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本文은 소모임<보스코의 온라인 스터디방>에 올라와 있는 글중 하나 입니다.
蛇足) 뒷담화-담화(談話)와 우리말의 뒤(後)가 합쳐져 생긴 말.
보통 남을 헐뜯거나, 듣기 좋게 꾸며 말한 뒤 뒤에서 하는 대화, 또는 그 말.
오늘은 뒷담화를 좀 해보겠습니다. 픽션이 아닌 정말 뒷담화 다운 뒷담화로..이런 잡문을 쓰면서
일요일 하루를 온종일 보내는게 조금 한심하긴 하지만 역시 뒷담화는 재미있긴 하군요,^^ 시간 가는줄 모르겠어요..ㅋㅋ
이음악은 마흘러의 교향곡 5번중 일부분입니다.
구스타프 마흘러(말러)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임공인 알마 쉰들러의 첫번째 남편 입니다..
절망감이나 염세관, 괴기한 해학이나 초연한 탐미,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고독한 만족감을 표현하는데 뛰어납니다.
그의 음악은 아내 알마를 만나면서 점점더 죽음과 고통에 대한 갈등과 초연함의 표현이 깊어가게 됩니다.
근대음악 발전의 과도기에 속한 인물로 낭만파적인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7.14~1918.2.6]
구스타프 말러(마흘러) [Gustav Mahler, 1860.7.7~1911.5.18]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1883.5.18~1969.7.5]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3.1~1980.2.22]
프란츠 베르펠 [Franz Werfel, 1890.9.10~1945.8.26]
예술가는 창작을 하는 사람 입니다.
한마디로 무형의 정신적 에너지와 자신의 열정 또는 영감으로 유형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외적 요인은 무엇일까요?
선사 시대의 원시인들에게는 자연에 대한 공포와 생존을 위한 주술적인 염원이 바로 그것이었을 겁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절대 왕권에 대한 복종과 새로 다가올 삶에대한 기대가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고,
그리스나 로마인들에게는 그들이 믿던 여러 신들이 그들 창작의 원천이었던 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공익적이고 대단한 동기에서만 예술가들이 그들의 창작의지를 자극 받고 고무 되었던것은 물론 아닙니다.
특히 남성 화가들 중에는 여성에게서 자신의 창작 의지를 자극 받고 불태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과의 관계
이미 언급했었던 휘슬러와 쿠르베가 공유 했었던 조애너 히퍼넌,
고갱이 타히티에서 함께했던 수많은 원주민 여자들,
14명의 사생아가 있었던, 모델들과 대부분의 작업을 침대에서 시작했던 클림트,
불행한 여성편력가 로트렉
설명이 필요없는 피카소까지
이번 장에는 남성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닌
한 여성을 통해 자신들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어가게 되는 남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봅니다.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1879~1964)
알마 쉰들러의 아버지는 에밀 야콥 쉰들러라는 유명 화가였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때 부터 아버지의 친구들인 화가들과 여러 문화계
인사들이 북적이는 환경에서 성장 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미술쪽 보다는 음악에
더욱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위의 우측사진은 그녀가(왼쪽) 14살때 찍은 사진 입니다.
그녀의 어머니 모습을 잘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마지막 사진과 비교해 보시길요.
아버지의 친구이자 제자인 클림트와 알마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만날수 밖에 없는
관계였을 겁니다. 17살 차이인 두사람. 알마의 첫키스의 대상이 바로 클림트 였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의 주인공이 바로 알마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워낙
풍부한 여성 편력가인 클림트가 과연 알마의 첫키스를 작품화 할정도 였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입니다. 알마가 첫키스의 상대로 너무 프로패셔널한 사람을 골랐다는건 어쩌면 불행한
일이었겠다 라는 생각은 드는군요.
실재로 알마는 클림트에게 둘이서 이태리로 가자는 사랑의 도피를 제안 했었지만
고수인 클림트는 그녀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한 여자에게 종속되지 않으려는 그의
프로 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처녀시절 그녀는 본격적인 음악 수련에 들어 갑니다.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는그녀의 음악 교사 였는데 클림트에 이어 그녀 생애 두번째의
염문 대상 이었습니다. 당시 상류층 처녀들의 바람기는 공공연한 것이었고 연애에 대한
소문은 비난의 대상이 아닌 인기의 척도와 비례 했었습니다. 쳄린스키외에도 감독인 막스
부어카르트와도 염문을 뿌렸습니다.
알마는 그녀의 나이 20세때 자신보다 20살 연상인 구스타프 마흘러와 전격 결혼 하게 됩니다.
당시 이 두 사람의 결혼에는 많은 찬사와 함께 질투와 비아냥이 폭포처럼 쏟아 졌었습니다.
