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필 金東弼(1919 ~ 1999)】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치 활동"
1919년 2월 21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해성면(海城面) 구룡리(九龍里)에서 태어났다. 출생 후 청소년기와 일본군에 입대할 때까지의 경력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1944년 12월경 일본군 사병으로 중국 창사(長沙) 지역에서 복무하다가 병영을 탈출하였다. 중국 국민군 하제원(何際元) 소장 휘하의 별동대 제4종대(從隊) 제3대대에 편입되었다. 중국군에 복무하다가 일본군 탈주 한적(韓籍) 병사를 인도해 달라는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듬해 봄 임시정부에 인수되어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였다.
토교대는 임시정부가 충칭시 남쪽 약 20킬로미터 지점 토교(土橋)에 설치한 광복군을 위한 일종의 보충대였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국인 병사, 징용자, 군속 등을 중국 국민군으로부터 인수받아 세 차례 편성하여 훈련하고 광복군에 배치하였다. 제1차는 1944년 3·4월경 30여 명의 한인 청년으로 편성되었다. 이때의 대장은 송호성(宋虎聲)이었다. 제2차는 1945년 2월경 푸양(阜陽)의 제3지대가 보내온 한광반(韓光班) 36명과 한인 청년 등 51명으로 편성되었다. 이때의 대장은 최용덕(崔用德)이었다. 제3차는 1945년 5월경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 사이에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체결되어 중국군 내의 한적 포로를 임시정부에 인도 인계하자 이들을 수용하였다. 이때의 대장은 한성도(韓聖島)였다.
1945년 2월 제2차 토교대에 배치되어 소정의 군사훈련과 정훈교육을 받았다. 이때 토교대에서 분대장에 임명되었다. 토교대 훈련을 마친 후에는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警衛隊)에 배치되어 임시정부 요인들의 경호 임무를 담당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광복청년회 영등포 특별지회 조직부장을 맡고 훈련교관을 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