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국축구, 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
월드컵에서 한국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와 1986년 제13회 멕시코대회, 1990년 제14회 이탈리아대회, 1994년 제15회 미국대회, 1998년 제16회 프랑스대회의 본선경기에 진출함으로써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4회 연속 본선진출국이 되었다. 2002년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는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되었으며,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루었다. /조선
[1994년] 에스토니아 여객선 침몰 대참사 - 900명 이상 몰사
승객 7백76명과 승무원 1백88명 등 총 1천 54명을 태우고 스톡홀름으로 가던 에스토니아 선적의 여객선 에스토니아호가 1994년 9월 28일 새벽 1시30분쯤 핀란드의 발트해 부근 해상에서 강한 바람과 파도로 인해 침몰, 9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사고 여객선이 침몰한 지점은 핀란드 남서쪽의 우토섬에서 약 39㎞ 떨어진 발트해 해상이었다. 현장에는 최대시속 90㎞의 강풍이 부는데다 파고 6m의 높은 파도가 치는 바람에 효과적인 구조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구조작업이 시작된지 10시간동안에 1백26여명의 승객을 구출하는데 그쳤다.
금세기 들어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해난 사고는 1948년 11월 1일 남만주 부근해역에서 중국 상선이 폭발, 침몰한 것으로 당시 배에 타고 있던 6천여명이 몰사했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이번 사고가 인명피해가 가장 많은 사고로 집계됐다. /조선
[1992년] 노태우 대통령, 한국 대통령으로 첫 북경 방문해 한중정상회담
노태우 대통령과 양상곤 중국 국가주석이 1992년 9월 28일 오전 북경시 인민대회당내 복건청에서 사상 최초의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공식 방문길에 나선 노태우 대통령은 9월 27일 대한항공 특별기편으로 북경공항에 도착, 3박4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노 대통령은 28일 오전 북경인민대회당 광장에서 베풀어지는 공식 환영식에 참석한 뒤, 인민대회당에서 양산곤 중국 국가주석과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8월 24일의 양국 수교이후 새로운 동북아시대의 개발을 위한 두 나라간 쌍무협력 강화문제와 한반도 및 동북아지역의 평화안보 증진문제 등을 중점 논의했다.
한중 양국은 30일 오전 노 대통령의 중국방문과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담은 8개항의 공동언론 발표문을 발표하고, 북경에서 민간간에 체결된 무역협정과 투자보장협정을 정부간 협정으로 격상, 서명하고 과학기술협력 협정과 경제 무역 기술공동위원회 설치에 관한 협정을 새로이 체결했다. /조선
[1989년] 마르코스(Marcos, Ferdinand Edralin) 전 필리핀 대통령 망명지 하와이서 사망
← 마르코스
1917. 9. 11 ~ 1989. 9. 28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1989년 오늘 신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때 그의 나이 일흔둘! 장례식은 부인 이멜다와 아들을 비롯한 가족과 수십 명의 추종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쓸쓸하게 치러졌다.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86년까지 20년 동안 필리핀을 철권통치했다. 부인 이멜다가 수도 마닐라의 시장을 지내고 장남이 대통령 보좌관으로 재직하는 등 족벌정치도 일삼았다. 1986년 2월 대선 직후 국민의 지탄에 밀려 하와이로 탈출했다. /YTN
[1982년] 한강종합개발사업 착공
1982년 9월에 착공하여 1986년 9월 준공되었다. 총사업비 9560억 원, 동원 연인원 420만 명, 동원 장비 100만 2천 대, 공사비 가운데 1962억 원은 한강에서 파낸 골재를 팔아 충당하였고, 하수처리시설에만 5427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이 사업은 크게 ①수로를 고정화·안정화시키는 저수로 정비를 통한 치수(治水)기능 확대, ②하천공간의 고도이용을 기하는 고수부지 조성 및 공원화를 통한 휴식공간 확보, ③안전하고 쾌적한 동서교통망을 확보하는 올림픽대로 건설(강변도로 확장), ④수질오염을 막아 한강물을 정화하기 위한 분류하수관로(分類下水管路)와 하수처리장 건설, ⑤유람선과 수상 레저·스포츠시설 등 수자원 이용, ⑥기타 관련 계획사업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저수로 정비와 수상 레저 시설, 김포대교에서 천호대교 부근 암사동까지 36㎞에 이르는 강바닥의 높낮이를 고르고 강폭 650∼900m, 수심 2.5m 로 정비하는 한편 상류와 하류에 각각 수량을 조절하는 수중보를 설치, 계절에 관계없이 수로에 항상 물이 꽉 차서 흐르도록 하여 하천의 경관을 아름답게 가꾸었고, 수상교통을 개발, 유람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naver
[1978년] 교황 바오로1세(Joannes Paulus I) 서거
1912. 10. 17 ~ 1978. 9. 28
제263대 교황, 바오로 1세가 1978년 오늘 서거한다.
