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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의 양숴 전경. 한갓진 전원 풍경 너머로 시제,
위룽허 등 북적이는 관광 명소가 자리한다.
양숴(阳朔)의 인상은 복잡미묘하다. 푸르른 녹음이 안식을 주기도, 험준한 절벽이 모험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예스러움과 현대적 정취도 묘하게 뒤섞여 있다. 멀끔한 현대식 호텔 룸에 머무르는 동안, 테라스 너머로 닭을 풀어놓고 키우는 농가를 마주하고 지냈다. 쾌적한 페리를 타고 유유자적 유람하며 강변에서 방망이로 손빨래하는 이들도 보았다. 재래시장 좌판에는 냉장고가 없어 매일 새벽, 돼지고기와 닭고기, 오리고기를 팔릴 만큼만 잡아서 내놓는다. 혹은 닭장을 가져다 놓고 주문하는 즉시 잡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길 건너편 글로벌 패스트푸드 브랜드에서는 냉동고를 몇 대씩 두고 대용량 감자튀김을 수시로 꺼내 조리기에 넣는다. 한 동네에서 본 풍경이라기에는 사뭇 이질적이다.
오늘날 양숴는 개발의 한복판을 지나는 듯하다. 자연경관을 앞세워 관광산업이 발달했지만, 그 외 분야는 여전히 순박하고 촌스럽다. 그렇기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정이 펼쳐지는지 모른다. 도시와 시골,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모습까지, 다층적 장면을 양숴에서는 한날한시에 만날 수 있다.
세계 각국 여행자가 모이는 시제(西街). 미식, 쇼핑, 인증샷 명소까지 관광 요소를 다 갖췄다.
시제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인기 있는 굴구이.
지상의 산수화, 십리화랑
양숴의 대표 관광지로 십리화랑(十里畵廊)이 꼽힌다. 이름 그대로 10리에 걸쳐 이어진 미술관(화랑)으로, 자연경관이 미술관 못지않게 근사하다는 의미다. 십리화랑에서는 위룽허(遇龙河)의 강변 풍경부터 위에량산(月亮山)의 위엄까지 마주할 수 있다. 전통 뗏목을 타고 트레킹도 하며, 신선처럼 자연을 즐기는 코스다. 산수화 속으로 차원 이동을 하면 이런 곳에 닿지 않을까. 평평한 땅 위로 비죽비죽 솟은 산봉우리는 한반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시끌벅적한 호객꾼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꿈속이라 해도 믿을 법하다.
위룽허에서는 뗏목 체험이 필수다. 양숴 곳곳에 뗏목 선착장이 있지만, 위룽허의 진룽차오부두(金龙桥码头)와 지마부두(骥马码头)에서 출발하는 코스가 가장 아름답고 길기로 유명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뗏목을 타고 잔잔한 강물을 떠내려가는 모습이 한없이 여유롭다. 하지만 배 위에서의 느낌은 훨씬 다채롭다.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거세지는 순간, 뗏목이 잠길 듯 물이 차오른다. 강둑을 넘어서며 거센 물보라가 일기도 한다. 뱃사공이 시시때때로 발을 들어 올리라고 신호를 주지만, 타이밍을 못 맞추면 발목까지 젖을 수도 있다. 이따금 찾아오는 스릴을 즐기고 나면 금세 평온해진다. 뱃사공의 일정한 움직임에 뗏목은 요람이 된다.
뗏목에서 내리는 곳은 십리화랑의 출발점이다. 이제 전기 스쿠터를 빌려 위에량산까지 달리기로 한다. 자전거나 스쿠터를 탈 줄 안다면 양숴 여행이 적어도 두 배 이상은 즐거워진다. 평지, 물가, 논둑까지 드라이브하기 좋은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부분 호텔에서 자전거와 전기 스쿠터를 유료로 대여해준다. 호텔에서 못 구하더라도, 관광지 입구에서 얼마든지 간편하게 빌릴 수 있다.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논밭 사이를 유유자적 달린다. 시속 30km 제한으로 더 느긋하게 주행한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데, 독특한 산세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눈에 위에량산임(월량산: 月亮山)을 알 수 있다. 삼각형 산봉우리 가운데 구멍이 크게 나 있는데, 이것이 달처럼 보여 붙은 이름이다. 정상을 바라보는 높이에 따라 반달부터 초승달로 다르게 보인다고 전해진다. 등산로 입구 너머에서는 오롯한 반원 속에 하늘이 담겨 있다.
양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벽등반 성지다. 인기 스폿인 주란동(竹帘洞)을 오르는 암벽등반가.
위룽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는 500여 년 역사의 푸리차오(富里桥) 다리.
위에량산(월량산: 月亮山) 정상의 아치형 동굴은 바라보는 높이에 따라 반달, 초승달 등으로 다르게 보인다.
심산유곡 산수화 속에 머무르는 듯한 몽환적 풍경.
