고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하는, 그래서 가족 모두에게 행복과 화목을 만들어 주는 소중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이제 광양시 하면 농부네 텃밭 도서관을 떠 올리게 됩니다.
광양시 하면 <광양제철>만을 막연히 떠 올리던 저도 농부님으로 하여 광양시를 처음으로 찾게 되었고 광양시에 대해 모르던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도 농부네 텃밭도서관으로 인해 광양시를 알고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폐타이어 소각로를 만드는 공장이 건립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텃밭도서관에서 100m 정도의 거리에 건립된다고 합니다. 수십년 동안 일궈온 텃밭 도서관이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이룩한 농부님의 꿈도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저 숲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으며 백로떼들도 무시로 찾아와서 수다들을 떠는 곳이라고 합니다.
* 대하소설 [토지]
1969년 《현대 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지면을 옮겨가며 연재되어 1994년 9월 제16권이 발간되면서 완성된 박경리의 대표적 대하 소설 <토지>는 한국 현대 문학 100년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소설로 손꼽힌다.
구한말에서 8·15까지 경남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4대에 걸친 비극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한국의 개인사·가족사·생활사·풍속사·역사·사회사 등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작품이 1897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 시대 전체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둘째, 지주·소작인·친일파·밀정·의병·승려·지식인 등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상적 경향을 가진 가공적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의 인생 유전을 세밀하게 추적한다는 점, 셋째, 소설의 배경 무대가 한반도의 하단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진주·통영·경성·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일본의 동경으로 확대된다는 점, 넷째, 사건 중심의 기술에서 점차 등장인물들의 개인사 중심 기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관을 이룬다는 점 등이다.
즉, <토지>는 인물로는 서희와 길상을, 공간적으로는 평사리를 각각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동심원을 그리는 확대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기술 방법을 통해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 한국인의 보편적 혹은 총체적 삶을 재현한다.
그러기에 <토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나올 수가 있다. 우선 갈래에서 대하 소설, 역사 소설, 농민 소설, 총체 소설 등 여러 명칭이 쓰이는데. 이는 그만큼 이 작품이 한국이 역사는 물론, 농민의 근대적 각성, 죽음과 한의 철학, 토속적, 무속적 향수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격동기 민족의 수난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서술 방법과 구성 원리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역사와 운명 모두를 포괄했다는 점에서도 총체적이다. 7,80년대의 탁월한 소설적 성취로 평가되는 <장길산>이나 <태백산맥>은 각각 민중적 세계관과 프롤레타리아 세계관에 입각한, 그 시대 역사 의식의 정직한 소산이다. 그러나 <토지>는 시대적 역사 의식에 비교적 자유로우면서, 한편으로 운명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추가한다. 이것은 아마도 박경리 특유의 유기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주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화개장터-곽재구
탁수기씨는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년 살았지
화개나루에 소금배 들고 복사꽃 피던 이팔청춘에
처음 쇳물 끓이고 풀무질 익혔지
된장 내음 땀내 적시는 저녁 나절이면
운천리 백사장에 누워 하늘의 별을 세었지
아니 아니 운천리 안열 부락 김초시네
둘째딸 생각으로 별이 보이지 않았지
작은 토담 타고 돌다 칡꽃 한 묶음 깨금발로 던지면
꽃내음보다 먼저 토방문이 열리고
그때 처음 사랑을 알았지
섬진강 푸른 강물과 지리산 산바람이
어는 산곡에서 속삭이다 함께 어둠에 드는지도 알았지
그 이쁜 전라도 가스나 동란 끝나고 죽었지
산사람 밥 한 솥 푸짐하게 해낸 죄로 강물되어 떠났지
탁수기씨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년 살았지
고스레 고스레 거칠은 강바람에 소주 한잔 부으며
앞으로도 한 백년 운천리 백사장 별을 헤겠지.
출처 : 곽재구 시집,『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평사리에서-민병일
악양 들녘 내래보는 마을에
어머니 눈웃음 닮은 돌각담 길
조붓조붓 나 있습니다.
보리밭 실개천 지나
앵두가지마다 불 밝힌
오롯한 풍경을 보셨는지요.
돌각담 길에 들면
사람을 사랑할수 있다는 것은
저렇듯 예쁜 돌각담 길 내어주며
끊어진 세상의 길을 잇는 듯 싶습니다.
슬픔과 절망도 약으로 달여 쓸 것 같은
봄바람 한 줄기
앵두꽃 등 켜진 돌각담 들어섭니다.
지리산-김 지 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ㅎ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첫댓글 화개 장터 탁수기씨 아직도 살아 계시는지요?...화개장터와 지리산,이 시를 읽으며 눈물 찔끔 했네요...ㅠㅠㅠ한도 많고 사연도 많은 지리산이네요
읽기에도 벅찬 자료들을 꾸며 주시느라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쉬엄쉬엄 보고 익히겠습니다. 토지의 박경리는 여류라는 수식어를 빼야 한다 들었습니다. 대단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