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서 워킹맘으로 살아 남기
중앙일보ㅣ안혜리·윤경희·김소엽·전민희·정현진 기자ㅣ입력 2014.02.26
잔인한 달 3월이 돌아왔다 … 워킹맘,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 shutterstock.com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이 꽤나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원래 남성을 능가하던 엘리트 스포츠 분야는 물론이요, 최근엔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간 여성 고위직 얘기가 더 이상 참신한 뉴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둘이 아니니까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분명 이렇게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니 워킹맘이 살기엔 더 어려워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워킹맘을 더 이상 워킹맘일 수 없게 만드는 장벽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사다리를 탈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살펴봤습니다.
▲ 일러스트 = 한차연 hancha337@hanmail.net
영국 시인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한국 엄마에겐 3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 아닐까. 특히 워킹맘이라면 아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 등 새 학교에 들어갈 땐 그야말로 공포가 엄습해온다. 이 무시무시한 학년초를 잘 넘겨야 한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텐데, 어디 세상일이 그리 쉽게 뜻대로 되나. 처음엔 초등 시절만 잘 보내면 한숨 놓을 것 같지만 곧 그 다음에 더 어려운 벽이 앞에 놓여 있는 걸 깨닫는다. 엄마들의 정보 싸움이 본격화하는 중학교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학원 정보 한번 얻어볼까하고 기웃거리다보면 어느새 입시철. 직장 다니며 교사도 잘 모른다는 난수표 같은 입시전형을 꿰뚫어 애 수준에 맞는 대학에 원서를 넣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살아남은 선배 워킹맘에게 물었다. 워킹맘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이 세 번의 고비를 어떻게 넘겼느냐고.
초등학교 1학년
“큰애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 정말 많이 긴장했다. 모든 게 스트레스고 두려움이었다.”
지금은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를 떠올릴 때마다 이모(45·반포동·중소기업 부장)씨는 아직도 당시의 불안감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맞다. 결혼과 임신·출산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직장 다니던 여성이 일을 많이 포기하는 시기가 아이의 초등 입학 직전이다. 아이의 심리적 안정 등 내세우는 이유는 많지만 결국은 엄마 네트워크가 주된 이유다. 친한 엄마가 없어 그저 불편한 게 아니라 애한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의사 길모(38·분당)씨는 “지금 초등 4학년인 큰 아들이 입학한 2011년 새해가 되자마자 아이 학교 보낼 걱정에 잠을 못잤다”고 털어놓았다. “다들 엄마 인간관계가 곧 아이 인간관계라고 하는데 워킹맘을 둔 우리 애만 ‘왕따’가 될 것 같아 불안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 반 30명 중 엄마가 일하는 애는 길씨를 포함해 딱 둘 뿐이었다. 길씨는 “친한 엄마들끼리 시험 끝나거나 학교 쉬는 날 애들 모아 영화보러 다닐 때 우리 애가 초대받지 못한 걸 알면 속상했다”며 “워킹맘이 엄마들 사이에서 소외되는 건 당연하지만 아이가 나 때문에 피해보는 건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길씨가 택한 방법은 무조건 얼굴 들이밀기였다. 1년에 딱 12일인 휴가를 큰애 학교행사에 맞춰 다 썼다. 당연히 급식도우미도 했다. 그러면서도 엄마들 만날 때마다 ‘날 싫어하지 않을까’‘내가 돈을 좀 더 내야 하나’라는 생각에 늘 마음은 불편했다고 한다.