교황으로 선출된 지 33일 만의 일이다.
그의 시신은 사망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방부처리됐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서두른 방부처리와 관련해 독살설 등 많은 음모론이 떠돌았지만 규명되지 못했다.
교황의 사인은 심장발작이나 폐색전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교구장을 지낸 요한 바오로 1세는 바로 전달인 8월 26일 교황 바오로 6세의 후임으로 선출됐었다.
그는 즉위와 함께 온화한 이미지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사로잡지만 교황 대관식을 치르지 않는 파격도 보여 줬다. /YTN
[1970년] 나세르(Nasser, Gamal Abdel) 이집트 대통령 심장병으로 사망
← 나세르, Yousuf Karsh가 찍은 사진
1918. 1. 15 ~ 1970. 9. 28
‘아랍 민족주의 기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심장병 발작으로 1970년 9월 28일 사망했다. 나세르는 아랍주의, 중립주의, 반서구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해 온 아랍세계의 구심점이었다.
그는 1948년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패한 원인을 지도자 부패로 판단, 당시 국왕 파루크1세를 축출하기 위해 청년 장교들의 모임인 '자유 장교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해 1952년 7월 나기브 장군과 함께 쿠데타에 성공했다. 1954년 나기브 수상 후임으로 수상에 올랐고 1956년 6월에는 영국군을 몰아낸 가운데 치러진 이집트 최초의 국민투표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56년 7월에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영국-프랑스에 맞서 싸워 승리하기도 했다. 1958년 2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합병해 아랍연합공화국을 수립하자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아랍 통합주의에 기초해 생긴 아랍연합공화국의 탄생은 중동에서 동서가 대립하는 가운데 서방 여러나라에 타격을 주는 중립주의의 큰 세력이 됐다. 1967년 6월, 6일전쟁에서는 이스라엘에 패해 정치적 상처를 입었으나 아랍민족들은 여전히 그를 아랍세계의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다. /조선
[1961년] 시리아서 쿠데타, 통일아랍공화국서 이탈
바그다드조약(중동조약기구)이 성립한 1955년부터 국내외 정국은 크게 긴장하였으며, 마침내 1958년 이집트와의 합병에 의한 ‘아랍 연합공화국’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를 추진했던 바트당은 오히려 활동의 자유를 상실하였으며 1961년에 ‘아랍 사회주의’ 체제에의 지향이 선언되자 인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리아는 ‘연합’에서 이탈하였다. 그 후 1963년에 바트당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재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국내의 사회개혁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던 중 당 내부에 대립이 생겨 1966년 좌파가 실력으로 정권을 잡았다.
1970년 하피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잡고 1971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지금까지 권력을 잡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시리아는 내전중인 레바논의 질서를 되찾기 위해 약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이스라엘군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후 레바논의 대부분 지역을 계속 점령하고 있다.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
1958년 9월 28일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80%의 찬성을 얻어 승인됐다. 신헌법은 드골의 정치적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다수파 정당에 의한 강력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했다.
대통령(임기 7년)의 권한이 대폭적으로 강화된 한편 의회의 힘은 약화됐다. 특히 하원(국민의회)의 권한에는 여러가지의 제한이 가해져 상원쪽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또 수상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어 대통령, 수상, 상원, 하원의 수직적인 정권시스템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대통령에게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고 중대한 국가적 위협에 직면했을 때 전권이 대통령 1인에 집중되게 되었다. /조선
[1950년] 정부, 서울 환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연합군이 1950년 오늘 서울을 수복한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된 지 석 달 만이다.