마흘러는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한 위대한 작곡가겸 지휘자로서 그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상임 지휘자를 맡게 되면서 유대인인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습니다.
그는 세번의 연애에 실패한후 알마와 결혼하여 사랑과 성과 예술성으로 넘치는 그녀의 영향력
으로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오히려 이러한 그녀의 넘쳐나는 끼 때문에 평생을 힘들어 합니다.
두사람은 두딸을 낳았고 마흘러도 자신의 작곡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행복한 기간이
흘러 갑니다. 이 기간 동안 분명히 두사람 사이에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 했었던듯 싶습니다.
하지만 첫 딸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갑자기 그들의 가정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 합니다.
마흘러는 알마와 결혼 하기전에 알마로 부터 결혼하면 모든 작곡작업을 중단하고 오직
가사와 육아등 가정생활에만 충실하겠다는 서약을 받습니다.
자유분방한 알마와 결혼하려는 마흘러에게는 젊고 아름다우며 문란하기 까지 했던 알마의 전력이
상당히 커다란 고민이었을 것이고 그러한 대비책으로 알마로 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는것이 필요했을 지도 모르지요.
첫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알마는 피폐해져 갑니다.
이러한 알마를 지켜보던 마흘러는 자신의 서약을 스스로 폐기하고 알마에게 음악 작업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작업을 발표하는것도 도와 주기도 합니다.
마흘러는 지휘자로서 성공을 거듭하여 많은 부와 명성을 쌓아가지만 마흘러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어려워 합니다.
“나는 3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 어디서나 이방인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또한 그는 심장병이 생기면서 그의 건강에도 커다람 문제가 생깁니다.
마흘러는 결국 자신의 심장병 때문에 50의 아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고 맙니다.
갑자기 알마는 유럽 문화계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사교계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겸 지휘자의 아름답고 젊은 미망인으로서.
하지만 마흘러가 사망하기 훨씬 이전부터 알마는 다른 예술가들과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알마의 행위를 마흘러도 심지어 그녀의 딸 안나도 알고 있었고 마흘러는 알마의 행위로
당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로 부터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마흘러가 안나의 작곡 작업을 허용 한것도 이러한 알마의 일탈을 되돌기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재로 마흘러는 알마를 위한 몇개의 곡을 만들었었는대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 10번은 그녀가
아래 나오는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나눈 사랑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습니다.
알마의 혼외정사의 상대는 건축가인 그로피우스 였습니다.
마흘러의 배려와 노력에도 불구하구 이두사람의 불꽃같은 사랑은 이어졌고 마흘러가
심장병으로 사망하자마자 두사람은 결혼하기에 이릅니다. 이 두사람 사이에 태어난 마농은
천사와 같은 아이였습니다. 알마는 특히 마농에게 특별한 사랑을 쏟아 부었는데 마농 역시
17세의 나이에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위의 뭉크그림은 그로피우스가 알마에게 선물한 '해변의 여름밤' (1895)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로피우스와의 결혼생활동안 그녀는 다른 두사람의 예술과들과 관계를 갖습니다.
한사람은 코코슈카, 다른 한사람은 소설가 페르펠 입니다.
한마디로 그로피우스와의 결혼기간은 알마에게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시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알마보다 6살 연하인 코코슈카의 알마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한마디로 뜨거운 용암과 같았습니다.
코코슈카는 400통의 편지를 보냈었고 수많은 그녀의 그림을 그렸으며 심지어 위에 보이는 그녀의
실물크기의 인형을 직접 만들어 잠자리에서나 여행중에 동행하기도 하였을 정도 입니다.
요즘의 구체관절 인형처럼 앉아있을수도 있고 누워있을수도 있습니다,.조금 무서우시죠?
젊은 화가 코코슈카가 알마를 처음 만난것은 알마가 마흘로와 사별한 이듬해 4월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알마는 그의 아이를 유산하기도 하였습니다.
젊은 코코슈카의 열정적인 사랑은 곧 독점과 질투의 집착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코코슈카의 모습에서 알마는 사별한 남편 마흘러의 그림자를 보게 되면서 그를 멀리하게 됩니다.
Bride of the Wind, oil on canvas, a self-portrait expressing his unrequited love for Alma Mahler,
widow of composer Gustav Mahler, 1913
"지상에서 맺어질수 없는 사랑이라면
비바람치는 밤 하늘을 떠돌더라도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어야 한다"
위의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는 그가 알마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림에서 알마는 나른하고 편안한 자세로 코코슈가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지만
그녀를 안고있는 코코슈카는 불안한 표정이 가득 합니다. 온전히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할 연인에 대한 서글품과 고뇌로 자신은 비바람 치는 밤의 하늘을 속절 없이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했던 코코슈가는 이그림을 알마에게 선물했지만 결국 그녀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그로피우스와 결혼 하였습니다.