길씨만이 아니다. 애가 초등 1학년 때 휴가를 대부분 이렇게 애와 관련한 스케줄에 맞춰 쓰는 워킹맘이 많다. 회사원 김모(43·서초동)씨는 “평일에 연가 얻어서 애 친구들 생일파티에 다갔다”며 “급식 도우미 봉사나 청소도 빠지지 않게 다니면서 다른 엄마들이랑 친해지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그나마 1학년으로 입학한 경우는 좀 낫다. 이미 엄마 모임이 짜여진 뒤에 전학을 가면 애나 엄마나 적응하기가 더 어렵다. 회사원 조모(46·압구정동)씨도 그랬다. 지금 고1인 둘째 딸이 초등 1학년 2학기 때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당연히 아는 엄마가 하나도 없었다. 아이한테 피해가 갈까봐 늘 전전긍긍이었다. 조씨는 “한번은 일 마치고 밤 11시 넘어 집에 갔는데 아이가 선생님이 원하는 짝이랑 앉을 수 있게 해줬는데 자기는 혼자 앉았다고 말했다”며 “그 말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후부터 조씨는 한달에 한번꼴로 열리는 같은 반 친구들 생일파티에 다 따라다녔다.
“휴가 내고 가봐야 아는 엄마가 있길 하나, 할 얘기가 있나. 가시방석이었지만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휴가는 100% 애들 학교 행사나 엄마 모임에 썼다. 그러느라 애 1학년 땐 날 위해선 파마 한번 한 적 없다.”
그가 찾은 또 다른 해결책은 금품향응이었다. 조씨는 “일단 밥 산다고 해야 엄마들이 만나준다”며 “영화표 끊어놓고 다른 엄마들한테 ‘애들 영화나 보여줄까요’라는 식으로 계속 연결고리를 이어갔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
“진짜 문제는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
한 대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는 이모(47·개포동)씨는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올해 중학교 입학하는 아들 때문이다. 이씨는 자기 일 하느라 엄마 모임에 소홀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 초등 시절 웬만한 전업주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치사한 일이 있어도 꾹 참았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애들 7명이 체육활동을 같이 했는데, 어느날 한 엄마가 특별레슨에 왜 빠졌느냐고 묻더란다. 레슨있다고 통보 받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씨는 “나중에 연락 맡은 엄마의 실수라고 해명하는데 난 지금도 그 엄마가 일부러 뺐다고 생각한다”며 “열 받았지만 애 생각하고 굽히고 들어갔다”고 했다. 밥 한번 사면서 “앞으로 나 빼기 없기~” 이런 식으로 오히려 비위를 맞췄다. 그 다음부터 모임에서 배제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는 “이건 사실 예외적인 경우고 초등 시절엔 고급 정보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알아야 하는 얘기는 엄마들이 해준다”며 “친한 애들이 다 다른 학교로 흩어져서 이젠 누구한테 학교 소식 듣나 걱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중학교에 올라가면 시험 일정과 준비물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알림장이 없어 워킹맘은 더욱 곤혹스럽다.
학교 분위기, 교사 성향, 이런 정보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엄마 입장에서 이보다 더 절실한 게 학원 정보다. 고교생 남매를 둔 조모(46·압구정동)씨는 “학원에 관해선 초등 때보다 더 얘기를 안해준다”며 “심지어 교과목도 아니고 토플 학원 정보 같은 것도 안 가르쳐주더라”고 했다.
조씨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애가 공부를 잘하면 된다. 공부 잘하면 자연스레 엄마들이 ‘같이 팀 짜자’고 제안한다.”
참, 어렵다.
이젠 두 애를 다 대학에 보낸 전직 은행원 박모(51·반포동)씨는 워킹맘 후배에게 “팔랑귀가 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 대학 4학년인 큰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휴직하고 미국에 갔다 6학년을 앞두고 귀국했다. 다른 엄마들이 인근 명문 중학교 보내려면 전에 다니던 학교 말고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라길래 그 말을 들었다. 다른 엄마들 말만 듣고 졸업까지 남은 일년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당연히 엄마 네트워크가 전무했다. 박씨는 “그땐 휴직시켜준 직장에 헌신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며 “엄마 네트워크를 뚫어야겠다는 노력도 안했다”고 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든 계기가 있었다. 중학교 첫 중간고사였다. 그는 “성적 보고 기절할 뻔 했다”며 “그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학원 정보 얻으려고 공부 잘하는 애 친구 엄마한테 전화했지만 당연히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안 친한 엄마가 물어보면 누구나 다 아는 저급 정보, 좀 친한 엄마가 물으면 중급 정보, 아주 친한 엄마가 물어봐야 고급 정보를 푼다”며 “한번은 알음알음 한 학원에 찾아갔더니 아무리 물어도 ‘학원 잘 모른다’던 엄마가 거기 와 있는 걸 보고 서러웠다”고 했다. 엄마 네크워크가 절실했다. 박씨는 “그 이후로 엄마 모임이 있으면 독감에 걸려 죽을듯 아파도 기어서라도 참석했다”고 했다. 한번 빠지면 다음 번부터 아예 배제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워킹맘에게 고비가 세 번 있다. 애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중학교 입학할 때, 그리고 마지막이 고3 때다.”