한,미 연합군은 앞서 25일 오후부터 서울 시가전에 돌입해 26일을 고비로 북한군의 저항을 꺾었다. 이튿날인 27일 오전 6시 10분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어 9월 28일 마침내 수도 서울이 90일 만에 완전히 수복됐다.
서울 수복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의사당에서 수도 탈환식이 거행됐다. /YTN
[1920년] 유관순 순국
←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형무소 시절 사진
3.1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 1902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향년 19세였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 재학 중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제가 학교 문을 닫자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 열사는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옥중에서도 굳건한 독립의지를 꺽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여성독립운동가로 추앙되고 있다./조선
[1915년] 에셀 로젠버그(Rosenberg, Ethel) 출생
← 쇠창살에 나뉘어 갇혀있는 로젠버그 부부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1939년 전기공학학위를 취득했으며 이무렵 벌써 공산당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1940년 육군 통신대에 근무하면서 군사기밀과 접하게 되자 아내 에설과 함께 이를 소련측에 넘겨주었다. 에설의 형제로 로스알러모스의 원자탄개발계획에 참여하고 있던 육군 중사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는 이들 부부에게 원자무기에 관한 정보와 데이터를 제공했다. 로젠버그 부부는 스위스 태생의 미국 첩보요원 해리 골드에게 정보를 인도했고 골드는 이어 뉴욕 주재 소련 부영사인 아나톨리 A. 야코블레프에게 이를 넘겨주었다. 해리 골드는 1950년 5월 23일 영국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와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로젠버그 부부와 그린글래스도 구금되었다. 또 다른 공모자 모턴 소벌은 멕시코 시로 도피했으나 체포되어 미국으로 압송되었다. 그린글래스는 줄리어스와 에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행한 뒤 15년 징역형에 처해졌으며 골드와 소벌은 각각 30년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3월 6일 뉴욕 시에서 열린 공판은 로젠버그 부부에게 방첩법(1917)을 적용, 사형을 언도했다. 수많은 탄원과 전세계적인 사면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싱싱 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브리태니커
[1902년]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 ‘목로주점’의 에밀 졸라 사망
← 졸라, Edouard Manet가 1868년에 그린 유화 (부분),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1902년 9월 28일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 에밀 졸라가 타계했다. 그의 대표작 <루공 마카르 Rougon-Macquart> 총서는 20권의 연작소설로, <제2제정 시대 어느 집안의 자연적·사회적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에는 고급 창녀의 인생을 다룬 <나나 Nana>(1880)와 광산촌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상을 폭로한 <제르미날 Germinal>(1885)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루공 마카르> 총서 제1권인 <목로주점>은 자연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실험소설론 Le Roman experimental>(1880)에서 소설가는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등장인물에 대해 실험이나 임상실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불행과 범죄의 근원인 인간의 허약함과 사악함에 대해 귀중한 실제적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했다. 또한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 때 유명한 평론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발표해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졸라는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브리태니커
[1895년] 프랑스 생물학자 파스퇴르(Pasteur, Louis) 사망
← 파스퇴르
1822. 12. 27 ~ 1895. 9. 28
동부 프랑스 쥐라현(縣) 출생. 파리의 에콜 노르말에서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모교의 조수로 활동하였다. 최초의 연구는 1848년 타르타르산[酒石酸]에 관한 것으로 타르타르산염과 파라타르타르산염의 구조상의 차이를 광회전성[旋光性]의 차이로부터 밝혀냈다. 디종중학교 물리교사를 거쳐, 1849년 스트라스부르대학 화학교수가 되었으며, 화학조성 ·결정구조 ·광학활성의 관계를 연구하여 입체화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때 생물이 입체이성질체의 한쪽만을 이용하여 합성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주의 ‘비대칭성’을 논함과 동시에, 생명의 화학적 연구에 흥미를 가졌다. 1854년 신설된 릴대학 화학교수 겸 이학부장(理學部長), 1857년 에콜 노르말 부주사(副主事)에 취임하였다. 릴의 양조가(釀造家) 비고의 의뢰를 받고 발효와 부패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후 젖산발효는 젖산균의, 알코올발효는 효모균의 생활에 관련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어 1862년 알코올에서 아세트산으로 변하는 것과 아세트산발효에 대해 연구하여 식초의 새로운 공업적 제법을 확립하였다. 또 포도주가 산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저온살균법을 고안하여, 프랑스의 포도주 제조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부패가 공기 중의 미생물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확인하고, 자연발생설을 부인하였다. 1865년부터 J.A.뒤마의 의뢰를 받고 누에의 미립자병(微粒子病)과 연화병(軟化病)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 끝에 양잠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공헌하였다. 1867년 소르본대학의 화학교수가 되었으나 에콜 노르말에서 연구를 계속, 탄저병 ·패혈병 ·산욕열(産褥熱) 등의 병원체를 밝혀냈다. 1879년 닭콜레라의 독력을 약화한 배양균을 닭에 주사하고 면역이 된다는 것을 발견, E.제너 이래 과제로 남았던 백신 접종에 의한 전염병 예방법의 일반화에 성공하였다. 1881년 푸이 르포르에서의 야외실험으로 가축에 탄저병 백신을 접종하여 그 유효성을 증명하였다. 1881년 프랑스 학사회 회원, 1886년 파스퇴르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하였다. /naver
[1885년] 한성전보총국 개국 한성-인천 최초 전신시설 개통
1885년 오늘 한성과 제물포, 즉 지금의 서울과 인천 사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전신시설이 개통된다.
