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ㆍ망소이의 난
▶ 공주명학소의 망이ㆍ망소이는 명종6년(1176) 1월에 무리를 모으고 스스로 ‘산행(山行병마사’라 칭하면서 봉기하여 공주를 점령하였다. 그들의 세력은 상당히 컸고, 정부군도 이를 진압하는 데 어려웠다. 처음에 정부는 당황해 하며 이들의 고향인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주는 무마책을 썼다.
이들은 정부군과 강화를 요청하고 정부측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무리들이 해산되었으나, 정부의 기만적인 행동으로 이들은 재차 봉기할 수 밖에 없었다.
명종7년(1177) 3월 재봉기하여 가야사를 점령하고 황려현(여주)과 진주(진천) 등지를 손안에 넣었다. 그러한 기세로 개경까지 진출하여 하였으나 그해 7월 망이와 망소이가 잡힘으로써 1년반만에 종결되었다.
▶ 그런데 망이ㆍ망소이의 반란은 천민들의 행정구역인 ‘소’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가혹한 수탈에 반발하여 일어난 농민반란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반란은 여타 다른 민란과 마찬가지로 지배계층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천민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신분해방운동의 성격도 강했다.
한편, 이들의 항거를 계승한 남적(南賊: 조정에서는 조위총의 무리를 서적이라 불렀고, 망이ㆍ망소이의 무리를 남적이라 불렀다)들의 봉기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 특히 같은해 손청 일파는 망이ㆍ망소이의 난에 자극을 받아 가야산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봄에 진압되었다. 명종7년(1177) 미륵산적과 이광의 봉기, 명종12년(1182) 2월 관성현과 부성현 민란 등이 일어났다. 망이ㆍ망소이의 난이 이후 여러차례의 천민의 난의 효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망이 망소의 난은 고려 특수 행정 구역인 향소부곡 중에 하나인 공주 명학
소에서 일어난 최초의 천민 신분 해방 운동 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사상에서
근대화의 태동 이라고 볼수 있다.
당시 고려는 무인난으로 왕권은 추락 하고 무인들이 집권하면서 절대 권력
을 장악부정 부패와 정권 다툼의 피튀기는 살육전이 전개돼고 있었다.
당시 집권자인 정중부 부자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부귀 영화와 권력유지에
만 혈안이 돼어지방 관리로 부터 뇌물을 받고 관직을 하사하는 청탁이 공공
연 했다,
지방관은 벼슬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재물을 헌납하기위해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를 부여 한다,
난이 일어나자 북쪽 평양에 조위총이 난때문에 어려움을 느낀 정중부는 일
단 그들을 회유해 학소를 현으로 승격 그들을 달랜다.
그후 병력을 징발 허승으로 하여금 토벌을 단행 발심했던 망이,망소형제와
무리들은 속수 무책으로 토벌 당한다,
이러한 천민 신분 해방 운동은 후에 많은 민중 봉기를 불러 왔고 특히
철혈 독재자 최충헌 집권기에는 그의 노비 만적이 자신의 주인인
최충헌 정권을 타도 하고 신분 해방을 이루기 위해 만적의 난을 이르키고
왕후 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냐는 말을 인용 하기도 한다,
또한 천민 출신 이의민이 무인 시대에 절대 권력자에 오르는 최초의 인물이 돼기도
한다
첫댓글 동양사 올려도 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