다년간 단련됐다 해도 워킹맘은 늘 어렵다. 특히 입시는 쉽사리 넘기 힘든, 또 하나의 장벽이다. ‘전직’ 은행원 박모(51·반포동)씨도 그랬다. 그 역시 고비를 못넘기고 결국 큰애가 고3 올라갈 때 전업주부가 됐다. 100% 대입 때문이었다. 입시전형이 너무 복잡해 직장을 다니면서도 도저히 제대로 챙겨줄 수가 없었다. 결국 은행을 관두고 입시전형을 공부했다. 다행히 박씨는 두 아이 다 사립 명문대에 보냈다.
박씨는 그나마 성공 케이스다. 초·중 시절부터 극성스럽게 애들을 챙겨 뭐가 부족한 지 파악할 수 있었고 그 부분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직장만 관둔다고 갑자기 원하는대로 일이 풀리는 건 절대 아니다. 원하는 정보는 못 얻고 우왕좌왕하다 직장도 잃고 애 입시도 마음대로 안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
초등교사인 오모(47·사당동)씨는 엄마가 입시전형을 꿰는 일 못지않게 아이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애가 고3 되니 워낙 집에 늦게 와 오히려 편하다는 엄마도 있다. 해줄 게 없다는 거다. 하지만 난 아니다. 고3 되니까 부담감이 확 몰려오더라. 실제로 엄마들은 정성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아이들은 다 잔소리로 받아들인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학업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고3은 학습보다 아이와의 관계가 어렵다.”
중소기업 부장인 이모(45·반포동)씨는 다르면서도 같은 얘기를 했다.
이씨는 “입시는 다 힘들다”고 했다. 그는 “고3은 걱정스럽긴 한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며 “돌아보면 고교 입시 준비하던 중3이 더 어려웠던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고3 때 손을 놓았던 건 아니다.
지금 대학 다니는 큰애가 고3이던 시절 늘 집에 올 때를 기다렸다가 간식이나 한약을 챙겨 먹였다. 별 것 아닌데 신기하게 아이가 그걸 좋아했단다.
“한번은 방에 과일 갖다주러 들어갔더니 ‘고3이라고 신경은 쓰이나봐’라며 웃는 거다. 그래서 ‘엄마가 언제 너한테 소홀한 적이 있었냐’ 했더니 그냥 ‘좋아서’ 한다. 워킹맘 애들은 엄마한테 이런 사소한 관심을 바라는 것 같다. 사소하지만 온전히 나한테 몰입해주는 그 짧은 시간. 그거면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는 이번에 고3 올라가는 둘째 딸을 위해 수시 원서 접수 때 아니면 수능 앞두고 한 3개월쯤 휴직을 고려하고 있다. 그는 “주위에선 고작 3개월 노력해봐야 뭐가 달라지느냐고들 하는데 아들이 좋다고 한 걸 딸에게 좀더 열심히 해줘볼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표를 쓸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내 주변에 애 고3이라고 사표 쓴 엄마가 있다”며 “엄마 인생은 엄마 인생 아닌가, 게다가 애가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맞다. 엄마 인생은 엄마 인생이다. 다만 항상 엄마가 애들한테 얼마나 관심이 있고, 사랑하고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워킹맘은 참 이래저래 숙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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