송신 측에는 전신키·송신전지 등의 송신장치를 설치하고 수신 측에는 유극계전기·음향기 등의 수신장치를 설치하는 가장 간단한 직류전신방식이었다.
현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세워진 한성전보총국에서 전보 업무를 취급했다.
17년 뒤인 1902년 3월 20일에는 한성과 제물포 간의 전화가 개통되고 그해 6월에는 한성전화소에서 전화교환업무를 개시하면서 시내전화업무가 시작된다.
그러나 1905년 4월 한·일통신협정의 체결로 통신권을 일본에게 빼앗긴다. /YTN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창립
← 마르크스의 이름이 독일의 서기로 기록되어 있는 제1인터내셔널 카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각국의 노동자 대표들이 1864년 9월 28일 영국 런던에 모여 국제노동자협회(약칭-제1인터내셔널) 창립을 결의했다.
2년전 런던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프랑스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자들을 만나 국제조직 건설을 제의한 데 따른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는 32명의 임시위원을 선출했다. 독일 대표 칼 마르크스는 협회의 `창립선언문`과 `잠정규약`을 초안했다. 산업 부르조아지의 착취에 눌려 비참한 생활을 해 오던 각국의 노동자들은 이날의 협회창립을 환영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1876년 해체됐다 1889년 재건돼 제2인터내셔널로 불렸다./조선
[1841년] 프랑스의 정치가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출생
← 클레망소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서른 살 이후에 배웠다. " - 조르주 클레망소
1841년 9월 28일 태어남 / 1929년 11월 24일 죽음
클레망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며 언론인이다. 클레망소는 1871년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902년 4월에는 바르 지역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06년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했고 1906~09년 총리를 역임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클레망소는 즉각 행동에 나서 프랑스 국민에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1913년 발간된 일간지 <자유로운 인간 L'Homme Libre>을 통해 반전(反戰)·반군(反軍)주의자, 사회주의자, 과격한 노동운동가 등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을 퍼붓는 한편 군비 확장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국민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던 1917년부터는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레이몽 푸앵카레의 요청에 의해 전시내각(1917~20)을 이끌었다. 클레망소는 이 기간 동안 냉정하고 끈덕지게 전쟁을 수행해 '승리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후에는 파리 평화회의 의장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골격을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1894~1906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때는 자신이 관여하는 언론지 <정의 La Justice>·<새벽 L'Aurore>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기사를 싣는 한편 정부를 맹렬하게 공격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825년] 콜롬비아의 3선 대통령 누녜스(Núñez, Rafael) 출생
← 라파엘 누녜스,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삽화(1885. 71호)
1825. 9. 28 ~ 1894. 9. 12
1880년부터 죽을 때까지 콜롬비아 정치를 지배한 독재자이다.
