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타니파타 21’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 선운사 입구 빗돌에 새겨져 있다.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의 오랏줄에 묶여 작은 일에도 마음 아파하고 번민한다. 그 번민은 사소한 일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를 향해 전진하는 용맹스러운 사자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바람, 지순(至純)한 연꽃처럼 하나의 자연세계가 되어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할 때, 그 잠깐 동안이라도 자연처럼 자유롭고, 순수한 영혼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힐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생각을 짧은 순간이라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이 또한 자연과 함께 하고, 진리와 함께 하는 보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꽃무릇은 9~10월에 꽃이 피고, 이 꽃이 시들면 알뿌리에서 새잎이 돋아난다. 그래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는 꽃이라고 해서 상사화(相思花)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꽃무릇이 정확한 이름이다. 꽃무릇은 여름철에 피는 상사화와는 다른 품종이다. 뿌리에는 코끼리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한 독이 있는데, 단청이나 탱화 보존에 유용하게 쓰기 위해 절 주변에 꽃무릇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선운사 뒤뜰엔 동백꽃이 진 자리, 고목에 열린 밤알 크기의 동백열매가 꽃만큼이나 소담스럽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아직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서정주 시인의 시 ‘선운사 동구’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진리의 말씀과 선운사 동구 시구(詩句)를 되뇌며 걸어서 그런지 연한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산이 무척 서정적이다.
선운사를 지나 계곡을 낀 길을 따라 도솔암으로 향했다. 그런데 골짜기 흐르는 물을 보니 마치 탄광촌 계곡에서 흐르는 물처럼 검은 색깔이다. 궁금해 하던 차에 길섶에 선 안내문에, ‘도토리와 상수리, 떡갈나무의 열매와 낙엽에 포함된 타닌 성분이 계곡 바닥에 침착되어 물이 검게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탐방로 옆에는 도토리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도솔암은 미륵보살이 머무르는 천상의 정토인 도솔천에 세운 절이다, 도솔 도솔 마치 풀벌레 울음소리처럼 정겹고 청아한 이름이다.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인 도솔천이란 이름에서 연유한 도솔암, 사방에 비치는 아름다운 풍광이 그 이름을 뒷받침 해 주는 것 같다. 도솔암 내원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이지 인간세상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도솔암 서편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지역 사람들에겐 ‘미륵불’이라고 불린다. 천상 세계에 세워놓은 도솔암 곁에 있는 미륵불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구현해 주리라는 구원신앙은 어느 시대든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 곁에 따라 다녔다. 권력자들의 핍박이 심할수록 민중들의 소망도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미륵불의 가슴부분에 표시된 사각형의 복장(腹藏)에 민중들의 염원을 들어줄 비기(秘記)가 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꿈을 꾸는 동안만은 현세의 고통을 견디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기란 이름으로 도솔천에 가까운 암벽에다 감춰놓았다는 동화 같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박종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