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영 李擢英(1541~1610)】 「경상병영 營吏의 난중일기 『정만록(征蠻錄)』」
이탁영 李擢英(1541~1610) 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수(子秀), 호는 반계(盤溪), 효사재(孝思齋). 경주 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24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건(李建)이고,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이연년(李延年)이고, 어머니는 김철손(金哲遜)의 딸 분성 김씨(盆城 金氏)이다.
이탁영(李擢英)[1541~1610]은 1541년(중종 36) 경상도 의성현 지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비범하여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8세 때 학업을 시작하고 부지런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였으며, 글방을 왕래하는 것 외에 부모의 곁을 떠남이 없었고, 특히 효심이 지극하였다고 전해진다. 17살 때 아버지가 타향에서 죽자 수백리 길을 가서 관을 모셔와 반장하였고, 어머니가 나이 예순에 두 눈이 멀게 되자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직접 숟가락으로 진지를 드렸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례에 대한 일이 아니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읍지(邑誌)에 전해질 만큼 효심이 지극하였다.
1561년(명종 16) 21세가 되면서 의성현의 향리(鄕吏)로 나아가 이듬해에 이방(吏房)이 되었고 1563년 경상도 감영의 영리(營吏)로 발탁, 승진되어 출중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40여 년간을 경상도의 영리로서 지방 행정 업무를 관장하였고 탁월한 행정 처리 능력으로 영리들의 사표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관찰사 김수(金晬)의 진영에서 모병과 군량 조달, 정보 수집과 분석, 작전의 방책을 건의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계초(啓草)도 직접 작성하였다. 김수가 조정에 소환된 이후에는 주로 당시 초유사(招諭使)였던 김성일(金誠一)과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참모로 7년간 활동하였다. 난이 평정되어 가는 60세까지 노구로 끝까지 참전하였고, 종전 후에는 전공으로 관직을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귀향 후에는 피난 당시 눈이 먼 노모를 봉양하는데 전념하고 모든 시중을 혼자서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향인들이 여러 차례 포상을 신청하여 자손들에게도 복호(復戶)되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이것은 1592∼1598년까지의 일기로 건권은 표지 뒷면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영상 이하 여러 관리들의 좌목(座目, 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이 있고,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이라는 제목 아래에 그날그날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고 있다. 다만 임진 기사는 날마다 기록하였고, 1593년에서 1598년까지는 연월 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만 적었다.
곤권은 임진왜란의 시작과 하루하루의 기록, 통문 등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적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통문, 격문 등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로부터 시작하여 그해 연말까지는 약 10일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게 적혀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연구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정만록>이라는 책이름이 선조 임금이 정해준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해진다.'
'조선 선조 때 경상감사의 막하 참모였던 이탁영의 일기로 건·곤의 순서를 단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이탁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였던 김수의 막하로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으며, 1593년에는 학봉 김성일의 막하에서 전쟁의 여러 전술을 건의하여 승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굳이 사양하였고, 후에 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1592년 4월 13일부터 1599년 난이 평정될 때까지 8년간의 전란 일기를 지어 나라에 올렸다. 임금이 직접 『정만록(征蠻錄)』이라 이름을 지어 계하(啓下) 하였다. 임진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그 밖에 『자성기(自省記)』, 『해이록(解頤錄)』을 남겼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묘는 의성군 의성읍 중리리 산123 호현(狐峴)에 있다.
나라에 충성하고 어머니 봉양에 지극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았으므로 1801년(순조 1) 충효사(忠孝祠)를 세웠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23년 유림의 발기로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지곡(芝谷)에 충효사를 영건하여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숙종 때 사곡은전(賜穀恩典)을 하사받았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증직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