법과대학 재학시 자유당에 들어가 정치에 입문했고 하원의원으로서 콜롬비아 최초의 자유주의 헌법(1853)을 기초하는 데 참여했다. 자유당의 장기집권 기간 동안 여러 대통령 밑에서 각료로 일했다. 1863년 유럽으로 건너가 다양한 정부형태를 연구했으며 정치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급진적인 사상을 대부분 포기하게 되었다. 1875년 콜롬비아로 돌아왔고 이듬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급진당이 후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낙선했다. 1880년 자유당과 보수당 온건파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1880~82)에 당선되었다. 1884년 급진당과 자유당이 반발하자 보수당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2번째로 대통령(1884~86)에 올랐다. 1886년의 헌법으로 누녜스 정권은 강화되었고 50년에 걸친 보수당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는 ' 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자치를 중앙집권으로 전환하고,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선도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정치·경제 정책에 관한 저작과 몇 권의 시집을 남겼다. 농장에 머물면서 보고타의 보좌역들에게 빈번히 직무를 위탁했고 농장에서 죽었다. /브리태니커
[1803년] 프랑스 소설가 메리메(Mérimée, Prosper) 출생
1803. 9. 28 ~ 1870. 9. 23
파리 출생. 법률을 배워 관리가 되었으나 예술가들과도 자주 교제했으며, 특히 스탕달과는 깊이 사귀었다. 22세 때 에스파냐 여배우의 이름을 빌려 《클라라 가줄 희곡집》(1825)을 발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의 특질은 단편소설에서 발휘되었는데, 1829~1830년에 걸쳐 《마테오 팔코네》 《타망고》 《에트루리아의 항아리》 등을 발표하였다. 이 단편들은 훗날 단편집 《모자이크》(1883)에 수록되었다. 1834년 문화재 시찰관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프랑스 국내와 코르시카 ·이탈리아 ·그리스 ·에스파냐 각지를 순방하였는데, 대표적인 걸작 《콜롱바》(1840) 《카르멘》(1845) 등은 그 때의 견문(見聞)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1844년 프랑스 아카데미회원, 1853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 출입하게 되었다. 그는 직업적인 소설가라기보다 호사가(好事家)의 입장에서 소설을 썼다. 평범한 일상생할을 싫어하고 색다른 이국정서(異國情緖)나 야성적인 정열을 좋아한 데에서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지만, 독특하고 간결하며 착실한 문체로 작품의 예술적 완성을 꾀한 점에서는 오히려 고전적(古典的)인 새로운 사실주의 문학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naver
[1484년] 창경궁 건립
← 창경궁 전경
1484년(성종 15) 9월 28일(조선일보에는 9월 27일로 나옴) 창경궁이 건립되었다. 창경궁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성종이 그 자리에 새로이 별궁으로 창경궁을 건립한 것인데, 창경궁은 창덕궁·덕수궁·경복궁·종묘와 함께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하나이다.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해 있으나 창경궁만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쪽을 향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세웠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을 1633년에 중건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난향각·취요헌·계월각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0년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전 총리 사망
1999년 현대남녀농구선수단, 평양서 북한농구팀과 친선경기
1998년 마크 맥과이어 미 메이저리그 사상 시즌 70개 최다 홈런기록 수립
1998년 박찬호, 메이저리그 진출 3년만에 시즌 15승 달성
1990년 전쟁기념관 기공
1977년 일본 적군파, 일본항공(JAL)기 납치
1977년 허담 북한 외무장관 미국 방문
1970년 산체스 엘살바도르 대통령 방한
1969년 서독 총선거. 기민당 신승
1968년 북악 스카이웨이 개통
1966년 아르헨티나 반(反)영국 폭동
1966년 유엔총회서 인도네시아의 UN복귀를 발표
1965년 필리핀 타알화산 폭발, 약2000명 사망
1963년 도미니카의 후앙 보슈 전(前)대통령은 쿠데타로 실각 후 망명
1963년 프랑스-독일협정. 아프리카대륙에서의 양국 세력 확정
1963년 영국-인도네시아군, 사라와크에서 무력충돌
1963년 미국 처음으로 원자력 이용한 인공위성 발사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950년 산돌 손양원 목사 순교
1950년 이승만대통령, 38선이북 진격 명령
1950년 나토(NATO)공동방위군 창설
1949년 미국, 대외군사원조법 성립
1948년 정부, 남북교역 중지 선언
1945년 현준혁 암살
1939년 독일-소련 우호조약 조인(폴란드분할점령 결정)
1937년 국제연맹 총회, 일본 비난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
1850년 미국, 해군 및 상선에서 태형을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