위에량산(월량산: 月亮山)은 등산객에게 입장료로 15위안(약 3,000원)을 받는다. 양숴에서 손꼽히는 명승지인 데다 화장실도 깨끗한 편이니, 체력이 된다면 정상까지 밟기를 권한다. 위에량산은 해발 380m로, 넉넉 잡아 1시간이면 정상에 다다른다. 하지만 등산객이 적은지 산길이 좁고 험해 몇몇 구간은 수풀을 헤치면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정상을 밟으면 고생한 기억은 땀보다 빨리 증발한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한 풍광이 노고를 말끔히 씻어준다. 아치 높이만 어림잡아 30m는 될 듯하다. 수묵화처럼 보이는 산세는 ‘구이린 제일의 산수’라는 양숴의 명성을 실감 나게 한다. 거칠거칠한 바위는 한때 암벽등반가의 성지로 통했다. 몇 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오르는 기이한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기록으로만 접하는 것이 아쉽다.
인증 샷을 여러 장 남기고 내려와 두 바퀴 위에 다시 올라탄다. 강물 따라 논두렁 따라 정처 없이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 아까는 보지 못한 장면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우뚝 솟은 절벽에 형형색색 헬멧을 쓴 사람들이 매달려 있다. 암벽 체험을 하는 여행자인 듯하다.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니 덩달아 심장이 ‘쫄깃’해진다. 줄에 매달려서라도 올라가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려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절로 응원할 수밖에. 양숴는 태국 끄라비, 미국 요세미티 못지않은 세계적 암벽등반지로 유명하다. 젊은 배낭여행자 중에는 오로지 등반을 위해 찾아오는 이도 적지 않다. 몇몇 투어 업체에서는 초보자도 체험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스릴을 즐긴다면 미리 예약해 한 번쯤 경험해보길.
싱핑구전은 20위안 지폐 속 명소로도 유명하다.
자연이 문명을 만나면
양숴의 산수는 거대한 무대로도 활용된다. 중국 5대 공연 중 하나인 ‘인상유삼저(印象劉三姐)’가 양숴의 첩첩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드넓은 강 위에서 펼쳐진다. ‘인상유삼저’는 영화감독이자 공연감독 장이머우(张艺谋)가 연출한 ‘인상’ 시리즈 중 하나로도 유명하다. 준비 기간만 무려 5년 반이 걸렸고, 출연자 역시 600여 명에 달하는 데다, 압도적 조명과 음악의 향연 덕분에 양숴의 필수 관광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줄거리는 소수민족 장족의 역경을 이겨낸 사랑 이야기다. 연출이 워낙 뛰어나 언어를 몰라도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사 대부분이 방언이라서 현지인도 알아듣기 어렵다는 후문이다.
공연은 사전 예약이 필수다. 현장 발매 부스가 있어도 모든 회차가 거의 매진이기에 취소표가 생기지 않는 이상 현장에서 표를 구하기는 어렵다. 티켓 가격은 좌석 위치에 따라천차만별인데, 조금 비싸도 ‘좋은 자리’를 선점하길 권한다. 화려한 의상과 섬세한 표정, 서라운드 음향 효과를 생생히 느낄 수 있어서다.
지난밤 공연의 여운은 아침이 되어도 쉬 가시지 않는다. 먹먹한 감동을 안고 싱핑구전(兴坪古镇)으로 향한다. 양숴의 소수민족이 터 잡고 살던 1,700년 역사의 전통 마을이다. 관광버스가 수시로 오가는 명소인 만큼 1층 상가는 기념품점이 즐비해 여느 관광지와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빛바랜 벽돌과 기와, 새초롬하게 말린 지붕의 끝 선, 창살의 가지런한 문양…. 그 너머로 우뚝 선 산봉우리까지 이색적이다. 환기에 유리하도록 높이 만든 지붕도 특징이다.
싱핑구전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로 리강(漓江) 풍경을 들 수 있다. 20위안 지폐 속, 산봉우리 수백 개가 겹친 모습이 이곳 풍경이다. 지폐 속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기에 뗏목 선착장도 위룽허 못지않게 인기다. 멋진 사진을 남기려고 전통의상을 빌려 입는 젊은이도 많다. 단, 위룽허에서 먼저 배를 탔다면 굳이 여기에서까지 탈 필요는 없다. 강둑에서도 충분히 비슷한 각도로 사진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강 건너편으로 이동해 카트를 타고 상공산(相公山) 전망대에 오르는 걸 더 추천한다. 지면에서 보는 마을은 그저 사람 사는 동네지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이 땅은 태초의 자연, 혹은 신이 머무르는 자리로 여겨진다. 위대한 예술가의 공연도 감동적이지만, 유구한 시간이 빚은 자연환경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 양숴를 떠날 시간이다. 다음 목적지는 롱지티티엔(龙脊梯田)으로, 장족과 야오족 등 소수민족의 마을이다. 종족과 문화를 보호하려고 자리 잡은 산골짜기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급경사의 산등성이를 깎고 또 깎았다. 사진 속 롱지티티엔은 해가 닿는 곳이라면 한 뼘도 남기지 않고 개간한 듯 보인다.