코코슈카는 평생을 실연의 아픔속에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면서 표현주의를 개척해 나갑니다.
하지만 알마는 코코슈카에게 평생 씻을수 없는 상처와 함께 코코슈카 특유의 염세적인 작풍의 계기와 자극을 주었습니다.
Two Nudes(Lovers), 1913
이그림역시 코코슈카가 알마에게 보낸 그림입니다.
역시 여주인공은 알마. 코코슈카가 그녀와 누드로 안고 있는 장면을 그려냈는데
이그림에서 코코슈카의 표정은 어두우면서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잘 표현내고 있습니다.
그림 하단의 OK라는 글씨는 코코슈카의 서명입니다.(Oskar Kokoschka의 약자)
현재 이그림은 오스트리아 정부와 알마의 법적인 세번째 남편인 베르펠 가족간의
법적인 소유권 재판에 있는 상태 입니다. 나치의 침략 당시 반강제적으로 나치정부에게
넘어간 이그림을 알마의 마지막 남편인 베르펠의 가족이 되찿아오기위한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현재 감정가격은 1억 8천만 달러라고 합니다.
수학(또는 산수)에 약하지만 대충 계산해도 2천억원이 넘는군요,,소송 할만 합니다..
암튼 코코슈카는 많은 어렵고 힘들었던 무명작가의 시절을 거쳐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을때조차 알마와의 이루어 지지 못한 사랑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코코슈카의 열정적 사랑에 오히려 질려버린 알마는 평소 존경하던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알마는 역시 베르펠과두 금방 뜨거워 지면서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도 합니다.
결국 1920년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베르펠과 결혼 하게 됩니다. 결혼전 임신했던 아기는
미숙아로 조산하게 되지만 10개월만에 아기가 사망하였습니다.
평소 유태인을 싫어하던 알마가 유태인 소설가인 베르펠과 결혼한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이 두사람은 꽤 오랜기간을 부부로서 생활 합니다. 두사람은 2차 세계대전으로 베르펠의 유태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경유해 미국에 정착하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미국에서 베르펠의 소설의 성공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She blossomed like a wondrous flower.
She passed through the world pure as an angel.
She was joy and love to so many.
For those to whom she was closest however, she was sunshine and joie de vivre.
(from the eulogy by Johannes)
나치의 박해가 본격화된 시점에서 그녀는 성직자인 홀린스타이너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의 알마에 대한 마음은 위의 짧은 글을 통해 알수가 있습니다.
그녀가 사망하기 2년전의 모습입니다.
뉴욕에 있는 알마 도서관에는 아직도 코코슈가가 그녀에게 선물한 알마의 초상이 걸려 있습니다.
모든 주인공들이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의 사랑이 담긴 그림은 남아 그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예술은 창작뿐만 아니라 기록의 기능도 있다는것을 새삼 일깨워 주는군요.
그들이 했었던 사랑 (보는 이들의 가치관에 따라 욕정이나 불륜으로 말할수도 있겠지만)은
그냥 이렇게 한여인의 죽음으로 묻혀 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첫키스의 대상이었던 클림트는 여전히 여러 여자를 전전하기는 했지만
빈분리파 또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의 대가로서, 아르누보 미술의 대표작가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했고
마흘러는 낭만파적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로서 알마와 만나면서 절망적이고 염세적인 그의 작품세계를
활짝 꽃피울수 있었습니다.
그로피우스는 독일 바우스의 교장을 역임하며 디자인 미술의 개혁가로 활약 했으며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표현주의 화가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고
베르팰은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로서 독특한 종교적 경지를 추구하여 세계적 문호(文豪)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를 거쳐난 남성 예술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볼때 분명 그녀는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었던 예술의 뮤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부도덕한 요부나 멋대로 평생을 살아간 여인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살아왔던 인생을 살펴보면 그것 또한 그녀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예술가 아버지
클림트와의 첫키스
너무나 사랑해서 두려웠던 그래서 가두어 두기만 하려했던 첫남편
예술의 열망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외도
첫아이의 사망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소유욕 강한 연하의 화가 애인
외도에서 생긴 아이와 이혼 그리고 배속 아버지와의 재혼
그리고 그 아이의 사망
성직자와의 결코 용서 받지 못할 관계까지.
그리고 그녀가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는 기간에
인류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학살을 진행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혹한 역사는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고 반볻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어느곳에서 몇명의 알마 쉰들러가 존재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첫댓글 진정한 팜므파탈이시군요~~
현대 사회였다면 알마를 어떻게 평했을까요?? ^^*