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푸차레*의 검은 수리
최 재 우
히말라야에 전하여 오는 말이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산이 있다. 올라가서는 안 되는 산이 있다. 이 산을 한번 보면 평생 이 산을 잊지 못한다.”
희말라야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마차푸차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껏 이산만은 네팔에서도 등반이 금지되어 있다. 마차푸차레를 좀 더 가까이 보기위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은 다가 갈수록 뒤로 물러났다.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더 높아져 갔다. 트래킹의 시발점인 포카라에서 볼 때는 하루 정도면 그 꼭대기를 오를 것 같은 산이었다. 이제는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하는 산이 되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세군데 있다고 한다. 삼대 미봉의 한 곳인 마차푸차레를 보기 위해서 꼬박 이틀 동안 오르막 트래킹으로 타라힐탑*까지 올라왔다. 내 생애 가장 높이 오른 산이다. 백두산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왔다. 그곳은 마차푸차래의 위용을 전망할 수 있는 산 꼭대기였다. 일부러 새벽녘에 일어났다.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차푸차레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한밤중이다. 하늘에서는 별빛이 어둑한 대지위로 쏟아지고 있다. 히말라야를 휩싸고 부는 바람만이 윙윙거리고 있을 뿐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동녘 하늘에서 희미한 빛이 어렴풋이 시작되고 있다. 히말라야 연봉의 능선이 어둠속에서 희미한 선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검은 색지 위에 흰색으로 스치듯 붓질한 것처럼 보였다. 빛이 만들어내는 히말라야 연봉의 성스런 데생이다. 일출로 높은 산꼭대기에서부터 산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아직 대지는 어둑어둑하고, 길게 뻗쳐 있는 산줄기는 희미한데, 가장 높은 마차푸차레의 산꼭대기가 불그스레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빛은 어둠을 산 밑으로 밀어 내린다. 서서히 마차푸차레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깨가 드러나고, 드디어 몸통까지 나타난다. 그때 순간적으로 나는 보았다. 마차포차레의 검은 수리가 나래를 활짝 펼치고 꼬리털을 펼친 채 하늘로 비상하는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수리는 어둠속에서 몸을 훌훌 털더니 나래를 펼치고 나를 덮치듯 날아오르고 있다. 밤새껏 검은 히말라야 레인지에서 적막과 어둠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수리가 여명의 햇살과 함께 하늘로 비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날개 짓으로 긴 히말라야 레인지위에 구름이 인다. 한번 날개 짓으로 수만리를 날아갈 형상이다.
마차푸차레는 그곳 원주민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산꼭대기가 마치 생선 꼬리 같다고 해서 ‘생선 꼬리’, 즉 마차푸차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그 산이 수리를 닮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 산을 바라보는 나를 압도하며 날아오르는 수리의 모양은 지금도 그렇고, 이 트래킹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볼 수 없는 감동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산악 박물관에서는 마차푸차레가 사슴 같다고 하고, 또는 양 같다고도 하였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검은 수리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도 수리같다느니, 날아오르는 수리같지않느냐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타라힐 탑을 떠나 며칠 더 트래킹을 하다가 새벽마다 저 마차푸차레를 보게 될 터이지만, 지금 보듯 저 같은 검은 수리 모양이 아닐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갑자기 전국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장자가 생각났다. 고전 <장자>를 펼치자마자 시작되는 것이 바로 ‘소요유(逍遙遊)’ 편이다.
북쪽 바다 속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이 물고기는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곤이 변해 새가 되었으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화가 나서 하늘을 날면 그 날개가 마치 구름과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크게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붕이 남쪽 바다로 갈 때는 바다를 쳐 파도가 삼천리에 이르고,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구만리에 솟구쳐 오르는데 한번 하늘로 날아오르면 여섯 달 동안을 날고서 비로소 한번 쉰다고 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한 장자는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비유로서 도(道)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장자는 구만리를 솟구쳐 나는 붕새로부터 시작하여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는 매미로 이어지는 비유에서 ‘큰 것과 작은 것’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의 서로 다르지 않은 심오한 도를 설명한다. 장자에 나오는 소요유(逍遙遊)라는 말을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이리저리 자유롭게 다닌다’라는 의미로 생각하여 보았다. 그 옛날 장자가 도를 깨우치기 위해서, 소요유의 붕새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곳 히말라야를 트래킹하고, 마차푸차레에 올랐었나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여 본다. 위대한 자연은 그 앞에 있는 인간에게 문학가가 되고, 또 철학가가 되라하는 영감을 주는 것은 아닐는지.
미국에서 왔다고 하던가. 어느 트래킹 여행가는 한 달 동안 저 아래 구룽족 마을에 머무르면서 이곳 마차푸차레를 보기 위해서 타라힐탑에 수시로 오른다고 한다. 그는 희말라야 병에 걸린 사람이 틀림없다. 세상 사람들은 희말라야에 와본 사람과 와보지 않은 사람으로만 구별된다고 한다. 한번만 와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저 마차푸차레를! 어둠을 떨치고 하늘로 솟구치는 수리를 본 나는 앞으로 어떨 것인지, 아직은 나도 나를 알 수가 없다.
첫댓글 원고를 제출하여 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