집념으로 가꾼 삶의 터전은 얼마나 경이로울까. 위에량산이나 상공산, ‘인상유삼저’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을까. 버스에 덤덤하게 올라탔지만 이미 설렘은 싹트기 시작했다. 양숴에서 충분히 만족했어도, 지금 이 순간 기대감이 자라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저 새로운 시공간을 향해 나아가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흔쾌히 즐기는 수밖에.
드넓은 강 위를 무대 삼아 펼쳐지는 수상 오페라 ‘인상유삼저’의 한 장면.
강이 깊고 넓은 양숴에서는 전통적으로 어업이 발달했다.
긴 세월 물고기를 잡은 어부가 가마우지와 그물 등을 이용한 전통 어업을 시연하고 있다.
롱지티티엔의 다랑논 풍경. 롱지티티엔은 양숴와 함께 구이린 여행 필수 코스 중 하나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의 이름은 오성홍기( 五星紅旗)로, 독특한 디자인과 색상으로 이루어진 이 국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대표한다. '오성'은 다섯 개의 별을 '홍기'는 붉은색 깃발을 뜻한다. 바탕의 빨간색은 열정 즉 혁명을 상징하고 다섯개 별의 노란색 의미는 붉은 대지에서 밝아오는 광명 or 중국인이 황색 인종임을 의미한다.
중국의 국장은 오성홍기와 흡사하다. 붉은 바탕에 5개의 오각별과 톱니바퀴를 감싸는 붉은 커튼, 그리고 중간에 천안문이 그려져 있다. 별 다섯 개는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을 의미하며, 큰 별은 중국공산당을, 나머지 네 개의 별들은 마오주의의 네 가지 계층들을 의미한다. 붉은색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상징한다. 내부의 벼와 외부의 밀은 농업을 의미하고 톱니바퀴는 공업을 의미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하기도 한다. 천안문은 중국 인민의 투쟁을 상징한다.
중국(China, 中國: 중화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China)은 동서길이는 5,250km, 남북길이는 5,500km이며, 국경선은 총길이 2만km이다. 남쪽으로는 베트남·라오스·미얀마, 남서쪽으로는 인도·부탄·네팔·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북쪽으로는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 및 러시아, 몽골과 접해 있으며, 둥베이[東北:옛 이름은 만주] 지역 남쪽으로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에서부터 황해, 동중국해, 타이완[臺灣] 해협(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약 160km 너비의 해협), 남중국해로 둘러싸인 해안선은 1만 4,000km에 이른다. 1949년이래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본토를 자신의 영토의 일부로, 중국은 중국대로 타이완을 자신의 영토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다. 타이완 섬을 중국의 23번째 성(省)으로 보는 데에는 두 정부의 의견이 일치한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전국은 중앙정부에 직속된 31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성이 22개, 소수민족 자치구가 5개(네이멍구[內蒙古]·광시좡족[廣西壯族]·닝샤후이족[寧夏回族]·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시짱[西藏:티베트]), 직할시가 3개(베이징·상하이[上海]·톈진[天津], 충징[重庆]), 특별행정구가 2개(홍콩, 마카오)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 약 1,416,096,000명, 인구의 90% 이상이 한족이고 법적으로 종교 활동이 허용되지 않는다. 면적은 9,600,013㎢, 수도는 베이징(Beijing, 北京)이다. 화폐는 인민폐를 사용하며 단위는 위안(¥)이다. 206년 한 설립 후 주로 한족이 지배했으나 1279년 원나라와 1644년 청나라 때 이민족이 지배하였다. 1912년에 공화국 정부가 선포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 결과 공산당이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혼합경제로의 전환을 통해 급속도의 경제 성장과 중국 사회 변화에 진전을 이루었다.
북경 천안문/ 칭기즈 칸의 초상/ 베이징 천단/ 팬더곰
이응노, ‘N° 136’, 73×45cm, 종이에 먹, 1983.[현재 KB GOLD&WISE the FIRST 도곡 전시 중]
고암 이응노는 동양화의 전통 필묵 기법을 현대적 추상으로 승화해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연 거장이다. 작가는 본 작품에서 한민족의 분단사와 옥중 생활의 고난을 깊이 응축시켜 예술적으로 형상화했다. 일반적으로 이응노의 후기 예술 작업은 ‘추상’이라는 관점에서 평가됐지만, 주제와 내용 그리고 의미의 차원에서 그의 관심은 오롯이 ‘사람’에 맞춰져 있었다. 1980년 민주화운동을 계기 삼아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군상’ 연작으로 발전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이어진 이 연작은 그의 70년 예술 여정과 세계관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글과 사진: 《KB 국민은행 GOLD &WISE, 2025년 12월호, (에디터 장새론여름)》, 《Daum, Naver 지식백과》|이영일∙고앵자 yil207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